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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실제의 정치적 도구이며, 정치적 교섭의 연속이고, 그것을 다른 수단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제1장 중.
10. 남쪽 문
“세계사의 중요한 하루가 끝났다. 가까이서 보니 그다지 훌륭해 보이지는 않는다.”
- 아르투어 슈니츨러, 1918년 11월 12일 일기.
지난 화에서는 건조하고 차가운 외교관 빌리 슈타들러가 ‘주권회복 담당 특임장관’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와의 관세동맹 협상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짧게 언급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오스트리아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대전쟁 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이중제국의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국이 해체된 뒤 남은 잔해 일부를 국가라고 부른 것에 가까웠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새로 지어진 집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제국의 한쪽 방이었고, 그 방에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그 벽을 고쳐 써야 했습니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치의 기본 축은 자연스럽게 두 단어로 요약되었습니다. “붉은 빈”과 “검은 농촌“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SDAPÖ)은 작은 나라의 수도라기에는 너무 거대한 공업도시 빈을 하나의 좌파적 생태계로 구축했습니다. 시영주택, 병원, 목욕탕, 학교, 도서관, 노동자문화, 스포츠, 여성·청년 조직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빈의 사회민주주의는 선거 때마다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정당정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였고, 가족이 사는 집이었고, 노동자가 씻는 목욕탕이었고, 토요일 저녁의 합창단이었으며, 병이 났을 때 찾아가는 진료소였습니다.
이들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 방법론인 오스트로마르크시즘(Austromarxism)은 자유민주주의를 단순한 부르주아 기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다수화·조직화되는 장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SDAPÖ는 공산당이 자라기 어려운 토양을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공산당(KPÖ)은 혁명을 약속했지만, SDAPÖ는 이미 열쇠를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낡고 느리고 관료적이었지만, 그 열쇠는 실제 문을 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언제나 나라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SDAPÖ는 거의 언제나 단일 정당으로는 가장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단위 정치에서는 대체로 야당에 머물렀습니다. 중앙정부는 대개 우파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직능질서에 기반한 가톨릭 보수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기독사회당(CS)이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범독일민족주의적 우익과 농민 이해를 대표하는 대독일인민당(GDVP), 농촌연맹(Landbund)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의회를 혐오하고, 제복과 행진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을 동경하는 보국단(Heimwehr)이 있었습니다.
우익 정파들의 생각은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기독사회당은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국가성을 지키려 했고, 대독당과 농촌연맹은 독일민족과 독일시장을 보았으며, 보국단은 의회정치를 끝장내고 직능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에는 대체로 합의했습니다. 농촌과 지방의 힘으로 중앙정부를 장악해 마르크스주의를 붉은 빈 안에 가두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던 1927년, 샤텐도르프(Schattendorf)라는 한 소도시에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SDAPÖ의 준군사조직인 공화수호연맹(Republikanischer Schutzbund) 단원 한 명과 애꿎은 여덟 살 어린아이가 극우주의자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 사법부는 범인들의 정당방위를 인정했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희대의 명판결에 감명을 받은 붉은 빈의 시민들은 자신들도 ‘정당방위’를 행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대법원이 자리한 법무궁(Justizpalast)으로 몰려갔고, 건물은 불탔습니다. 빈 경찰청장이던 요한 쇼버(Johann Schober)는 붉은 빈의 수장인 칼 자이츠(Karl Seitz) 시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소총이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빈의 거리에서 시위대 89명이 죽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이 전세계를 강타했을 때, 작은 오스트리아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경제는 이미 너무 작았고, 금융은 너무 취약했으며, 빈은 과거 제국의 수도였던 시절의 몸집을 아직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관세동맹을 체결해 시장을 합치자는 논리에는 대독일주의에 미심쩍은 시각을 보내던 기독사회당도 반대하기 어려웠습니다. SDAPÖ도 원칙적으로 독일과의 경제협력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대독당이나 농촌연맹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보국단조차 처음부터 대놓고 어깃장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대독 관세동맹 협상은 말 그대로 국운을 건 거국적 프로젝트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쇼버가 이 협상을 주도했습니다.
독일 쪽에서는 제5차 마르크스 내각의 외무차관 빌리 슈타들러가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슈타들러는 오스트리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독일 바깥에 남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도 위에서 독일 남쪽에 열려 있는 문을 다른 사람이 잠그는 것을 그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그런 문장이 외교문서의 첫 문장에 들어가는 순간 마지막 문장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게 독일은 당장 붙잡아야 하는 막차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에게 오스트리아는 고려 가능한 옵션에 가까웠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심지어 영국까지 반대하고 나서자, 슈타들러는 이 문제에 독일의 목숨까지 걸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천히 발을 뺐습니다. 외교관답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입니다.
그 직후, 오스트리아 경제는 무너졌습니다.
시티 오브 런던의 거물이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이던 루이스 로스차일드(Louis Rothschild) 남작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부실채권을 무리하게 떠안고 겨우 버티던 최대은행 크레디트안슈탈트(Credit-Anstalt)의 어음 만기 연장을 거부했습니다. 1931년 5월, 크레디트안슈탈트는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은행 하나가 무너지자, 사실은 은행이 아니라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는 바로 이 무렵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영향은 오스트리아에도 번졌고,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급성장과 대혼란, 그리고 그에 맞서는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ss)의 반나치 파시스트 독재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나치는 달랐습니다. 독일에서 나치는 시끄럽고 지저분한 일개 극우정당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품위 있는 방패가 되지 못했고, 중산층의 공포를 안전하게 담아낼 그릇도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관세동맹 실패와 크레디트안슈탈트 파산의 분노는 오스트리아 나치가 받아먹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두 갈래로 흩어졌습니다.
한쪽은 외세가 독일민족의 생존권을 짓밟았다고 외쳤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살아남으려면 더 조심스럽게가 아니라 더 과감하게 독일과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독당과 농촌연맹이 이쪽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관세동맹 실패는 경제정책의 좌절이 아니라 독일민족에 대한 국제적 모욕이었습니다.
SDAPÖ는 그 정도로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독일 정치는 이미 KPD의 급성장, 비상통치, 우파 혼란으로 점점 불길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그들 역시 독일과의 경제협력에는 여전히 열려 있었습니다. 다만 그 독일은 노동자의 권리와 붉은 빈의 자치를 보장하는 독일이어야 했습니다. 독일시장과 독일 노동운동은 숨통일 수 있었지만, 독일 비상정치와 독일 관료국가는 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애초에 나라를 독일에게 넘기겠다던 발상 자체가 문제였다고 외쳤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빨려 들어갈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처럼 온 나라가 직능적이고 유기체적인 조합국가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의회와 정당과 계급투쟁을 끝내고, 가톨릭적 질서와 직능대표와 강한 국가로 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국단이 그렇게 말했고, 원래부터 독일과의 협력에 미온적이던 기독사회당도 점점 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좌익과 우익, 친독과 반독, 강경론과 온건론이 뒤엉켰습니다. 오스트리아 정치의 질문은 더 이상 좌익이냐 우익이냐만이 아니었습니다. 은행이 무너진 뒤 사람들은 먼저 물었습니다. 친독이냐, 반독 - 또는 친이 - 냐.
