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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주석
실족케 함에 대하여(누가복음 17:1-10)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Ⅰ. "실족케 함"은 "큰 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이것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주의해야 한다(1, 2절). 사람의 왜곡됨과 비꼬인 성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실족케 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일에서까지도 그의 선한 사업을 수행하시며, 악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현명하신 계획과 목적을 기대할 수는 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적절하게 대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큰 화가 있으리라"(12절). 그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 그의 운명은 중죄를 지어 바다에 던지워질 운명에 처한 죄인의 비참함보다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자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책의 짐 아래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1. 박해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작은 자들 중"의 하나에게라도 말이나 행동으로라도 해를 끼치며, 그것 때문에 해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낙심하고, 그 의무를 다함에 용기를 잃는다. 즉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 표류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다.
2. 유혹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의식을 타락시키고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들이야말로, "실족케 함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3.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달고 추잡한 생활을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해 실족이 온다. 그것은 그들의 죄책과 벌을 조금도 감하거나 경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Ⅱ. "남이 자기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의 "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러한 죄를 짓지나 않을까를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3절). 본문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가장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으로 앞의 구절에서 언급한 자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히 교역자들은 교인들을 낙심하게 할 언행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들은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혹 교인들을 낙심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늘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둘째는 후에 나오는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같이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로 볼 수 있다. 즉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곧 어떤 해를 입혔거나 재산의 손해를 입혔거든 격노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거나 거칠게 복수를 선언하지 말라. 이런 때는 특히 혹 실언을 하지나 않을까 하여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사람이 너에게 잘못했을 때에는 그를 경계할 만한 처지라면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분노는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나타낼 것이다. 그에게 잘못된 점을 말해 주되 어떤 점에서 그가 잘못했으며 너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임을 말해 줄 것이다. 아무도 네가 그를 오해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너는 할 수 있는 대로 이해하려고 힘 쓸 것이다), 네가 그를 오해했다거나 그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고 단지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를 오해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빌게 될지도 모른다(수 22:30, 31 참조).
2. 그가 잘못을 뉘우쳤을 때는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와 완전히 화해하라는 말이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손상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말며, 그것으로 너무 책망하지 말지어다. 그가 뉘우치지 않더라도, 그에게 원한을 품지 말 것이며,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적어도 내가 회개하노라고도 말하지 않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친숙하게 지내야만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그가 큰 죄를 범했으면 그가 속해 있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범죄자로서 엄숙하면서도 온순하게 훈계하고,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다시 우정으로 친교를 맺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용서라고 말했다(고후 2:7).
3.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면 그 때마다 몇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이다(4절). 사람이 너무도 조심성이 없거나 너무도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와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더라도 그러한 죄를 다시 안 짓겠노라는 약속을 받고, 다시 "너는 용서하라." 잘못을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관용의 정신을 가져서 모든 사람을 가장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에 힘쓰며, 모든 사람을 안심하고 대하기에 힘쓰며, 사람들의 잘못을 가볍게 보며 사람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하는 본을 보이기에 힘쓰도록 할 것이다.
