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장터에서
정확히 68년 전 봄날...
개울섶에 찔레순을 꺾어 먹으로 개울가로 나갔다가 찔레 덩쿨 아래 뱀을 보고 다섯 살 동무 네 명은 기겁을 하고 신작로로 도망쳐 나왔다가, 영배미골, 오미골, 번걸골 여기저기서 장 가는 흰옷 무리 사람들을 보고 그중 늘 배고파하던 마름버짐 기철이가,
"얄마들아, 우리 풍산 장터 티밥 주서먹으로 가자 !"
"티밥?"
이 신작로 따라 10리만 걸어가면 곡물 장터 구석에 뻥티기 할배가 있고, 그 할배가,
"터지니더, 귀막으이소!"
고함소리와 함케 강냉이 티밥이 망태기 안으로 폭팔하는데, 그 망태기 틈사이로 몇 개씩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면, 기다렸다가 땅에 떨어진 것은 주서먹어도 된다는 철이 말에 꼬마 네 넘이 그 먼어언 장터까지 걸어가서 뻥티기 옆에 쪼그리고 눈빠지게 강낭티밥 주서 먹으로고 했지만, 읍내 꼬마들이,
"욜마들 안 꺼질레?"
텃세에 겁먹고, 티밥 알갱이는 한 개도 못 주서먹고 점심 쫄쫄 굶고, 다시 그 먼길 집으로 힘빠지게 돌아오다가 결국 그중 제일 겁 많은 택산이가 징징 울기 시작하다, 나머지 기철이, 정내, 오복이도 눈물 찔끔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던 씨동무 중 벌써 둘이는 밥숟가락 놓고 산으로 갔고, 하나는 허리 병으로 지팽이 없이는 마당에도 못 나오는 신세고... 괜히 먹먹해지는 봄날입니다.
68년 만에 풍산 장터에 갔더니 그 많던 장꾼들은 다들 어디 가고, 장보러 나온 사람은 눈 딲고 봐도 없고, 당체 오늘이 무신 날인지, 장날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썰렁하더이다.
강내이 티밥 한 대 튀기면 어르신과 담소하다가...
"어런요, 조 짜게 베름칸은 없어졌닛겨?".
장난삼아 아부지 하던 베름칸에 대해서 물었더니, 티밥 어르신 왈,
"조 짜게 있던 베름칸요? 그거 내 칭구가 하던 긴데, 둘째가 외국 가서 돈 번다 카더니, 저, 뭐 프랑스니 미국이니 오만 데 구경 다하고 돌아오더니, 고마 베름쟁이 망치 집어 싸고
내두룩 낙동강에 피래미 낚시 댕기다가 몇 년 전에 갔지! 그때 계속 했으마, 손재주가 조아가 안동 문화재 되고도 남을 사람인데. 아깝은 분이지!"
그때 옆에 당파 씨 팔던 할매가 커피 두 잔 들고 와서,
"잡사 보소."
나에게도 커피를 권하셨다. 커피 마시고 건너편에서 김 무럭 토하면서 방금 나온 찐빵 두 봉지 사서 하나는 티밥 어르신 드리고 한 봉지는 조금 전 커피 주신 당파 씨 할매 드리니,
"아이고 뭘 이키로 사 주닛겨!" 하신다.
시계를 보니 12시인데... 왱 앵앵 거리면서 12시를 울리던 지서 오종도 울지 않고, 사방을 둘러봐도 장보로 나온 사람은 없어, 오늘이 풍산 장날인지 무신 날인지... 당체 구분도 안 될 정도로 고향 장터는 이제 늙어가고 있었다.
조정래
2022년 4월 풍산장터에서
♧♧♧
친 구
나에게는 여러 명의 고등학교 친구가 있는데, 남시영이가 그중 하나다. 굳이 저울로 달아서 말한다면 다른 친구들보다 마음적으로 쪼매도 아이고 으법 많이 친한 친구 측에 속한다,
글마는 댁바리는 글키 명석하지 못하지만 일평생 법 없이 살아도 되는 심성이고, 경고 댕길 때 덩치는 작어도 씨름 선수 할 정도로 건강하다.
글마하고 추억은 지금도 디지탈 사진보다 더 아름답게 내 댁바리 깊이 박혀 있어 이제는 글마가 노망끼가 생겨서 조정래를 외면하거나 욕을 바가지로 한다 한들 난 웃을 일이지 딱히 노망 든 친구 버릴 사이가 아니다.
고3때 글마하고 운산역에 내리 가 운산 장터 작은어메 집에 가서 인사하고, 그 긴 구계 돌나덜 길을 걸어 간 추억은 그 어떤 당대 문학가 필력으로 쓴들 절대 웃질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내 인생 오래도록 알퐁스 도데의 별 떨어지는 밤 동화처럼 남아, 내가 글 쓰는 데 찬물 샘 역할을 했었다.