출구 없는 샅바싸움이 이어지자, 정파들은 자연스럽게 1931년 11월 대선을 떠올렸습니다. 1929년 우익 진영이 주도한 헌법 개정으로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더 이상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총리 임명권, 내각 해임권, 제한적 의회해산권, 비상명령 승인권을 가진 강력한 직위가 되었습니다. 한 번만 제대로 이기면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이 정치권을 지배했습니다.
1차 투표 결과, 붉은 빈의 시장이자 SDAPÖ 후보인 자이츠가 과반에는 미달했지만 1위를 차지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자 기독사회당 후보인 빌헬름 미클라스(Wilhelm Miklas)가 2위에 올랐고, 대독당-농촌연맹 후보 쇼버가 그 뒤를 바짝 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보국단 후보이자 무솔리니의 추종자인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베르크(Ernst Rüdiger von Starhemberg) 공이 4위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우파가 이기는 선거였습니다. 1920년대처럼 반마르크스주의 하나로만 뭉칠 수 있었다면, 미클라스가 어렵지 않게 이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세동맹 실패와 크레디트안슈탈트 붕괴 이후 친독파와 반독파의 균열은 예전처럼 쉽게 봉합되지 않았습니다. 쇼버는 공식적으로 미클라스를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족주의 선전으로 자신의 대독일주의 동맹을 홍보했습니다. 독일과의 경제결합을 포기한 오스트리아 보수주의는 나라를 말려 죽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런 짓을 하면 가장 타격을 입는 사람은 당연히 미클라스였습니다. 결선투표에서 자이츠는 불과 0.9%포인트 차이로 미클라스를 제쳤습니다. 우익은 대통령권을 강화했지만, 정작 그 의자에 앉은 사람은 우익이 아니라 붉은 빈의 상징 칼 자이츠였습니다.
붉은 빈이 드디어 나라를 잡아먹었다는 말이 우익 신문들의 지면을 덮었습니다. 우익진영은 대혼돈에 빠졌습니다. 기독사회당은 대독당과 농촌연맹을 배신자라고 불렀고, 대독당은 기독사회당을 제네바와 로마 앞에서 무릎 꿇은 겁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국단은 양쪽을 모두 썩은 정당국가의 일부라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자이츠에게도 선택지는 많지 않았습니다. SDAPÖ 정부를 꾸릴 수 있다면 가장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순간 우익은 다시 반마르크스주의로 결집해 불신임을 때릴 것이고, 정국은 시작도 하기 전에 마비될 터였습니다. 기독사회당과의 대연정은 이미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습니다. 보국단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습니다. 남는 것은 의석이 적어 통제가 가능하면서, 최소한 독일과의 경제협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우익 대독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즉, 1927년의 숙적 쇼버였습니다.
자이츠는 쇼버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자이츠는 쇼버를 용서하지 않았고, 쇼버는 자이츠를 여전히 불신했습니다. 그러나 자이츠와 쇼버는 파시스트들이 더 싫었습니다. 자이츠에게 쇼버는 경찰 발포의 얼굴이었지만, 돌푸스와 보국단이 빈으로 진입하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쇼버에게 자이츠는 붉은 빈의 얼굴이었지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식 직능국가로 접혀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쇼버 내각은 정상적 과반내각이 아니었습니다. 대독당과 농촌연맹, 독립관료 중심의 소수내각이었습니다. SDAPÖ는 이들의 법안 발의 하나하나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권했습니다. 자이츠는 대통령의 비상명령 서명권과 총리 임면권을 쥐고, 쇼버가 붉은 빈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세웠습니다. 쇼버는 연방정부와 대외경제협상을 쥐고, 독일과의 우회적 경제결합을 추진했습니다.
자이츠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쇼버는 총리가 되었지만 빈을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궁은 붉은 빈의 안전판이 되었고, 총리실은 독일권 경제회복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1932년 여름, 파펜 개조내각의 특임장관이 된 슈타들러는 다시 오스트리아와의 경제동맹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이 판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와 범독일 우익이 같은 경제문서에 밑줄을 긋고, 기독교 보수주의자와 파시스트가 같은 오스트리아 독립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관세동맹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쓸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곧바로 크레디트안슈탈트 붕괴, 외교적 포위, 금융공황, 제네바의 차가운 회의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슈타들러는 이름을 쪼갰습니다. 청산협정, 문화협정, 철도운임 조정, 석탄·농산물 결제, 금융기술협력, 학술교류, 출판협력, 통화안정 협의. 하나하나는 작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관세동맹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슈타들러는 동맹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문서에 서명하고도 자신들이 같은 편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는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슈타들러와 쇼버, 자이츠는 비틀거리면서도 잘 협력했습니다. 대독일주의자들이 너무 앞서나가 또다시 외세를 자극하는 것보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적절한 제동장치를 거는 편이 슈타들러에게도 일하기 수월했습니다. 자이츠는 노동자 보호와 붉은 빈의 재정을 요구했고, 쇼버는 독일시장과 결제망을 요구했으며, 슈타들러는 그 두 요구가 같은 문서 위에서 서로를 죽이지 않도록 문장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일이 수월하게 풀릴 때는 한 번쯤 뒤를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패배자들의 분노가 어떻게 썩어가는지 보아야 했습니다.
대통령권도 잃고, 중앙정부도 잃은 기독사회당은 점점 급진화했습니다. 젊고 단단한 권위주의자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당권을 장악하자, 기독사회당은 자이츠-쇼버 체제와의 타협을 포기했습니다. 돌푸스는 더 강한 오스트리아 독립, 더 강한 직능국가, 더 노골적인 반마르크스주의를 말했습니다. 그에게 독일과 가까워지는 것은 나라를 잃을 위험이었습니다. 반면 이탈리아와 가까워진다고 해서 오스트리아가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푸스는 파시스트라기보다, 파시즘을 기독사회당의 행정언어로 번역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보국단을 경멸하면서도 필요로 했고, 무솔리니를 경계하면서도 이용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용하는 사람이 이용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솔리니 입장에서도 돌푸스가 점점 친이탈리아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극단적이라 거부감을 주는 보국단만이 아니라, 엄연히 오스트리아의 주요 양당 중 하나인 기독사회당이 알아서 가까워지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이 정말로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키는 것은 사력을 다해 막아야 했습니다. 대전쟁 승리를 거세당했다는 분노를 동력으로 나라를 잡아먹어 놓고, 정작 얼마 안 되는 전리품인 남티롤까지 독일의 압박 아래 놓이게 만든다면, 무솔리니는 그날로 주유소에 매달릴 처지였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자이츠와 쇼버와 슈타들러가 벌이는 외교적 기예를 이름만 바꾼 안슐루스(Anschluss)로 보았습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쇼버는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슈타들러는 그렇게 보이지 않게 만들고 싶었고, 자이츠는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게 막고 싶었지만, 외교에서 의심은 대개 문장보다 빨랐습니다.