Ⅲ. 우리 모두에게 요긴한 것은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이 은혜가 자라면 다른 모든 은사도 더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굳게 믿을수록, 또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안심하고 의지할수록 모든 일을 믿음으로 더욱 잘해나갈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말씀드린 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줌을 시사한 것이다(5절).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의 국무총리라도 된 듯 했지만 자기들의 믿음이 약하고 부족함을 깨닫고, 그 믿음을 보다 좋게 해 주실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여쭈며, 믿음의 부족함을 완전케하여 줍시라고 간청했다. 곧 미음을 갈망함이 더 강하고, 믿음을 의지함이 더 견고하고 변치 않으며, 믿음의 헌신이 보다 온전하고 확고하며 믿음의 기쁨을 더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할 바는 우리의 믿음이 더해질 것이며 이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될 일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과실을 용서하는 의무를 강조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어려운 의무를 감당할 수 없겠나이다" 하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심을 믿으면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가장 큰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 것은 다른 경우, 곧 제자들이 이적을 행하는 중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로써,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 꾸짖으셨다고 생각한다(마 17:16 이하 참조).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고치기보다는 먼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짖기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가르쳐 주셨다(6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좋았을 것이나 너희 믿음을 도저히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혹은 너희가 동물의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드는 겨자처럼 그렇게 다른 모든 은혜에 대해서도 예민하고 적극성을 띠어, 겨자씨와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면" (겨자씨는 그래서 중풍병에 약으로 쓰인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일 이상의 놀라운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너희가 전파하는 말씀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나무를" 땅에서 뽑아 "바다에 옮기우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 17:20 참조).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또한 "그것을 믿는 자에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Ⅳ. 그리스도의 사업에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겸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을 만하다든지 또는 주님께 빚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지만 그것으로써 주님을 자기들의 빚장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1.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이다(사도들과 성직자들은 특별한 종임). 그러므로 주님의 존귀를 위해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정력과 시간을 주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종인 우리는 모든 시간이 맡겨 주신 의무를 감당하는 일로 채워져 있으며,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의 종류가 서로 다르므로 우리는 맡겨진 일을 끝을 내고, 다른 일을 맡겨 주시기를 기다릴 것이다. 들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먹이던 종이 밤에 집에 오더라도 역시 할 일이 있다. 식탁에서 수종 들어야한다(7, 8절). 우리가 종교적 대화의 임무를 띠고 있을 때에 헌신을 하는 일은 면제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을 때에는 역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실 일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3. 여기에서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는 우리에게 관련된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며, 그것을 우리 주님께 맡겨서 주님께서 언제 또한 어떻게 적당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도록 할 것이다. 종은 주인이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날에 할 일을 다 끝내면 그 시간이 바로 먹을 때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완수하는데 정신을 쓰자. 그리고 그 일을 잘하도록 하자. 그러면 적당한 시간이 되면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4. 우리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섬김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그 후에 너는 먹고 마시라."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해서 말하기를 자기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의 영광을 주님께 드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 즐거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을 가지시도록 하고, 주님께 찬양을 돌릴 것이다. 그 다음에 사랑의 위로 중에 먹고 마신다. 이러는 중에 잔치가 벌어진다.
5. 그리스도의 종은 주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띠를 띠고," 헝클어지고 거치장스러운 일을 떠나서 오직 자기의 할 일에만 계속하여 밀고 나가야 한다. 곧 마음의 띠를 띠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잔치를 준비할 때 곧 주님께서 잡수실 것을 예비할 때에는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띠를 띠어야 한다. 이것은 종이 할 일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다른 주인들처럼 나라를 취하러 오시지 않았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당신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보여 주려고 오셨다.
6. 그리스도의 종들이 주님을 위하여 한 봉사를 주님의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주님께서 그 일로 인하여 신세를 지셨다고 생각하실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우리가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 못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의 빚진 자되게 한 까닭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친히 빚진 자가 되시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지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서 청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 어떤 일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든지, 혹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한 일보다 더 많다하더라도 우리가 의무를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부족한 것뿐이며 의무 이상으로 한 것이 없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첫째 되는 큰 계명을 지키는 것뿐이다. 이 계명에 가장 중요한 것이 다 들어 있다.
