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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1일 금요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린다. 이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5월 13일이었는데, 9세기 중엽에 11월 1일로 바뀌었다. 교회는 이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들은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하늘 나라의 성인들을 기리며 전구를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는 우리도, 희망을 안고 성인들처럼 하느님을 뵐 그날까지 열심히 살아갑시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큰 환난을 겪어 내고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 큰 무리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한다고 말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7,2-4.9-14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3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성인은 탁월한 성덕과 영웅적인 신앙의 삶이 인정되어,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삼고자 공적으로 선포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드러냅니다. 단순해 보이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가지 색으로 펼쳐 드러나듯이,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다양하게 드러내고 특정한 요소를 돋보이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다른 한편, 성인은 주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이를 뜻하기도 합니다. 천국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는 교회가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을 뿐, 하느님께는 당신 거룩함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 넓은 의미의 성인을 기리고, 우리도 성인이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는 우리를 모두 성인으로 이끄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은 자신의 노력으로 높은 경지에 닿겠다는 야망의 표현도 아니고, 다른 죄인과 나를 구분하며, 자신을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교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니, 그분께서 반드시 완성하시리라는 믿음이고, 그분 뜻에 순종하는 겸손이며, 그분 부르심에 대한 성실하고 자유로운 협력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성인(聖人) 옆에 살기 힘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처럼 살짝 수준 떨어지는 수도자들끼리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옆에 살다가 과로사한다!” 따지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백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도 결코 바오로 사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가였습니다.
넘쳐나는 뒷골목 청소년들, 산업화의 착취물로 이용당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을 많이 잘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 돈보스코가 전혀 다른 장소인 두 곳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 돈보스코와 함께 사목했던 제자들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상상이 쉽게 갑니다.
저는 늘그막에야 철이 들어 요즘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음 할 일,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태안에 있었는데, 오후에는 서울에 찍고 저녁엔 대전 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간 게으름 피운 것을 반성하며 뛰어다니니, 다른 형제들에게는 부담이 될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분들도 성인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게 다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유혹할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이 어떤 분인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그리 깨끗하고 거룩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의 오랜 민담 중에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지구에 내려와 인간의 삶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천상의 존재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숲속에서 빛나는 죽순을 발견한 나이 든 대나무를 잘라 파는 노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죽순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작고 빛나는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기뻐서 그는 그녀를 아내의 집으로 데려왔고, 그녀를 딸로 키우며 그녀의 이름을 가구야히메(가구야 공주)라고 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나무꾼은 숲으로 돌아올 때마다 다른 대나무 줄기에서 금과 보물을 발견하여 금세 부자가 됩니다. 가구야 공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노인은 시골의 친구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 딸을 높은 귀족과 결혼시키기 위해 황제가 사는 도시로 이사 나와 커다란 집을 짓습니다. 가구야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각지에서 귀족들이 그녀의 결혼을 청하러 찾아옵니다. 모두 고위 왕자인 다섯 명의 끈질긴 구혼자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주장하지만, 가구야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기를 꺼려 각 구혼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맡깁니다.
그녀는 신화 속 섬의 전설적인 보석 가지와 부처의 구걸하는 돌 그릇 등 희귀한 보물을 각 왕자에게 요청합니다. 각 구혼자는 결국 속임수나 패배로 실패하고 그들의 진정한 성격과 무가치함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일본 천황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녀에게 구혼하려고 합니다. 그는 그녀의 온화한 성격과 신비로움에 반해 그녀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냅니다. 가구야는 그를 좋아하고 그의 친절함을 존경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밝힙니다.
어느 날 밤, 가구야는 자신이 실제로 달에서 왔으며 곧 천상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양부모에게 밝힙니다. 상심한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지구에 머물게 하려고 노력하고, 황제는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올 천상의 존재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경비원을 보냅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천상의 행렬이 내려오고, 깃털 옷을 입은 가구야는 출발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줄 메모와 불멸의 비약이 담긴 약병을 남겨 둡니다.