그래서 파리와 로마는 반대파를 지원했습니다. 프랑화와 리라화가 국경을 넘었고, 그 돈은 신문사와 청년조직과 퇴역장교 모임과 보국단 주변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남의 돈으로 애국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절제력이 부족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1933년 5월 1일, 자이츠의 후임인 로베르트 단네베르크 빈 시장은 요근래 거리에서 부쩍 세력을 불리는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노동절 집회 관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 골치 아픈 독일공산당의 하수인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었습니다. SDAPÖ 지도부는 KPÖ가 붉은 빈 안에서 좌파 주도권을 흔드는 것을 경계했고, 공화수호연맹은 긴장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경찰도 움직였습니다.
진짜 사고를 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보국단 중에서도 통제되지 않는 급진 분파가 공화수호연맹과 경찰병력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탔습니다. 그들은 새벽녘 대통령궁을 급습했습니다. 이들의 계산은 단순했습니다. 자이츠는 붉은 대통령이었고, 쇼버 체제의 안전핀이었으며, SDAPÖ와 대독일주의자들을 억지로 같은 국가 안에 묶어두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를 제거하면 체제는 무너질 것이고, 기독사회당과 돌푸스와 보국단은 결국 자신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이츠는 총알 다섯 발을 맞았습니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오스트리아 전체가 얼어붙었습니다.
돌푸스는 경악했습니다. 그는 자이츠를 증오했고, 자이츠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원수를 대통령궁에서 쏴 죽이는 일은 그가 관리할 수 있는 권위주의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통제 가능한 압박수단이 아니라, 판을 부수는 짓이었습니다. 돌푸스는 기회를 보았지만, 동시에 재앙도 보았습니다.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보국단만 폭주할 것이고, 잡으면 살인자들과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쇼버도 경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경악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자이츠가 죽었다는 것은 자신의 체제도 죽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서명, SDAPÖ의 기권, 붉은 빈의 안전장치,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돌푸스와 슈타렘베르크가 “질서회복”을 외치며 권력을 장악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쇼버와 대독일주의자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쇼버는 만성 허혈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1932년 8월 사망했고, 정치적 실패에 따른 울분이 없는 이 대체역사에서도 1933년 5월 쯤이면 정상적인 정치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베를린의 슈타들러는 암호전문을 읽다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깨뜨렸습니다. 몇 초 동안 그는 깨진 잔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지도 위의 철도선을 보았습니다. 슈타들러는 오스트리아를 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솔리니는 더 복잡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키우던 맹견이 옆집 고양이를 물어죽이고 칭찬해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그 개가 물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양이를, 그 시간에, 그 집 현관에서 물어죽이라고 명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습니다. 맹견이 사고를 쳤다면, 이제 주인은 그 사고를 “경계근무”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가장 격노한 것은 SDAPÖ 위원장 오토 바우어(Otto Bauer)였습니다. SDAPÖ에게 5월 습격은 단순한 정치테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붉은 빈의 성채가 침공당하고, 그 붉은 빈의 아버지가 살해된 사건이었습니다. 자이츠는 대통령이기 전에 빈의 시장이었고, 시장이기 전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얼굴이었습니다. 보국단은 단지 국가원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붉은 빈의 기억을 쏜 것이었습니다.
자이츠는 죽었고, 쇼버는 병상에 누웠습니다. 이때,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대독당의 법무장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였습니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곧 기묘한 논리를 제출했습니다.
반민족적 우익 극단주의자들의 폭거와 그에 뒤따른 국민의회의 질서회복 실패는 연방대통령의 신체를 살해한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중앙 집행부와 국민의회의 정상적 존립 근거를 치유 불가능하고 비가역적으로 파괴하였다.
이에 현 중앙 집행부와 입법부는 헌법상 형식으로는 존속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해체된 것(Selbstausschaltung)에 준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화국을 구성하는 절대적 정치주체인 독일계 오스트리아 민족은 기존 정당적 의회형식을 넘어, 자신을 대표하고 질서를 회복할 임시 국민집행체를 구성할 원초적 권리를 보유한다.
모든 민족적 정치세력은 이 명령을 이행할 의무에 구속되며,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더 이상 합법적 반대파가 아니라 공화국의 재건을 저지하는 반국가적 세력으로 간주된다.
당연히 법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습니다. 헌법이라기보다는 헌법의 시체 위에 민족이라는 깃발을 덮어놓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오스트리아에서 법리적 정합성은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독당에게 이 논리는 필요했습니다. 자이츠 사망을 명분으로 돌푸스와 보국단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국가원수 암살에 대한 질서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친독 진영과 SDAPÖ를 다시 묶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대독당과 농촌연맹의 지역조직, 친독 관료와 법률가들, 독일과의 협정망을 모두 움직일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습니다.
이 언어에 올라탄다는 것은 SDAPÖ에게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의 조심스러운 친독주의를 버리고, 대독일주의 열차의 발판에 발을 올리는 것을 뜻했습니다. 독일의 권위주의 정권이 언젠가 빈을 삼킬 수 있다는 걱정은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보국단은 이미 빈의 문 앞에 와 있었습니다. 바우어는 분노했지만, 그의 분노는 논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 지도부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그 자(자이스잉크바르트)는 불쾌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노동자의 도시’를 침공하지는 않았소. 우리가 대문 앞에서 그를 쫓아낸다면, 내일은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릴 것이오.
바우어는 혁명을 원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혁명을 막을 말이 남아 있지 않아서 공화수호연맹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건, 오스트리아 내전의 시작이었습니다. 린츠(Linz)에 '오스트리아 구국안정정부'를 선언한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군부 내 지지자들과 보국단을 끌어들였습니다. 당연히, 수상하게 이탈리아어 구사 능력이 높은 이들도 더 자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베를린의 내각회의장에서는 이런 제목의 문서가 각료들에게 한 부씩 배부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질서회복 및 독일-오스트리아 교통·경제안전 보장에 관한 긴급 검토>
11. 기관총과 왕자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 마오쩌둥, <지구전론> 중.
