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기간 동안 다섯 명의 신하 신분의 제후들이 왕을 등에 업고 다른 제후들 위에 군림하여 호령한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란?
기원전 771년 지금의 장안 부근의 호경에 있던 서주가 '주 유왕 (周 幽王)'의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서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망하고 그 나라를 동쪽의 낙읍(지금의 낙양)으로 나라를 옮기고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패권국의 위치에 있었던 산서성의 진(晉)나라가 세 나라로 삼분되는 기원전 453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 환공(齊 桓公)
춘추 초기 후계자 싸움으로 자기를 죽이려던 관중을 등용한 제환공은 제나라의 내정을 개혁한 결과 신장된 국력을 기반으로 천자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패자가 되었으나 관중과 제환공이 죽자 그 아들들의 후계자 싸움으로 패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진 문공(晉 文公)
계모의 모함으로 나라에서 쫓겨 난 이후 19년 동안 유랑 생활 끝에 秦목공의 도움으로 晉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올라 유랑 생활 동안 얻은 교훈과 천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여 진나라의 내정을 혁신시켜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다.
진문공이 이룩한 업적의 특징은 당시 군주들의 임기가 죽을 때까지의 종신직이라고 감안하면 진문공의 재위 기간은 불과 8년에 불과했으나 그 후계자들은 전국시대가 끝날 때까지인 약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패자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진문공의 개혁은 당대에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 정도의 훌륭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초 장왕(楚 壯王)
초나라의 별칭은 남만, 혹은 형만이라고 하여 당시 중원 제후국들로부터 야만국 대접을 받아 위의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대표하던 중원제후국들의 공동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초나라의 작위는 공후백자남의 5등급에서 4번째에 해당하는 자작에 해당하여 불만을 느낀 초나라 군주는 당시 주천자만이 사용하던 왕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즉 너희들이 우리들을 야만국으로 취급하니 중원제후국들의 전례를 따르지 않겠다는 표시로 왕호를 사용한 것이다. 특히나 초장왕의 부왕 초목왕은 조부였던 초성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라 재위 초기 심적인 갈등을 느껴 주색에 골몰하다가 심기일전하여 초나라의 내정을 개혁하여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여 패권을 다툴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초장왕에 대한 고사성어가 많다.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명(三年不鳴), 준정중원(問鼎中原), 절영대회(絶纓大會), 능장선장리(能撑船腸里- 뱃속에서 배를 저을 수 있을 정도의 배포), 우맹곡마(優孟哭馬), 나전탈우(蹊田奪牛) 등에 많은 고사성어가 다 그에게서 나왔다. 고사성어를 찾아보면서 초장왕의 행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왕 부차 (吳王 夫差)
오자서와 손무의 활약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부왕 합려의 왕위를 이어 받은 오왕 부차는 계속 중원의 제후국들에 대한 정벌전을 일으켜 패자의 야망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빈번한 원정과 당시 속국으로 간주했던 월나라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여 결국은 월왕 구천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자신은 자살로 마감하고 만다.
월왕 구천 (越王 句踐)
가장 전형적인 중국 사람들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사람이다. 왕의 신분으로 포로로 잡혀가 3년 동안의 오왕 부차를 위한 노예생활 끝에 마지막에는 부차의 대변을 핥아 충성심을 보이고 석방되어 20년 동안 노심초사하여 부차의 신임을 얻은 후에 부차가 중원 정벌에 심혈을 기우리는 틈을 타서 그 배후를 공격하여 일거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차지한 아주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함으로 해서 목표가 사라지자 그 밑에서 같이 고난을 같이 했던 ‘범려’는 토사구팽의 화를 피하기 위해 그 곁을 떠나고 그래도 설마 하고 머물렀던 ‘문종’은 결국은 구천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구천이 죽은 월나라는 아무런 동기도 없이 패자의 지위를 잃고 2류국으로 전전하다가 전국시대 초나라에 의해 병합당한다.
