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무사 276 최후의 조각
핏핏!
새처럼 신형을 뽑아 올리며 길을 재촉하던 북궁단야가 어거지로 따
르는 장추삼을 돌아보고 뭐라고 하려다 와락 인상을 구기며 가슴 깊이
에서 나오는 답답함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놈이건만 어떻게 신법 쪽
으로 가면 티끌만큼의 발전을 보이지 않는 건가.
다행히 척석평과 시전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이들은 시전
을 지나쳐 거지노인이 사라졌던 골목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우뚝 걸음을 멈춰야 했
다.
"이런!"
달리던 하운이 주먹을 꾹 쥐었다.
"저게 뭐야!"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이미 북궁단야는 대붕처럼 몸을 띄
우고 있었다.
'젠장, 젠장!'
상대는 자신들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대로 자신들은 상대를
의식조차 하지 못했고. 빌어먹을 비무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을.
"여기 문제만 틀어져 봐. 내 무림맹에 책임을 물을 테니!"
북궁노백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며 장추삼이 으르렁댔다. 실로 가소
로운 순간이지만 마음 놓고 웃지 못할 상황이라는 게 마음이 아파 걸음
을 재촉하며 탄식을 터뜨렸다.
장추삼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기에.
비록 십장생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책임은 피할 수 없겠지
만 무림맹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힘들어지지
는 않았을 터.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성현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매정방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길모퉁이를 돌자 급하게 불을 끄는 시전 상인들의 분주한 모습이 들
어왔다. 그러나 교묘하게 막혀 있던 골목의 집들은 시커먼 연기로 뒤
덮인 상태.
"느... 늦었나!"
북궁단야가 이를 악물었다. 뒤따라 들어온 하운과 장추삼도 이 처
참한 사태에 넋을 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으드득 ㅡ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 이를 갈아붙이던 장추삼이 아무에게나 물
동이 하나를 빼앗아 들고 화마가 일렁이는 현장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씨앙! 이들에게 뭔 죄가 있다고!"
물을 뿌리는 장추삼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우는 거지노인이 피신해 있던 이곳은 물론 개방의 인물들이 다수였
겠지만 시전에는 비루먹는 그냥 거지들도 많았다. 또한 병이나 기타
의 이유로 숨어 사는 사람들도.
실화(失火)는 아니었다. 화재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 서로
를 의지한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부상자들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공포가 가득 차 있었으니까.
비루한 행색과 언제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 땅바닥으로 처박은 머리들.
"물을, 물을 더 가져와요!"
고함을 지르며 바삐 뛰어다니는 장추삼에 동화되어 사람들의 손발
이 더욱 바빠졌지만 휘발성의 무엇을 이용한 방화였는지 불길은 좀처
럼 잡히지 않았다.
장추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물으 퍼 나르던 북궁단야가 이를 질
끈 물었다. 이대로라면 빈민촌은 완전히 전소되고서나 불이 꺼질
판이었다.
태울 것을 다 태우고 잡아서야 소화(消火)의 의미가 없다!
문득 고개를 돌린 그가 시전으로 급히 달려갔다 돌아왔다.
"여길 잡아라!"
북궁단야는 두꺼운 옷감 두루마리의 끝을 장추삼에게 내밀었다. 순
간 멈칫했던 장추삼도 북궁단야의 의도를 파악하고 두루마리의 끝을
잡아 힘껏 늘였다.
펄~ 럭!
양팔을 벌리고 두루마리를 펴자 그들 사이엔 반경 삼 장 정도가 덮
여질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옷감이 펼쳐졌다.
"물을!"
뭘 하려는지 몰라 하던 사람들도 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거대한 천
조각에 골고루 물을 뿌렸다. 이렇게 되자 천의 무게는 상당한 것이
되었지만 두 사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장사들일세!"
상인 하나가 감탄하며 장추삼의 머리에 물을 한 동이 뿌렸다. 그러
자 북궁단야 편의 사람들도 그에게 물을 뿌렸다.
"셋에 간다!"
"음!"
북궁단야의 외침에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게 환자 사이를 오가던 하운이 둘의 행동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
다. 이런 식의 방화라면 산소 자체를 차단하는 소화법이 가장 효과적
이니까.
물론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 둘, 셋!"
파박!
북궁단야의 짓에 따라 몸을 날린 그들이 허공에서 거대한 막을 펼
쳐 내며 화마의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털퍼덕!
맹렬히 타오르던 불꽃이 숨을 죽이고 기분 나쁜 연기를 발산하며 마
지막 발악을 감행했으나 이들은 천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물론 말할 수 없이 뜨겁고 숨이 막혔지만 장추삼과 북궁단야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 와중에도 장추삼은 뭔가를 계속 궁시렁거렸다.
"제길, 이게 무슨 짓거리야! 이게 정의라고! 개가 웃겠다! 지나가
는 똥개도 웃겠다고!"
그렇게 두세 번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 사람들도 불어나 겨우 불길을
잡았으나 화마가 쓸고 간 자리의 참혹함에 장추삼과 북궁단야는 보람
보다 서글픔을 느껴야 했다.
사람들의 웅성임과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피어나는 검은 연기, 그
리고 세상의 온갖 치부를 드러내듯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펄럭이는 연
매(煉煤)들.
땀과 그을음에 얼룩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던 북궁단야가 여벌로
남겨둔 수건 하나를 장추삼에게 내밀었으나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해보자는 거지. 그래, 제대로 해보자고. 이번에는 아예 끝장을
낼 테니까."
"얼굴이나 닦아라."
북궁단야의 손에서 낚아채듯 손수건을 집어 든 장추삼이 벅벅 얼굴
을 문질렀다. 뭔가 더럽고 추한 것이 덕지덕지 묻은 것처럼.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의 손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건 땀일까, 눈물일까.
