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頓漸論議를 再論함
심재룡(서울대학교, 철학과)
1. ‘선문정로禪門正路’의 파문
1981년도에 출간된 성철스님의 『선문정로』가 한국의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파문은 한번에 그치지 않고 아직도 그 기나긴 파장을 주시해야 하겠끔 우리의 깊은 성찰을 유도하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가 돈점논으로 결정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파장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참가자들은 물론 대중들까지도 성철스님이 『선문정로』에서 제시한 돈오돈수가 선수행의 정통이라는 주장을 둘러싼 시시비비가 이 대회를 계기로 하여 가려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선문정로』가 뿌린 파문의 씨앗이 한갖 파문에 그치지 않고, 견성의 대도를 걷는 모든 불자들에게 분명히 한 가닥 맑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급기야는 쇄미해가 는 교단적 한국 불교가 중흥하는 밑거름의 역활을 다하도록 함께 기원해 본다.
마침 목교수는 이 논문에서 『선문정로』의 올바른 의취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목교수의 이번 논문 “『선문정로』의 근본사상"은 현대 한국 선불교의 맥락에서 『선문정로』의 올바른 의미를 파고 들려는 먼젓번의 논문 "현대 한국선의 위치와 전망" (1984년 간 『한국선사상 연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편, 551-579쪽)에 이은 두번째의 진지한 시도라고 여겨진다. 이 두편의 논문은 목차와 순서에 약간의 상이가 있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 중복되어 있기 때문에 논자는 자유로이 그 두 논문을 넘나들며 그 주장들을 확인하고 그 역사적 사실과 철학적 내용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먼저 그 주장들을 나열한 다음 조목조목 따지는 순서를 밟고다.
2. 열 다섯가지 주장
두세번 읽어가면서 밑줄을 긋고 번호를 매겨보았더니 목교수의 논문에서 대략 열다섯가지의 주장을 간추려낼수 있었다. 어느 것이 성철스님의 주장이고, 어느 것이 목교수의 주장인지는 분명치 않다. 우선 정리해 본다.
1)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정각한 것은 원돈적 각증이다. 이 역사적 연원과 체증의 실상을 퇴옹은 『선문정로」에서 확연히 밝히고 있다.
2) 『선문정로』는 보조의 『절요』, 혜심의 『선문염송집』, 서산의 『선가귀감』등 한국선사상사를 잇게 되는 새로운 저술이다.
3) 보조류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는 것은 퇴옹선사의 독단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명맥을 승계하고 정통선가를 재흥시키려는 의분심의 발로이다.
4) 따라서 조계종이 지금껏 선수행의 강요로서 삼아온 돈오점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한다.
5) 스스로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한 종교(주장)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교설이다.
6) 부분적으로 알았다고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다.
7) 완전한 깨달음 즉 돈증(頓證)은 번뇌가 하나없이 다하고 번뇌가 不生 無生하는 경지이다. 깨달음의 자리는 번뇌불생의 세계이다.
8) 한번 깨닫고 나면 영원한 깨침이어서, 수도와 좌선을 가차(假借)할 것도 없이 수치(修治)하지도 않고 「번뇌가』, 生起 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마조어록에서 인용)
9) 돈오점수를 직역하면 "깨달으면 부처이므로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거나 "천천히 닦으면서 깨치고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지근하고 모호한 수도방법을 「성철」스님은 호되게 쳐부수고 있다.
10) 禪門의 돈오 즉 견성과 알음알이로 깨달은 敎家의 돈오는 천양의 차이가 있다. 보조스님이 말씀한 信解는 解悟의 頓悟를 말함이니 이는敎家의 돈오점수 사상이다.
11) 달마가 직접으로 전한 것은 습이 이어받았으며, 이것은 오직 頓悟만 있고, 漸修는 없는 것이다. 혜능이 頌한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가 의미하듯 돈오돈수가 선가의 정통사상이다.
12) 보조스님이 『결사문』과 『수심결』에서는 하택규봉에 따라 돈오점수를 달마정전(達磨正傳)이라고 주장하다가, 『절요」에 와서는 하택규봉은 知解宗徒로 曹溪嫡統이 아님과 동시에 돈오점수는 依言生解하는 교가요, 선문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커다란 사상전환을 보였다. 고려선종사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3)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하는 선승이 있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선을 주로하는 조계종에 아직까지도 돈오점수의 행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14) 보조는 규봉의 解悟사상을 알음알이/知解라고 비판하면서도. 「절요』 『원돈성불론』 등에서 해오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보조는 禪門 直指單傳의 본분종사가 아니요. 그 사상의 주체는 華嚴禪 이다.
15) 한국불교가 統佛敎的(통이 여기서는 通이 아니라 統임에 유의할 것) 융섭을 배제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순수선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퇴옹이 선의 순수성, 전통성(정통성?)을 구현하기 위하여 보조국사에다 겨냥해 살펴본 것은 이를 표폄해서가 아니다. 「(3)의 주장 으로 연결됨」.