8. 그리스도의 가장 충성된 종은 가장 훌륭한 봉사를 하고 있을 때라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물론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묻어버리고 아주 흑암 속으로 빠져버리는 그런 무익한 종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그의 봉사가 별로 이익을 드리는 것이 못됨을 생각할 때는 무익한 종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선함이 하나님께 미칠 수는 없는 것이며,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 없다(시 16:2; 욥 22:2; 35:7).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가 빚진 자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보탬을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유익한 일이라 함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이도 즐거워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치유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누가복음 17:11-19)
여기에는 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이 기사가 없다. 문둥병은 유대인들이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다른 어느 병보다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는 표시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길거리에 누워 있는 문둥병자들을 보실 때에 진노하시기보다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약 중간 위치에 이르셨다. 이곳은 예루살렘이나 갈릴리에 비해서는 생소하신 곳이었다. 이곳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국경 지대이다. 주님께서 이 길로 가신 것은 이 문둥병자들을 찾아내어 고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주님을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참아 냄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사 65:1 참조). 우리는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Ⅰ. 문둥병자들이 그리스도께 한 말. 이들은 열 사람이 한 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단절되어 있었지만 문둥병자들 끼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한 촌에 들어가실 때에 만나 뵈었다. 이들은 주님께서 여행으로 인한 피로를 풀으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피로하신 채로 촌으로 들어가시고 계신 주님을 만났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본체 만체하시지 않았으며 그들의 호소하는 바를 뒤로 미루시지도 않았다.
2. 문둥병자들은 성한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멀리 서" 있었다. 영적으로 문둥병자와 같은 우리들도 그리스도께 가까이 하려고 할 때에 아주 겸비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극히 순결하신 주님께 누가 감히 가까이 할 수 있으랴? 우리는 불순하다.
3. 문둥병자들의 요구는 전원이 일치되고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13절). 그들은 멀리 있었으므로 음성을 높이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선생님으로 모셔야 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게 되면 그는 곧 구주이신 예수이시지 다른 분이 아니시다. 그들은 특별히 자기들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정을 구할 때에도 이 말씀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들은 그것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문둥병자들은 예수의 명예를 듣고 있었다(주님은 이 지방에 대하여 정통하시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들은 용기를 내어 주님께 간청을 하게 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아주 평범하고도 쉬운 말을 꺼냈을 때에 모두가 가담하여 한 목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문둥병의 감식자인 제사장에게로 보내어 검사를 받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적극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순종심을 시험하신 것이었으며 그렇게 시험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 한 경우와 같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길과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 문둥병자 중의 몇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고치면 고치고 그렇지 않으면 못 고치겠다고 할 것이지 헛걸음이나 하게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하는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합의가 되어 모두가 제사장에게로 갔다. 의식적인 율법이 아직도 유효한 때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야 될 것으로 여기시고, 이에 대한 세평을 지키며 또한 그들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는 제사장들에게 경의를 표하시느라고도 그렇게 하셨겠지만 아마도 보다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제사장들의 판단과 증인이 병을 고치는데 보다 완전함을 기할 것과 제사장은 마땅히 각7성하여 육체적인 질병 이상의 질병에 대한 지도력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Ⅲ.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래서 제사장에게 보이는 데도 어울렸고 자기들이 깨끗하게 되었음을 제사장에게서 증명을 받게도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지 않는다. 가서 제정되어 있는 의식에 순응하자. 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서 믿을 만한 성직자에게 너의 사정을 말하라. 그러한 수단이 너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수단은 성심껏 이행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Ⅳ. 그 중의 하나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사례를 하였다"(15절). 그 사람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언 받고, 열 사람 모두가 원하는 감검된 처지에서 해방을 받기보다도 먼저 그 병을 고친 장본인 되시는 분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병고침의 이익을 받기 전에 먼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던 것이다. 그는 감사함에 있어서 열성적이고 다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하여 자기의 깨끗해짐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감사했다. 그리고 또 그가 큰 소리를 지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할 때에 큰 소리를 냈던 것과 같다"(13절).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어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그의 체험에 의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리스도께 특별한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존경하는 자세를 취하고 "사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특히 병을 고쳐 주신 일에 감사해야 하며, 그리고 감사를 돌리되 빨리하고 미루적거리지 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감사의 정이 사라지기 쉽다. 우리는 또한 기도를 드릴 때도 그렇지만 감사를 돌릴 때에 아주 겸손한 자세로 해야 한다. 그래야 야곱의 자손에 어울린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을 추구할 때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을 때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창 32:10 참조).
