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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에는 복식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에 따른 정도의 차이일뿐 복식이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복식에 엄격한 차이가 있어서 이를 어길 경우에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옛날의 신분에 따른 복식의 차이는 장식의 정도에 있었습니다. 장식이 많을수록 신분이 높음을 말해주는데, 이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명령을 하는 위치에 있음을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복식 및 그 장식과 상관이 있는 한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복[衣]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이미지로 읽는 한자』 263쪽) 거기서는 단순히 옷의 기능에 관련된 한자들만 알아보았지요. 여기서는 복식이 어떻게 신분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대 중국의 봉건 계급제 사회에서 신분이 제일 높은 사람은 아마 왕(王)이겠죠. 중국에는 오랜 옛날부터 왕이 많이 있어왔습니다만 넓은 땅덩어리에 갈라진 많은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여 강력한 왕권을 처음 휘두른 사람은 진시황입니다. 진시황(秦始皇) 진시황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의 치적에 대한 논의가 왈가왈부 이어지고 있지만 대체로 과보다는 공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우세해보입니다.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당당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면류관은 왕들만이 쓸 수 있는 의례용 모자입니다. 즉위식이라든가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씁니다. 앞에 늘어뜨린 구슬은 천자는 12줄을 늘어뜨렸는데 유(旒)라고 하고, 귀가 있는 곳에는 솜구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를 광(纊)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면류관을 쓴 천자가 너무 눈이 밝고 귀가 밝은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9줄의 유가 있는 면류관을 쓰다가 대한제국 때부터 비록 자의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천자와 같이 12개의 유가 달린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실 면류관의 형식이 완성된 것은 실제로는 후한(後漢) 때부터라고 합니다. 면류관 같은 통치자의 모자를 표현한 한자가 바로 '임금 왕(王)'자입니다. 임금 왕(王) 갑골문-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임금 왕(王)'자의 자형(字形)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하나는 갑골문의 형태에서 보이는 면류관 같은 모자라는 해석이고, 하나는 금문의 형태에서 보이는 도끼라는 해석입니다. 도끼는 옛날 통치자 또는 지배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형(刑) 집행권을 의미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실제로 사람이 들 수 없을 정도의 큰 도끼가 통치자나 지배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집무실 뒤쪽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는 현충사 같은 곳을 가보면 거의 2m는 됨직한 칼이 전시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릴 때 그런 칼을 보고 '이 것을 사람이 직접 휘두른다니……'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주성이나 다른 박물관 같은 데를 가보면 자루 길이까지 다 합쳐서 50cm가 조금 넘는 칼도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 전투에 썼던 무기라고 합니다. 2m가 됨직한 칼은 장군의 막사에 비치해둔 명령권을 상징하는 의장용 칼인 것입니다. 실제 형벌을 집행하던 도끼는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월(戉, 鉞)이라고 하는데 모양이 다양합니다만 왕(王)자의 금문을 닮았습니다. 월(戉, 鉞) 그러나 천자 같은 사람이 일일이 형벌의 집행 같은 것까지 관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형벌을 집행하는 계층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사(士)의 계층이었지요. 이는 '선비 사(士)'자의 글자 형태에서 드러납니다. 선비 사(士) 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위 '임금 왕(王)'자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자형이 닮기는 닮았지만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선비 사(士)'자를 형체소로 취한 글자 가운데 '수컷 모(牡)'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士)자를 암컷과 가장 큰 차이점이랄 수 있는 발기한 성기를 나타내는 글자라고 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왕(王)자는 고깔, 곧 임금이 쓰는 모자이고, 사(士)는 형을 집행하는 도끼에서 온 글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모자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육체 노동을 많이 해야 하는 평민들에게는 필요없는,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통치자의 머리 장식에서 나온 글자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모자는 곧 명령을 나타내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권율(權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행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권율 장군입니다. 투구를 쓴 모습이 아주 위엄이 있어 보입니다. 예로부터 장수와 사병의 가장 큰 차이는 사병들과는 다른 투구를 쓴 모습이었습니다. 머리에 투구 같은 모자를 쓴 몸을 나타낸 글자가 바로 '하여금 령(令)'자입입니다. 