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項 止 行
第一目 明 修 止 方 法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 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常不得隨心外, 念境界後, 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 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 唯心無外境界. 卽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唯除疑惑⋅不信⋅誹謗⋅重罪業障⋅我慢⋅懈怠. 如是等人, 所不能入.
문 장 해 설
첫째, 샤마타를 닦는 방법을 설명한다. 샤마타를 닦는 방법은, 첫 번째, “샤마타(śamatha, 止)를 닦는 사람은 고요한 곳에서 살면서, 가부(跏趺)를 틀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正念)에 들게 한다”고 논술한다. 선정을 닦는 사람이, 숲 등의 고요한 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불교에서 예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그렇게 해서 계(戒)를 지키고,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생활을 한다. 계를 지켜서 악을 저지르지 않으므로 마음은 불안에서 벗어나고, 소욕지족의 수행을 하므로 만족하는 마음으로 살며, 신체를 건강하게 보존할 수 있다. 두 번째, 불전(佛前)에 지심으로 참회를 하여 업장을 벗어난다. 참회에 의하여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며, 업보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세 번째, 그 밖에 의식을 구족하고, 훌륭한 선지식을 모시며, 세간의 잡스러운 일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첫 번째의 “고요한 곳에서 산다”만을 들어, 다른 것을 생략한 것이다. ‘단좌정의(端坐正意)’란, 가부(跏趺)를 틀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正念)에 들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통일의 방법으로서, 원시불교 이래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제일 먼저 수식관(數息觀)이지만, 본론에서는, 유심관에 의하여 진여싸마디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선정의 실습을 채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식(氣息)에 의하지도 않는다’고 논술한다. 다음의 ‘형색(形色)에 의하지도 않는다’란, 신체의 부정(不淨)을 관하는 부정관이나 해골을 관하는 골쇄관을 가리킨다. 더욱이 ‘변처(遍處)’라고 하여, 원형의 단(壇)을 만들고, 그것을 적(赤) 또는 백(白)⋅청(靑)⋅황(黃)의 한 가지 색으로 빈틈없이 모두 칠한 다음, 그것을 응시하는 것에 의하여, 세계는 모두 붉다. 또는 세계는 모두 희다, 또는 세계는 모두 푸르다. 또는 세계는 모두 노랗다고 관하는 관법이다. 이들도 모두 이 ‘형색’ 속에 들어간다. 다음의 ‘공(空)’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도 관하는 관법이며, ‘변처’의 한 가지이다. 다음의 ‘지⋅수⋅화⋅풍’의 사대도 마찬가지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의하지도 않는다’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식(識)이다’라고 보는 관법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지⋅수⋅화⋅풍⋅청⋅황⋅적⋅백⋅공⋅식의 10변처(daśa-kṛtsna-āyatanāni, 十遍處)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법은, 외계에 현상이 실재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관(觀)해서 마음의 통일을 닦는 방법이다. 그러나 본론은 유심관을 채택하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관(事相觀)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법장의기』는 이것을 ‘도경(倒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망상을, 그 망상이 생겨나는 끄샤나(kṣaṇa; 刹那)의 끄샤나에 제거하며, 드디어는 ‘망상을 제거한다’고 하는 생각조차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은 유심소작(唯心所作)이며, 그런데다 마음의 본성은 무념이기 때문에, 이 ‘법성무상(法性無相)의 이취(理趣)’에 도달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디 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은 끄샤나의 끄샤나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끄샤나의 끄샤나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드디어 ‘망상을 제거한다고 하는 생각조차 버린다’는 것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마음 밖에 경계를 만든 다음에, 마음에 의해서 마음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 마음이 바깥 대상을 집착하여 산란해지면, 그 산란한마음을 다스려서 정념에 들게 한다. 이 정념이란, 다만 마음일 뿐이며, 외경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더욱 그 마음에도 자신의 특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끄샤나 끄샤나의 마음을 인정하는 한, 유심의 이치에 도달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념에 들면 마음을 끄샤나(kṣaṇa; 刹那)의 끄샤나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좌선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을 때의 마음가짐을 논술한다. 말하자면 좌선을 마치고, 사람들과 교류를 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수면을 취하는 등의 움직일 때⋅멈출 때⋅앉을 때⋅누울 때, 어느 때든지 항상 마음을 집중하는 방편을 잃지 않게 하여 법성은 부동하다는 도리를 관찰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음에 지(止)를 완성하여 마음에 정(定)을 얻었을 때의 것을 서술한다. 말하자면 좌선을 하여 마음에 고요함을 얻으면, 마음은 정념에 들어가므로, 샤마타의 힘이 맹렬하고 예리하게 된다. 그래서 진여싸마디(tathatā-samādhi; 眞如三昧)에 수순할 수 있게 되며, 더욱 진보해서 이 싸마디에 들어가 버린다. 이것이 샤마타의 완성이다. 그러나 아직 이것은 10신의 계위이기 때문에, 내범의 지위이다. 범부이기 때문에, 번뇌를 끊을 수는 없다. 성자의 깨달음의 지혜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진여싸마디를 얻음에 따라 번뇌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믿는 마음이 증장하는 것을 얻어, 십신(十信)의 계위를 완성하고, 초주(初住)의 계위에 들어가, 퇴보하는 일이 없는 단계를 재빨리 이룩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정취의 계위를 벗어나서, 정정취의 계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은 샤마타를 완성할 수 없다.
