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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전체 요약
배경
과거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땅에서 종노릇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에 고통스러워하는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일으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 에게 범죄하고 맙니다.
결국 출애굽한 1세대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고,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새로운 세대만이 약속에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선 그곳에서 다른 민족들을 무찌르고 모두 내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애굽이 전적인 하나님의 건지심이었다면,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하나님의 섭리와 이스라엘의 순종이 동시에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출애굽은 우리에게 있어 구원이라 할 수 있으며, 가나안에서의 삶은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즉 성화의 삶이라고 대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보김(1:1~2:10)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삿 1:1)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민족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 제단을 허용했습니다.(삿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민족들을 남겨두어 이스라엘에 가시와 올무가 되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김이란 곳에서 매우 크게 웁니다. 이들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이 세대들은 살아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섬겼지만, 출애굽과 광야시절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능력과 말씀들을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는 더 큰 죄악들로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보김에서 '행위'적으로 회개했던 것을 조심하고 또한 다음 세대에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반복해서 죄를 짓는 이스라엘과 사사들(2:11~3:31)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격적으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우상을 섬기며 악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민족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큰 고통속에 '부르짖고'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에 질리도록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지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있습니다. 사사가 있을 동안은 하나님이 지켜주시지만, 사사가 죽은 이후엔 언제나 '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같은 죄가 아니라 언제나 '더 큰 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바람을 폈습니다. 그런데 바람난 그 여자가 하필 꽃뱀이었던 겁니다. 지갑만 탈탈 털린 남편이 돌아와선, 역시 당신밖에 없다며 다신 안그러겠다고 울며 매달립니다. 아량 넓은 아내는 남편을 용서해주고 다시 받아줍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다시 바람을 피는 것입니다! 이 바람은 첫번째 바람보다 훨씬 나쁜 것(그 수위와는 관계없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짓을 열번이 넘게 반복합니다. 혹시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초의 사사는 갈렙의 조카였던 옷니엘이었고 다음 사사는 에훗과 삼갈입니다. 그런데 옷니엘과 에훗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사들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사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약함'에 있다는 점입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고 삼갈은 소모는 목동이었지요. 이후에 나오는 사사들 역시 대부분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심으로, 모든 능력과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나타내시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여선지자 드보라(삿 4:1~3:31)
21세기 우이제일교회에 프론티어와 달리 구약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인구 조사를 할때 보면 여자들은 숫자로 치지도 않았을 정도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못지 않은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고 남자의 권한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사사로 세워 구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여성'인 드보라를 사사로 택하신 것은 남성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심과 동시에, (당시 문화배경상 천대받던) 여자조차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를 나타내려 함입니다.
너무나 무력했던 남성 중심에 이스라엘을 대표하던 존재가 바로 '바락'입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바락과 함께 전쟁에 나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남자인 바락은 여자인 드보라에게 의지하며, 오직 네가 함께 가야만 자신도 가겠다며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와 한판 붙게 됩니다. 가나안은 철병거 900대를 소유한 강한 군대였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은 드보라와 바락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패배한 가나안의 총독 시스라는 자기 민족과 가까웠던 헤셀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시스라는 한 나라에 총독에 오를정도의 인물로 분명 인간 관계에 능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을만하고 안전한 집으로 피신한 것이지요. 그런데 뜬금없이 여자인 야엘에게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야엘이 왜 그랬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적어도 분명한건 가나안 군대가 두 여성에게 대패했다는 것입니다.
전정에 승리한 드보라와 바락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들이 전쟁에서 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4.심약한 사람 기드온(삿 6:1~8:35)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에 압제하에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므낫세 지파 중에 작은 집안에 가장 작은 자라고 소개할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함께 할 것이기에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그 거대한 미디안을 무찌를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표징을 구했지요. 그것은 일종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고기와 무교명 그리고 국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사자가 시키는데로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에 올리고 국을 그 위에 부었습니다. 하나님에 사자는 지팡이로 바위 위를 가르켰고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바위에서 불이 솟을 것이라면 왜 굳이 지팡이로 제물을 가르켰을까요? (잠시 뒤 확인해봅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기드온에게 여호와에 영이 임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하나님에게 두 차례에 걸쳐 징표를 다시 구합니다. 한번은 양털에만 이슬이 있게 함이고, 두번째는 양털은 마르고 땅에만 이슬이 있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기드온의 청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전쟁 준비가 일단락 되었습니다. 기드온에겐 3만 2천명에 군사가, 미디안은 13만 5천에 군사가 있었지요. 양으로나 질적으로나 미디안이 철저하게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병사가 많다고 돌려 보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혹시 이스라엘이 3만여명의 병력으로 승리할 경우 스스로 자신을 구원했다고 교만해질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300명의 병력으로 이긴다면 도저히 자신들이 이겼다고 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엔 기드온과 300명에 병력, 그리고 손에는 무기 대신 나팔과 횃불이 담긴 항아리가 들려 있습니다. 어둠 위로 적막이 깔리자 세 부대로 나뉜 기드온의 군대는 야습을 감행합니다. 그들의 전략은 단지 목소리와 나팔을 이용한 승리의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결국 기드온과 300용사는 13만 5천에 미디안 군대를 무찌릅니다.