구계 골은 깊다. 구계 남씨 형제애도 무진장 깊다. 영식이 형님 아래 모두가 하나 같이 남들 부러운 형제애로 도갓집 하고, 글마 술독에 퍼 온 찐데기 술 마시고 내도 얼굴이 어주자 애인 홍도화보다 더 붉게 핀 기억이 어제 같다.
1969년 구계초등학교 마당에서 영화보고 글마하고 졸업 후 서울 취직하려고 평창동 글마 삼촌집에 같이 자고, 글마는 삼촌이 권하는 회사에 가고 난 초봉 4800에 전자회사 공돌이로 취직했다.
그 후 나는 캐나다, 미국, 프랑스. 벨기에 외국 근무 가고, 글마는 고무쟁이로 살았다.
외국 전자 회사 다닐 때 글마는 구계 처자하고 결혼하고 농미를 델구 나를 찾아왔었고, 그 후로는 서로 얄마 절마야! 때로는 씨팔새끼 니메이 내메이 캐싸면서 살다보니 어느덧 53년 세월이 흘렀고, 하늘에서 춘절이 중하거던 니멋되로 사세요. 하늘문이 훤히 보이는 날 다시 구계골을 들어서니 나도 늙는가 눈물 났다.
옛 도갓집 둘러보고, 글마 사는 윗동네 가서 이집저집 들따봐도 당체 그 많던 구계사람들은 화전놀이를 갔는지 안 보이고...
여불떼기 집도 빈집, 저짝 집도 문이 떨어진 채 마당에 민들레꽃이 잡초 사이로 올라오고 있을 뿐... 당체 물어 볼 사람이 없다.
근데 뒷집에서 폭삭 늙은 할매가 보여서,
"할매요, 여 남시영이 집이 어딧겨?" 하고 물었더니,
"어디서 왔닛겨? 남시영 행상머리 아주 나쁘이더. 통시칸에 쿤내가 나서 내는 못 살시더...“ 날 붙잡고 십여 분 하소연하는데 그제야 그 할매 치매성 잔소리과에 입학하신 분으로 파악 되어서,
"할매요, 내가 경찰서 형사씨더. 글마 잡아가 뽈싸데기 때릴 터이니 이웃간에 우짜든동 잘 지내이소!"
부탁하고 나오면서 보니 쿤내 난다는 정낭은 옛날 정낭으로 사용 안 한지 오래 되어 쿤내는 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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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시영 찾으로 옛날 술말 자전거에 달고 가던 웃동네로 가다 보니 드디어 또랑 건너편 밭에 고추 심는 부부를 보고,
"남시영, 어디서 일하닛겨? 내가 글마 형이씨더!" 고함치니,
“고운사 쪽으로 더 올라가면 작은 다리 나오는데 그 안짝 밭에 가 보이소!"
“에이, 마한 늠의 자슥, 핸드폰도 안 터지는 이 깊은 산골에 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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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여기저기 고장나는 나이들인데, 글마는 제수씨가 울매나 걷아 처먹인는지 교복 입으마 아직도 고등학생 같을 정도로 쌩쌩했다.
사는 집에 라디오 수신이 잘 안 된다 카이 성주 안테나 설지 작업하고 구계로 차를 몰았다. 골이 깊고 반석 산이 둘레 되어 반파장공진이 1.5m 짧은 vhf대역의 반송파는 비록 학가산서 첨두전력 3kw 송출해도 전계강도기로 겨우 마이너스 22dbi 나오는 전파난청 지역이라서 fm이 잘 나오지 않았다.
150만 원짜리 달면 되지만 글키 비싼 안데나는 서울 부자들이 다는 것이고 그냥 60만 원짜리 Rs3000 fm 수신 안데나 하나 달아주고 아직 뒤에서 보면 여고생 같은 막내 제수씨가 콩나물 추가로 끓여 낸 점심을 먹으면서 개죽나물인지 쌉사리한 것을 초장에 찍어 농주 한잔 걸치고 구계골을 빠져나왔다.
막내는 언론사에 훌륭하게 자리잡았고 특히 부인을 잘 만나 행복한 가정 이룬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원래 형제끼리 화목하다가도 남의 성씨 들어오면 형제간에도 불화가 기본인데 구계남씨 형제 집안은 당대 구계 전설로 내 글이 금강산에 석필로 남았듯이 구계골 남씨 형제 이야기가 돌비석에 남아도 될 일이다.
조금 흠이 있다면 형제 중 남시영이가 쪼데기는 아니지만 쪼매츰 맨자구지만 그 정도면 쑥맥이보다는 웃질이고 다행히 농미 어마이가 똑소리나고 살림이 윤기가 반질반질하니 마음놓인다,
53년 만에 구계골에 가다.
조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