냉정한 눈으로 잿더미를 쓸어보던 북궁단야가 혀를 찼다. 뭘 어떻
게 사용한 발화인지 몰라도 사고 현장은 완전히 연소되어 뭐가 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관원이다!"
늘 그렇지만 사건이 종결되고서야 출동하는 관원들을 보고 사람들
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원하고 얽혀서 좋은
모습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허탈한 세 명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관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남아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잿더미의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사체가 가라앉아 있을까.
그나마 마련한 집을 한순간에 잃은 사람들은 올 겨울을 어디서 보내
야 할까.
수많은 걱정을 뒤로할 수 없는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던 장추삼
이 문득 탄식을 터뜨렸다. 너무나 사실적인 한숨이라 균현이 다 떠내
려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기에 옆에서 듣는 하운과 북궁
단야의 마음도 따라서 어두워졌다.
시전의 작은 찻집에 앉을 때까지 그렇게 침묵 속으로 몸을 맡긴 그
들이었지만 주문받으러 온 점소이 아이의 겁먹은 눈동자만은 외면하지
못했다.
"아무거나 시원한 차면 좋네."
북궁단야가 간단히 주문하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지만 하운과 장
추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호되게 뒤통수를 맞아버렸는걸."
냉차를 단숨에 들이키고 소리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북궁단야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턱을 받치고 멍하니 밖을 쳐다보던 장추삼과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고심하던 하운도 이 말에는 동의를 표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비록 천하제일을 두고 벌인 비무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추삼과 유소
추의 대결은 이야깃거리로 충분했다. 그리고 열흘이라는 시간이 주어
졌으니 중원 천지로 소문이 퍼졌을 것은 명약관화.
강남의 남궁선유나 떠돌이 박옹에게까지 전달되었을 판이니.
문제는 그 이면을 계산하지 못했다는 거다. 장추삼과 유소추가 한
판 벌인다고 했을 때 승부에 촉각을 세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의 행보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도 있을 거라는 가정을 왜 하지 못했
을까.
"그들은 우리의 행보에서 뭔가 단서를 발견하려고 했던 거요. 하
지만 저런 곳까지 찾아낼 줄은."
하운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찌 보면 급소를 찔렸다고 할까.
그토록 어렵게 찾아낸 단서였는데 그들은 너무도 쉽게 발견하고 막아
버린 거다.
"당연히 찾아낼 수 있었겠지."
북궁단야가 하운의 말을 간단히 부정해 버렸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하운에게서 눈을 돌린 북궁단야가 한숨을 내쉬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균현에 온 지 열흘이 넘었지만 실질적으로 행동한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오?"
북궁단야의 질문에 하운이 머리를 툭 두드렸다.
맞는 말이다. 열흘이라면 균현 전체를 들쑤시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돌아다닌 건 비무첩을 받기 전, 단 세 시진에 불과
하다.
한마디로 탐문만으로도 이들의 행동 반경은 잡힐 정도로 작았고, 이
들이 객방에서 열흘간 처박혀 있을 동안 상대방은 마음껏 정보을 수집
했을 터였다.
"눈뜨고 당했군."
하운이 허허롭게 웃었다. 너무 어이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는 얼굴
로.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장추삼이 힘없이 뇌까렸다.
"거기 울보노인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너무하
지 않아? 그 빌어먹을 인간은 강호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죽
였다고. 그런데 사건 타령이라니."
장추삼의 슬픈 넋두리에 하운의 얼굴이 벌게졌다. 사건에 눈이 어두
워 현장의 아픔을 외면하려 한 자신이 부끄러웠을까.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단 낫지."
"뭐야!"
북궁단야의 냉소에 장추삼이 벌떡 일어섰다. 역시 재수없는 인간은
어딜 가도 티가 난다.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렇게 계산적으로 자기 할 일만 생각하고 찾
아다닌다면 어찌 사람이고, 어찌 인간이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지!"
"멍청한 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추삼을 외면하며 북궁단야가 코웃음을 쳤
다.
"네 녀석처럼 감정의 바다에 빠져 아둥바둥거릴 시간이 있으면 차라
리 사건의 해결에 힘을 쏟는 편이 낫다는 거다, 한심한 녀석아."
"누가 한심해!"
거의 발광하기 직전인 장추삼을 무시하듯 다시 한 잔 냉차를 따른
북궁단야가 고개를 앞으로 죽 내밀어 장추삼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네가 이러는 동안에도 비천혈서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을 거
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대를 이어서까지 이런 악순환은 반복될
거란 말이다. 한탄하고 슬퍼한다고 지난 시간이 돌아오나? 죽은 사람
이 살아날 거라고 믿는 거야?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넌 계속 그렇게
살아라."
"으으........"
얄밉도록 정확한 말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재수가 없다.
꽝!
탁자를 부술 양으로 내려친 장추삼이 의자에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식식거렸다.
"이렇게 되면 개봉으로까지 가야 하는 건가."
"글쎄, 이제는 뭘 어찌해야 할지......."
하운과 북궁단야가 고심하는데 장추삼이 다시 일어섰다. 역시 엉덩
이가 가벼운 녀석이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떡이 나와, 감이 나와! 숙소로 돌아가자고, 배도
고프고 잠도 오는구먼."
"음."
생각해 보니 배고 고파서 북궁단야가 동의했다. 이른 아침 외에는
먹은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음."
생각해 보니 졸려서 하운이 동의했다. 비무가 결정된 열흘 전부터
매일 새벽까지 장추삼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더니 수면 부족으로 눈가
가 다 시꺼멓다.
찻집을 나와 골목에 접어들려던 그들의 앞을 무언가가 불쑥 막아섰
다.