Ⅴ.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사람이 출중한 인물임에 주목하셨다. 이 한 사람만이 사마리아인이고 다른 사람은 다 유대인이었다(16절). 사마리아인들은 유대 교회에서 분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지식과 예배를 잊고 있고, 떠나고 있었는데 이 사마리아인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이 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목하였으며, 그와 함께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를 돌리지 않은 사람들을 또한 주목하셨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오직 한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17, 18절).
(1)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주님께서는 전부를 고쳐 주셨다. 말씀 한 마디도 전체를 호의적으로 치료하였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시는 치료는 풍성하여 그 환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전체를 다 치료하기에 넉넉하다. 여기서 열 사람이 한꺼번에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주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2) 그런데 돌아와 감사를 드리기에는 얼마나 인색한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왜 감사를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것은 배은망덕은 바로 죄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많은데도 올바른 자세로 돌아와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하여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겨우 열에 하나).
(3) 감사의 정을 가장 많이 가졌던 사람들이 흔히는 가장 기대가 적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돌렸고 유대인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계시 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연 종교에만 지배를 받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경건성과 헌신하는 점에 있어서도 뒤지고 부끄럼을 당하는 일이 많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유대인들의 배은망덕 곧 은헤를 받고도 전혀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말로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그것을 너무도 경시하는 인간 세상의 배은망덕도 암시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19절에서 그 사마리아인에게 큰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 나머지 유대인들도 병 고침을 받았다. 그들의 배은망덕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병이 도루 나게 해도 마땅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은혜를 감사하는 좋은 본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한편 사마리아인은 특별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주님의 찬사를 받으면서 그의 병 고침을 확인 받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그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께서 그를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하여 보시고 구원해 주셨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일시적인 은혜를 받았을 때에 그것을 믿음의 기도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찬양으로 감사를 돌릴 때에는 그 은혜가 배나 늘어나고 보다 유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실현(누가복음 17:20-37)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야의 나라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머지 않아 세워질 것이며 또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었다.
Ⅰ. 바리새인들이 이에 대해서 질문을 하여 주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하고 물었다.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일시적인 나라, 곧 지상의 다른 나라들에 뛰어난 유대 나라가 발달한 속세의 나라로서의 하나님 나라라는 관념을 보여 주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과 제자들이 천국이 가까웠음을 오래 동안 전하였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광경이 언제 벌어지겠느냐고 말했다. 언제 우리가 오래 동안 대망 하는 나라를 보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Ⅱ.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첫째는 바리새인들에게, 그 뒤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보다 나은 제자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1. 메시야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그들이 나라가 언제 임하겠느냐고 물었을 때에 "너희는 너희가 묻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나라가 임하더라도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다른 나라처럼 외형적인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상의 나라의 발달과 혁명은 지상의 다른 나라들에 의하여 알리어지고, 신문지상에 게재된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1) "하늘나라는 장엄하게 소리를 내며 오지 않고 정숙하게 올 것이며, 눈에 뜨이게 오지 않는다. 곧 겉으로 나타나게 오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인 그 하늘나라가 언제 오는지 그 시기를 알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으시고 하늘나라의 성격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시려고 하셨다. 하늘나라가 올 시기를 너희는 알려고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밀로써 너희에게 속한 일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크게 긴장할 바는 그것이 계시에 의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이라"고 말씀하셨다. 왕이신 메시야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오실 때에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왕이 자기의 영토를 방문하기 위하여 행진을 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한다. 왜냐하면 왕이 있는 곳에 왕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오시지 않는다. 주님의 나라는 여기나 저기 어느 특별한 곳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왕좌가 여기저기로 옮기어 국민들이 그에 따라서 그것에 가까이 또는 멀리 살려고 할 그런 것도 아니다. 기독교와 교회를 이곳이라 또는 저편이라고 제한하는 사람들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외치는데 이것은 카톨릭 기독교의 의도와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자기들 교회가 참 교회임을 과시하는 표시로 번영하고 외관상으로 화려하게 꾸민다.
