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석 작곡가
생몰 1930년 5월 8일 ~ 2010년 3월 14일
학력 신흥대학 영문학과
경력 1992년 통일국민당 창당 발기인
수상 2010년 은관문화훈장
본명은 의병(義秉)이며 춘석은 그의 아명이다.
해방 전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피아노 전공)에 입학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신흥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그는 중학교 때 이미 〈황혼의 엘레지〉·〈아리랑 목동〉 등의 작곡과 편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연주활동의 영향으로샹송이나 팝송 스타일의 노래와 외국가요의 번안편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트롯 가요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 후 은성경음악단을 조직해 KBS라디오의 생방송연주를 전담하면서부터이다.
특히1960년대 이후 가수 이미자를 만나면서 완전히 트롯 가요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66년 이후에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고있으며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다.
40여 년이 넘게 작곡생활을 해온 그의 대표곡으로는 〈비내리는 호남선〉·〈38선의 봄〉·〈섬마을 선생님〉·〈가슴 아프게〉 등을 들 수 있으며,
그외 200편이 넘는 영화주제가 등을 포함해 총 2,500여 곡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아울러 패티김·이미자·남진·나훈아·문주란 등 350여 명이 넘는가수들을 길러내 '박춘석 사단'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태양음향사를 창설, 자신이 음반을 직접 제작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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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력: 1930년 6월 4일 12:00 qq음/평: 1930년 5월 8일 12:00 남자
시 일 월 년
- 乙 辛 庚
- 酉 巳 午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신 대운: 순행
寅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사
왕 쇠 병 사 묘 절 태 양 생 목
81 71 61 51 41 31 21 11 1 현재 나이: 81 세 현재 대운: 己丑
오행 목화토 금수
체/내인 1 2 0 3 0 사오미 화국 사유축 금국 대기
운/외인 2 기축
세/외인 1 1 경인
월 1 1 기묘
일 2 계해
---------------------------태어난시간 미확인 이나 오행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진단표를 모두 작성하면 알수있으니, 공부하시는 분들은 작성해보세요.
그런다음 경력과 맞추어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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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박춘석’ 2700곡 남기고…
“가족처럼 지낸 분인데…” 원로작곡가 박춘석 씨의 서울아산병원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뒤 자리를 나서고 있다. 고인은 이 씨의 노래 중 3분의 1 이상을 작곡하며 이 씨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란 칭호를 안겨준 음악적 동반자였다. 연합뉴스가수 이미자 씨가 14일 별세한
‘섬마을선생님’ ‘비 내리는 호남선’ ‘마포종점’ '가슴아프게’ ‘초우’ ■ 박춘석씨 80세로 별세 1960∼90년대 히트곡 제조기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곡 받아 톱스타 반열 올라
“박춘석 선생은 한국 대중가요의 총설계사였습니다. 가요계의 전설이 된 가수들에 일일이 캐릭터를 부여한 위대한 프로듀서였죠.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임진모 가요평론가) 뇌풍증으로 16년 투병하던 원로 작곡가 박춘석 씨가 14일 오전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0세. ‘섬마을 선생님’ ‘비내리는 호남선’ ‘마포 종점’ 등 1960년대 이후 전 국민의 애창곡을 지었으며 1960, 70년대 패티 김, 이미자, 남진, 정훈희, 하춘화 씨 등 수많은 가수들을 톱스타 반열에 올렸다. 이들은 ‘박춘석 사단’으로 불렸다.
1954년 가수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로 작곡 인생을 시작한 뒤 1994년 8월 뇌중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2700여 곡을 작곡했으며 한국음악 저작권협회에만 1152곡이 등록돼 있다.
‘검은 뿔테 안경’이 트레이드마크였으며 ‘가슴 아프게’(남진) ‘공항의 이별’(문주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초우’(패티 김)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하동포구 아가씨’(하춘화) 등이 그의 작품이다.
특히 이미자 씨는 박 씨의 작품을 노래하면서 ‘엘레지(애가)의 여왕’으로 불렸다. 박 씨는 30여 년간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노래는 나의 인생’ 등 무려 700여 곡을 이 씨를 위해 작곡했다.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 씨는 본명이 의병(義秉)이고 춘석은 아명이었다. 네 살 때 풍금을 연주했고 봉래소학교와 경기중학교를 거치며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익혔다. 19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고 이듬해 신흥대(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경기중 4학년 시절 명동의 나이트클럽인 ‘황금클럽’에서 피아니스트 활동을 시작해 대중음악 작곡가로 변신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박 씨의 음악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박춘석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1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에 마련된 빈소에는 최희준, 패티 김, 이미자, 남진 씨 등이 찾아와 고인을 애도했다. 이 씨는 “박 선생님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아들이 어릴 때는 내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는 동안 아이가 박 선생님의 무릎에 앉아 놀던 기억이 난다”며 “성격이 워낙 깔끔해서 투병 이후에는 (누워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우리를 피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패티 김 씨는 “선생님이 쓰러지신 뒤 매년 자택을 찾아갔는데 노래를 불러드리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며 연방 눈물을 훔쳤다.
남진 씨는 “1966년 박 선생님 자택을 찾아가 곡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받은 곡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가슴 아프게’였다. 철없던 때는 연습 시간에 자주 늦어 박 선생님한테 군밤을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