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부산시청이 들어오고 아파트 단지도 많아 달라지고 동네에 있던 부산여대도 이름이 신라대로 바뀌어 이전을 했지만 과거엔 동래구였으며 원래 부산항이 개항되기전 까지 부산을 아우르던 곳이 동래였다고 했다.
인천보다 부평이 더 크고 군산보다 옥구가 목포보다 나주가 더 크고 마산보다 창원이 더 컷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연산동을 가려면 부산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막히는 길을 따라 서면로타리를 지나서 오래 가야 했다.
많은 유흥가와 극장은 남포동 같은 부두가 가까운 곳에 있었고 연산동은 시가지에서 먼 주택가로 배산이나 황령산이 보이고 멀리 금정산이 보였다.
사촌동생의 말에 따르면 산에 군부대 기지가 있어서 동네를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손끔보듯 감시하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 (지나고 보면 말이 안되지만) 밤엔 통행금지도 있고 나오지 않았는데 어두운 산 환하게 켜진 불을 보면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항공기가 지나기 때문에 산에 통신시설이 있어 충돌할 위험이 있고 주요시설인 부산항을 지키는 방공포병 기지가 있는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학교 주변엔 문구점이 많았고 당시 초등학생들은 교복이 사라졌지만 일부가 교복을 입었었다.
또한 여름방학이 북쪽에 비해서 길어서 착각하면 개학시기가 지나 올라와 결석을 했는데 6년 개근상을 못 받은 이유가 바로 부산 큰집에 갔다가 개학일을 착각해서 였다.
다른 것 보다도 해수욕을 할 수 있어 좋았는데 해운대는 말로만 들었고 지금은 백사장이 확 줄어든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수영복이나 튜브는 챙기지 않은채 물놀이를 즐겼고 해수욕장이면 팔던 냉차(삭카린을 넣었지만 보기 좋으라고 수박을 동동 띄움)를 사먹거나 돈을 아껴 중국집에 들려 짜장면을 사먹고 어른들은 회를 사와서 술을 한잔씩 했고 특히 자갈치 시장엘 가면 붕장어(꼼장어)를 고추장에 버무려 구워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밤이 되면 시내 극장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기도 했었고 그 사이에서 약을 파는 상인들의 구성진 소리도 기억난다.
" 보이소...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오늘만 팝니데이...
그리고 쓰리꾼 조심하이소!
아재! 다른 것과 잘못 묵으면 당감동으로 급행 타고 가니 ..."
당시 시내는 밤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 인파속에서 돈을 털어가는 소매치기가 있었다.
요즘으로 보면 건강보조식품 같은 것을 팔던 상인은 부작용을 이야기 하면서 부산의 '당감동'을 이야기 했었다.
지금은 없겠지만 70년대 당감동엔 화장장이 있었다.
잘못 먹으면 부작용이 있다는 걸 과장하여 선전했던 것 같다.
일주일 정도 부산에 있으면 지역의 사투리를 익혀 경기도 광주의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 어른들은 나의 사투리를 듣고 웃으셨고 아이들도 히안하다며 따라했는데 며칠 지나면 다시 원래의 말로 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