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간구해도 아무 효과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예배가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의 안식일 습관에 대해 책망하신다. 안식에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에 어긋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기 위해 올라온다. 짐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예수님이 책망하셨던 장사하기 위한 도구들이나,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먹고마실꺼리을 말하는 것 같다. 예배보다는 다른 주변 것들에 몰두하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 짐인 것 같다. 계명을 어길뿐만 아니라, 주님과 아무 관계없는 예배였던 것이다. 그들의 예배가 회복되면 주님은 다윗과 같은 왕을 일으켜 그들을 회복시키실 수 있으시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던 것 같다.
예배라고 다 똑같은 예배가 아니라, 주님의 성령의 임재하심이 살아 역사하고 나타나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죽어서 형식만 남아 있는 예배도 있다. 죽은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다. 삶이 없는 예배가 그렇다. 하나님을 갈구하지 않는 예배가 그렇다. 자신들을 위한 예배가 그렇다. 살아 있는 예배는 무엇일까? 삶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주님 앞에 함께 모여 주님을 경험한 산 간증들을 주님과 교회 앞에 고백하고, 또 그 가운데서 형제자매들을 통해 주시고 선포하신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기를 소원하는 예배가 살아 있는 예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형식이나 예배의 스킬들이 정교하지 못하더라도 그 영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예배가 하나님 마음에 기쁨으로 드려지고, 그 예배에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케냐에 살면서 외로움이나 걱정보다 마음에 평안이 큰 까닭은 아마도 매일 갖는 이 경건의 시간과 날마다 듣는 찬양(MP3)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만날 사람도 거의 없고, 학교에서 교제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계가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더욱 주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빼고서라도....... 가끔은 이런 것이 초막 셋을 짓고 싶다던 베드로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내가 가끔은 우리 신선 놀이 하는 것 아니냐는 행복한 투정을 하기도 한다. 주님과 깊은 사귐을 누리고 나면, 주님은 나의 삶 속에 살아있는 예배가 경험되게 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사역하는 곳에도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주일 예배든, 개인의 일상의 예배든 그 예배가 살아야 그리스도인답게 힘 있고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주님 모든 예배 속에서 주님만을 추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예배를 날마다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