첫 번째는 진여를 의혹하는 사람, 의혹이 있으면 마음이 산란하여 오로지 일심(一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믿음이 없는 사람, 믿음이 없으면 오로지 일심이 될 수 없다.
세 번째는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샤마타를 얻을 수 없다.
네 번째로 중죄업장 즉 살모(殺母)⋅살부(殺父)⋅살아라한(殺阿羅漢)⋅파화합승(破和合僧)⋅출불신혈(出佛身血)의 5역죄(逆罪)와 음계(婬戒)⋅도계(盜戒)⋅살인계(殺人戒)⋅대망어계(大妄語戒)의 4빠라지까, 그리고 아만이 강한 사람, 게으른 사람은 제외된다.
이런 사람들은 진여싸마디에 들어갈 수 없다.
첫댓글 [샤마타를 닦는 방법은, 첫 번째, “샤마타(śamatha, 止)를 닦는 사람은 고요한 곳에서 살면서, 가부(跏趺)를 틀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正念)에 들게 한다”고 논술한다.]에서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에 들게 한다]를 <특정 대상에 집중하여, 선정의 표상을 성취한다> 라고 교과서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기 때문에 늘 마음 밖에 경계를 만든 다음에, 마음에 의해서 마음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 마음이 바깥 대상을 집착하여 산란해지면, 그 산란한마음을 다스려서 정념에 들게 한다. 이 정념이란, 다만 마음일 뿐이며, 외경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더욱 그 마음에도 자신의 특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라는 설명과 아구가 안 맞슴미다...
방님이 워낙 기본에 충실하셔가지고.. 오히려 중생계의 창의적? 아이디어에 해박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제가 이평래 교수님께 빙의해 보겠씁니다
참고) 전술을 요약하면..대강 [특정 대상을 취해서 집중하여 닦는 것이 아니다]는 주장.
[그렇기 때문에 늘 마음 밖에 경계를 만든 다음에, 마음에 의해서 마음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 원래 마음 밖의 경계란 있을 수 없는데, 중생이 특정대상을 취한 다음에(=마음 밖에 경계를 만든 다음에(그럴수는 없지만..아무튼..)) 뭘 해보려고 하는 거슨 안 된다.
* 너무 어거지 해석인데.. 뒤에 문장을 보믄 아구가 좀 맞슴다..
[그리고 또 마음이 바깥 대상을 집착하여 산란해지면, 그 산란한마음을 다스려서 정념에 들게 한다.
이 정념이란, 다만 마음일 뿐이며, 외경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 심외무경이란 자각? 이 곧 정념이며.. 이 정념을 통해, 중생이 '저 밖에 있다'고 착각하여 끄달리고 집착하여 산란해진 마음을 다스린다.
* 아무말이나 하는 것 같지만.. 중생계에는 혁신적인? 저급한 아이디어가 많슴다.. 결론적으로 아무말이더라도 나름의 가리키는 바가 있다는...ㅡ..ㅡ;;
[더욱 그 마음에도 자신의 특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 식과 식의 대상의 연기로 드러나는 모습.. 일체유심 심외무경.. 마음(식)은 자신의 고유한 특질이 없어 일체를 비춤으로써 성립하므로, 모든 것은 진여이다.
질문 : 대체 뭔 족보에도 없는 헛소리냐
답 : 요즘 K선종에서 유행인.. 그런 수행관?입니다..
-제가 너무 저급하게 오해했다면.. 교수님께 죄송.. _()_
현실 폭로 만담
구루 : 삼라만상.. 모든 번뇌.. 일체의 드러남은 당신 바깥에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는 당신의 마음일 뿐이오! 탁!(죽비 치는 소리, 카르스마 한 스푼 추가)
고객 : 헛!........ (눈물 주르륵)...... 30년 평생 '진여-마음'을 찾아 헤맸는데... 이미 여기 이렇게 있었군요..
번뇌 역시 이 '마음'일 뿐이었군요..