다시 앞으로 가서, 바위 위에 올려둔 제물과 그것을 가르킨 지팡이를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지팡이가 상징하는 것은 기드온이고 바위를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반석이신 예수님)입니다. 지팡이가 바위에 제물을 가르킨 것처럼, 기드온은 철저한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디안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러나 불이 지팡이(기드온)가 아니라 바위(하나님)에서 나온 것처럼, 미디안을 무찌른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지팡이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갈뿐이고 그것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성취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지요.
기드온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것을 거부하지요. 대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릅니다. 미디안에게서 빼앗은 초승달(이슬람 상징) 금 귀고리로 에봇(제사장의 의복)을 만들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과도한 결혼(?)으로 많은 아내와 자식을 둔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5. 아비멜렉의 최후 (삿 9:1~9:57)
기드온은 슬하에는 70명에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아비멜렉은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을 선동해 자신의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전부 죽이게 됩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 요담은 도망치며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저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이에 분열의 영을 보내셔서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특별히 가알이라는 사람이 세겜과 더불어 아비멜렉에 대항합니다. 아비멜렉은 부하인 스불과 함께 가알과 대적하게 되지요. 여기서 왠지 가알이 아비멜렉과 스불을 무찌를것처럼 굴더니, 어이없게 패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 화만 돋구게 되지요.
세겜사람에게 분노한 아비멜렉은 철저하게 보복합니다. 성에 불을 질러서 그 안에 사람들을 몽땅 진멸할 정도로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아비멜렉은 갑자기 한 아낙네게 던진 멧돌에 머리가 깨져 죽어가게 됩니다. 여인에 손에 죽기 싫다고 부하에게 죽임을 명령하긴 했지만 실상 이름없는 여자에게 비참하게 죽게된 것입니다. 결국 요담을 통한 하나님의 저주가 실현된 것입니다.
6. 단순한 입다(삿 11:1~12:7)
길르앗 사람 입다는 매우 힘이 강한(might)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생의 아들이라는 출신때문인지 그의 형제들에게 쫓겨 돕 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잡류(불량배)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암몬자손에 위협에 휩쌓여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와 순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잠깐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척을 하더니 다시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것은 길르앗 장로들이 모여 세력을 지닌 입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지요. 입다는 장로들의 제안을 수긍하고 이스라엘에 장관이 됩니다.
입다는 일단 열심있는 순박한 믿음의 소유자로 보여집니다.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그대로 하나님에게 말씀드리는 순수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입다에겐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에게 서원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전쟁에 이기게 해주시면 집에 돌아올때 처음으로 반기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당시 이방종교의 풍습이었고 모세의 율법에는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가 저러한 서원을 했다는 것은 율법에 무지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결국 입다는 암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자신의 서원탓에 자신을 반기던 딸을 번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입다의 서원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신앙에는 열심과 지혜가 함께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옙4:13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신앙은 단지 믿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에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맹세하는 것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일방적으로)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성취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 죽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사건이 이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맹세를 지키고자 아들까지 주시는 그 엄청난 무게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 역시 맹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맹세하는 것을 조심하고 다만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을 그르다(마 5:37)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에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7. 자신만을 위했던 삼손 (삿 13:1~16:31)
