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대攬景臺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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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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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攬景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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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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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입암면 산해 3리 산 29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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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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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시(權泰時, 1635~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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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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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광해군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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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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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숙종10), 1916년,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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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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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문중 | |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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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攬景臺)는 용담(龍潭) 권지(權誌, 1567~1637)가 1615년(광해군7) 영해도호부사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의 권유와 건축비 부담으로 반변천 강안 남경대
절벽 위에 대지를 마련하여 정자를 짓고, 좌우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여 남경대라
하였다.
권지는 임진왜란 때 이곳 이웃 마을인 북면 후평리에 피난하여, 용담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한 적이 있으므로 남경대 주변은 익숙한 지형이었다.
아들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과 손자권태시도 이곳을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권태시가 죽은 뒤 남경대는 폐허가 되었는데,
1817년(순조17)경 권태시의 6대손 권상도(權尙度)가 사림에 폐허 참경을 알려서 1827년
(순조27) 권지, 권창업, 권태시 3대의 학행을 추모한 영남사림에서 남경대 중건계(重建契)가
조직되고, 이로부터 약 100년 후에 사림대표 정건모(鄭建模), 조진용(趙晉容), 권한모(權翰模),
신익호(申翼浩), 오석준(吳錫浚) 등이 주도하여 3년간의 건축공사로 훼철된 봉람서원
(鳳覽書院)의 기와와 목재로 1916년 남경대를 중건하고 춘추로 계회를 하였다.
그 뒤 1993년에 후손에 의하여 남경대가 새로 건축되었다. |
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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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이다.
하층은 모두 개방시켰으며, 상층에는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인 우물마루를 두었으며,
퇴칸의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시멘트 기단 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은 후 12본의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오량가구의 홑처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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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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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攬景臺) |
산택재(山澤齋) |
영모당(永慕堂) |
당 안의 동편 벽면에 걸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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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기(攬景臺記) |
1920년 9월 하한(下澣)에 진성(眞城) 이만규(李晩?, 1845~1921)가 쓴 기문이고,
기문 뒤에는 1992년에 중건한 사실을 기록한 추록(追錄)이 적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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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택재운(山澤齋韻) |
영모당운(永慕堂韻) |
차운(次韻) |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각각 쓴 2수의 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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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次韻) |
난은(懶隱) 이동표(李東標)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각각 쓴 2수의 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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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판(詩板) |
종후생(宗後生) 권재강(權載綱)이 쓴 시문이다. |
누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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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정이야기 |
권태시는 1684년(숙종10) 남경대를 중건하고 이곳이 반변천에 위치하여 경치와 지형이
『주역(周易)』의 산택손괘(山澤損卦)와 같다고 하여, 남경대에 산택재라고 편액하였다.
산택손괘는 못의 흙을 파서 산에 올리면 못은 깊어 좋고 산은 높아 좋아진다는 것인데,
자기 수양을 철저히 하면 스스로 좋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곳에 이동표(李東標), 권두경(權斗經), 민정중(閔鼎重), 권상하(權尙夏) 등당대의 명현들이
찾아와 권태시가 지은 「산택재 원운(山澤齋原韻)」에 차운하면서 수려한 산천의 풍광을
격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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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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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예(權?, 1495~1549) |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崖)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16년(중종11) 식년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마애실기(磨崖實記)』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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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지(權誌, 1567~1637) |
자는 중명(仲明), 호는 용담(龍潭)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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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창업(權昌業, 1600~1663) |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권지(權誌)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언필(朴彦弼)의 딸이다.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박호(朴豪),이엄(李儼) 등과 교유하였다. 효종 때에 재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왕명에
향리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추천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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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시(權泰時, 1635~1719) |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선중기의 뛰어난 예학자이다.
그는 고려조 개국공신인 태사공 행(幸)의 25세손이며, 중종시 이조판서를 지낸 권예가 고조부가 된다.