(2) "이것은 영적인 감화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의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그 영광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영에 감화를 끼치며, 그 권능은 사람의 영혼과 양심을 지배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되 그들의 육체로부터만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외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 그러면 거만하고 헛되고 육욕적이던 것이 겸손하고 진지하며 거룩하게 되고, 세상에 몰두했던 것을 세상에서 단념시키고 세속적인 정치가 아니라 심령의 변혁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 하게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속에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해석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너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 가운데 세워지기 시작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복음은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적으로 확증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환영을 받고 있어서 너희 심령 속에는 아니지만 너희 나라에는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속에 있는데 그들 앞에 오기를 대망 하는 나라가 어느 때 오겠느냐고 호기심을 가지고 묻는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2. 하늘나라의 건설은 반대와 방해를 당하게 될 사업이었다(22절). 제자들은 모든 일이 그들 앞에서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고 그들의 사업이 모두 성공되기를 기대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날은 너희의 증거가 끝나고 너희의 사업이 끝났을 때 인자의 날을 보기 원할 때(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하루)에 올 것으로써 복음의 번성과 발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 날을 보지 못하리라. 처음에는 사실 너희가 놀라운 성공을 하게 될 것이다"(하루에 교회로 수 천명씩 모여들 때와 같이). 그러나 언제나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그보다는 너희가 핍박을 받으며 흩어지고, 말도 못하고 옥에 갇혀서, 지금 너희가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이 공포가 없이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얼마 동안은 복음을 달갑게 받아들이다가 백성들이 차츰 복음에 대하여 냉담하게 되어서 맨처음에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것처럼 그러한 풍성한 수확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비둘기가 그 우리의 들창으로 몰려들 듯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주님의 제자들의 전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실망을 예상했으며, 전도자들과 교회들은 때로는 밖으로의 제지를 받게 되어, 교사들은 구석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며, 진실한 회중들은 분산되고 말 것이다. 그 후에 주님의 제자들은 전날에 즐기던 대로 자유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던 날, 안식일, 성례일, 전도일, 기도 일을 갖게 되기를 원할 것인데, 이러한 날은 인자의 날로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함께 담화할 수 있는 날이다. 그 때는 우리가 헛되이 이러한 날을 기대할 그때에 올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부족함을 아는 그러한 은혜의 가치를 알기를 원하신다. 이 은혜의 가치는 우리가 은혜를 계속하여 받을 때, 은혜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또한 풍성한 때에 기근의 해를 위한 비축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때로는 내적인 구속을 받게 되는데 곧 전에 그들과 함께 하셨던 인자의 임재하심을 증거하는 그러한 표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성령이 떠나버리시고, 자기들의 주님의 제자된 표시를 나타내지 못하며, 천사가 바닷물을 휘저으려 내려오지 않는다. 사람의 자녀들에게는 큰 어리석음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미온적인 태도가 많다. 그런데 이들은 인자께서 세상을 정복하시며 또한 정복하시려고 백성들의 축하를 답례하시며 면류관을 쓰시고 말을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시던 그 모습대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그 날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날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운동이 쇠퇴하는 것은 언제나 볼 수 있고 들어 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3.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이곳이나 저곳의 어느 특별한 장소에 임하실 것으로 대망 할 것이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은 모든 곳에 일시에 일반적으로 일어날 것이다(23, 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는 여기에 핍박하는 로마인들의 손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에게 전할 한 가지 기가 있으며, 혹은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할 한 가지가 있다. 여기에 메시야가 있고, 또 거기에 그의 예언이 있으며, 이 산 속 여기 곧 예루살렘 그곳에서 진정한 교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이러한 말들을 따르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일부의 사람만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광명을 주시기 위하여 마련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번뜻하면 곧 억제할 수 없이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은 것이다.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1) "유대 나라를 멸망시키어, 그들을 황폐케 하고 그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할 심판은 온 나라에 걸쳐서 번개와 같이 나를 것이며, 그 나라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모두 황폐케 하고, 이 멸망을 받도록 선정된 것들은 이를 피할 길이 없고 막을 수도 번개의 번쩍함을 막을 수 없음과 같다.