다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사용해 징계하십니다. 동시에 그들을 구원할 새로운 사사를 준비시키십니다. 단 지파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노아와 그 부인을 통해 삼손을 주신 것이지요.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철저하게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이 지켜야할 규약이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둘째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셋째 부정한 것(특히 시체)를 만지지 않는다. 이 세가지 규약엔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나실인은 술이 아니라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엡 5:18)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복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전 11장을 보면 남자는 머리(hair)를 짧게 자르고 여자는 머리를 기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머리(head)는 지배권과 책임권을 상징힙니다. 여자가 '머리카락'을 길러 '머리'를 가리는 것은 자신에게 지배권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남자들이 머리를 (귀 위로)짧게 자르는 것은 자신에게 지배권과 동시에 공동체를 책임질 의무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엡 5장 22~28절을 보면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줌같이 대하고,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하듯 순종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나실인이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체를 만지지 않음은 죄에서 떠남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아래 건장하게 성장한 삼손은 성령에 지혜에 따라 블레셋 여인과 위장혼인을 하려 합니다. 위장혼인 자리에서 블레셋을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조금씩 일이 틀어지게 됩니다. 삼손이 막상 그 블레셋 여인을 '보자'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죽였던 사자의 시체에 꿀이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퍼서 먹게 됩니다. 여기서 삼손은 시체에 손을 대지 말라는 나실인의 규율을 어기게 됩니다.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식에서 삼손은 하나의 수수께끼를 냅니다. (분명 삼손은 결혼식 중에 술을 마셨을 것입니다. 두번째 규율을 어기게된 것이지요.)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는데 그것들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 수수께끼에 답은 앞서 삼손이 죽였던 사자와 그 사자에 시체에서 나온 꿀입니다. 이 문제를 잘 살펴보면 결국 자기 자랑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 주민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자 삼손에 아내를 협박해 답을 얻어냅니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삼손은 아스글론의 블레셋 주민들을 죽이고 노략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면 죄에 이르는 길을 설명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 온 것이라" 아담과 하와도 같은 경로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삼손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삼손은 먼저 블레셋 여인을 보았고, 사자 시체에서 꿀을 먹었으며, 결혼식 자리에서 자기 자랑을 하다 개인적인 복수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보는 것과 먹는 것 그리고 자랑하려는 세상적 욕망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온전케하실 예수를 바라보고 참떡이신 그분을 먹으며 십자가의 사랑만으로 자랑해야할 것입니다.
삼손의 개인적인 복수는 올바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블레셋을 무찌르는데 사용하십니다. 블레셋은 삼손에게 복수하고자 삼손의 아내와 그 집을 몰살합니다. 삼손은 다시 이를 복수하고자 낙귀의 새 턱뼈를 들고 천명을 쓰러뜨립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셈입니다.
삼손은 굉장히 정욕적인 사람인듯 보입니다. 일단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특별히 여자 문제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사로 한참 있을때, 그는 평생 있지 못할 들릴라라는 블레셋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삼손과 원수지간인 블레셋은 들릴라를 통해 삼손의 약점을 캐내려 합니다. 삼손은 몇 차례 들릴라를 속이지만, 결국 자신의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에 있음을 밝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로 삼손의 긴 머리카락이 그의 능력의 근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나실인으로의 구율이 그의 힘의 근원이었다면, 그가 한참전에 시체에 손을 대고 술을 마셨을때 힘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삼손이 가진 힘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나실인이 지켜야할 형식적인 규율이 힘의 근원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삼손처럼 우리가 어떤 규칙을 지키고 노력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는지요. 그러나 '오직 은혜'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힘을 모두 빼앗긴 삼손은 눈알이 뽑힌채 블레셋 사람들에 노리개로 전락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수였던 삼손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자 많은 블레셋 지도자들과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그곳에서 삼손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삿 16:28) 결국 삼손은 최후의 힘을 발휘해 건물의 기둥을 무너뜨려 삼천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입니다.
삼손의 삶과 그의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면 전부 '나'밖에 없습니다. 사사의 역할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사들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등장했던 사사들은 모두 어딘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임하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평안케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태어나기전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고 어떤 사사보다 강한 능력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만을 했을뿐 이스라엘을 구원하지도 평안케 하지도 못했습니다.
삼손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법이나 규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삼손처럼 구별된 우리들은 자신의 삶과 신앙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특별히 연약하고 작은 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8. 세상의 소망을 둔 사람들 (17:1~18:31)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는 어머니의 은 천백을 훔쳤다가 훔친 자를 저주하는 것을 듣고는 다시 어머니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은신상을 만들어 여호와에게 드리겠다고 합니다.(삿 17:3) 그리고 미가는 자신이 소유한 신당(예배당)에 온갖 종교적 우상을 만들어 놓고는 은신상은 자신에 집에 둡니다.