부친은 문행으로 널리 알려진 숭정처사 권창업이다. 권창업과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당시 명사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어려서 경당 장흥효의 수문인이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읽었고, 장성하여 졸재 유원지 문하에서 성리, 상수, 예설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1684년(숙종10) 용담 권지와 번곡 권창업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던 진보현(현 영양군 입암면) 북면
문해리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라 자호하여 현판을 달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90년(숙종16) 근곡 이관징, 석담 권대운, 갈암 이현일 등 남인 계열 대신들의 학행 천거로 장악원
주부를 거쳐 충청도 회덕현감이 되었다. 이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퇴임 때 회덕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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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경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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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경관 |
영양군 입암면에서 2번 군도를 타고 오다가 산해교를 건넌 뒤 바로 도로변 오른쪽에는 건물이
남경대(攬景臺)임을 알리는 꽤 큰 석비가 세워져 있다. 석비 오른편에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남경대가 확 트인 공간 안에 펼쳐져 있는데, 건물 앞에는 꽤 넓은 마당이
있고, 30여 그루의 소나무가 둘러가며 심겨져 있다. 건물 뒤로도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다.
마당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반변천이 흐르는 산해교가 옆으로 바로 보이고, 산해리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건물 앞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으며, 대 앞뜰에는 반타석이 있다. 남경대 좌측 뒤로 좁은 오솔길로 30m 쯤 들어가면 처사(處士) 송헌(松軒) 권백원(權百源) 묘가
있다. 대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우측 하류방면으로 굽이치는 곳에 넓은 분지가 있는데,
이곳 산해리에는 국보 제187호로 지정된 봉감모전오층 석탑이 있다.
입암면 산해2리에 위치한 이 탑은 건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탑의 기단은 자연 편평석(偏平石)으로 부설한 한 변이 약 5m이고, 그 뒤에 방형지대석
(方形地臺石) 위에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이 구성되었고, 높이는 약 8m이며 각 부재(部材)는
전형(塼形)을 모방하여 수성암(水成岩)으로 만들어진 전(塼)으로 축적하였다. 남경대 앞에는 초선대(招仙臺)가 있는데, 반변천 가운데 돌출하여 높은 석대를 이루어 작은
독산(獨山)같이 보이고, 또 큰물이 지면 섬 같기도 하다. 상부가 평평하여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으며, 풍치가 아름답다. 그 아래는 여러 사람들이 풍유와 천렵으로 많이 모여 노는 곳이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석보입암권 > 입암면 산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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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이 큰 내를 이룬 마을 ‘산해리(山海里)’ |
산해리는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마을에 속한 자연부락을 지나는 마을이다.
낙동강의 동쪽원류인 반변천과 소하천인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은 큰 내를
이루었으니 마치 산 속의 바다를 연상하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동산(東山)과
문해(汶海)의 이름을 따서 산해라고 한 것이다. 본래 진보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해동,춘감동,신천동,주파동,
삼산동의 일부와 안동군 임동면의 동산리를 합하여 영양군 입암면에 들게 하였다. 최근 이곳 산해리에서 민간 제작용 고려청자가마터가 발견되어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수습발굴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산해리에는 10여개의 자연부락이 속해 있는데, 대개 마을의 지세에 따라 부락의 명칭이
정해졌다. 산해리에 중심이 되는 마을인 문해동(汶海洞),문해(汶海),무내는 반변천과 동산천 두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많아 문해라고 하였다. 문해 서쪽의 긴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 동산태,동산(東山),동산동(東山洞)은 옛날 안동현이
속했을 때, 동산령 너머 마을이라 하여 동산동으로 불리워졌으며, 윗마을을 동산태,
아랫마을을 아랫동산태라고 한다. 문해 북서쪽 둔덕에 위치한 배두들,주파(舟坡),주파동(舟坡洞)은 안동김씨가 약 20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모양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는 가득차면 가라앉는다고 해서 살림이 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동산동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동산,하동산(下東山)이라고 불리워지는 마을은 그
아래로는 문해가 이어지고 있다. 주파와 동산동 그리고 문해를 잇는 세 갈래 길이 있으며
현재는 산해3리이다. 문해동(汶海洞) 서남쪽에 위치한 봉감(鳳鑑,鳳甘),봉감동(鳳鑑洞,鳳甘洞)은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약 500년 전인 1599년(선조32) 이곳에 서원을 창건하여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으나 그 후 봉감서원(鳳鑑書院)이라 개칭되었다.