1932년 이후의 독일은 내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독일인들이 내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매우 협소하게 해석했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월요일에는 전차 차고 앞에서 RGO가 피켓라인을 세웠고, 화요일에는 질서단 청년들이 깨진 유리창을 치웠으며, 수요일에는 공산당 기관지가 정간되었고, 목요일에는 실업자위원회 사무실이 경찰에게 털렸습니다. 금요일에는 누군가 총을 쐈고, 토요일에는 장례식이 열렸으며, 일요일에는 모든 정당이 독일을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총성을 내전이 아니라고 부르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헤르만 레멜레는 피셔-마슬로 지도부를 제치고 KPD의 당권을 장악한 뒤, 마치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다시 일으킬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그의 연설 속 독일은 언제나 혁명 전야의 결정적 순간이었고, 노동자 계급은 언제나 최후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부르주아 국가는 언제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지막 숨이 너무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었습니다.
KPD는 강했습니다. 베를린, 함부르크, 루르, 작센, 튀링겐의 공장지대와 실업자 구역에서 KPD는 더 이상 단순한 항의정당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KPD는 아직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군대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고, 관료조직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며, 농촌과 가톨릭권과 중도 노동조합은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SPD는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했고, SPO는 아예 그들을 막는 것을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레멜레는 매일 혁명을 말하면서도 정작 혁명을 선언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시에, 독일 국가 역시 KPD를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파펜은 우아하고 오만했으며, 종종 너무 늦게 현실을 이해했습니다. 내각의 실권자인 슐라이허 장관과 국군 역시 몇 차례의 '대통령 비상명령'을 통해 KPD의 세포조직들을 무력으로 억눌렀지만, 그건 공산주의의 근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증요법에 가까웠습니다. 파펜도, 슐라이허도, 심지어 중앙당과 FStP와 질서단과 SPO까지 KPD를 없애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KPD 전체를 단번에 불법화하는 일은 도시 전체를 폭발시키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KPD는 망치와 용수철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안티파와 RGO, 각종 조직들은 매일 두들겨 맞았지만, 매일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사이, 경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1932년 7월 로잔 배상금협정이 서명되었습니다. 독일의 배상금 90%를 탕감하는 이 조약은 라이히 재무장관 게오르크 치머만과 독일 재무관료들의 금자탑같은 성과였습니다. 또한, 1932년 11월부터 파펜 개조내각의 노동부 장관 겸 국가실업구제위원장을 맡은 기독교 노총 위원장 아담 슈테거발트(Adam Stegerwald)는 도로, 운하, 철도, 주택 등 국가인프라 수리 사업을 통해 공공일자리를 확충했고, 이는 독일의 실업률은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숫자, 지표는 지표일 뿐이었습니다. 독일인의 위장은 그렇게 예의바르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왕당파와 극우, 극좌는 로잔 조약 역시 비난했고, 빵집 앞의 줄은 여전히 길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쪽 문이 폭발하듯 열렸습니다. 1933년 5월 발발한 오스트리아 위기는 독일의 계산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빌리 슈타들러는 오스트리아 문제가 군사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성이 외교전문보다 빨랐습니다.
독일은 내부에서 공산당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쪽에서 이탈리아의 군사적 위협에도 대응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병력을 집어넣겠다는 말은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정치인들은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자유무역", "경제질서", "국민생활 보호", "국경 안정"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군사행동을 하고 싶지만 아직 외교문서를 찢고 싶지는 않을 때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문제는 국군의 총병력이 여전히 10만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산당과 싸우면서 이탈리아와 대리전을 벌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였습니다. 그러나 공개 재무장은 아직 위험했습니다. 영국을 설득해야 했고, 프랑스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말아야 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을 전면적으로 찢어버리는 듯한 조치는 삼가야 했습니다. 슐라이허 역시 지금 당장 두 번째 대전쟁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법은 독일답게 회색지대에서 애매하게 나왔습니다.
군대가 아니지만 군대처럼 훈련할 수 있고, 경찰이 아니지만 경찰처럼 출동할 수 있으며,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국가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조직. 그건 바로 질서단이었습니다. 마침 질서단은 독일 각지에서 현지 군경의 치안보조조직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빗자루와 구급상자, 배식차 대신 마우저(Mauser) 사의 소총을 들려보내는 건 쉬웠습니다. 그렇게, 질서단의 연계조직으로 국민질서보호단(Volksordnungsdienst, V.O.D.)이 만들어졌습니다. 정부는 이 단체가 무장조직이 아니라 비상근무조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외국 대사관은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지만, 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을 보느니 차라리 독일 정부의 설명을 믿는 쪽이 더 안심됐습니다. 교통시설 경비, 철도 보호, 수송로 안전 확보, 공공생활 유지. 문서상으로 보면 그랬습니다.
하지만 거리에서 이 조직은 다른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무장질서단(Waffen-OB)'. KPD는 이 이름을 더 좋아했습니다. 너무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싫어했습니다. 역시 너무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국민질서보호단에는 예비역 장교들, 전직 참모장교들, 사격교관과 통신병과 철도병 출신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무기고가 생기고, 트럭이 배정되고, 사격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군 병력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10만명이었습니다. 다만, 군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총을 쥐여줬을 뿐입니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습니다. RGO가 철도와 항만에서 파업을 일으키면 무장질서단이 나타났습니다. 안티파가 질서단과 충돌하면 무장질서단이 나타났습니다. 실업자 행진이 관청 앞을 막으면 무장질서단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군대는 거의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관총은 예상보다 자주 등장했습니다. 이전의 질서단은 얻어맞고 돌아오면 중산층의 식탁에서 수프를 얻어먹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주변에는 예비역 장교와 트럭과 통신장비와 기관총이 있었습니다. 공산당 청년들이 함부로 덤볐다가는, 진짜로 혈중 납 농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레멜레는 후퇴했습니다. 그는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기관총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너무 합법적으로 나타나는 세상에서는 혁명의 날짜를 다시 계산해야 했습니다. 코민테른도 그를 뜯어말렸습니다. 모스크바는 독일 혁명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공산당이 독일 정부에게 자신을 합법적으로 학살할 명분을 선물하는 것까지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봉기는 '행동'이 아니라 '상태'라는 말이 당 내부에서 돌았습니다. 국가가 고립되고, 사회민주주의가 갈라지고, 군이 망설이고, 노동자가 다수가 되는 순간. 그때가 봉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 총을 쏘는 사람은 혁명가가 아니라 경찰의 조수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사실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중앙이 아직 총봉기를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KPD는 바리케이드 대신 선거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투표소가 대통령궁으로 이어지는 길일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투표로 대통령궁에 들어가는데 국군이 그것을 막는다면, 반란은 누가 일으킨 것인가?