(2)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울 복음은 온 나라에 걸쳐서 번개처럼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다. 이 메시야의 나라는 한 지방적인 것이 아니고 온 지구상 전면에 멀리 또한 넓게 전파될 것이다. 이 나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면에 순간적으로 전파될 것이다. 지구상의 나라들은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복음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트로피는 비록 로마의 멍에를 정복할 수 없는 나라에 있어서라도 악마의 나라의 폐허 위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건설의 설계는 한 국가를 크게 만드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국가를 적어도 모든 나라 중의 몇 나라를 좋게 만드는 일에 있으며, 비록 국가들이 격격 하더라도 이루어질 것이며, 지상의 왕들은 그들의 온 힘을 다해서 이에 대항할 것이다.
4. 메시야는 세상을 다스리시게 되기 전에 "많은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25절).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일로 고난을 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고, 이 세대에서 버린 바 되어야 하고, 그리고 메시야가 그런 대우를 받게 되면 그의 제자들은 고난을 받고 역시 주님을 위하여 배척을 받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메시야의 나라가 외형으로도 호화롭게 세워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면류관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지나가야 한다. 인자는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한다. 고통, 수치, 죽음 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이방인들의 다른 세대에 의하여 환영을 받기 전에 믿지 않는 유대인의 현세대의 배척을 받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장 큰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가장 큰 반대를 물리치고 나서야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권능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합쳐지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땅 끝까지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메시야의 나라의 건설은 유대 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하며 유대 나라는 비로소 무사주의의 깊은 잠을 자고 있었으며 음탕에 빠져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인데 이는 마치 옛날의 노아 시대와 같고 롯의 시대의 소돔과 같은 것이다(26절 등). 다음 사실에 주의하자.
(1) 전에는 죄인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왔으며 어떠한 태도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는가에 그들이 상당히 경계를 받아 왔는데 드디어 그것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육체적인 것이 그들의 생활을 타락시키고, 온 땅이 난폭함으로 충만해 있던 옛 세상으로 나아가서 생각해 보자.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소돔성 백성들이 어떠했던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악하여 하나님 앞에서 지나치게 죄인들이었다. 이제 이들의 생활에 관해서 생각해 보면
[1]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닥쳐 올 멸망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경고를 받았다. 노아는 옛날 세상 사람들에게 의를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롯은 소돔 성 사람들에게 의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 그들의 죄악된 생활의 끝장에 가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과 그 시기가 멀지 않음을 경고했다.
[2] 백성들은 그 경고를 대단치 않게 여겼으며, 신임을 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완고하여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리낌없이 그들의 생활을 계속하여 나갔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향락에 빠져서 다른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육체를 위한 준비를 하기에 힘쓰고, 그들의 현재 번영 상태가 그대로 계속되기만 바라며, 장가가고 시집가며, 가정을 이루어나가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매우 즐거운 생활을 누리었으며, 소돔 사람들도 역시 그랬었고 또한 매우 바빴다. 그들은 사고 팔며, 농작물을 재배하며 집을 지었다. 이것들은 정당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이런 일들을 무질서하게 생각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은 이런 육적 생활에만 집착되어서 앞으로 받을 무서운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니느웨성 사람들처럼 금식하고 기도하며 회개하고 거듭나야 할 때에, 닥쳐오는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으면서도, 완고하게도 육신을 위하여 먹으며, 술을 마시기를 계속하여 하나님께 울며 슬퍼하지 않았다(사 22:12, 13).