지금은 봉감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으며,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이 자리 잡고 있다. 산해마을에는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가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반변천 가에 세운
남경대(攬景臺)와 봉감사(鳳鑑寺) 터에 남아있던 벽돌로 쌓은 봉감모전오층석탑,
그리고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1599년(선조32) 이곳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창건하여
퇴계를 배향하다가 뒤에 터만 남은 서원터가 남아 있다.
남경대攬景臺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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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수산/http://blog.daum.net/kil0930>
영양남악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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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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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정(南岳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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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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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 147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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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 |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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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 |
1685년 남악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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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시기 |
: |
1761년 남악정 중수, 1821년 중수, 1980년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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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 |
재령이씨 종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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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 1985. 8. 5 지정 | |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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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정(南嶽亭)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창건 당시에는 초당이었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기와집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현일의 연보를 통해서 이현일은 1673년( 석보면 남악실에 작은 집을 지어 이듬해 이거하였고,
1685년에 2칸의 초당을 완성하여 ‘남악초당(南嶽草堂)’이라는 편액과, 영양 수비(首比)에서
지낼 당시에 지은 『갈암기(葛庵記)』를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현일의 6대손인 수졸재(守拙齋) 이상채(李相采, 1787~1854)가 지은 『남악정중수전말기
(南嶽亭重修顚末記)』와 이숭일의 7대손인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의
『남악정기(南嶽亭記)』에는 1761년에 건물이 없어진 남악초당 터에 5세손인 인재(仁齋)
이광주(李光澍)가 족제인 이광실(李光實)등과 합의하여 중건을 했었는데, 건물이 퇴락하자
1821년(순조21)에 다시 주손인 이수억(李壽?)과 이수악(李壽岳) 등이 중심이 되어 중수를
한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현일의 10대손인 간송(澗松) 이장호(李長浩, 1905~1981)가 지은
『남악정중수기(南嶽亭重修記)』를 살펴보면 현재 주남에 있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퇴락한 건물을 문중과 유림이 힘을 합해 1980년에 중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악정은 1985년 8월 5일 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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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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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정은 정남향을 한 정자와 진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고, 오량의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높이 1미터 가량 돌을 쌓아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건물의 정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그 계단 위에 섬돌을 놓았다.
자연석 주초를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놓고, 방 측면에 구들을 깔았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고, 이 퇴칸의 주위에는 정 중앙의
반 칸 규모만 남기고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진입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평대문을 세웠다.
중앙의 통로에는 두 짝의 판문을 달았고, 양 쪽에 있는 1칸에는 각각
장판각과 창고로 이용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정자와 진입문은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정자의 동북쪽 담장 귀퉁이에는
화장실이 있다. 정자의 동쪽과 서쪽 담장 아래는 화단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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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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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문(弘道門) |
남악정 진입문의 현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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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초당(南嶽草堂) |
남악정 어칸에 위치하고 있다. 남악정의 초창기는 초가였기 때문에 초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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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정중수기(南嶽亭重修記)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10대손인 간송(澗松) 이장호(李長浩, 1905~1981)가
쓴 중수기문이다. |
누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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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이 아무리 깊은 숲에서 울어도 그 소리는 하늘까지 들린다. |
남악정은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만년에 도를 강론하던 곳이다.
