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리젠트 저녁 공개 강좌 짧은 리뷰
지난 주 월요일에도 저녁 공개 강좌가 있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가지 못하고 오늘 저녁 공개 강좌에 참여했습니다. 오늘 강의자는 리젠트 칼리지 제임스 휴스턴 영성 신학 석좌 교수인 브루스 힌드마쉬와 캐나다 출신이며 북미권에서 매우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스티브 벨이 함께 '찬송과 그리스도교 영성: 짧은 역사 스케치로 본 헌신과 노래'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에 있어서는 꼭 자신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체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서 있어왔던 신앙과 경험들이 자신의 경험과 비추며 과거의 영성이 무엇이었고 지금의 영성과 연결되는 부분이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제 주관적 전제에서 브루스 힌드마쉬는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영성 신학교수입니다. 그는 교회사교수며 역사 전통을 탐구하며 조사하는 방식으로 영성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21세기 영성의 이야기보다는 정말 교회사 교수로서 그리스도교 영성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하는(물론 거기에는 결국 북미권의 인식이 들어간 영성의 관점이지만) 교수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그의 교수로서의 능력이 떨어지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의 전공은 18세기 영국 교회 흐름이지만 초대교회 때부터의 영성의 역사를 파헤치고 설명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는 그의 지극히 교수로서의 역할에서 충실한 찬송과 묵상, 헌신의 영성의 역사가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시대별로 있었던 찬송의 특징을 잡습니다.
성서시대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다양하게 찬송가운데 섞여 있습니다. 구약의 시편은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찬양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불려졌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그리스도교 공인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분께서 모든 것을 이기셨다는 찬송과 우리가 그 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찬양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인 때의 고대 교회는 삼위일체론 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찬양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 이시다는 강조점을 넘어 삼위일체론 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분들의 위격을 높이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그의 찬송가를 같이 불렀는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Prudentius: Christ as God
Of the Father's love begotten,
ere the worlds began to be,
he is Alpha and Omega,
he the source, the ending he,
of the things that are, that have been,
and that future years shall see,
evermore and evermore!
O that birth for ever blessed,
when the Virgin, full of grace,
by the Holy Ghost conceiving,
bare the Savior of our race;
and the babe, the world's redeemer,
first revealed his sacred face,
evermore and evermore!
This is he whom seers in old time
chanted of with one accord;
whom the voices of the prophets
promised in their faithful word;
now he shines, the long expected,
let creation praise its Lord,
evermore and evermore!
O ye heights of heaven, adore him;
angel-hosts, his praises sing;
powers, dominions, bow before him,
and extol our God and King;
let no tongue on earth be silent,
every voice in concert ring,
evermore and evermore!
Christ, to thee with God the Father,
and, O Holy Ghost, to thee,
hymn and chant and high thankgiving,
and unwearied praises be;
honor, glory and dominion,
and eternal victory,
evermore and evermore!
(Words: Marcus Aurelius Clemens Prudentius(348-413); trans. John Mason Neale, 1854; and Henry Williams Baker, 1861)
중세시대 때는 보다 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에서 당하셨던 고난과 수치를 묵상하고 찬양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곡들도 차분하고 가사들도 보통 그러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수도원 운동들과 발을 맞추어 예수님의 고난을 찬양하고 묵상하며 자신들도 그 고난을 걸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 그와 같은 찬양들이 울려 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찬송작사가로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찬양은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번역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Cistercian identification with Christ in pity
O sacred Head, now wounded,
With grief and shame weighed down,
Now scornfully surrounded
With thorns, Thine only crown:
O sacred Head, what glory,
What bliss till now was Thine!
Yet, though despised and gory,
I joy to call Thee mine.
What Thou my Lord, has suffered
Was all for sinners' gain;
Mine, mine was the transgression,
But Thine the deadly pain.
Lo, here I fall, my Saviour!
'Tis I deserve Thy place;
Look on me with Thy favour,
Vouchsafe to me Thy grace.
What language shall I borrow
To thank Thee, dearest friend,
For this Thy dying sorrow,
Thy pity without end?
O make me Thine forever;
And should I fainting be,
Lord, let me never,never
Outlive my love to Thee.
(Attributed to Bernard of Clairvaux, 12th century, Trans. Paul Gerhardt)
종교개혁시기는 다시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찬양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칭의를 특별히 더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도 찬송가들을 많이 썼고요. 칼빈은 특별히 시편의 시들을 많이 인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청교도 시기로 넘어가며 두드러지게 달라지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영향이었습니다. 찬양에서 내가 주님을 보며 내가 주님을 찾고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았네 하는 찬양의 가사 가운데 내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전 시대의 찬양가운데는 나라는 주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찬양하더라도 그 수난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었고 나는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시절과 청교도 시절 시대 즈음에 등장했던 계몽주의는 찬양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시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이작 왓츠입니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그의 찬송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이 당시의 찬양 특징은 전투적인 찬양이 많았습니다. 아이작 왓츠의 찬양들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군사 되어 용맹스럽게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는 식의 찬송가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강의 중간에 같이 나눈 찬송가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Calvinist Psalmody
All people that on earth do dwell,
sing to the Lord with cheerful voice;
him serve with mirth, his praise forth tell.
