•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삶을 나누는 공간 '더불어 숲'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박경리 토지 문학관
알보리 추천 0 조회 26 10.03.31 16: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문학캠프 가던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약속장소인 세종 문화 회관 뒷쪽으로 가니 버스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지정해 준 대로 3호차로 가니 인솔 담담자가 신원 확인을 한 후 차에 올랐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탔더니 앞쪽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연이어 참가자들이 올라 타는데 보니까 20대에서부터 잘 해야 40대쯤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버스는 모두 6대, 참가자들이 200여명은 될 듯 싶었다.
거기다가 인솔가이드와 yes.24에서 나온 스텝들까지 해서 250여명 가량 될 것 같았다.

비가 와서 불참 하는 이들이 있어 빈 좌석이 많았다.
내 옆자리엔 아무도 앉지 않아 배낭을 올려 놓고 혼자 앉아 가게 되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원주까지 가는 동안 가지고 간 책(아내가 결혼했다)을 읽었다.
저자를 만나러 가는데 저자의 책은 읽고 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 들릴 때도 어울릴 사람도 없고 해서 책만 읽었다.

드디어 원주에 도착해서 박경리 토지 문학관으로 갔다.
불후의 명작을 남긴 작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니 어느 한 곳
대강 대강 훑어 볼 수 없어 꼼꼼히 둘러봤다. 문화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대작가의
삶의 흔적들과 남겨진 유품들을 봤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박경리 문학 공원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박경리님께서 말년까지 거처하시던 집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박경리님께서 쓰신 책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박경리 선생님의 집필실.
저 곳에서 작품을 쓰셨다고 한다. 쓰시던 유품들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그런데 박경리님의 유품 세가지를 놓고 통영, 하동, 원주 세 곳에서 서로 다투고 있다고 하는데
쓰시던 재봉틀, 국어 사전, 자그마한 나무장이 그 세가지라고 한다.내 생각엔 말년을 보내신 이 곳
에 유품들을 두는 것이 옳을 것같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박경리 선생님께서 말년까지 머무르셨던 이 곳을 원주시에서 박경리 문학 공원으로 조성한 것은 너무 잘 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저 시를 읽으니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사셨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스무살에 시집가서 스물 세살때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까지 의료사고로 잃으셨다고 한다.
게다가 외동딸과 결혼한 사위 김지하 시인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 내란
선동죄로 사형언도까지 받았다가 감형을받은 후 사면 되었으니 그 마음 고초를 헤아려 보면 참으로 험한 인생을 견뎌 내신 거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인고의 삶을 사셨던 거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저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늙어서 남은게 버릴 것들 뿐이라면 얼마나 홀가분하랴 싶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박경리님의 작품 세계를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 해설사님.
아주 박식하셔서 이해에 도움이 많았다.



전시된 시마다 어찌 그리 코끝이  찡해 지는지...절절한 외로움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토지 문학관 앞에 만들어 놓은 토지 속의 등장인물들의 만화 개릭터들.
같은 버스 같은 3조였던 예쁜 아가씨, 여행 내내 내가 예뻐했다.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2)
백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나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나는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의 무게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 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에 걸려든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 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전신에 엄습해 오는 통증과 급격한 시력의 감퇴와
밤낮으로 물고  늘어지는 치통과
내 작업은 붕괴되어 가는 체력과의
맹렬한 투쟁이었다.
정녕 이 육신적 고통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자를 걸어 놓은 창작 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 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로는, 그렇다.



(4)

승리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배수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분히 발을
내 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 술수가
가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 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잿더미다, 잔해다.

- 박경리의 글 중에서 -

박경리는 그 지난한 고독의 삶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아마도 피와 눈물을 찍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아, 대작가이기전에 평범한 한 여인으로 살고 싶지 않았을까 몰라.

토지 문학관을 나서며 다음에 조용할 때 혼자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다음은 이효석 문학관으로 이어집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