이현일이 이곳에 자리 잡고 처음 창건했을 때는 초가를 얽었기 때문에
‘남악초당(南嶽草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중수를 거쳐 기와집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검소함을 숭상하는 군자의 기상을 갖고 있었던 초당이었지만,
선조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초당 역시 위풍이 있는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남악초당이 완성되자 주위에서는 이현일을 ‘남악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영해와 석보의 사이에 위치한 남악초당은 당시 새로운 학문의 장이 되어
학자들의 방문이 이어져 남악골의 위상도 더욱 높아졌다. 이현일이 이곳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47세에 처음 남악골에 집을
지어 살다가 바로 부친상을 당해 안동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어 모친상도 당하자 계속해서 여묘살이를 해야만 했다.
장례가 끝난 뒤에 59세에 남악골로 돌아와 남악초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문을 연마한지 5년 째, 이현일은 사업(司業)에 임명된다.
사업이란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이름난 산림(山林)에게만
제수되는 자리인 만큼, 남악정의 산천초목도 그 광명을 입게 된 것이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려고 했지만, 그의 학덕과 인품은
이미 조정에 까지 울려 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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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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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자는 익승(翼昇)이고, 호는 갈암(葛庵)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627년(인조5) 영해(寧海)에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여식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1640년) 부친을 따라 영해부의 서쪽 석보(石保)로 가서 은거하였다.
1646년(인조23)과 1648년(인조26)에 초시에 모두 합격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서 복시를 단념하였다.
26세(1652년) 중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였고,
27세(1653년)에 부친과 영양현 수비(首比)로 이거하였으나,
종종 형제들과 함께 전에 살았던 석보초당으로 와서 강학하였다. 40세(166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 상소에 참여하였다.
47세(1673년)에 석보의 동쪽 골짜기인 남악실[南嶽谷]에 집을 짓고 48세(1674년)에
이거하였다. 이해 8월에 부친상을 당하자 안동 두실원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당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자 허목(許穆) 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52세(1678년) 공조 정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어 비로소 출사하였다.
그러나 54세(1680년) 모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향리에서 3년 상을 지냈다.
이후 59세(1685년)에 남악초당을 완성하여 그곳에서 지내자, 사람들이
‘남악선생(南嶽先生)’이라고 불렀다. 63세(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여 성균관사업, 사헌부장령,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때 인현왕후 폐비의 부당함을 논하고 사직서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어 성균관좨주를 거쳐 대사헌에 올라 인현왕후의 보호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용납되지 않자 낙향하였다. 64세(1690년) 이조참판, 세자시강원찬선,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66세(1692년) 다시 대사헌, 병조참판, 우
참찬,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68세(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려다가 함경도 홍원으로 귀양을 갔다.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자칫 목숨을 잃을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던 이현일은 같은 해
다시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종성으로 귀양을 갔다. 3년 뒤인 71세(1697년)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74세(1700년) 풀려나기까지 이현일은 7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 생활이 풀린 뒤 이현일은 안동 금소(琴韶)에 정착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열정을 다하였다. 78세(1704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주변경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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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악정(南嶽亭)과 주사골[做士谷]으로 이름난 주남리(做南里) |
석보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키로 가다보면 삼의리와 요원리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요원리를 향해 3키로 정도가면 주남리 남곡의 남악정을 볼 수 있다.
남악정의 풍경에 대해서는 이장호의 『남악정중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정자는 창수재의 남쪽, 석보의 동쪽에 있다. 푸른 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있고, 숲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맑은 물줄기가 그 앞을 지나가고 경치가 그윽하여, 아련히 때 묻은
세상과 멀러 떨어져 있는 듯하니, 운곡(雲谷)에 있는 주자(朱子)의 회암초당(晦庵草堂)이나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退溪)의 암서헌(巖棲軒)만 어찌 유독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곳이겠는가?
꽃이 핀 아침이나 달이 밝은 저녁마다 이 정자에 올라가 둘러보면 구름과 연기가 천 겹으로
둘려 있고, 만 겹의 숲이 좌우에서 정자를 끼고 두르고 있다.
남악정은 마을의 한 가운데에서 가장 북쪽으로 완만한 능선의 산을 기대고 있다.
