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우정의 사도직에 대해 설명을 드리기 전에 우선 샤를르 드 후코 수사님의 영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샤를르 수사님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저희의 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샤를르 수사님은 프랑스 파리에서 귀족으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먼지 나는 길을 걷고 목공소를 보면서 예수님의 삶에 반해버렸습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30년 동안의 나자렛 삶에 대해서 아주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숨은 생활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신 곳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삶을 나누면서 반복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조금씩 아, 그렇구나! 하고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이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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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드 푸코 | 샤를르 수사님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너 거기서 뭐하니?”라고 묻는 친구의 편지에 이렇게 답장하셨습니다. “오래된 친구들과는 우정이 더욱더 깊어가고, 새로운 사람도 사귀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려고 노력하고, 기회가 닿으면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이야기 나눈다.” 샤를르 수사님은 당시 아프리카 뚜아렉 언어사전, 속담 모음 등 지금도 이 민족이 사용하는 책을 쓰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샤를르 수사님은 사제가 없는 곳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며 투신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이슬람교도들에게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파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이웃 이슬람 친구들이 멀리까지 가서 염소젖을 구해다 살려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제가 아니라 환대를 베풀 수 있는 상대임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형제적 우정을 나누는 것이 복음을 삶으로 외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 수도회(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현재 많은 나라 이슬람 신도들 사이에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친구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이슬람이 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영성을 살고자 하기에 앞으로 제가 나눌 이야기는 우정을 통해 나누는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외국에 사는 여러 선교사들의 이야기와는 좀 다를 것입니다.
멕시코에서 노숙자들과 우정을 나누며
제가 이곳 멕시코에 처음 와서 적응하던 시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이해를 주고받는 통교가 부족해서 경험을 나누어 달라고 했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끝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5년 이상 살고난 지금은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생활을 주님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올해 들어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선순위로 정해서 하는 일은 공원에서 노숙자들과 매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의 수녀원에서 2, 3년 전부터 마약 때문에 정신이 자꾸 쇠약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적어도 자신을 살피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찾다가 시험적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기도”라는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상상하시겠지요. 그러나 저희가 공원에서 하는 기도는, 글 한 줄을 열 번 반복해서 읽어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뇌신경이 파괴된 친구들, 공원에서 오랫동안 노숙자로 살아왔기에 다른 곳에 적응할 수 없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기도입니다. 저희는 다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맥락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려는 것뿐입니다.
실험적으로 해본 기도가 우리 친구들 처지에 맞는다는 확신이 서면서 다른 수도회 수녀들을 초대했고 지금은 네 수도회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함께하는 다른 수녀님들을 통해서 저도 새로운 힘을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일을 결정하는 데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여러 수도회가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수도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수도회의 미래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며 살아가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공원에서는 주로 노숙자와 매매춘 남녀와 그들의 손님들도 만납니다. 제가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저의 어린 시절 상처에 대해,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른 가면 없이 직면하게 됩니다. 앞으로 제가 가장 많이 소개하게 될 친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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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에 참석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사진/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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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에서 일하며 생계를 돕고 공원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그 다음에 하는 일은 이곳 멕시코 교구 까리따스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인 “들으며 다닌다”에 일주일에 이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기도하는 공원에서 약 30~40분 정도 떨어진 공원에서 하는데, 커피를 가지고 가서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갈 때에는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여기에 있다”고 적힌 빨간 티셔츠를 입고 갑니다. 주로 노인과 우울증 환자가 많은 지역인데 역시 이 공원에서도 노숙자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 일은 제가 급료를 받고 1년 계약으로 하는데 1년 후 결과에 따라 계속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이 급료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므로 일주일에 3일 이곳 한인 가게에서 일하는 중입니다.
가게에서 일하면 상인들의 세계와 교포들의 세계를 접할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외국에 와서 언어와 문화의 다름에 매일 충격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온 세상의 흐름 한가운데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다른 일들과 시간 조정이 어려워 3일을 파출부 일로 바꾸려고 알아보고 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새로 찾을 때마다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을 느낍니다.
제가 수녀원에 입회해서 올해로 3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에 일을 한 곳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80년대 초 노동생활을 시작으로 공장도 여러 곳을 다녔고 농사일도 해보고 파출부도 여러 곳에서 해보고, 유럽에서는 집시들과 장에 다니며 조그만 물건들도 팔아 보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일을 해보고 온갖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안정된 수입이 없거나, 일을 새로 찾을 때 느끼는 불안은 여전히 제가 다루어야 할 숙제로 따라다닙니다. 요즘 경제위기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기도할 때 그들과 함께 주님께 갑니다.