"어?"
그것은 작은 가판이었는데 왠지 눈에 익은 것이라 장추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탕 좀 팔아주세요."
"아니, 아줌마는 어딜 가고 어린애가 탕 장사야?"
열흘 전에 맛나게 먹었던 개방식의 탕을 팔던 가판대. 그런데 상인
이 바뀌었다. 오십대 아주머니가 직접 끓여서 팔았었는데 지금은 십여
세의 소녀가 아닌가?
"이런 경우가! 이건 말도 안 돼!"
아동은 보호받아야 한다! 노동이나 기타의 수단으로 착취되어서는
안 된다!
장추삼의 빛나는 아동 사랑이 입으로 구현되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북궁단야가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어 불쑥 돈을 치렀다.
뭔 잡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건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구매자이거
늘.
"옛다. 세 그릇 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코가 가판에 닿을 만큼 고개를 숙인 소녀가 탕을 휘휘 저어 서툰 국
자질로 탕을 담아냈다. 그 고소한 냄새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지만 아이 앞이니 헛기침으로 체면을 지켰다.
"자자, 시장한데 한 그릇씩 들자고! 요기에는 탕만큼 좋은 게 없거
든!"
물건값을 치른 이가 뭐라고도 하기 전에 생색내기 좋아하는 인간이
툭 튀어나와 주절거렸다. 웬만한 얼굴 두께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뻔뻔
함이었지만 장추삼이라는 인간의 특성상 이 정도는 그야말로 기본적인
일이었다.
후루룩ㅡ
말을 꺼내기 무섭게 탕을 밀어 넣는 장추삼의 기세는 거의 폭풍이었
고 솔솔 피어나는 냄새에 처음부터 회가 동했던 북궁단야도 약간의 점
잔을 빼다 곧 탕 그릇에 머리를 박는 형국이 되었다.
후루룩ㅡ
후룩ㅡ 후룩ㅡ
미친 듯이 탕을 퍼 넣는 둘과 달리 하운은 망연한 얼굴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입이 터져 나갈 것처럼 음식물을 우걱우걱 씹으며 입가를
파들파들 떨던 장추삼의 볼에 흐르는 눈물이 너무도 인간적이었기에.
"씨앙! 이 좋은 걸 남겨두고 죽긴 왜 죽어!"
"아, 무지하게 맛나네! 한 그릇 더 다오! 내 아주 탕으로 배를 채
워 버릴 테다!"
눈물 훔치랴, 중얼거리랴, 음식 씹으랴, 다시 숟가락질하랴, 그야말
로 장추삼은 바빴다. 그래서 소녀의 이채로운 표정을 인식하지 못했는
지도.
한동안 장추삼을 보고만 있던 하운도 씁쓸한 얼굴로 수저를 쥐었다.
"어린 소저가 수고......!"
인사말을 건네려 소녀를 바라보던 하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국자
로 탕을 저으며 장추삼들을 바라보는 소녀의 표정, 뭔가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탕 한 수저를 떠서 입에 가져가며 하운이 소녀의 눈동자를, 그 이면
의 무엇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분노, 초조, 안도, 그리고, 그리
고....
[장 형, 북궁 형!]
하운의 전음에 탕과의 전쟁을 벌이던 두 사내가 뚝 숟가락질을 멈췄
다. 강호상에 유래없는 쌍방향 전음이었지만 장추삼과 북궁단야로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고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하운의 양의문은 이제 최고 수준이었으니까.
잠시 멈칫하던 장추삼과 북궁단야가 다시 탕과의 전면전을 벌이려
고개를 처박았다. 하운의 전음을 무시하는 걸까?
그러나 둘은 눈을 감고 뭔가를 헤아린 후 서로를 마주 보고는 씨익
웃었다.
'하나, 둘.......'
파박!
탕 그릇을 내던지며 장추삼이 앞으로 튀어나가고 북궁단야가 뒤로
신형을 죽 끌 듯 밀려나다 허공에서 비룡번신의 수법으로 몸을 뒤집으
며 칼을 빼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느새 아이를 감싸며 하운도 칼을 빼 들었다.
이 갑작스럽고도 조화로운 돌격에 혼이 빠진 은잠자들이 흠칫해서
몸을 빼려고 했지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장추삼의 주먹을 피하기란 역
부족이었다.
퍽!
"쿠엑!"
뻥!
"커헉!"
전방에 숨어 있던 둘에게 아낌없는 육보시를 베풀고 빙글 몸을 돌린
장추삼의 눈에 검수로 후방의 한 명을 기절시키고 다른 한 명의 목젖
에 칼을 겨눈 북궁단야가 들어왔다.
"이놈!"
후다닥 달려든 장추삼이 북궁단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력한 한
방으로 은잠자를 어루만져 주었다.
쿠당!
그렇게 네 명을 잠재운 두 사람이 하운의 보호 아래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에게로 다가섰다.
생각해 보니 가판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다. 가판의 특성상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이 난 곳과 이곳의 거리는 차이가 나도
한참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곳은 태평로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다! 저 아저씨들은 귀신장수들도 쫓아 보낼
사람들이거든."
하운이 무릎을 굽혀 소녀의 눈을 말끔히 들여다보며 머리를 쓰다듬
어 주었다.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장추삼과 북궁단야가 둘
의 전후를 막아섰고.
"음."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도 나름대로 의연하려고 턱을 잡아 뺀 소녀가
고개를 들어 철탑처럼 버티고 선 장추삼의 바짓가랑이를 짤짤 흔들었
다.
"어?"
긴장하던 차였기에 소녀의 부름에 약간 놀란 장추삼이 고개를 돌렸
다.
"왜?"
"대협이 괴성이신가요?"