정자의 서편으로는 마을 쉼터가 있고, 산을 등진 북쪽을 제외한 3면에는 농지와 가옥들이
에워싸고 있다. 정자의 남쪽 2차선 도로 너머에는 산비탈을 개간한 농지가 눈에 들어온다.
농지 아래로 암벽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오래된 소나무가 암벽과 어우러져 있다.
암벽 아래에는 요원에서 흘러나오는 냇물이 흐른다. 남사골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고,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 입지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정자 역시 앞뒤에 산으로 빙 둘러싼 마을 가운데서도 북쪽에 있지만 남향을 하고 있어
따뜻한 기운을 잔뜩 머금을 수 있는 위치이다. 석보면 주남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사골의 시무나무와 비슬나무숲이 남악정과
함께 이름난 곳이다. 남악정과 주사동의 이 숲은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다. 주남교에서
홍계리 쪽으로 꺾어서 700미터를 가면 주사골에 도착한다.
이곳은 이현일의 종질인 주곡(做谷) 이도(李櫂, 1636~1712)와 주계(做溪) 이용(李熔,
1640~1693)형제가 이곳에 이거하면서 조성한 숲이다.
시무나무와 비슬나무 등 59그루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오래된 수해방지 숲으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다. 마을이름은 이도와 이용
형제의 호인 주곡, 주계에서 따온 것이다. 주남리는 ‘남’악정과 ‘주’사골에서 한자씩 따온 이름으로, 이름만큼이나 그 유서가 깊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석보입암권 > 석보면 주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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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보면 주남리는 석보면 소재지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주남리에는 11개
자연부락이 있다. 먼저 주남리의 입구에 있는 인마리[仁旨] 마을은 옛날 안동에서
영해로 가는 통로의 중간 지점인데, 이곳의 마방에서 행인들의 말이 쉬어 갔다고
한다.
특히 어떤 어진 선비가 이곳을 지날 때 그의 말이 마방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인말이라고 했는데, 음이 변하여 인마리 또는 인마루로 불리다가 8,15광복 이후부터
인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골마리는 인마리 서쪽 산골짜기에 위치한 곳으로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인마리 동쪽 산 아래에도 마을이 있는데, 산그늘 때문에 햇볕이 오래 머물지 않는
모서리 마을이라고 하여 음지몰, (음지말 , 음지마)라고 불린다. 인마리의 북쪽에 현재 폐교된 주남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인마리,홍계(洪溪),
요원(腰院)으로 길이 나뉘어져서 삼거리라고 불린다. 삼거리에서 홍계리로 가는 곳에 주남동의 중심이 되는 주삿골[做士洞]이 있다.
이곳은 갈암 이현일의 종질이자,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재종형제인
주곡(做谷) 이도(李櫂, 1636~1712)와 주계(做溪) 이용(李熔, 1640~1693) 형제가
영해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개척한 마을이다. 이 두 선비의 호를 따서 이주
했던 곳이 현재의 주사동[주사골]이라고 불렀다. 주사골의 남동쪽 가래골 못 미친 곳에는 1948년 무렵부터 한 두집씩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된 새마[新村]가 있다. 주삿골의 북동쪽에는 마을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름이 붙은 가래골[楸谷]이 있다. 마을이 자리 잡은
골짜기가 따뜻하고 산수가 아름다워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하여 가곡(佳谷)이라고도
했다. 삼거리에서 요원리로 가면 주남초교를 지나 모여 있는 마을은 갈암 이현일이 지은
남악초당이 있었다고 하여 남악실로 불린다. 한편 마을의 위치가 따뜻한 곳이라 하여
남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남악실에서 양지바른 쪽에 위치하여 늘 햇볕이 잘 들고 따뜻한 마을인 양지마와 반대쪽
응달진 쪽에 있는 음지마가 있다. 양지마는 주남리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칠반(七班)이란 곳은 주남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주남리 제 7반이 된다. 주남은 주사동과 남악실에서 각각 이름을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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