Come ye before him and rejoice.
Know that the Lord is God indeed;
without our aid he did us make;
we are his folk; he doth us feed,
and for his sheep he doth us take.
O enter then his gates with praise;
approach with joy his courts unto;
praise, laud, and bless his name always,
for it is seemly so to do.
For why? The Lord our God is good;
his mercy is forever sure;
his truth at all times firmly stood,
and shall from age to age endure.
(Words: William Kethe, Scottish Psalter (1650); music: Old Hundredth)
Watts on the Cross of Christ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Where the young Prince of glory died,
My richest gain I count but loss,
And pour contempt on all my pride.
Forbit it, Lord, that I should boast,
Save in the death of Christ my God!
All the vain things that charm me most,
I sacrifice them to His blood.
See from His head, His hands, His feet,
Sorrow and love flow mingled down!
Did e'er such love and sorrow meet,
Or thorns compose so rich a crown?
His dying crimson, like a robe,
Spreads o'er His body on the tree;
Then I am dead to all the globe,
And all the globe is dead to me.
Were the whole realm of nature mine,
That were a present far too small:
Love so amazing, so divine,
Demands my soul, my life, my all.
(Isaac Watts, Hymns and Spiritual Songs (1707))
초기 복음주의 시기는 내가 만난 하나님과 더불어 보다 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과 변화에 대한 찬송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찰스 웨슬리가 그런 찬송을 많이 지었고 그 뒤의 찬송가를 지은 사람들도 그런 영향의 곡들을 많이 작사 작곡했습니다. 대표적인 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 뉴튼도 그와 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Early Evangelicalism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Twas grace that taught my heart to fear,
And grace my fears reliev'd;
How precious did that grace appear,
The hour I first believ'd!
Thro' many angers, toils and snares,
I have already come;
'Tis grace has brought me safe thus far,
And grace will lead me home.
The Lord has promis'd good to me,
His word my hope secures;
He will my shield and portion be,
As long as life endures.
Yes, when this flesh and heart shall fail,
And mortal life shall cease;
I shall possess, within the vail,
A life of joy and peace.
The earth shall soon dissolve like snow,
The sun forbear to shine;
But God, who called me here below,
Will be forever mine.
(John Newton, Olney Hymns(1779)).
브루스 교수님이 이와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 스티븐 벨이 그 시대마다의 특색 있는 찬송가를 기타로 연주하며 같이 찬양하였습니다. 스티븐 벨을 저는 여기 오기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북미권에서는 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인 것 같았습니다. 채플실을 꽉 채운 사람들이 같이 찬송가를 부르는데, 여기 분들도 아우렐리우스의 찬송가는 잘 못 부르시더군요. 워낙 오래 된 찬송가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이제 스티브 벨이 자신의 찬양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렸습니다. 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한 그런 가수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강의와 찬송이라는, 교수와 가수라는 색다른 조합으로 저녁 공개 강좌가 진행되었습니다. 브루스 교수님은 현대 찬송은 스티브 벨 같은 찬양을 작사 작곡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주 관심은 과거의 그리스도교 영성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조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전형적 교회사를 전공한 교수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또한 그는 그만큼 엄청난 조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짧은, 어찌 보면 별 내용 아닌 것 같은 이 강의 속에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을지 신학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각 시대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사와 멜로디가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은 그 시대의 찬송과 항상 맞물려 있었습니다.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찬송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몇 백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방대한 자료가 부러웠습니다. 물론 우리가 영어로 읽으면 상관없겠죠.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초대 그리스도교의 문서와 찬송들을 번역해 놓은 자료를 가진 영어권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수백 년 흐르며 이와 같은 자료들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신학은 우리 말로 번역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것이 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나 아우렐리우스의 찬송가들을 영어권 사람들이 번역하고 같이 찬송 부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영어권 사람들의 찬송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번역하고 공예배에서 같이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모국어로 불렀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들의 신앙고백과 연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찬송가도 아이작 왓츠나 존 뉴튼 같은 찬송가들을 많이 번역했습니다. 그렇기에 영어권에서 불려지고 고백되었던 그 신앙고백들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에 선교사로 있었을 때는, 정말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없어 같이 찬송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북미권은 아무래도 한국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다 보니 찬송가를 불러도 바로 그 곡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같은 신앙 고백으로 찬양을 올려 드릴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찬송이든 어떤 신학이든 우리는 많이 번역하고 우리 말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더욱 성장 성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셋째, 시편은 각 시대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의 모든 특색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습니다. 브루스 교수님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찬송가 중에 내가 들어가기 시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백들은 이미 시편에 많이 나와있는 내용들입니다. 삼위일체적인 고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곧 그 분 자신이라는 고백도 시편 여기저기에 암시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성경이 왜 성경이 될 수 있는가 입니다. 성경은 정경화 작업을 거친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을 다 담고 있습니다. 고대 교회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시대 마다 특별하게 하나를 강조하고 다른 하나를 덜 강조하는 모습들을 보였지만 성경은 언제나 각 시대의 모든 특별 강조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 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감사 드리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