대협이라... 일반 소녀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북궁단야와
하운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지만 물정 모르는 장추삼이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대협은 무슨! 오빠다, 오빠!"
"그러니까 장 대협 본인이 맞다는 말씀이시로군요."
".......!"
다소 떨림이 있었지만 아이에 어울리지 않는 관록이 엿보이는 말투.
그제야 장추삼도 이 소녀가 단순히 시전 빈민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곡팔개(哭八개) 장로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개방의 소취
(蘇翠翠)라고 합니다."
'음!'
세 청년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역시 천년 개방. 이렇게라도 명맥을
잇고 있었던 거다.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여기저기 싹을 틔워놓
고 있었다.
"그래, 소 소저,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지?"
곡팔개라면 아마도 사당의 우는 노인을 일컬음이리라. 그런데 팔개
라고 한다면 개방의 팔결제자를 일컬음이 아닌가. 구결을 맺는 방주
다음으로 높은 위치라는 의미라는 건 일반인들도 아는 것이지만 실질
적으로 장로 급이 아니면 맺을 수 없는 매듭 수가 팔결이라는 건 구파
에 정통한 이나 아는 사실이다.
"소 소저?"
하운의 계속된 물음에도 소취취는 장추삼만을 바라보았다. 아니, 노
골적으로 하운을 무시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 정도의 눈
치 정도는 알아채고 하운이 입을 다물었다.
그저 장추삼이 미더워서라면 좀 지나친 감이 있는 면박이지만.
"아아... 이놈의 인기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장추삼이 헤벌쭉 웃었다. 그에
소취취도 풉, 웃음을 터뜨렸고 북궁단야는 속이 매우 불편해졌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그래그래, 이 장추삼이에게 무슨 볼일이신가? 우는 노인네가 뭐라
고 하던가?"
"곡팔개 장로님이라니까요!"
소취취가 꽥 고함을 지르자 장추삼이 귀를 틀어막으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저맘때의 여아들이 지르는 소리, 거의 음공 수준이 아니겠
는가.
"아아, 내가 잘못 말했네. 정말로 잘못했어. 곡 장로님께서 무슨
말이라도 남기셨나?"
그제야 치켜뜬 눈을 거둔 소취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얼마 전부터 곡 장로님께서는 심히 불안해하셨지요. 그나마 남은
터전까지 뺏기는 게 아니냐고요. 그리고... 그저께 어디론가 떠나가셨
답니다."
"이런!"
"늦었다는 건가!"
세 청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정적인 열쇠를 가진 이가 사라져
버렸다니. 그런데 장추삼은 환호작약 박수까지 치며 좋아라 했다.
"좋아, 좋아! 노인네가 도망갔단 말이지! 기막힌 선택이었어! 여
기 온 인간의 급수를 어림잡아 본다면 줄행랑이 상책이거든!"
"줄행랑이 아니라 피신이라니까요!"
그거나, 그거나, 하고 코를 후비던 장추삼이 울먹이는 소취취를 보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여자는 애든 어른이든 우는 모습을 보기 싫으니
까.
"맞아, 피신이지! 암! 전략적 후퇴라고, 전략적 후퇴. 오, 이거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멋진 것 같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장추삼을 다소 어이없는 눈으로 보던 소취
취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정신 사나운 인간임에
틀림없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에 모가 나서 그렇지 이들 가운데 그나마 장로님의 안위를 걱정
한 사람은 괴성 하나로구나. 곡 장로님 말마따나 강호인이라고 보기
어려워.'
피신이니 전략적 후퇴니 어쩌고 떠드는 둘을 보며 하운이 다시 한
번 자책을 했다. 무림맹과의 마찰 때문인지 몰라도 자꾸만 사건의 해
결에 집착하여 전후의 사정을 돌보지 않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아니면....
'나 역시 비천혈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가.....'
그가 누구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소취취가 부산떠는 장추삼을
이끌고 이디론가 가려고 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해. 내가 멋이 있다는 건 뼈에 각인이 될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나머지......."
"신소리 자꾸 할 거면 더는 말하지 않겠어요. 저라고 시간이 남아돌
아서 이러는 줄 아세요?"
아따, 똑 부러진다.
그러나 장추삼으로서는 아이의 말을 혼자 들을 처지가 아니었다. 뭔
가 비밀을 가지게 된다는 건 그의 성격상 참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그
리고 무엇보다.......
약간 굽혔던 허리를 쭉 펴면서 장추삼이 오히려 한 발 물러나 하운과
북궁단야의 가운데에 섰다.
"만약 나만 들어야 하는 말이라면 차라리 듣지 않을 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동료다, 친구보다 더 소중한 동료란 말이야. 단 하나의 비
밀도 없는, 그런 진짜 동료라는 거지. 그런데 지금 비밀을 만들자고?
그건 안 될 말이야. 네가 얼마나 중요한 말을 할지 모르지만 그냥 안
듣고 말란다."
손을 휘휘 젓고는 장추삼이 몸을 돌렸다.
"자자~ 가자고. 볼일 끝났잖아. 보아하니 피신할 만한 이들은 알아
서 죄 떠난 모양이우. 이 아이도 좌판 걷고 어디든 갈 테고. 이래저래
불쌍한 건 집 잃고 터전까지 들켜서 거리에서조차 내몰릴 빈민들뿐이
지. 이래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제일 싫다니까."
하운과 북궁단야도 멀거니 서 있다 곧 몸을 돌렸다. 무슨 꿍꿍이속
인지 몰라도 장추삼의 행동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고 하도 다니다 보
니 자연스레 손발까지 맞는다.
"흠, 그러고 보니 아까 화재를 피해서 떨고 있던 아이들이 걱정이구
려. 올겨울은 어디서 날지."