레멜레는 이 질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무장질서단이 몇 달동안 남긴 더 큰 효과는 공산당의 후퇴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훈련시키려면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독일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너무 많았습니다. 퇴역 장성, 전직 대령, 예비역 장교, 철모단 주변의 참전군인, 동부 엘베의 융커, 전몰자 유가족 조직, 구장교단 후원회, 힌덴부르크 개인숭배 네트워크. 그들은 모두 정치 전면에서 조금씩 밀려나 있었습니다. 파펜은 그들을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활용하지는 못했고, 슐라이허는 그들을 필요할 때 불렀지만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FStP와 질서단 기획자들은 그들을 군사전문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군사전문가는 총을 가르칠 뿐 아니라, 총을 쥔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말하기 시작합니다. 무장질서단의 사격장, 예비역 등록소, 전몰자 추모회, 지방 방위교육 모임은 곧 정치적 살롱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파펜은 너무 가벼운 남작으로 보였고, 슐라이허는 지나치게 계산적인 장군으로 보였으며, 치머만이나 슈타들러는 너무 밋밋한 관료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공산당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공화국도 싫어했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그 감정을 어떻게 조직해야 할지 몰랐을 뿐입니다.
그 무렵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건강은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86세 노인의 건강이 멀쩡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살아 있어야 했습니다. 공화국을 지키려는 자들과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동시에 '참아줄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건축자재에 가까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건축자재도 심장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위기 이후 힌덴부르크는 병상에 눕는 날이 늘었습니다. 대통령궁은 고급 병실이 되었고, 그 문을 지키는 사람은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Oskar von Hindenburg)였습니다. 오스카는 공식 대통령 대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서를 읽어주고, 보고를 걸러내고, 누가 아버지를 접견할 수 있는지 정하고, 무엇이 "원수의 뜻"인지 설명했습니다. 힌덴부르크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더 문제였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병든 자의 입은 매일 새로운 해석을 낳았습니다. 누군가는 그가 파펜을 여전히 신뢰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슐라이허의 보고를 싫어한다고 말했으며, 누군가는 독일이 다시 역사적 권위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의 출처는 대체로 같았습니다. 병실 문 앞이었습니다.
하지만 힌덴부르크의 직무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영영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33년 10월 4일, 대통령 유고 상태가 선언되었습니다. 독일은 이상한 선거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죽지 않았지만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원수의 초상화는 여전히 관청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는 원수의 후임을 뽑기 위한 문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품위란 거의 장식품이었습니다. 그래도 독일 정치인들은 장식품을 좋아했습니다.
1933년 12월 1차 투표가 치러졌습니다. 후보들은 독일의 분열을 아주 성실하게 대표했습니다. KPD는 레멜레를 내세웠습니다. SPD는 프로이센 주총리 오토 브라운을 내세웠습니다. FStP과 질서단, 쿠노 백작 주변의 온건 보수혁명주의자들은 1932년 대선에서처럼 칼 야레스를 밀었습니다. 중앙당과 바이에른인민당(BVP), SPO, ADGB 우파, 기독교노조의 지지는 아담 슈테거발트 노동장관에게 모였습니다. 그 외 DNVP에서는 철모단 지도자 프란츠 젤테, 나치당 잔여세력은 히틀러를 내보냈습니다.
1차 투표 결과, 레멜레는 약 27%의 득표율로 1위를 했습니다. 아무도 과반을 얻지 못했으므로 2차 투표가 열려야 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선 2차 투표란 현대적 의미의 상위 2인 결선이 아니었습니다. 후보를 새로 내는 것도, 사퇴하는 것도, 교체하는 것도 모두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레멜레에게 매우 좋은 제도였습니다. 공산당은 독일의 다수가 아니나, 반공 독일은 아직 누구의 이름으로 모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DNVP 당수이자 언론재벌 알프레트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는 날마다 선거 기류를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내보내, 반공 후보 단일화가 없다면 공산당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슈테거발트와 야레스의 단일화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는 누가 내려가느냐였습니다. 야레스는 파펜과 슐라이허가 관리하기 쉬운 밋밋한 후보였고, 그래서 쓸모가 있었습니다. 대통령궁에는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명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야레스 진영의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슈테거발트 진영은 훨씬 넓었습니다. 1차 투표 득표율도 조금 더 높았습니다. 기독교 노조와 ADGB 우파를 묶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슐라이허를 불쾌하게 했지만, 불쾌함이 숫자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SPD의 브라운은 자신의 처지를 알았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안전하게 대통령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SPD가 1933년 겨울에 배운 가장 잔인한 교훈은, 패배한 정당도 때때로 국가의 목줄을 쥘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브라운은 조건을 냈습니다. KPD 탄압과 합법 노동운동 탄압을 구분할 것. ADGB와 SPD 조직을 RGO와 함께 두들겨 패지 말 것. 질서단과 무장질서단의 무장화와 경찰권 대행을 제한할 것. 비상명령에 시간제한과 사후승인 절차를 둘 것. 파펜 내각의 개조를 검토할 것.
슈테거발트는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야레스 진영은 화를 냈습니다. 쿠노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고, 질서단은 배신감을 느꼈으며, 파펜은 모욕을 느꼈습니다. 슐라이허는 더 조용히 화를 냈습니다. 그는 브라운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브라운의 표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것은 장군에게 매우 불쾌한 종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습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August Wilhelm von Preußen), 통칭 아우비(Auwi).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너무 유명해서 무시할 수는 없고, 너무 가벼워서 안심할 수도 없으며, 너무 극성맞아서 출마 선언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가 있었습니다. 그가 아우비를 지지한다는 것은 한 왕자를 지지한다는 뜻만이 아니었습니다. 힌덴부르크의 유산을 호엔촐레른의 이름에 빌려준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 아우비는 1930년 돌격대에 가입해 기성 언론과 보수주의자들의 조롱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대체역사에서 아우비는 철모단, 질서단, 퇴역군인회 등 온갖 조직과 모임에 얼굴을 비추던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장 제정을 복원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카를 괴르델러(Carl Goerdeler)와 같은 왕당파 행정관료들,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August von Mackensen) 원수를 중심으로 한 무장질서단 주변의 군부 올드보이들, DNVP와 철모단의 강경파, 엘베 강 동쪽의 융커들, 빌헬름 프리크(Wilhelm Frick)를 비롯해 나치당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보수파, 그리고 강경 보수혁명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스카와 괴르델러 박사가 노린 것은 선거의 '납치'였습니다. "누가 레멜레를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힌덴부르크 이후 독일의 역사적 권위는 누가 계승할 것인가"가 중심 질문이 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슐라이허는 격노했습니다. 왕정을 복고한다, 말은 좋았습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 자신 역시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당파들이 수학을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레멜레가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나라에서 왕자를 카드로 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보석을 뒤지는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익 진영은 확실히 흔들렸습니다. 젤테는 거의 곧바로 사퇴했습니다. 야레스도 슈테거발트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습니다. 브라운 역시 '조건부 지지'라는 애매한 말과 함께 슈테거발트를 위해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슈테거발트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안정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독일을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독일이 그날 레멜레를 뽑지 않도록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 차이는 곧 드러났습니다.
레멜레는 패배했지만, 약 30%의 공산당 표를 확인했습니다. KPD는 대통령궁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독일의 모든 반공세력이 자신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협과 굴욕을 삼켜야 하는지 보았습니다. 그것은 패배라기보다 다음 선전물의 초안이었습니다.
