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왕권탈취 과정에서 탄생한 수백 명의 공신들과 기존 권문척신세력이 결탁하여
거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훈구파’이다. 한편 이에 맞선 ‘사림파’는 김종직을
필두로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등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며 성종 대에 크게 성장하였다.
조선 전기에 발생한 네 차례 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는 모두 훈구파가 사림파를 도륙한 정치적 변란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인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언관(간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릴 기회를 찾던 연산군과
그 심중을 미리 헤아린 유자광 일파가 손잡고 사림파 52명을 일거에 처단한 사건인데, 그 빌미가 된 것이 바로 김일손의
‘사초’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이 사화로 인하여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한 반면, 이미 예종 대에 남이장군을
모해한 유자광은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격상된다.
여기서 [조의제문]이란, 초패왕 항우에게 주살된 초회왕 웅심(義帝)이 김종직의 꿈에 현몽하여
그 혼령에게 술잔을 바치며 조문한 글(鎭魂文)인데, 유자광은 이것이 바로 세조를 비난하고 단종을
조문한 글이라고 몰아쳤던 것이다.
그 이후 세 차례의 사화를 거치는 동안 사림파는 지리멸렬하였으나, 성리학이란 학문적 소신과
사제 간으로 연결된 학통, 그리고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바탕으로 계속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다가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몰아내고 사림파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에 따라 집권 사림파는 곧 동인-서인으로 분화되고, 다시 동인은 남인-북인으로 그리고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져 결국 사생결단식 붕당정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