하여금 령(令) 갑골문-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목숨 명(命) 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삿갓 같은 모자는 어딘지 '임금 왕(王)'자의 갑골문과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하여금 령(令)'자는 바로 삿갓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글자입니다. '하여금 령(令)'자와 호훈(互訓: 뜻이 서로 통하여 곧잘 함께 쓰이는 글자) 관계에 있는 글자로 명(命)자가 있습니다. 이 글자는 '하여금 령(令)'자 같이 명령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에다가 명령을 내리는 입까지 그려넣어서 '명령(命令)'을 강조한 글자인데, 애초에는 한 글자에서 나온 글자입니다. 명(命)자는 갑골문에는 보이지 않고 금문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갑골문이 쓰이던 시대에는 함께 쓰이다가 금문이 통용되던 시대에 와서 모종의 구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뜻을 분리시킨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휘봉을 들고 있는 '다스릴 윤(尹)'자에 명령을 하는 입 모양을 그려넣어 '임금 군(君)'자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은 이집트 파라오의 부장품입니다. 소년 왕 투탕카멘의 데드 마스크지요. 교차한 두 손에는 도리깨 모양과 갈고리 모양의 지휘봉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손에 지휘봉을 들고 있는 글자가 바로 '다스릴 윤(尹)'자입니다. 위 명(命)자의 경우와 같이 윤(尹)자에서 파생된 회의자에 속하는 '임금 군(君)'자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스릴 윤(尹) 갑골문-금문-소전-해서 임금 군(君) 갑골문-금문-소전-해서 지휘봉을 들고 명령하는 사람도 지배계층에 속한 사람이지요. 지금은 거의 성씨로만 쓰이고 있지만 옛날에는 벼슬 이름에 이 글자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노자가 함곡관을 빠져나갈 당시 함곡관을 지키던 수비대장의 이름이 윤희(尹喜)라고 하는데 사실 여기에서 윤(尹)은 성이 아니라 관직을 성씨처럼 부른 것입니다. 곧 함곡관(關)의 수비대장(尹)인 관윤(關尹)이라는 직책에 있는 희(喜)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위작임에 틀림없다고 알려졌지만 윤희가 남겼다고 하는 도가 계열의 책으로 『관윤자(關尹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으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을 한성부윤(漢城府尹)이라 하였습니다. 한성은 지명이고 부는 행정 단위이며, 윤은 직책입니다. 우리 나라, 나아가 동양에서는 투구가 물론 몸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명령권자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품위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면 서양의 투구는 이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리스 같은 서양의 투구는 실용성, 곧 실제 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의 고대 청동 투구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투구는 일제시대 때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민족의 울분을 가슴에 안고 뛰어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이 받은 것입니다. 실제로는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다가 50년 만인 1986년에야 전달되었는데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투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품목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나라와의 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투구와 달리 코와 목부위까지 덮게 되어 있습니다. 이 투구를 쓰고 멋진 모습을 뽐낸 배우가 있죠? <트로이>의 한 장면 바로 브래드 피트입니다. 이 영화는 독일 출신인 볼프강 페테르젠 감독이 연출한 영화인데 신화적 요소는 다 빼고 실제의 모습에 가깝게 만들어내었습니다. 멋진 배우도 많이 나오고 범선 군단이나 거대한 목마 등 볼만한 장면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나라의 투구와 달리 그리스 투구를 쓰면 실제 사람의 얼굴에서 거의 눈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표현한 한자가 있는데 바로 '무릅쓸 모(冒)'자입니다. 무릅쓸 모(冒) 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눈을 두 개 다 그려넣으면 실제 모습에 훨씬 가깝겠습니다만 그러면 문자라기 보다는 그림[도화]에 훨씬 가깝게 되겠죠. 지금 해서의 모양까지도 투구 밑에 눈을 그려놓은 초창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눈 목(目)'자가 죽간에 쓰기 편하도록 세워서 쓴 모습을 따랐다는 점만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저런 투구를 썼다면 전쟁에서 남다른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지면 몸을 보호하는 용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더욱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도 불사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글자가 '무릅쓰다'라는 뜻으로만 제한되어 쓰이자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투구를 쓴 모양을 나타낸 글자는 따로 만들어내었습니다. 바로 '면할 면(免)'자입니다. 면할 면(免) 갑골문-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하여금 령(令)'자와 아주 흡사한 모양입니다만 쓰고 있는 모자가 실용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전체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 다릅니다. 실제로 저런 투구를 쓰면 머리에 화살 같은 치명적인 무기를 맞아도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은 비단 고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렇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사진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입니다.