아우비는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졌습니다. 그는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7.6%의 표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왕당파에게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궁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래된 깃발은 박물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흔들면, 아직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히틀러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나치당은 이미 시들고 있었습니다. SA의 추태, 스트라서파의 이탈, 쿠노 백작의 배신, 선거 실패, 질서단의 성장, KPD와의 거리전에서의 피로가 겹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우비가 나타나자, 우익 신화 시장이 무너졌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민족의 신화를 대표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호엔촐레른은 그보다 오래된 신화였습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자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자에게 관객을 빼앗겼습니다. 정치에서 그것은 때때로 패배보다 더 모욕적이었습니다.
NSDAP 당원들은 흩어졌습니다. 보수적이고 반공적인 이들은 아우비의 환상과 왕당파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반자본주의적이고 민족혁명적인 자들은 슈트라서의 흑색전선으로 갔습니다. 싸움터를 원했을 뿐인 SA 말단 일부는 좌우를 바꿔 KPD 주변으로 흘러갔습니다. 이것은 사상전향이라기보다 주소변경에 가까웠습니다. 독일 거리정치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민족을 위해 주먹을 휘두르던 사람이 오늘은 노동자계급을 위해 같은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나치는 사실상 붕괴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우익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장점은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같은 회의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개 공산당이 그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우비의 지지연합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정당으로 모였습니다. 독일국민갱신당(Deutsche Nationale Erneuerungspartei, DNEP).
이름은 신중했습니다. “복고”가 아니라 “갱신(Erneuerung)”이었습니다. 왕정복고를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면 가톨릭권과 행정보수파와 현실적 우익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갱신”은 훨씬 편리했습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그것을 제국의 갱신으로 읽을 수 있었고, 보수혁명주의자는 국가의 갱신으로 읽을 수 있었고, 괴르델러는 행정과 재정의 갱신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정치적 단어란 모두가 자기 뜻으로 오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더 짧게 불렀습니다. 흑백적 동맹(Schwarz-Weiß-Roter Bund). 갈색 셔츠가 벗겨진 자리에는 더 오래된 색이 돌아왔습니다..
12. 패배한 승리자
“어떤 지적 영향에서도 자유롭다고 믿는 실무가들은 대개 이미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중.
1934년 2월, 아담 슈테거발트가 대통령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에서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빈이 함락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엥겔베르트 돌푸스와 슈타렘베르크, 보국단, 기독사회당 진영이 승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신문들은 레멜레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적화된다느니, 아우비가 카이저를 다시 모셔온다느니, 힌덴부르크 이후 독일의 역사적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느니 하며 매일같이 종이를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빈이 무너지자 그 모든 말들이 순식간에 남쪽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독일 정치가 늘 그랬듯, 사람들은 어제까지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던 문제를 오늘 아침 조간신문이 도착하자마자 너무 오래된 문제처럼 취급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변덕이 아주 정당해 보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단순한 외국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남쪽 거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이 이탈리아식 장화 밑에서 깨졌습니다.
오스트리아 친독파가 패배한 이유는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그들은 애초에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자이츠 암살 이후 빈의 SDAPÖ와 대독일동맹 계열 우익은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습니다. 보국단이 대통령궁에 들어가 자이츠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공화수호연맹의 노동자들과 대독당, 농촌연맹의 친독 우익이 같은 전선에 선 것은 역사적 화해라기보다 불쾌한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같은 적을 미워했지만, 같은 나라를 꿈꾸지는 않았습니다.
쇼버가 아직 버티고 있을 때에는 그럭저럭 형태가 유지되었습니다. 쇼버는 빈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1927년의 학살자였고, 친독 우익에게는 경찰과 관료와 외교를 아는 질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모두가 싫어하면서도 모두가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정치에서 그런 사람은 의외로 쓸모가 많습니다. 대개 존경받는 사람보다 오래 버팁니다.
그러나 쇼버가 병석에 눕자, 이 불완전한 구조는 중심을 잃었습니다. 그 뒤 친독 임시정부의 얼굴로 나선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법률가였습니다. 그는 법률 문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존 중앙 집행부와 국민의회의 정상적 존립 근거가 치유 불가능하고 비가역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식의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종이 위에서는 국가를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종이가 총알을 막아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친독 우익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한 방에 묶어둘 정치적 무게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독당과 농촌연맹은 붉은 빈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회민주당이 오스트리아를 독일권으로 묶기 전에 먼저 볼셰비키화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습니다. SDAPÖ 역시 친독 우익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친독 우익이 보국단과 싸우는 동안만 노동자를 필요로 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노동자 주택단지에 경찰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맹은 “보국단이 자이츠를 죽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잡은 동맹”이었습니다. 공동국가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내각도, 하나의 군대도, 하나의 미래도 없었습니다. 적이 문 앞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든 함께 문을 밀 수 있었지만, 누가 열쇠를 가질 것인지를 묻는 순간 서로의 손목을 노려보았습니다.
반면 돌푸스와 슈타렘베르크, 보국단, 기독사회당 진영의 언어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매국노를 몰아내자.
빨갱이들을 죽이자.
타락한 도시 빈을 심판하자.
오스트리아를 독일 내전의 남쪽 지부로 만들지 말자.
역사는 불공평했습니다. 복잡한 쪽이 더 많은 사정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단순한 쪽이 더 빨리 총을 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부의 분위기도 친독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장교가 돌푸스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하던 옛 장교들, 가톨릭적 질서와 군대의 명예를 국가의 마지막 기둥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대체로 선택지를 그렇게 보았습니다. 독일에 나라를 가져다 바치는 자들, 붉은 빈에 나라를 넘기는 자들, 그리고 기독교 도덕과 직능질서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를 독립국가로 붙들겠다는 자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 번째를 골랐습니다. 그것이 가장 고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덜 역겨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장교단의 정치적 판단은 대개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탈리아는 그 판단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밀어 넣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브레너 쪽에서 병력을 움직이고, 보국단에 무기와 탄약을 흘려보내고, 장교단을 보내 훈련을 도우며, 돌푸스 정부를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이 빈까지 올 필요는 없었습니다. 브레너에 서 있기만 해도 베를린의 손목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기, 돈, 고문단, 정보, 선전, 자원병. 할 수 있는 것은 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국군은 여전히 조약의 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무장질서단은 공장 앞에서 노동자들의 머리를 깨뜨리고 역과 교량을 지키는 데는 쓸 수 있었지만, 이탈리아와 정규전을 벌일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KPD가 여전히 거대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바뀌었고, 대선은 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았으며, 프랑스는 라인란트 너머에서 언제든 고함을 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빈은 고립되었습니다. 린츠가 무너졌고, 철도와 보급선이 끊겼으며, 노동자 주택단지들은 하나씩 포격과 수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화수호연맹은 잘 싸웠습니다. 그러나 잘 싸우는 것과 이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특히 상대에게 포병과 식량과 국제적 후견인이 있고, 자신에게는 도덕적 분노와 부족한 탄약과 서로를 믿지 못하는 동맹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1934년 2월, 빈은 함락되었습니다. 돌푸스 진영은 그것을 질서의 회복이라 불렀습니다. 보국단은 그것을 오스트리아의 구원이라 불렀습니다. 이탈리아 신문들은 그것을 중앙유럽의 안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 신문들은 대체로 훨씬 덜 우아한 단어를 골랐습니다.