하운이 짐짓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하는 짓인가 하던 북
궁단야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뭔가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올여름이 유난히도 더웠지, 길기도 했고. 아마 이번 겨울 역시 춥
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그건 차치하고라도... 짚으로 얼기
설기 엮은 집이라도 나름대로 보금자리였거늘 그조차 빼앗긴 빈민들의
앞날이 걱정이야. 그야말로 지부대인이라도 순시 나온다면 모조리 관
아로 압송될 텐데."
환경미화 때문에, 하며 천연덕스레 반문하는 장추삼에게 고개를 끄
덕이던 북궁단야가 순간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언제 이놈하고 이리 쿵짝이 잘 맞게 되었단 말인가!
'근묵자흑(近墨者黑)이다, 근묵자흑.......'
그렇게 주절거리면서도 그들의 발길은 급하지 않았다. 아니, 급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화답은 그리 늦지 않게 도달했다. 뭐, 늦으면
늦는 만큼 발길을 늦출 용의도 있었지만.
"그건, 그건......."
뒤에서 우두커니 이들의 말을 듣던 소취취가 울먹거리다 끝내 울음
을 터뜨렸다.
"그건 어쩔 될가 없었다고요! 저희라고 지푸라기촌 아저씨 아줌마
들을 외면하고 싶었겠어요! 그렇지만 상대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들
이었어요! 차라리 저희가 떠나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
에요!"
이때 장추삼이 홱 돌아섰다, 성난 얼굴로.
"언제까지 도망 다닐 건데?"
"예?"
"언제까지 도망 다닐 거냐고! 그렇게 도망 다니면서 언제까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거냔 말이야! 이 자리를 피하면 당장은 한 몇 달
버티겠지. 그리고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또 그렇게 놀란 토끼마냥 자
리를 옮겨서 시간을 보낼거야. 그러면 돼? 그러면 해결이 나냐고!
이게 무슨 상사병 같은 것도 아닌데,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시간이 해결
해 주냔 말이다!"
문득 하운과 북궁단야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장추삼이 사용하는
단어, 아이와의 대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주 가지가지를 해요, 하고 말을 맺은 장추삼이 간만에 침을 한번
뱉었다. 소싯적에는 기막히게 뻗어나갔던 침 빨인데 오랜만에 하자니
영 어색하다.
"그, 그게, 그러니까요........"
"뭐가 그러니가야! 몇십 년에 걸쳐서 당한 것까지는 알겠지만 아무
리 그래도 그렇지, 어린애 하나 달랑 놔두고 숨어서 뭐 하자는 건데!
그렇게 겁이나면 차라리 개방이라는 간판을 떼던가!"
이제 장추삼은 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대상없는 누군가에게 소리치
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기척을 느끼지 못하여 하운과 북궁단야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요 며칠간 이 심통 맞은 녀석의 내공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천리통(千里通)의 대능력이라도 얻었다는 건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던 하운이 번쩍 눈을 빛냈다.
"이런 거였나....."
멀리서 떡을 팔던 사내가 좌판을 걷기 시작했고, 그 옆에 만사형통
(萬事亨通)이라는 깃발을 쥐고 졸고 있던 점쟁이가 깃대를 내던졌으며,
싸구려 노리개를 팔던 여인네가 좌판에 천을 덮었다.
그렇게 장사를 접은 이들은 무려 다섯. 조용히 좌판을 한구석에 밀
어 넣고는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서서 소리를 지른 장추삼을 똑바로 쏘
아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추삼은 허리에 손까지 척 얹고 오연하게 서 있었다. 가끔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인 소취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여유까지 보
이면서.
모여든 다섯의 남녀가 손짓으로 소취취를 불렀다.
"취취야, 이 길로 떠나려무나. 우리도 곧 뒤따를 것이다."
그들로는 장추삼의 행동이 충분히 강압적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소취
취의 눈물을 불안의 산물로 판단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분해서 덜덜
떨리는 아이의 입술도 역시 장추삼을 향한 것이라고 믿을 상황이었고.
"싫어요!"
"음?"
"뭐?"
장추삼의 옆에 딱 붙어서 소취취가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서 그러나 보구나. 알았다. 그럼 용사 고모와 함께 떠나도
록 하거라."
"그게 아니에요!"
빽 소리를 지른 소취취가 앙증맞은 두 주먹을 바들거리면서 떠듬떠
듬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도망치듯 옮겨 다녀야만 하나요! 언제까지 도
망 다녀야 하냔 말이에요!"
"그, 그건......"
다섯 명 모두 할 말이 없어서 뒷머리를 긁었다.
"얘가 낫네, 얘가 나아."
빈정거리기로 말하자면 천하제일을 다툴 장추삼의 이빨이 번뜩이자
다섯 명의 눈 또한 번뜩였다.
"괴성,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 아닐세."
"제 머리를 못 깎는 중이라면 옆에서라도 거들어야지. 언제까지 긴
머리로 탁발(托鉢)할 수는 없잖아?"
"뭐라고! 그래도 곡팔개 장로님을 보아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어디
까지 망발을 할 셈인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한을 보며 엄지와 중지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
리를 낸 장추삼이 껄껄 웃었다.
"그거야, 그거라고! 그렇게 외치는 거야! 뭐가 그리 무서워서 두더
지마냥 숨어 있는 건데?"
"보자 보자 하니까!"