구루 : 진리는 구족되어 있으므로, 한 생각 돌리면 바로 그 자리라오. 중생이 한 생각 잘못 일으켜 헛되이 미혹되어 있을 뿐..
고객 : 크....(엄치척)
후기) [견성 뽕]이 빠진 며칠 후, 고갱님은 새치기 차량을 보며 빡이 쳤슴미다. 하지만 그는 바로 견성도인이란 말씀. 이내 일체유심-심외무경의 진리를 소환해서 '이 빡침 역시 뿌리가 없는..마음의 현현..어쩌고..'라고 중얼거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와씀미다. "크..역시 견성파워 오진다" 그 이후의 일은 지면관계상 생략..
황벽님 은근 공부 많이하신듯..
위 답글의 본글에 이미 적은 내용인데요. 다만 조금 퍼즐을 만들어서 약간 좀 더 생각을 하도록 적었기는 합니다.
마... 제가 그냥 뭐랄까... 그냥 적을까 고민 좀 하고 하던 중인데요.
대승기신론은, 선가 즉 선불교, 특히 한국 선불교의 '보물'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떤 마음은 그 마음과 상응한 대상과 함께 성립합니다. 집중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수행과 관련하여, 대승불교가 삼매 중심 전승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대승불교에서 수행이라고 하면 거의 집중이 근본인데요.
위 답글 본글 꼬리말에 적었듯, 집중에서는 그 대상이 아주 중요합니다. 집중은 그 대상을 성취하는 것, 그래서 그 대상을 존재 표상으로 획득하게 하는 거라서요, 아주 강한 탐착을 형성시키고 강한 속박력을 가집니다.
그런데 보통 다양한 수행들은 외적 대상을 선정합니다. 이거를 다른 말로 패러프레이징하자면, 지금 자신이 아닌 내지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겁니다.
분명 그렇죠? 호흡이든, 허공이든, 지수화풍이든, 그 무엇이든...
그런데 기신론 심진여와 심생멸의 일심에서, 불각의 방향 전개가 심생멸입니다.
여기서 기신론은, 스스로 내세운 일심 체계의 입장에서, 의문을 던지는 거예요. 수행의 근본이 집중인데, 집중을 닦음에 어찌하여 불각으로 향하는가?
일심계열도 유심론계열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유심론이라 그런게 아니구요. 기신론은 일심의 입장에서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런즉 대상 선정에서 기존 여타의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기신론만이 답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불교가 퀴즈쇼 정답 찾기가 아니거든요. 중요한 것은 체계적 완성미? 그런 거에 있어요. 우리가 어떤 전승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세계에 편입된다는 것인데, 같은 꿈 최소한 유사한 꿈을 꾼다... 그런 측면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심에 비춰, 외적 대상이 아니고, 어떤 수행이 각의 방향 전개이겠나? 각의 방향 전개 즉 심진여냐... 왜 대승기신론이 선가의 보물이냐... 선가의 가장 최상승법이 간화선이예요. 간화선은 "이기 뭐고?"로 대표됩니다.
"이기 뭐고?"가 뭐죠? 탐구심이야, 행온을 잡으라는 말을 하는 거라구요. 그런데 행온을 잡으려고 하면, 행온의 내용인 상온이 알려진다구요. 그래서 "以一切法本來無相"이라는 말을 제시하죠. '상'이 없는 거다... 그러니 그거에 붙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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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하면요. 성취했을 때, 집중의 대상에 강하게 속박되는데... 애초에 그러한 일이 없도록 대상을 선정해주고, 어떤 상이 알려지더라도 그거는 아니다라고 처음부터 못을 박아두는 겁니다. 소위 착각도인을 없애자는 거지...
대승기신론이 간화선이냐? 아니요. '없다'는 산냐도 가능합니다. 다만 以一切法本來無相이란 점을 자신에게 끊임 없이 상기시켜, 없다는 상에 빠지지만 않는다면요. 즉 대승기신론의 하위 전승 중 하나가 간화선인 겁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제가 그냥 선불교의 가장 대표인 간화선을 예로 들었을 뿐입니다.
층층이 구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층이 쌓일 수록 점점 더 구체화됩니다. 모든 게 다 그래요. 모든 것? 모습(相)으로 있는 거...
여러 차례 말했지만, 대승불교가 집중이 근본이다보니, 집중 수행만 하다보면 소위 싸가지가 엄어집니다. 기신론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불각으로 가서 되겠어? 무자비한 놈이 되는 거지... 그러다보니 자비관을 강조해서 보충을 좀 해줍니다. 불각이 없으면 자비를 어디서 논할 거야? 그렇죠? 일심이거든? 차별하면 안되요.
어쨌든 불교라는 것은요. 이 육척 단신에서 세계들 즉 꿈들과 그것의 발생과 소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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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