독일 좌파에게 붉은 빈의 함락은 단순한 외국 도시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에 난 상처였습니다. SDAPÖ와 늘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닌 KPD조차 충격을 받았습니다. 빈의 노동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노조 사무실이 폐쇄되고, 공화수호연맹 대원들이 처형되거나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독일 공산당 신문에 검은 테두리를 두르게 만들었습니다. 레멜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빈에서도 노동자를 구하지 못했다고.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에게 무기를 쥐여주고도 혁명을 두려워했고, 혁명을 두려워하다가 결국 반동의 포탄 앞에 노동자를 세워두었다고.
SPD는 그 말을 증오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참기 어려웠습니다.
우익의 반응은 슬픔보다 분노에 가까웠습니다. DNEP는 즉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파펜 내각이 외교니 균형이니 조약이니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적이 독일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왔다고 외쳤습니다. 빈은 함락되었고, 독일인들은 체포되었으며, 로마는 알프스 너머에서 웃고 있는데, 베를린은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는 문장이 흑백적 동맹의 전단지에 실렸습니다. 그 문장은 사실관계가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선전문으로는 좋았습니다.
내각, 특히 슐라이허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했습니다. 지금 당장 전쟁을 시작하자는 것인가. 10만 명의 국군 병력과 급조한 무장질서단으로 이탈리아를 상대로 알프스에서 정규전을 벌이고, 그 사이 KPD가 베를린과 루르에서 들고일어나며, 프랑스가 서쪽에서 군화를 끌고 나오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DNEP의 왕당파들은 대체로 잠시 입을 다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임 없는 자리에서 욕설을 내뱉는 일은 매우 쉬웠습니다. 독일 정치의 상당 부분은 그 기술 위에서 굴러갔습니다.
아무튼 파펜 체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슈테거발트가 대통령궁에 들어갔다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를 뒷받침하는 힘의 조합이 바뀌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중앙당의 가톨릭 세력, 바이에른의 보수적 기독교도들, 방위파 사회민주당원들, 기독교 노조와 ADGB 우파, 그리고 조금 더 넓게는 FStP의 국민자유주의자들, 질서단, 오토 브라운의 조건부 묵인까지. 이들이 슈테거발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파펜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파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파펜이 총리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받아서가 아니라, 힌덴부르크의 근시들 가운데 그나마 덜 최악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힌덴부르크가 병상 뒤로 사라지고 슈테거발트가 대통령이 된 이상, 그 낡은 핑계도 함께 치워져야 했습니다.
파펜은 정리해고를 통보받았습니다. 귀족답게 모욕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우아함은 실직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슈테거발트는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 내무장관을 임시 총리로 지명하고, 1934년 5월 총선거를 예고했습니다. 그뢰너는 국군의 원로였고, 슐라이허의 세계를 알고 있었으며, 사회정책과 노동문제의 언어도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DNEP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대화는 가능했고, SPD와도 접점이 있었습니다. 중앙당, BVP, SPO, FStP, KVP 연합이 당장 갈라지지 않도록 묶어둘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뢰너는 새 시대의 총리라기보다, 무너지는 선반 밑에 끼워 넣은 튼튼한 나무토막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은 칭찬이었습니다. 1934년 독일에서 튼튼한 나무토막은 꽤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5월 총선 결과는 누구에게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독일적인 결과였습니다. 총 608석 가운데 KPD는 178석을 얻어 최대 정당 지위를 완전히 굳혔습니다. 레멜레는 대통령 선거에서 졌지만, 의회에서는 더 커졌습니다. 붉은 빈의 패배는 공산당에게 애도의 언어와 복수의 언어를 동시에 주었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조합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DNEP였습니다. 흑백적 동맹은 106석을 얻어 제2당으로 뛰어올랐습니다. 나치가 실패한 자리에, 더 오래된 색이 돌아왔습니다. 갈색 셔츠의 고함 대신 흑백적 깃발과 왕당파의 분노와 후겐베르크의 인쇄기가 들어섰습니다. 독일 우익은 완전히 새로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주 낡은 것을 새 포장지에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에서 그것은 종종 혁신이라 불렸습니다.
SPD는 99석으로 떨어졌습니다. SPO 이탈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고, KPD의 공격을 막지 못했으며, 붉은 빈의 패배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여전히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노동자 세계의 유일한 목소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정권 지지연합은 과반은커녕 의석 4할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패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대통령을 쥐고 있었고, 행정과 재무와 질서의 언어를 쥐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SPD와 DNEP 중 한쪽만 묵인하면 버틸 수 있었습니다. 둘이 KPD의 불신임 표결에 한꺼번에 찬성하지 않는 한, 슈테거발트의 비상대권과 의회 산수는 아직 정부 편이었습니다.
그것이 새 체제의 진짜 헌법이었습니다. 정권은 서로를 혐오하는 두 사냥개에게 번갈아 먹이를 주는 사육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SPD에게는 노동권과 공공근로, 무장질서단 통제의 약속을 던져주어야 했습니다. 공장 앞에 회색 제복들이 나타나 노동자들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을 팔아야 했습니다.
DNEP에게는 다른 고기가 필요했습니다. 재무장, 주권회복, 군의 명예 회복. 베르사유의 사슬을 끊겠다는 말. 15년간의 굴욕을 끝내겠다는 말. 오스트리아를 로마의 손아귀에서 언젠가는 꺼내오겠다는 말. DNEP는 그 말들을 좋아했습니다. 다만 언제나 그 말들 뒤에 “지금 당장”을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슈테거발트와 합을 맞출 새 총리는 어려운 조건을 만족해야 했습니다. 재무장과 군수공업 확충을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외교적 재앙은 피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처우도 최소한 관리 가능한 비전 안에 묶어야 했습니다. 군부를 설득하고, 산업계를 움직이고, 영국을 달래고, 프랑스의 고함은 견디고, SPD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지 않으며, DNEP가 당장 정부를 배신했다고 소리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런 인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흔했다면 독일은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칼 야레스의 이름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는 안전했고, 익숙했고, 대통령 선거 단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그래서 문제였습니다. 그를 총리로 앉히는 것은 너무 노골적인 보은성 인사처럼 보였습니다. 독일은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체면이라는 얇은 포장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의외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추천자는 쿠노 백작이었습니다. 파펜이 실각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정치권의 브로커였고, 라인란트 산업계와 우익 자금망을 연결하는 큰손이었습니다. 그는 기업가이자 옛 DVP의 창립 멤버였던 알베르트 푀글러(Albert Vögler)를 추천했습니다.