그녀가 떠난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 황제는 비약을 마시지 않기로 했고, 그녀 없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슬픔을 안고 사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대신 그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불로장생약을 불태우라고 명령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후지산(문자 그대로 ‘불멸의 산’을 의미함)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가구야 공주에 대한 천황의 영원한 기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구야는 이 지상의 존재가 아님을 알고는 이 지상의 모든 유혹에 물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오늘 제2 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상에서 하느님 자녀임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면 이 지상의 어떤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는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잿더미처럼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모든 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 독서에서는 오로지 구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 시련을 이겨낸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온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가 힘과 재산으로 누르려 했을 때 그저 술통에 누워 “햇빛이나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구약의 욥은 다 잃었지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력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런 성인들을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다 가진 이들은 죄를 짓지 않기에 성인들입니다. 다 주시는 분은 전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자랐습니다. 저의 작품은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문학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저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준 선배, 동료, 후배 문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저를 키워준 한국 문학과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강의 수상 소감을 보면서 그의 겸손과 인품도 노벨 문학상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와 이예원’의 번역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있습니다.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500만이 넘는 가톨릭 신자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박해의 칼 아래 쓰러진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드러나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희생 그리고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모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분들만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한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본당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신앙의 향기를 전해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본당에는 지체를 이루는 봉사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은 그런 건물과 조직, 봉사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기에, 주보를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기에, 나눔과 희생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제 기억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1970년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염이 멋있었습니다. 곰방대로 담배 피우셨습니다. 제가 어렸고, 54년이 지나서인지 그 이상 생각은 잘 나지 않습니다. 작은형은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키도 컸고, 운동을 잘했던 형입니다. 구속되기보다는 자유를 좋아했던 형은 자유롭게 먼저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는 제게 신앙을 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였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저를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어머니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기여서, 어머니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남아 있는 가족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갈 겁니다. 교회가 위령성월을 지내는 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우리의 희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쉼터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녀 드보라(Deborah
신분 : 구약인물, 판관, 예언자
활동연도 : +12세기경BC
같은이름 : 데보라
성녀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12판관 중 한 명으로 예언직과 판관의 직무를 수행한 유일한 여자였다.
판관기 4-5장에 의하면 드보라는 판관 에훗이 죽은 뒤 다시금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임금 야빈의 침략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등장한 판관이다. 판관 드보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과 함께 타보르 산에 진을 치고 야빈의 장수 시스라와 맞서 대승을 거두고 가나안 임금 야빈마저 굴복시켰다.
이렇듯 판관 드보라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또 ‘라피돗의 아내’(판관 4,4)라는 혼인한 신분으로 백성을 다스릴 만큼 주님의 영(靈)으로 가득 차 있었다.
Debora, Dvora로도 표기되는 그녀의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꿀벌(Bee)로 번역된다.
성 아우스트레모니오 (Austremonius)
활동년도 : +3세기경?
신분 : 주교
지역 : 클레르몽(Clermont)
같은 이름 : 아우스트레모니우스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선교사였다는 사실과 클레르몽의 주교였다는 것 외에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또는 아우스트레모니오) 성인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없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에 의하면 그는 로마(Roma)에서 프랑스 지방으로 파견된 일곱 주교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한다
성 베니뇨 (Benignus)
활동년도 : +2세기경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디종(Dijon)
같은 이름 : 베니그노, 베니그누스, 베닉누스, 베닝누스
성 베니뇨에 대한 공경은 디종의 옛 무덤을 발견한 6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성 베니뇨의 고난은 이때부터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 리옹(Lyon)에서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디종 근교인 에파니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온다
성녀 라헬 (Rachel)
활동년도 :
신분 : 구약인물
지역
같은 이름 : 레이첼
야곱(Jacob)의 아내이자 유다인의 어머니로 존경받는 성녀 라헬은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Laban)의 작은딸이다.
야곱은 형 에사우(Esau)를 속이고 맏아들의 권리를 가로챘기 때문에 라반의 집에 몸을 숨기고자 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했을 때 우물가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이러 나온 라헬과 첫 만남을 가졌다. “라헬은 몸매도 예쁘고 모습도 아름다웠다.”(창세 29,17) 야곱은 첫눈에 라헬과 사랑에 빠졌고, 외삼촌에게 라헬과의 혼인을 청했다.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얻는 대신 칠년 동안 일 해 드리겠습니다.”(창세 29,18) 이렇게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칠 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첫날밤을 지낸 신부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다. 큰딸을 먼저 시집보내고자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이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 딸을 맏딸보다 먼저 주는 법이 없다네. 칠 년 동안 다시 일해 준다면 라헬을 주겠네.”(창세 29,26) 야곱은 라반의 약속을 믿고 칠 년을 더 일하기로 한 후 레아와의 초례 주간을 채운 후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주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그러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다.”(창세 29,31) 야곱은 레아와 라헬의 몸종 빌하(Bilhah), 그리고 레아의 몸종 질파(Zilpah)를 통해 열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를 갖지 못하던 라헬과의 사이에서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얻었다. 요셉을 얻은 후 야곱은 라반에게 고향 가나안으로 보내달라고 청해 막대한 재산과 함께 길을 떠났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 집안의 수호신들을 몰래 가져왔다.
그 후 라헬은 베텔을 떠나 에프라타로 가던 중에 두 번째 아이를 해산하게 되는데 산고가 심해 아이를 낳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라헬은 이렇게 죽어, 에프라타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 묻혔다.”(창세 35,19) 라헬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기의 이름을 ‘벤 오니’(슬픔의 아들)라 불렀지만 야곱은 ‘벤야민’(내 오른손의 아들)으로 불렀다.
유다인들은 라헬을 12지파의 어머니로 존경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라헬을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후손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로 그렸고(예레 31,15), 마태오 복음(2,18)은 헤로데가 유다의 임금 탄생 소식에 어린 남자 아이들을 살해하자 어머니 라헬이 통곡한다고 한탄했다. 베들레헴 입구에 있는 라헬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의 대표적인 순례지로 특별히 불임으로 고통 받는 여인들이 자주 방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