이때에 한 레위인이 "자신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삿 17:7) 돌아다니다 미가에 집에 도착합니다.여기서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의 일부를 기업으로 받은 것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로 종교 의례를 담당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종교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미가는 자신의 거류할 곳을 찾는 레위인을 자기 신당의 제사장으로 스카웃합니다. 그리곤 드디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또한 당시 단지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주할 기업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라이스 지역을 정탐하러 가던 중에 미가에 신당에 있는 레위 제사장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요. 레위 제사장은 이들에게 거짓된 축복을 해줍니다. 이 축복이 거짓된 이유가 있습니다. 단 지파는 그들이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고(삿 18:1)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단 지파는 유다 지파 서북쪽 땅을 이미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여호수아 19:40) 만약 레위 제사장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면 그들에게 애초에 주어진 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복하라고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레위인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짝퉁이었기에 허튼 축복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단 지파의 정탐꾼은 라이스란 지역을 정복할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동료들을 데리고 라이스를 정복하려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 와중에 미가의 신당에 있는 모든 종교 물품들 그리고 미가의 집에서 은신상을 훔쳐 나옵니다. 그리곤 레위 제사장에게 자신들의 지파의 제사장이 되라고 권유합니다. 이 의리없고 줏대없는 제사장은 기쁘게 그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떠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소망을 빼앗긴 미가는 단 지파를 쫓아가 따지지만 그들이 자신보다 강한 것을 알고 슬퍼하며 돌아오게 됩니다.
단 지파의 군사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대신 평화로운 라이스를 침략하고 빼앗습니다. 그리곤 그곳에 은신상을 자기들을 위해 세워 놉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삿 18:31)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던 실로에 동시에 우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마음에 하나님과 함께 우상이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소망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미가는 자신의 집에 은신상을 두었고(삿 17:4) 레위인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할 곳을 찾았으며(삿 17:9) 단 지파는 하나님이 허락한 땅 대신 자기들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리(삿 18:1)를 찾았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미가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잃어버렸고, 레위인은 자신의 유일한 기업인 하나님을 얻을 수 없었으며 단지파는 이후에 회복될 이스라엘에 12지파에서 빠지게 됩니다.(요계 7장) 우리는 이들의 실패를 교훈삼아 사라질 세상이 아닌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 5:2)
9.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때에 (삿 19:1~21:25)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그때에, 어떤 레위인이 간음한 후에 자기를 떠난 첩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결국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기브아 지역을 여행하던 중에 날이 어두어져 머물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때에 한 노인이 이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렇게 레위인 일행이 노인에 집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베냐민 지파에 불량배들이 쳐들어와서 레위인과의 남색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들에 강압에 못이긴 레위인은 결국 자신의 첩을 대신 내놓게 되고, 첩은 능욕당한 뒤 죽게 됩니다.
분노한 레위인은 자신의 첩의 시체를 12덩이로 잘라 이스라엘 각 지파로 보냅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스라엘 지파는 분노하여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됩니다.(삿 20:1) 그런데 이들의 행동에서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 앞에 모였다고 해놓곤 자신들이 모든 것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삿 20:7) 겉으론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감정대로 복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11지파는 자신의 형제인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병력의 수는 이스라엘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처음 두번 전쟁에서 이들이 패배하게 됩니다. 두번의 패배를 겪은 11지파 연합군은 하나님께 생떼를 씁니다. 벧엘에서 울고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이지요.(삿 20:26) 세번째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11지파 연합군에 손을 들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11지파는 베냐민 자손에게 돌아가 매우 잔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복수를 성취하고 맙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의 원대로 복수를 하고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에게 딸들을 주지 않기로 자기들 '혼자'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에 대가 끊어지게 생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서로가 보완적이고 유기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한 지파의 생사가 이스라엘 전체에 존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들의 뜻대로 복수를 행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를 멸망시켰다고 생떼를 쓰더니, 갑자기 다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곤 다시 자기들의 지혜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 방법은 정말로 추악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주민을 몰살하고 처녀들을 빼앗아 베냐민 지파에게 준 것과, 베냐민 지파에게 실로에 참여하는 처녀들을 납치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전체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레위인은 멀쩡한 자기 부인을 놔두고 간음한 첩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목숨이 위험하자 첩을 죽도록 방치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상급이지만 다른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한 것도 모잘라, 그것에 배신을 당해도 그것을 다시 구하지 않습니까? 또한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철저히 자기 방식대로 처리합니다.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울고 제단을 쌓으며 종교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능력만을 뽑아먹으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안위에 문제(베냐민 지파가 사라져 자신들도 위험해지는)가 생기자 추악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레위인도 이스라엘 11지파도 심지어 베냐민 지파도 각자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 싸움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성경 기자는 사사기의 이 이야기의 시작과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우리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샬롬!
유익한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