[3] 그들은 무서운 심판이 임할 때까지 완고하고 육욕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고 롯이 소돔을 떠날 때까지 백성들을 경고하여 일깨우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일이 없이 계속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죄악된 길에 있는 죄인의 어리석음은 이유 없다고 할만큼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외 없이 다 그렇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은 짓밟고, 그들이 악행을 할 때에 짓밟히는 것처럼 지옥에 떨어뜨림은 옛날 방식이었다.
[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를 자기들 스스로 지키는 사람들을 보존하려고 하신다. 노아는 방주로 들어가게 하셔서 거기서 안전하게 하셨으며 롯은 소돔을 빠져나가게 하셔서 해를 면하게 하셨다. 몇 사람의 멸망의 자리로 경솔하게 또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더라도 믿는 사람이 받을 구원에는 손상을 주지 않는다.
[5] 행악을 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지 않던 몰락을 보고 놀랐으며, 말로 할 수 없는 공포와 놀라운 것은 그들 자신이 그 몰락에 삼키운 바 되었던 것이다. 홍수는 임했으며 옛날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멸망을 당했다. 불과 유황불이 내리고 소돔의 죄인들은 모두 멸망당했다. 하나님께서는 화살통에 많은 화살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을 배반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전쟁을 거는데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유효하게 쓰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의도하는 바는 완고하고 음난한 자들의 멸망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놀라운 일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2) 하물며 죄인들은 어떻게 될까(30절).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리스도께서 로마 군대에 의하여 유대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오실 때에 유대 나라의 일반성이 이와 같은 통치의 안심감과 우둔함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경고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후에는 사도들이 또한 경고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옛날에 노아와 롯에게 경고를 받았던 것과 같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가 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완고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무시하고 반대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에게서 떠나 피난처로 갈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단 저펀에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시고, 그 후에 심판의 물결이 들이닥쳐 모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중에서 전해지고 또한 멀지않아 세상에 공포된 우리 주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일깨웠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서 자기들의 멸망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마찬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올가미처럼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불구하고 여전히 완고하고 부주의하는 태도를 갖게 될 것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세대의 죄인들도 완고하게도 악행을 계속할 것이다. 그들은 후일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자기들이 바쳐야 할 결산서도 생각지 않았다. 화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여.
6.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 자신을 당시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구별하고 그들에게서 그들의 도성에서 또한 그들의 나라에서 떠나고, 그들 자신으로서는 주어진 신호 곧 주어져야 할 방향으로 도망하는데 깊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노아가 그의 방주로 들어가고 롯이 소알로 들어간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칩거할 것이다. "너희가 옛날의 바벨론처럼 예루살렘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예루살렘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 서 각기 그 영혼을 구원하자"(렘 51:6, 9 참조).
(1) 이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도망은 날쌔야지 그들의 세속적인 일을 염려하여 지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31절).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을 때에 경보가 울렸다면 그 세간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느라고 시간을 많이 보낼 수도 없으며 그런 휴대품을 가지고 가려면 방해가 되어 도망하는데 지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는 세간살이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다음의 은혜의 이적을 받게 될 때에 그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될 것이다(렘 21:9). 세간살이를 돌보기 위하여 지체하기보다는 그것을 뒤에 버리고 가는 것이 좋다. 롯과 그의 가족들처럼 염려거리가 될까 두렵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2) 그들이 소돔성에서 도망할 때에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32절). 롯의 처를 생각하라. 소돔에서 도망할 뿐 아니라 롯의 처를 경계삼아(예루살렘이 또한 소돔과 같았음. 사 1:10). 계속하여 도망하고 롯의 처가 한 것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멸망할 곳으로 결정된 곳을 떠나기를 싫어하지 말고, 그대가 퍽이나 사랑하던 누구이거나 무엇이거나 간에 뒤에 버리고 떠나기를 싫어하지 말 것이다. 자연적인 상태의 소돔을 떠난 사람들은 오직 앞으로 나갈 것이며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생길까 두렵다. 아니 마음속으로라도 돌아갈 생각이 날까 두렵다. 소돔성을 떠난 것은 마음속으로도 이미 그 성을 뒤에 둔 증거이다. 롯의 처는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그는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끝나는 자 곧 변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한 영원히 기념물이 되었다.