푀글러는 통합제철(Vereinigte Stahlwerke AG)의 의장이었습니다. 통합제철은 독일 최대의 석탄·철강 콘체른이었고, 이게파르벤(IG Farben), 지멘스(Siemens)와 더불어 독일 산업계의 괴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독일 전체 자본주의의 왕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화학에는 이게파르벤이 있었고, 전기에는 지멘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다시 대포와 장갑판과 기관차와 군함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결국 루르의 철과 석탄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장부의 가장 큰 이름이 통합제철이었습니다.
푀글러는 대중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열광적인 연설가도 아니었고, 거리의 깃발을 흔드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이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보였습니다. 독일에는 이미 연설가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라를 구하겠다고 외쳤고, 몇몇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푀글러는 적어도 숫자를 알았습니다. 철강 몇 톤이 필요한지, 석탄을 어디서 끌어와야 하는지, 신용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숙련공을 얼마나 붙잡아두어야 하는지, 군수공업이 장부 위에서 어떤 속도로 자라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1934년 베를린에서 그것은 드문 자격이었습니다.
그는 정파색이 약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파색이 약하다기보다 정당정치의 더러운 물감이 아직 얼굴 전체에 묻지 않았습니다. 옛 DVP의 창립 멤버였고, 그 후신인 FStP의 당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당수라기보다 산업계 인물로 보았습니다. SPD는 그를 군수자본가라고 의심했고, KPD는 당연히 훨씬 더 나쁜 말을 썼습니다. DNEP는 그가 충분히 민족적이지 않다고 불평했지만, 재무장을 맡길 수 있는 철강의 남자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Zentrum과 BVP는 그에게 슈테거발트의 사회정책적 족쇄를 채우면 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푀글러 내각이 성립했습니다. 목표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경제회복. 더 이상 노동자들을 공산당에 빼앗길 수 없었습니다. 1920년대의 노사협조가 박살났다면, 새 계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그 계약은 낭만적이지 않을 것이고, 평등하지도 않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노래로 기념할 만한 것도 아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업자에게는 노래보다 일자리가 먼저였습니다. 마르크스 내각과 파펜 내각이 부서지며 남긴 몇 안 되는 유산은 공공 일자리 확충이었습니다. 푀글러는 그것을 더 키우려 했습니다. 도로, 운하, 철도, 주택, 통신, 공장 설비. 굶주린 사람에게 삽을 쥐여주는 정책이었습니다. 아주 인간적이지는 않았지만, 굶기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둘째, 주권회복. 이 말은 더 우아했습니다. 실제 뜻은 재무장이었습니다. 다만 히틀러식으로 고함을 지르며 조약을 찢어버리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히틀러도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푀글러식 재무장은 장부와 계약서와 공장 증설계획의 냄새가 났습니다. 주변 강대국들, 특히 영국을 필요 이상으로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 베르사유 조약을 우아하게 찢어버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프랑스는 항상 화가 나 있었고, 소련은 빨갱이들이었고, 이탈리아는 자기가 강대국인 줄 아는 파시스트 돼지들이었으므로, 결국 차를 마실 상대는 영국인이었습니다.
독일의 과제는 간단하게 말하면 이랬습니다. 프랑스인과 러시아인의 욕설과 고성을 한 귀로 흘리면서 영국인과 차를 마시고, 그 사이 군함과 비행기와 징병제와 군수공장을 하나씩 장부에 올리는 것.
오스트리아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잊는 척할 수 없었습니다. 돌푸스의 오스트리아는 독일 정치의 남쪽 상처가 되었습니다. DNEP는 매일 그 상처를 손톱으로 긁었고, KPD는 그 피를 노동자 계급의 배신으로 해석했으며, SPD는 그 앞에서 말을 고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슈테거발트와 푀글러는 오스트리아를 즉시 해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탈리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만들겠다는 문장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푀글러 내각은 시작부터 모순 위에 세워졌습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재무장해야 했고, 노동자를 공산당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수공업을 키워야 했으며, 우익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영국과 예의 바르게 협상해야 했습니다. 독일 정치는 아주 오랜만에 합리적인 사람을 총리로 세웠습니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이 합리적인 결과를 만든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자들이 자기 자녀에게 들려주는 동화에 가까웠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독일 정치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반독에 진심이었습니다. 파리에서는 합리적으로 재무장하는 독일이 미친 듯이 고함치는 독일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고함은 조롱할 수 있었지만, 장부는 조롱하기 어려웠습니다. 로마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승리가 전리품이자 족쇄라는 사실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무솔리니가 자신이 유럽의 심판관이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믿음은 곧 아프리카의 모래 위로 걸어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야전에서 식사를 추진하는 무장질서대원들, 1933년 10월.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백작, 1934년 2월. 그는 이제 독일 보수정치의 거물이다.
독일국민갱신당(Deutsche Nationale Erneuerungspartei, DNEP)의 첫 전당대회, 193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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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들 피를 토할 것 같으면서 아슬아슬하게 토하진 않네요.
쿠노가 킹메이커가 됬군요.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쿠노를 보니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푀글러 내각에선 슐라이허는 어떻게 됬나요?
+흑백적 동맹이라니 이거 카이저라이히에서 따온건가요?
사실 카라 슐라이허 루트를 의식해서 일부러 푀글러 쪽으로 갔습니다. 여전히 군부 실세이기는 하겠지만, 슐라이허의 주장인 횡단전선(Querfront)은 푀글러 내각이 가져가게 되겠죠.
독일민족갱신당이라니..... 이거 프로이센 사회주의+파시즘인가요?
왕 없는 왕당파.. 그러니까 우익 드골주의 비슷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왕당파지만 나치보다 온건해진 셈이니 공화국엔 이득이 아닐까요(?)
+쿠노는 보수혁명주의자니까 DNEP로 갔나요?
@E.E.샤츠슈나이더 오 그나마 공화국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군요(?)
@로콘 당적은 없는 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일종의 기불릭(…)
+ 아마 곧 등장시킬 카를 폰 뢰벤슈테른이 DNEP의 찐 좌파 보수혁명주의자고, 쿠노는 그냥 돈 벌고 정치적으로 잘 나가는 게 더 중요한.. 좀 더 냉소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인물입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자유민주주의' 독일..
비상대권통치를 몇년간 계속하고 있으니 그 자유민주주의 맞네요 ㅋㅋ
솔직히 지금 당장 독일이랑 이탈리아랑 붙어도 무솔리니의 공격은 독일 무장질서단에 막힐 것 같다는 생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