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는데 얼마나 넓은 집을 필요로 하는가?>
톨스토이의 우화를 패러디해서 글을 쓰려고 하는가라고 지레짐작하시지 말기 바란다. 철학적 함의가 있는 글이 아니고 그저 한 인간이 사는데 몇 개의 방으로 구성된 몇 평의 주거공간이 적절할까 생각해 보려고 할 따름이다.
수 만 평의 건축물로 추정되는 아방궁이나 500여동의 전각에 7천여 칸이 들어찼다는 경복궁(1칸을 대략 1.9평으로 보면 1만 3천평)은 제왕의 거처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한다.
1431년, 세종께서는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을 제정하여 신분에 따라 주택규모를 제한했다. 관리는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庶人)은 10칸을 한도로 했다.
최소한도면 얼마나 좋으랴! 예컨대 백성이 집을 짓는데 돈이 없어 초가삼간을 짓는다고 하면 나라에서 나서서 너무 좁은 집은 살기에 불편하다고 하며 7칸을 덧붙여 10칸 집을 지어준다(?) 백일몽 같은 이야기이고 서민은 최대 10칸으로 집을 짓고 옹크리고 살라는 말씀이었다. “옛말에 큰 집 옥(屋)은 죽음에 이르며, 반면 작은 집 사(舍)는 사람에게 길하니라. 큰 집은 건사하기 힘들고 장식할 곳이 많아지니 본업인 농사와 길쌈에 방해가 되느니라. 노래에도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어다가 초가삼간 집을 지어 부모형제 모셔다가 천년 백년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백성들을 훈육, 교화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 가사제한령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최대 99칸으로 완화되어 적지 않은 명문가가 99칸(약 190평) 대저택을 건축했고 현재도 보유하고 있다. 이 한도도 지키지 않은 저택이 있으니, 강릉의 선교장은 102칸에 이르고 하인배의 거주 공간을 합하면 300칸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국가가 도래하여 가사제한은 다 옛일이 되었고 현재 집의 규모는 재력이 허용하는 한 궁전을 짓는다고 해도 나라에서 범칙금 딱지 하나 떼지 않는다. 대신 적지 않은 재산세를 받아간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래도 최근 소심한 나는 일개 서인인 주제에 너무 넓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닌가, 켕기는 맘이 들곤 한다. 비록 서울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아파트일망정 10칸(약 19평)이 훨씬 넘는 52평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52평 아파트는 옛날엔 3품, 현재는 국장 이하의 관료에 어울리는 규모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혹자는 나의 소심함을 동정하여 대기업의 임원은 행정부의 서기관이나 사무관과 사회적 신분이 비등하므로 심려하지 말라고 따듯한 말씀을 건네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분들도 내 거처가 6개의 방으로 구성되어있고 아내와 둘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금 과할 정도로 넓게 살고 있다는 반응을 보일 터이다. 더욱이 나의 재력이 별로 신통하지 않다고 알고 있는 친구들은 고개를 저을 터이다. 관리비도 많이 나오고 청소하기도 힘이 들지 않느냐고.
우리 모두 넓은 아파트에서 사는 이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인간도 동물인지라 자기만의 전용공간을 가져야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인간에게 먹이활동을 위해 일정한 터를 자기 몫으로 확보할 필요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정신과 감정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일정한 전용 공간이 필요하다.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고 난 다음에도 아파트가 좁아 아내의 밉상을 계속 보고 들어야만 한다면 이것은 고통이고 불행이다. 이런 때에는 자기만의 방으로 건너가서 마음의 상처를 핥으며 분노를 다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파트가 넓으면 살림살이를 펼쳐놓고 살 수가 있어 편안하다. 옷장, 책장, 책상, 테이블을 마음대로 놓고 생활할 수 있다. 며칠 전 유치원생인 손녀가 놀러 와서 피아노를 제법 진지하게 연습하더니 지네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고 서운해 하더란다. 그래서 할머니가 왈 아빠가 돈은 많지만 너희 집이 아직 좁아 피아노 놓을 데가 없다고 견강부회하여 위로해 주었단다.
위와 같은 이점에 덧붙여, 아니 어쩌면 이것이 가장 결정적 이유일 지도 모르는데, 나에게 넓은 아파트에 사는 일은 어린 시절 겪었던 고난에 대한 신원(伸冤)의 의미가 있다.
나는 유아부터 대학교 3년생까지 17간(약 32평) 한옥에서 살았다. 59년 전인 나의 고교 3학년 겨울 당시 우리 집에는 문간방을 확장한 방을 부모, 큰 안방은 누이들 세 명과 식모, 사랑방은 두 형들과 내가 쓰고 있었고 대청 옆 1평 되는 건넌방은 비어있었다. 건넌방은 구들이 다 막히고 꺼져서 불길이 들어가지 않아서 쓸 수가 없는 냉방이었다.
방 하나를 셋이나 넷이 쓴다면 그건 품위 있는 생활하고는 거리가 있는 수용소 생존 수준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형제들은 그런 생활을 겪었다.