이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려는데 실실거리던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가를 담으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어조에는 힘과 또
다른 무엇이 짙게 깔린지라 평소의 장추삼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 개방이 얼마나 당했는지, 왜 당했는지 몰라. 그간의 설움
과 고통도 알 도리가 없고! 하지만 당신들이 그렇게 움츠러들어서
득을 보는 이들보다 고통받는 이들이 더 많다는 건 몰랐나? 비단 지
푸라기 빈민촌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보자
고! 당신들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겨진 자들의 허탈은 무엇으로
메워야 하나? 당신들의 몇 달간의 온정이 그들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거야? 예전의 개방이 이랬다고? 모
르긴 몰라도 아닌 걸로 아는데?"
장추삼은 문득 정화진과의 일이 생각났다.
같은 경우였다. 잠시 잠깐의 힘과 능력이 있어서 온정을 베풀었다
는 것에는. 그러나 장추삼은 이후까지도 고려했고,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매일 희멀건 죽이나 먹던, 아니, 그나마도 굶기가 예사였던 빈민들
에게 개방의 탕은 그야말로 은총이었으리라. 그저 비나 피할 정도의
지푸라기 집이지만 그들에겐 그것 또한 훌륭한 주거 공간이었을 터
였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 귀뚜라미처럼 사라진 뒤안길에 홀로 남겨
진 빈민들은 어땠을까.
물론 예전의 개방이라면 이렇지 않았다. 성마다의 지부 말고도 소
도시마다 운영되고 있는 그들만의 보금자리에서 자체적으로 빈민을
돌봤으며 아픔을 같이했었다.
개방의 식구는 그래서 많았던 거다. 자파의 식구들보다 품은 식구
가 더 많아서, 그래서 최고의 방파였던 거다. 비록 딸린 이들이 힘
없고 가진 것 없어도 지켜주고 감싸 안았던 거다.
역시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이 수반되는 걸까. 언제부터
힘이 최고의 덕목이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인간의 근원적인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러우면 일어나! 아니, 붙어서 깨져 보지도 않고 왜 숨어들었는
데! 나 같으면......."
"그만하게."
어디선가 슬픈 울림을 담은 음성이 들렸다.
"젠장, 도망가 있었다면서 말짱 구라네. 아니, 귀도 안 간지러웠소?"
"그래서 왔지 않나."
우는 노인, 곡팔개는 평소처럼 술독에 절어 있지도, 그렇다고 눈물
을 흘리지도 않았다. 위엄이 가득한 얼굴로 표표히 내려선 그가 다섯
명의 남녀에게 눈짓하자 이들은 소취취를 데리고 분분히 흩어졌다.
금선탈각(金蟬脫殼)의 계.
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추적자들의 눈을 속여 버
린 거다. 추적할 대상 자체가 없어졌으니 쫓던 입장으로서 기가 찰 노
릇.
남겨둔 꼬리는 외부인이 처리하면 그만이고.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던 곡팔개에게 장추삼이 빈
정빈정 약을 올렸다. 사실 약 오르는 이는 장추삼들이겠지만.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거요? 내가 알기로 노인장을 찾는 이
들이 꽤 될 텐데."
"자네 같으면 더 이상 숨겠나?"
"허....."
자신이 한 말에 그대로 당한 장추삼이 실실 웃었다. 사내란 모름지
기 이래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되든 안 되든 벌이고 봐야
한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벌이는 것은 반대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음?"
"아닐세,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노부를 좀 따라와 주게."
* * *
"그래, 하고자 하는 말이 뭐요?"
"그 말은 노부가 먼저 해야 할 듯한데?"
태평로를 끼고 있는 작은 산의 공기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장추삼
이 북궁단야가 눈치를 주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곡팔개에게 질문을 던
졌으나 간단한 반문에 말문을 닫아야 했다.
"아... 그런가? 우헤헤."
'뭐가 아, 그런가. 우헤헤헤야, 멍청한 녀석.'
단세포적인 장추삼의 반응에 기가 막혔지만 곡팔개가 장추삼만을 대
화 상대로 인정하는 눈치라 어떻게 나서보지 못하고 북궁단야가 한숨
을 팍팍 내쉬었다.
사정은 하운도 마찬가지, 그 역시 딱히 눈을 두지 못하고 소소히 떨
어지는 태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뭘 알고 싶어서 온 겐가, 소문을 들으니 자네들은 비천혈서와도 관
련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자네들이 찾아오고 난 후에 들이닥친
놈들은 또 누구인가?"
질문이 너무 많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 이상
을 내줘야 하는 법이고 장추삼으로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일들이다.
"거 성격도 급하시네. 하나씩 합시다, 하나씩. 일단 노인장의 터
전을 들쑤신 인물들은 십장생이라는 조직일 가능성이 클 거요. 이제는
맛이 갔지만."
"십장생?"
곡팔개도 들어본 명칭이라 깜짝 놀랐다. 거기에 장추삼의 부연 설
명이 곁들여지자 그가 입을 쩍 벌리고 놀라움을 표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가? 허......"
내친 김에 무림첩의 오발동에 관해서도 신나게 주워섬기던 장추삼이
뭔가 이상해서 곡팔개를 멀뚱히 들여다보았다.
"아니, 뭐가 그리 좋소?"
"넘어가세. 그건 그렇다 치고 비천혈서와의 문제는 어찌 된 건가? 소
문이 사실인가?"
득의의 표정을 싹 감추고 곡팔개가 정색을 하며 다음의 질문에 답을
구했다.
"글쎄올시다."
"글쎄올시다라니! 가진 거면 가진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뭔 놈의
글쎄 타령이란 말인가? 그러고도 자네가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 있나?"
삥ㅡ
"또 열받게 하네. 아니, 글쎄라고 말하면 사내도 아닌 거요? 내가
뭔가를 가지고는 있는데 아직 뭔지는 정확치가 않거든. 내 그럼 하나
만 물어봅시다."
장추삼이 곡팔개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고 실실 웃었다.
"노인장, 비천혈서가 뭔지나 아시오?"