(3)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그들을 버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저희들끼리 연합하여 저희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면 자기들 스스로 잘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33절).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그리스도교에서 떠나서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는 그들과 함께 생명을 잃을 것이고, 그들과 함께 재난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그들의 모험이 깔려 있는 같은 밑바닥에서 살든지 죽든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어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되리니 이는 그가 분명히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과 한패가 되었던 자들 곧 그들의 안전보장 밑에 있던 자들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의무이며 방도임을 알아야겠다.
7.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피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피할 길이 매우 좁다(34-36절).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것을 황폐케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유효한 방법을 취하셔서 그들과 그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다른 사람들 사이를 구별하는 놀라운 섭리에 의하여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보전하실 터인데,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하나는 불타는 곳에서 잡아채어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고 다른 사람은 멸망의 자리에서 죽어버리도록 남겨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검은 누구나 다 베어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지만 조만간에는 하나님께서 누가 당신을 믿는 자이고 누가 믿지 않는 자임을 알고 계심이 나타날 것이며 어떻게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을 확신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인 자들을 복수하실 목적으로 심판자를 보내실 때에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십자가 안에서 영광을 돌린 자들은 하나라도 빠짐없이 그 심판에서 건져내실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이다.
8. 이러한 구별과 갈라냄과 분별함은 하나님 나라가 미치는데 까지는 도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37절). "주여 어디오니이까?" 제자들은 그 때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시기를 알려 주심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질문을 했다. "주여 어디오니이까?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그곳이 어디오니까? 또 남아있는 자들이 멸망해 버릴 곳은 어디오니까?" 그 대답은 암시적인 것으로써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1) 멸망당하도록 정해진 악한 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는 마치 송장이 있는 곳에는 새들이 그 냄새를 맡고 몰려와서 그것을 먹이로 삼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이 그들 나신이 죽어서 썩은 송장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가증스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밉살스럽게 되어, 이러한 불(不)신앙의 세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하나님의 심판이 밀어닥치기를 마치 독수리들이 먹이를 찾아 모여듬 같이 할 것이다.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시 21:8).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욥 :4). 로마 군대들은 유대인들이 숨어 있는 곳과 요새를 뒤지며 사냥하여 그 난을 피할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2) 보존되기로 정해진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즐거움 속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유대인들의 교회의 해산이 도처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그리스도 교회가 도처에 설립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믿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만나게 되리니 독수리들이 먹이를 둘러싸고 모여듬같이 모여들터인데 그 먹이가 있는 방향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본능적인 성질에 따라서 모여든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그의 복음, 그의 조례, 그의 교회에 계시게 된다. 왜냐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 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저쪽에서는 저쪽대로 주님께로 모여들 것이다. 메시야의 나라는 유대인 교회에 있어서의 예루살렘 곧 모든 유대인들이 모여든 곳과 같은 어떠한 곳이든지 교회가 있고 복음이 전해지며 성례가 집행되고 경건한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면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를 믿음으로 그와 함께 즐길 수 있다.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을 등기하는 곳 곧 당신의 있을 곳으로 인정하는 곳이면 당신을 믿는 자들을 만나 주시고 복 빌어 주신다(요 4:21 등; 딤전 2:8). 훌륭한 해석자들의 대부분은 영광의 나라에서 성도의 무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만날 것을 알고 있다. "시체(주님의)가 어디 있으리라는 것을 묻지 말아라. 그리고 그들이 (믿는 자들)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묻지 말라. 그들은 확실한 방향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께 달려 있고 주님은 소생시키시는 주권자이시며, 믿는 자들의 중심이 되시고, 또 믿는 자들은 다 그(주님)에게로 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