전국칠웅(戰國七雄)
기원전 453년 북쪽의 패권국 진(晉)나라의 세가였던 ‘한, 위, 조’ 3가가 당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지가’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삼분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다. 기존의 秦, 초, 연, 제와 합쳐 전국칠웅이라고 한다. 전국 시대 패권을 차지한 순서대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1. 魏
‘한, 위, 조’ 삼가 중 ‘위나라’에는 ‘위문후’라는 명군이 나타나 내정 개혁과 인재발탁에 힘써 전국 시대 초기 패권을 차지했다. 하북성 중부에 위치했던 중산국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고,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를 등용하여 서쪽의 진나라를 제압했으며, ‘이극’이라는 사람을 기용하여 농업생산을 장려 국가의 경제력을 증대시키고, ‘서문표’라는 사람을 업의 태수로 삼아 미신을 타파하고 관개사업을 시행하여 산출된 농업생산물은 위나라 국가의 부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나 ‘서문표’가 미신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귀신의 일로 사람의 일을 재단하는 자는 귀신으로 취급하겠다.'라는 명언은 후의 중국 역대 군주들의 정치적인 규범이기도 하다.
즉 죽은 사람의 일로 산 사람의 일이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는 명제는 군주라 할지라도 종교의 명분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복잡한 중국역사의 전쟁에서 종교전쟁이 끼어들지 않은 것은 ‘서문표’의 명쾌한 정의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2. 齊
망각한 ‘위나라’의 패권을 무너뜨린 ‘제나라’의 군주는 ‘제위왕’과 그 아들 ‘선왕’이다. 병법가 손빈을 등용하여 당시 막강한 ‘위나라’의 군대를 계릉과 마릉에서 두 번에 걸쳐 궤멸시켜 ‘위나라’를 2류국으로 전락시키고 대신 패권국으로 올라섰으나 그 뒤를 이은 ‘제민왕’ 때에 이르자 월왕 구천의 2세쯤으로 여겨지는 ‘연소왕’에 의해 ‘제나라’는 거의 멸망직전에 몰렸다가 ‘연나라’의 내분으로 간신히 복국에 성공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시황’에 의해 가장 마지막으로 병합된다.
3. 秦
남쪽의 ‘초나라’와 마찬가지로 춘추시대부터 서쪽의 오랑캐 정도로 여겨졌다가 춘추 초기 ‘진 목공’이라는 걸출한 군주가 나타나 패자를 넘보는 위치까지 갔으나 ‘진 목공’이 죽을 때 ‘진나라’의 대소 신료177명을 순장시킴으로써 국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2류국으로 전락된다.
순장제도가 시행됨으로 해서 군주가 죽을 때 같이 죽어야 되니 능력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나라’에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순장 제도를 폐지한 ‘진 헌공’의 뒤를 이어 기원전 361년 즉위한 ‘진 효공’은 ‘상앙’을 등용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효과적이라고 불리는 개혁 즉 변법을 단행하여 ‘진나라’를 일약 강국의 위치에 올려놓고, ‘진나라’는 그 변법으로 인하여 140년 후에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진나라’가 중원 진출의 계기가 된 사건은 ‘제나라’에 의한 ‘위나라’ 군대의 궤멸이다. 당시 ‘위나라’의 주력은 산서성 남부의 서쪽에 집중 되어 있었다. ‘진나라’는 ‘위나라’ 때문에 감히 황하 서쪽의 위수의 지류 낙수를 넘어 올 수 없었다. ‘제나라’에 의해 ‘위나라’의 주력부대가 ‘제나라’에 의해 궤멸 당하자 그 도성을 동쪽의 개봉으로 옮긴다. 그 기회를 틈타 ‘진나라’는 낙수를 건너 ‘위나라’의 황하 서쪽의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것이다.
비록 ‘상앙’은 ‘혜문왕’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상앙’이 시작한 변법은 ‘혜문왕’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계속 시행되어 ‘진나라’의 국력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어 전국시대 말기에 가서는 나머지 6국의 국력을 전부 합친 것에 필적할 수 있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효과적으로 시행한 결과 증대된 국력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고 볼 수 있다.