16) 보리수 아래서 돈오하고 45년 동안 점수하였다는 一說은 부처대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영원한 깨달음의 如來性이다.
3. 논성철비의 돈점(論性撤比擬 頓漸)
논자는 다음과 같은 비의를 던져본다.
1) 역사적 사실을 유사 근거로 내세워 진리성을 주장하는 중국 내지 동아시아 전통의 전형이 선종의 소위
28대 조사설이다. 역사적 부처가 원적 각증의 주체라는 선종의 종파적 주장을 진리의 근거로 삼을 때. 퇴옹의 진리주장이 의심스럽다. 이것은 마지막 (1)주장 즉 여래의 영원성과 관련하여 현대불자들이 반추해야 할 문제이다. 불교의 몰역사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법맥의 적통을 내세우는 유사 -역사적 의식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선종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늘 의문이 간다.
2) 『선문정로』가 현대 한국선종사에 새로운 저술임은 사실이다. 그런데 현대 한국선승들의 새로운 체험을 기초로한 저술이라기보다 전래의 중국 및 한국 할아버지 조사들의 글귀/文證을 들어 그 진리주장을 거듭하니 생생한 체험위주라는 선종의 진면목은 어디로 갔다고할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3) 도그마틱한 태도는 의례 순수성을 주장하고 나온다. 배타적 태도의 앞얼굴이 의분심이라는 목교수의 해석이다. 저자의 의도는 글에 나타나지 않으니 목교수의 해석을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4) 이제까지 요컨데 한국선불교의 수행지침이었던 돈오점수를 재고하자는 주장이다. 그렇다. 돈점론은 선종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양론에서 언제나 문제되는 직관과 노력의 강조점의 차이로서 늘 생각해 보아도 너무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5)에서 부터 8까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거기서 도출된 결론적 단언은 돈오점수의 직역과 이를 미지근하고 모호한 수도방법이라고 질타하는 퇴옹의 의분심이다. 그리고 11)에서 15)까지는 다시 정통선종인 돈오돈수를, 교가적 화엄선을 버리지 못한 보조의 전통적 수행법 즉 돈오점수법과 바꾸어서 적통을 되살리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의분심을 곁드려 주장하는 수행의 요체요 순수한 선이라는 돈오돈수는 과연 어떤 수행법일까?
번뇌가 불생하는 부처의 경지이다. 누가 부처의 경지를 몰라서 점수를 주장하는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응병투약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부처는 병이 없으니 약이 없다는 식의 동어반복을 영원히 녹음기틀듯 틀어 놓으면 병이 있는 중생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어떤이는 보조스님께서 시설한 삼종의 수행법을 양가적 태도 라고 하기도 하고(Buswell), 통불교적 회통적 태도라 하기도 했는데(이종익), 보조스님 스스로 아니 선종선사들이 전가의 보도로 쓰는 대승의 대기방편설을 어디에다 묵혀두고 그런 新說을 자꾸 新說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순수 적통을 네세우는 퇴용은 대승의 대기방면을 어디다 두고 맨날 영원의 노래로 우치한 중생을 호되게 꾸짖기만 하는지? 보조의 사상적 전환이라는 또 하나의 신설을 신설한 퇴옹은 거기에 덧붙여 이제까지 한국 불교의 전통이라는 회통성을 뒤업고 중국선사(마조계열의 선) 순수성을 내세우려 한다. 과연 한국인들의 근기에 알맞는 것일까? 논자는 회통성 못지않게 순수성을 주장하는 퇴옹의 주장 역시 한국불교의 역사적 변화 즉 역사성을 무시한 종교적 독단이라고 보여진다.
돈점의 교리적 내용을 따져서 그 순수성을 가리는 작업은 이미 1981년에 12명의 학자들의 논의에서 잠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보았다고 한다. (이미 책으 로 되어 나온지 오래다.) 또 이미 저 중국선종사에 유명 한 혜능 대 신수 즉 남돈북점의 대결이 신회에 의해서 주도된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이 (주장의 진위를 가릴 성질이 아니라)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번의 파문도 그 밑에 순수를 표방한 무슨 주도권 싸움이 아니냐는 의문을 낳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소개
沈在龍(1943-2004)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사 기자와 미국 하와이대학 강사를 거쳐 현재 서울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4년 별세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선불교의 철학적 기초』(태학사), 『끈기와 슬기의 사람들」(계몽사), 『한국의 전통사상』 (박영사), 『현대사회와 윤리」(공저, 박영사) 『현대사회와 평화」 (공저, 서광사),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공저, 집문당), 「동양의 지혜와 선」 (세계사), 「부처님이 올 수 없 는 땅」 (세계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아홉 마당 으로 풀어 쓴 선」 (스즈끼 지음, 현음사) 『연꽃속의 보석 이여-티베트 불교 길잡이」 (베러 음, 불일 출판사).『있는 그대로의 자유』(앨런 왓츠 지음, 세계사) 「유배된 자유 달라이 라마 자서전』 (정신세계사)등이 있다.
199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