"으음?"
"뭔지도 모르면서 무슨 놈의 비천혈서 타령이냐고. 이거 정말로 웃
기는 경우잖아?"
"으으음....."
인상을 구기는 곡팔개에게 곧바로 장추삼이 질문을 던졌다. 뭔지 보
여달라고 버티면 곤란하기에 선수를 친 것인데 워낙 벼락같은 물음이라
순진한 거지노인은 그대로 넘어갔다.
"나도 하나만 물읍시다. 뭐가 두려워서 숨은 거요? 왜 복룡표국 얘
기가 나오니까 줄행랑을 놓은 거냐고?"
"........."
일순 당황한 곡팔개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하운과 북궁단야를 살살
훔쳐보았다.
"저 사람들은 내가 보증할게요. 걱정하지 말고 말해요."
제 자신을 보증할 무엇도 없으면서 장추삼이 큰소리를 쳤다. 배알이
꼴렸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는 편이 장추삼이라 북궁단야와 하운이 그
저 바보처럼 웃는 것으로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잠시 고민하던 곡팔개가 입술을 꾹 깨물고 침을 한 번 넘겼다.
"사실 삼성이라고 뭉뚱그려서들 말하지만 자네들은 전혀 다른 배경
을 가지고 있다네. 괴성의 평범하디평범한, 어찌 보면 단순한 인생은
논외로 치세. 일단은 화산의 대제자인 유성, 자네는 사사건건 무림맹
과 충돌하고 있는데 기실 무림맹과 구파가 한통속이라는 건 모르는 이
가 없을 것이야. 지금 당장 소원하다고 해도 언제 어깨를 걸칠지 알
도리가 없거든."
지목받은 하운이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 입술을 축이고 장추삼과 북
궁단야를 쳐다보았다.
"맞는 말씀입니다. 기본적으로 구파와 무림맹은 한통속이겠지요. 무
림맹 자체가 구파라는 인식도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화산이 어
떤 길을 걷든 저는 하운이라는 개인입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 정도는
파악할 줄 안다고 믿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궁단야에게 고개를 돌린 곡팔개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성이 먼저 질렀다.
"의심하든 뭐든 상관없는데 무림맹과 연관짓지는 마시길. 가문의 일
도 해결하기에 바쁜 사람이오. 사실 무림이 어찌 되든 상관없는 사람
이니까."
"또 마음에 없는 말 한다."
찌릿!
옆에서 깔짝대던 장추삼이 북궁단야가 쏘아보자 대번에 꼬리를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콧방귀 한 붕을 잊지 않았지만.
"잘 알았네, 잘 알았어. 초록이 동색이라는데 자네들이 붙어 다니는
데야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래, 선택이란 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 그렇다면 내 자네들에게 승부를 걸어보도록 하지. 천
년 개방의 마지막 도박이 될 승부를."
삼류무사 277 자가사육(自家飼育)
등봉현은 비록 하남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외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하남을 대표하는 객잔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눈이 튀어
나올 만큼 빼어난 절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남을 방문하는 유람
인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등봉현을 찾곤 한다.
등봉현에는 중원 오악 가운데 하나라는 숭산이 있고 숭산의 소실봉
에는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봉현, 아니 하남 땅에서는 방문좌도(傍門左道), 하다못해
패도(覇道)의 성격을 띠는 문파조차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정설이
지배적이었다.
"모두 부질없는 말일 뿐......."
오십대 후반의 중노인이 걸음을 옮기다 문득 발길을 멈추고 중얼거
렸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가 고개를 쳐들고 웅장한 철문 위에 매달려 있는 현판 하나를 올
려다 보았다.
흑월회(黑月會).
그렇다. 이곳은 무림십오개대파 가운데 가장 늦게 두각을 나타낸 흑
월회의 정문이었다. 그리고 중노인에게는 돌아가지 못할 마음의 고향
이었고.
꿀꺽!
굴강한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찾아들며 중노인은 부지불
식간에 마른침을 삼켰다.
'휴우... 역시 떨리는 건가.'
어깨부터 시작된 진동이 팔을 타고 내려와 손가락으로 전해지자 검지
를 들어 올리며 중노인이 이를 질끈 물었다. 나름대로 수없이 마음
가짐을 다졌거늘 막상 대하고 보니 상념은 그저 머리 속에서 만들어내
는 관념 덩어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난 대체 무엇을 겁내고 있는 걸까.'
이건 긴장감이 아니다. 분명히 두려움이다. 남겨둔 것도, 미련도
없는, 그야말고 집착할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
데.
설마 목숨이 아까운 걸까?
죽음을 마주하며 당당할 이는 없다. 그야말로 우화등선을 바라보는
성인이 아니라면 생명체로서 최소한의 공포는 품고 있을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조차 느낀다는 죽음에의 공포일진대 하물며 사
람으로 그런 감정 하나 없다면 그게 인간이겠는가.
그러나 중노인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품은
공포의 근원은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중노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궁상이다."
다짐하듯 혼잣말을 하고 중노인이 허리를 쭉 폈다.
"하긴 처음에도 이랬었지."
그가 언젠가의 옛날을 떠올렸다.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처음으로 강
허행을 떠나던 날을, 그때 디뎠던 첫발을, 처음 맡았던 바람 내음을.
분답하게 배웅 나와 철문을 열려던 육사제를 막으며 그가 말했었다.
나갈 때도, 그리고 들어올 때도 자신의 손으로 열겠노라고. 그래야만
당당할 수 있을 거라고, 그 감촉을 잊지 않겠노라고.
그 문이 다시금 그의 앞에 놓여 있다.
선택은 없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여로의 종착이
라도.
뚜벅뚜벅.