4. 楚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강대국이었던 ‘초나라’는 춘추 말기 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은 ‘초 평왕’이 ‘진나라’에 데려온 며느리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오자서 부자’들과 갈등을 빚게 되어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은 ‘초평왕’에게 살해되고 ‘오자서’는 ‘초나라’를 탈출하여 ‘오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오나라’를 강대국의 위치에 올려놓은 ‘오자서’는 ‘오나라’의 군대를 이용하여 ‘초나라’를 거의 멸망직전에 몰리게 되나 일치단결한 ‘초나라’의 군신들의 노력과 ‘진나라’가 보낸 원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자 ‘진나라’의 재상이며 ‘연횡론자’ ‘장의’의 유세술에 농락당해 주변 국가로부터 고립당한 결과 원래의 국가가 발흥했던 형주일대를 ‘진나라’에 빼앗긴 후 나라를 동쪽의 진성으로 옮기고 이어서 계속 쫓겨 다니다가 안휘성 수춘에서 ‘진나라’의 장군 ‘왕전’에 의해 멸망당한다.
광대한 영토에 비해 국가 조직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면이 있었다. 초사로 유명한 ‘굴원’은 전국시대 후반기 초나라의 정치인이자 시인이다. 후에 ‘진시황’이 망하자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였던 오군(吳郡)에서 일어난 기의군 대장 ‘항량’이나 그 조카 서초패왕 ‘항우’ 등은 초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항량’은 망한 ‘초나라’의 왕족 출신 ‘웅심’을 찾아 ‘기의군’의 왕으로 옹립한 것은 전국시대 내내 ‘진나라’에 핍박받아 원한에 사무친 ‘초나라’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5. 趙
전국시대 중엽 ‘조나라’에는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출한 왕이 태어나서 ‘위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서 다시 독립한 중산국을 겸병하고, 다시 그 진출방향을 서북쪽으로 잡아 지금의 내몽고 지방과 영하성 일대의 땅과 주민들을 병합하고 일약 당시 초강대국 ‘진나라’와 세력을 다툴 수 있는 나라로 등장했다. ‘무령왕’은 중국 전쟁사에서 기병을 처음으로 전투에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무령왕’이 도입한 기병을 ‘호복기사’라고 부른다.
당시의 기병은 보병의 보조부대 역할에 불과했으나 ‘무령왕’에 의해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과로 전쟁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무령왕’이 도입한 기병대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반 보병사단과 구분되는 기갑사단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이 후계자 싸움 중에 비명횡사하고 이어서 벌어진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함으로 해서 더 이상 ‘진나라’의 통일의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제거되었음을 의미이다. 특히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이 ‘진나라’ 군대에 의해 몰살당한 사건은 ‘진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단지 시간문제에 해당하게 된 것입니다.
6. 燕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내내 약소국의 위치에 있다가 전국시대 말기 당시 강대국 제나라의 침략을 받아 제나라에 겸병될 위기에 처했으나 주변 국가들의 제나라에 압력을 가해 간신히 제나라에 겸병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어서 즉위한 ‘연 소왕’이 ‘제나라’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황금대를 지어 천하의 능력 있는 인재를 모으는 과정에서 당시 ‘위나라’로부터 사신의 신분으로 ‘연나라’를 방문했던 ‘악의’를 기용하여 ‘연나라’의 국정을 맡긴다.