"예수님, 오늘 하루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만납시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복음 말씀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기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일하는 여자가방 가게 일을 가장 먼저 떠올리면서 “예수님 오늘 하루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만나요”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시장으로 일하러 가는 상인들, 점원들, 물건 사는 사람들, 커다란 무리 안에 저도 바쁘게 뛰어다니며 바쁘다고 타령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의 삶은 살고 나면 더 이상 바꿀 수 없는데 어떻게 일이 모든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일만 하고 살았다고 한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쪽 치아파스라는 주에서 일을 하러 온 인디언 동료와 가게에서 나눈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나의 가족은 스페인 이름으로 다니엘라라고 나를 부르지 않아.” “그럼 너의 언어로 너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니?” “윌이라고 부르지, 학교에서는 두 가지 언어로 가르쳐도 모두들 스페인어만 사용하고 집에 가면 우리 언어만 사용해.”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인디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시당하니 당연하지.” “나는 돈을 좀 모아 대학교에 가려고 올라왔는데 다 쓰고 한 푼도 모으지 못했어, 결국 일만하고 돈을 모으지 못하니 시골로 다시 가서 아버지 농사일이나 도와야지, 오빠가 이번 급료 타면 내 차비를 보태준댔어….”
정말 이들이 받는 급료는 아주 조금이고 자기 몸 하나도 알뜰해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순간 세상이 불공평함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도록 일하고도 경제적으로 힘겹게 지내나! 오늘 기도는 이런 친구들을 지향에 두고 해야지!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한 후 집에 돌아오면 피곤이 몰려와 기도할 마음보다 쉬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거기에다 함께 사는 자매들이 부엌이나 화장실을 어지러 놓았으면 화가 납니다. 기도하려 예수님 발치에 앉아 먼저 화를 어떻게 풀 것인지 생각하며 나의 피곤과 분노가 남의 탓이라는 책임전가 욕구를 어떤 방법으로 포기할 것인지 찾아봅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오늘 기도 지향으로 생각해두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들 가정을 저의 삶과 함께 “땅을 가꾸어 얻은 제물”로 봉헌합니다.
공동기도 시간이 되면 저와 함께 사는 멕시코 자매 베티는 하루 사건을 다 나열하길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자매 파올라는 하루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다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저는 중요한 것만 영적으로 표현하고 너무 간추려버려서,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문화에서 나의 표현을 알아듣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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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로 한국에서 지난 40년간 활동하다 지난 7월 1일 선종한 아이코 수녀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 회원들.(사진/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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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소식, 동물 사료용으로 빵을 만들어 팔고 있다는 소식
한동안 가자 지구 주민들을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우리 자매가 이메일을 보내준 덕분에 소식을 금방 알게 되었고, 주님께 평화를 간절히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소식, 겁에 질리고 추위에 얼어 죽는 이웃 아이 소식, 동물 사료용으로 빵을 만들어 팔고 있다는 소식, 창문 유리가 깨져 폭탄 맞아 다리가 잘린 어린이 얼굴에 박혀 알아볼 수 없어 두 가정이 자기 아이라고 서로 우기는 소식….
여러 나라에서 자매들이 평화시위에 참석해서 경험한 것도 보내 왔습니다. 이곳에서도 함께 사는 파올라 자매가 앰네스티가 주도하는 시위에 다녀왔습니다. 시위대는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르고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 누워서 가자 지구의 많은 사상자들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저는 시위보다는 일상생활을 덜 이기적인 삶으로 만들어가고자 모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불행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 행동이 만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는 시위를 하면 불의에 맞서 무엇인가 했다는 느낌이 들고 거기에서 희망을 느꼈으나,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만 일을 하는 것에 더 기쁨을 느낍니다. 결국 제가 참여하지 않았던 이 시위가 저를 잠에서 깨우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고 공동선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자 지구 전쟁을 전쟁이 아니라 '살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대치한 군인이 없거니와, 죄 없는 어린이가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이런 상황까지 갈 수 있고,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것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제 오늘 저의 삶을 하느님 시선으로 살펴볼 시간입니다. 저의 불만과 한탄도 모두, 제가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처럼, 저에게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소중히 다루는 것이 더 깊이 연대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 손에 드리며 이것을 통해 자비를 배우길 희망해봅니다. 틀림없이 제게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마음 깊이 전해짐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노숙자를 만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 이글은 신앙인아카데미에서 발행하는 <맘울림> 2009년 7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예수의 엘리사벳 강순화 자매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에 몸담은 지 30년이 되었으며, 지난 17년 동안 멕시코에서 활동했다. 최근에는 인디언 부락에서 지내다가 현재 멕시코시티의 노숙인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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