결심을 굳힌 그가 문지기 둘이 눈을 빛내고 있는 흑월회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뉘시오?"
문지기 하나가 힐끗 중노인을 보고 물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촌
노의 차림새라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고, 그래서 중노인은 마음
이 편했다.
"얼마 전에 회주와 약속을 했던 사람일세. 십팔 년 만에 찾아온 사
람이라고 하면 알 것이야."
"......?"
신입 문지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중노인의 흐트러짐없는 태도를
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내전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던 중노인의 눈에 어떤 의혹이 일었다. 그의 눈에 침중
한 기색이 깔릴 무렵 문지기가 돌아오더니 들어가라고 하며 철문의 고
리를 잡았다.
"됐네."
"에?"
어리둥절한 문지기에게 희미한 미소를 띠며 중노인이 문고리를 맞
잡았다.
"내가 열고 들어가겠네."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의 문지기를 무시하고 중노인이 문
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끼이익ㅡ
기름칠하는 것을 잊었나. 철끼리 마주치며 울리는 소음이 오늘따라
가슴속까지 울리는 것은.
'아니야, 그때도 같았어.'
소란스러워서, 들뜬 마음에 사제들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신이 열었고 그 자신의 가슴에 파고들었던 음향이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람도 같고, 문도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한 걸까.
정문을 들어선 중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은 했지만....."
텅 빈 연무장과 인기척이 거의 끊긴 대전.
"비운 건가, 버려둔 건가......"
이때 내전에서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처음에는 그저 걸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예 날 듯 달려왔다.
"음?"
그의 앞에 거의 날아온 사람은 눈처럼 하얀 백의를 입은 중년인이었
는데 전체적으로 물처럼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중노인과 백의 중년인이 한순간 서로를 외
면했다.
"후우....."
"......."
한쪽의 힘겨운 한숨은 다른 편의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겼고 백의
중년인은 그저 고개를 모로 꼬고 입을 꾹 다문 채 알 수 없는 저편에
시선을 던지고만 있었다.
팔랑ㅡ
어디선가 낙엽이 하나 떨어져 중노인의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동료들도 없을 늦가을의 나무를 홀로 지키다 이제 소임을 다하고 쉬려
는 것처럼.
가만히 낙엽을 집어 든 중노인이 황혼처럼 붉게 타올라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한 잎사귀에게 묵묵히 눈을 던지다 살짝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지?"
"....."
"오지 말았어야 했나?"
"......"
"돌아보지 않았어야 했던 건가?"
"......"
몇 차례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백의 중년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
답할 말이 없었고 대답할 자격도 없었으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이므로.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잘 알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백의 중년인 자신에게? 아니면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니 어
쩌면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 다른 여덟 명의 사제와 사매들에게? 그것
도 아니라면.....
"그 모든 걸 확인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고개를 돌려 중노인을 직시하며 백의 중년인이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아....."
뜻밖의 응대였기에 낙엽에서 겨우 눈을 뗀 중노인이 백의 중년인을
찾았으나 그의 눈은 허공을 헤매야만 했다.
털썩.
"수백이 일(日) 사형(師兄)을 뵈옵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은
귀환이시나 십팔 년을 하루같이 기다렷기에 세월의 무상함을 손등에
아로새기신 주름으로만 확인할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렇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촌노가 바로 십팔 년 전 강호를 거의
평정했던 절대의 사내 태양광무존 일모였다. 아홉 개의 커다란 문파의
장문 가운데 무려 네 명을 무릎 꿇린 장본인이라는 거다.
세월의 무상함일까, 일백의 대나한진을 앞에 두고도 꼿꼿하던 그의
허리는 어느새 휘었고, 공동산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던 그의 목청은 조
금씩 가래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갈 곳조차 없는 방랑자가 되어 고향과도 같았던
하남 땅의 이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너무도 정중한 예(禮)여서일까?
수백의 절을 저도 모르게 옆으로 한 발 물러나 피한 중노인이 사제
의 넓디넓은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젠 친형제보다 살가웠던
사제에게도 거리감을 느껴야 하는 건가.
깊이 몸을 숙이고 있는 수백에게 다가서다 흠칫 몸을 굳힌 일모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고맙네? 난 자격이 없어? 그간 어찌 지냈느냐? 이런 나를 이해해
다오?
씁쓸하게 고개를 젓고 일모가 수백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이런 환대는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걸 모르나, 삼사제."
"배려를 바라는 건 무리가 아니실까요?"
예의 속에 가시, 환대 속의 무정.
사람이란 무언가를 받으면 또다시 바라게 된다. 생각지 않다 받은
것엔 한없이 감사하면서도 한번 받게 되면 그때 가졌던 고마움을 기대
라는 관념으로 금방 바꿔 버린다.
그렇게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결국 남는 것은 반쪽으로 남은 자신의 양심과 후회, 그리고 원망이 전
부다.
'또다시 뭔가를 바란 건가, 나라는 인간은.'
일모가 스스로에게 조소를 던지고 얼굴을 굳혔다. 회포를 풀자고,
덕담을 나누자고 힘든 결심을 한 게 아니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현실
은 냉정하다.
그걸 한 번의 예와 한마디의 응대로 수백은 약여하게 보여준 거다.
"미리 말씀드리면 대사형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제들
은 이 자리에 있기 힘든 형편입니다."
아까 눈치챘어야 했다. 대사형이 아니라 일사형이라고 했을 때.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계신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백을 뒤로하고 일모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
겼다.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수백이 다시금 정중히 포권했다. 아
까의 과장을 버린, 마음속의 외침 그대로를 담은 예였기에 그 어떤 인
사보다 진솔했다.
"부디 원하던 것을 찾으시길. 비록 그것이 최악이라고 하더라도."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ㅎㅎ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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