서울대 법대를 목표로 하는 수험생인 나로서는 어려움이 더했다. 밤 10시가 넘으면 형들이 자야했기에 방구석에서라도 불을 켜놓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냉방인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밤 늦도록 치열하게 공부했다. 영어와 독일어 구문을 외우다가 책상에 엎어져 잠이 드는 날도 있었다. 머리에 미열이 올랐지만 공부에 열중한 탓이려니 여겼고, 간간이 기침이 나오고 가래가 뱉어졌지만 방 안 공기가 차가워서 그러려니 했다.
목표한 대학에 합격한 후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나는 중등도의 결핵에 걸린 상태임이 발견됐다. 지난 몇 개월의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심한 공부를 하던 내 몸에 균이 침입해서 급속히 퍼졌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휴학과 수술을 권했지만 아버지는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치료를 잘 받으면서 공부 또한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나는 주사를 맞고 매일 파스를 한 움큼씩 먹으며 치료를 잘 받아 결국 완치가 됐다. 그러나 후유증이 없었을까?
돌이켜 따져보면 당시 나에게 차갑지 않은 공부방이 있었다면 결핵에 걸리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지금 같았으면, 또는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나는 부모에게 건넌방의 구들을 새로 놓아서 공부방으로 쓰게 해 달라고 말했으리라. 그러나 4남4녀의 형제 중에서 일곱째로 태어난 데다가 심약했던 나는 부친이 어려워 무언가를 요구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부친은 지난 6년간을 실업자로 지낸 끝에 공공기관의 임원으로 취직했기에 필요한 용처에도 돈을 쓰지 않으려는 가난에의 공포가 지배했다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에서 저 밑의 서열인 나 하나를 위해 방 수리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결국 결핵에서는 벗어났지만 전의가 많이 손상되었고, 심지가 굳세지 못한 나는 그 후 부친의 돌연한 별세, 집 재정과 이사 간 주거환경의 악화 등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공부에 매진하지 못해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어떻든 인생의 목표로 삼은 법조계의 길이 막혔기에 자존심도 크게 상했고 사회에 기여한 바가 더 적다는 자괴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고, 살아오면서 고생도 더 했고, 현재도 동창 변호사들보다 주머니도 더 가볍다는 현실이 슬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遠因)은 내 방이 없음 때문이었다. 필요할 때 공부방 한 칸이 없어, 나의 인생은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의미의 “이생망”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생은 빗나갔다는 뜻의 “이생빗” 쯤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내가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된 시점은 47살에 송파구 문정동의 방 4개짜리 아파트를 산 때였다. 그 때 신축 아파트도 아니고 중고 아파트에 내 방 하나를 마련하기가 이렇게 오래 걸렸구나 하고 비감해 했던 기억이 난다.
잠시 내 개인적 서사를 떠나 휴식을 취할 겸, 고금을 통해 그리고 동서양에 걸쳐 주택에 청소년을 위한 자기만의 방 내지 공부방이 있었는지를 내 좁은 지식 한도 내에서 살펴보자.
폼페이유적 조사에 의하면 고대 로마제국의 일반 시민들은 의외로 협소한 가옥에서 살았으며 일상의 대부분을 야외의 공공장소에서 보냈다고 하니, 아마 로마의 청소년에게는 공부방이 없었으리라. 로마가 온난한 지역에 위치했고 지식기반사회가 아니었으니까 큰 사회적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된다.
현대 유럽에서도 부자가 아니면 자신만의 방을 가지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인데, 유명한 소설가인 버지나아 울프도 “자기만의 방”이라는 에세이에서 그것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고 그것을 가지기를 오래 갈망했음을 훌륭한 필치로 나타내고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아파트 건축비가 급등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작은 규모의 아파트들만 건축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협소한 아파트 건축붐이 출생율 저하의 한 요인으로 보이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방이 둘이나 셋인 아파트에서 자식에게 공부방을 마련해 줄 방법은 하나만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금성 안에 천개 넘는 방들이 있어도 황제의 침실은 두세 평에 불과하고, 톨스토이는 우화에서 죽은 자에게는 반 평의 땅 밖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방 세 개를 내 몫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원님 행차 후 나팔과 같이 때 늦은 소용없는 욕심이 아닐까 싶다. 생활자금이 밑이 보이기 시작하니 조만간 현재 살고 있는 이 아파트를 팔아 집을 줄이고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집을 줄이는데 있어 서울에서 방 두세 개가 있는 아파트로는 절대 가지 않을 작정이다. 시골로 내려가 방 4개(사이좋게 나 둘, 아내 둘)가 있는 아파트나 주택을 마련해야 하겠다.
그 다음 생을 마치게 되면 화장할 터이니 반 평의 땅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아니다! 높은 언덕 위에서 재를 뿌리면 바람에 실려 산지사방에 퍼지리라. 그러면 수 백 평, 아니 수 천 평에 내 재가 퍼질 테니 수 천 평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끝)
첫댓글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소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고 또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