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여 이후 모든 전쟁 영화의 교과서가 되다시피한 오마하 전투 장면입니다. 상륙작전에 투입된 한 병사의 철모에 총알이 스칩니다. 머리에 총알을 맞고도 살아난 이 병사는 바로 위 사진의 모습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철모를 벗어봅니다. 불행히도 다음 장면에는 철모를 벗은 머리에 총알을 맞아 즉사합니다. 죽음을 면하느냐 면하지 못하느냐 하는 '면할 면(免)'자가 머리를 보호하는 철모, 곧 투구에서 나왔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위에서는 주로 모자에만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끌어왔습니다. 지금부터는 평민과 지배계층의 다른 부위의 복식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이 아니라도 지배계층인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 차이에는 복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사대부 계층은 노동을 하느라 움직일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복장이 좀 거추장스러웠습니다. 위의 그림은 '사자시좌(四子侍坐)'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논어』에 보이는 이 장면은 공자(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가 제자인 자로(子路)와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그리고 증석(曾晳)이 모시고 앉은 자리에서 각자의 포부를 물어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락부락한 사람이 자로이고, 매끈한 사람은 염유, 뒷 모습이 보이는 사람이 공서화인 것 같습니다. 슬(瑟) 옆에 있는 사람이 증석인데 공자는 증석의 포부를 가장 마음에 들어합니다. 공자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모두 일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에는 넓은 띠를 하고 있습니다. 저런 넓은 허리띠를 신(紳)이라고 합니다. 이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중국에서는 진신대부(縉紳大夫), 서양에서는 Gentleman이라고 하는데 신사(紳士)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는 옷만 잘 차려 입었다고 해서 신사(紳士), 곧 Gentleman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증석의 허리띠[帶]에는 옥을 매단 장식물까지 매달려 있습니다. 궤안 사이로 보이는 공자의 허리춤에도 긴 칼날 같은 장식물이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풍성한 웃을 허리띠로 조여 매니 옷에는 온통 주름이 잡혔습니다. 띠 대(帶) 금문대전-소전-해서 '띠 대(帶)'자는 바로 띠를 한 모습을 나타낸 모양입니다. 위쪽의 가로선은 바로 띠입니다. 띠와 교차되게 표현된 곡선은 모두 옷의 주름입니다. 밑의 '수건 건(巾)'자는 하의임을 나타내는 요소입니다. 증석의 모습에서 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사대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허리띠에 장식을 하였습니다. 천마총에서 나온 금제요대(金製腰帶)입니다. 온통 금으로 만들어진 이런 허리띠에는 자세히 보면 여러가지 장신구들이 달려 있습니다. 반달 모양의 곡옥(曲玉)도 보이고 물고기 모양이며 길게 늘어뜨린 패옥 모양도 보입니다. 신라 왕들이 극도로 호사한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만 사대부들도 재료의 차이가 있었을 뿐 별반 차이는 없었습니다. 신라와 시대적으로 궤를 같이 했던 당나라 왕발(王勃)의 시 「등왕각(滕王閣)」의 첫 련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 굽어보고 있는데, 패옥이며 난방울 소리 울리니 가무 끝났다네.(滕王高閣臨江渚, 珮玉鳴鸞罷歌舞)" 이 구절은 등왕이 지은 높은 누각에서 잔치가 끝나자 참석자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느라 허리에 차고 있는 패옥이 서로 부딪치고 말의 고삐에 매단 방울이 울리는 것을 묘사하였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차던 패옥은 발굴된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통)형과 벽옥을 반으로 쪼갠 곡옥을 연결하였습니다. 위 증석이 차고 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화려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곡옥에는 아래로 연결하는 실을 꿸 구멍이 있습니다. 이런 허리띠에 매달아 아래로 드리운 패옥을 표현한 글자는 바로 '누를 황(黃)'자입니다. 누를 황(黃) 갑골문-갑골문-금문-소전-해서 이 글자의 갑골문은 두 가지가 보입니다. 첫 번째 것은 비교적 장식이 소박한 것을 나타내고 두 번째 것은 다소 화려한 장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글자는 옥의 색깔 때문인지 아니면 발음을 빌린 것 때문인지 일찍부터 '노랗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뜻을 가진 글자를 따로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드리운 장식이 옥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형체소로 '구슬 옥(玉)'자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황(黃)은 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음소로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뜻을 가진 한자는 '서옥 황(璜)'자입니다. 황(黃)자는 이외에도 다른 많은 글자의 음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복장을 가지고 신분의 차이를 표현하는 글자가 꽤 많네요.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지금 세상에 산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첫댓글 사월 선생님!
고맙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어찌 저런 자료들을 머리 속에 다 가지고 계신지~~
재미난 글 덕분에 즐거운 하루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해석 고맙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