‘연 소왕’과 ‘악의’의 20년 이상 걸친 국정쇄신을 위한 노력 끝에 어느 정도 국력을 신장시킨 ‘연 소왕’과 ‘악의’는 우선 외교적인 교섭을 시작하여 ‘제나라’ 정벌을 위한 5국 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었다. ‘악의’는 정벌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의 70여 개의 성은 모두 ‘연나라’의 소유가 되었고, 단지 ‘즉묵’과 ‘거성’ 두 개의 성만이 마지막까지 저항하고는 있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연 소왕’이 돌연히 죽고 태자가 그 뒤를 잇자 ‘악의’의 공을 시기한 자의 참소를 받아 소환령을 받은 ‘악의’는 ‘연나라’에 돌아가면 살해될 것을 우려하여 ‘조나라’에 망명하고 그리고 ‘연나라’의 ‘제나라’ 정벌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전국시대를 마감 짓는 마지막 두 주인공이었던 ‘형가’와 ‘태자 단’이 꾸민 ‘진시황’ 암살사건은 ‘연나라’를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규적인 군대를 ‘진나라’를 물리친다는 것은 워낙 차이가 는 국력으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연나라’의 태자 ‘희단(姬丹)’은 ‘형가’라는 자객을 고용하여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기도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조그만 실수로 인해 ‘진시황’ 암살기도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희단’은 그 행위를 추궁 받아 ‘연왕’에 의해 참수당해 그 목은 ‘진시황’에게 보내진다.
7. 韓
전국시대 내내 가장 국력이 약한 국가였으며, ‘진나라’에 의해 가장 먼저 멸망당한다. 법가 ‘신불해’가 재상으로 있을 때 국력이 반짝 했을 뿐 중원의 정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항상 주위의 강대국에 의해 시달림을 받다가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가 ‘한나라’였다.
춘추기간 동안 다섯 명의 신하 신분의 제후들이 왕을 등에 업고 다른 제후들 위에 군림하여 호령한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란?
기원전 771년 지금의 장안 부근의 호경에 있던 서주가 '주 유왕 (周 幽王)'의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서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망하고 그 나라를 동쪽의 낙읍(지금의 낙양)으로 나라를 옮기고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패권국의 위치에 있었던 산서성의 진(晉)나라가 세 나라로 삼분되는 기원전 453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 환공(齊 桓公)
춘추 초기 후계자 싸움으로 자기를 죽이려던 관중을 등용한 제환공은 제나라의 내정을 개혁한 결과 신장된 국력을 기반으로 천자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패자가 되었으나 관중과 제환공이 죽자 그 아들들의 후계자 싸움으로 패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진 문공(晉 文公)
계모의 모함으로 나라에서 쫓겨 난 이후 19년 동안 유랑 생활 끝에 秦목공의 도움으로 晉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올라 유랑 생활 동안 얻은 교훈과 천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여 진나라의 내정을 혁신시켜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다.
진문공이 이룩한 업적의 특징은 당시 군주들의 임기가 죽을 때까지의 종신직이라고 감안하면 진문공의 재위 기간은 불과 8년에 불과했으나 그 후계자들은 전국시대가 끝날 때까지인 약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패자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진문공의 개혁은 당대에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 정도의 훌륭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초 장왕(楚 壯王)
초나라의 별칭은 남만, 혹은 형만이라고 하여 당시 중원 제후국들로부터 야만국 대접을 받아 위의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대표하던 중원제후국들의 공동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초나라의 작위는 공후백자남의 5등급에서 4번째에 해당하는 자작에 해당하여 불만을 느낀 초나라 군주는 당시 주천자만이 사용하던 왕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즉 너희들이 우리들을 야만국으로 취급하니 중원제후국들의 전례를 따르지 않겠다는 표시로 왕호를 사용한 것이다. 특히나 초장왕의 부왕 초목왕은 조부였던 초성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라 재위 초기 심적인 갈등을 느껴 주색에 골몰하다가 심기일전하여 초나라의 내정을 개혁하여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여 패권을 다툴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초장왕에 대한 고사성어가 많다.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명(三年不鳴), 준정중원(問鼎中原), 절영대회(絶纓大會), 능장선장리(能撑船腸里- 뱃속에서 배를 저을 수 있을 정도의 배포), 우맹곡마(優孟哭馬), 나전탈우(蹊田奪牛) 등에 많은 고사성어가 다 그에게서 나왔다. 고사성어를 찾아보면서 초장왕의 행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왕 부차 (吳王 夫差)
오자서와 손무의 활약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부왕 합려의 왕위를 이어 받은 오왕 부차는 계속 중원의 제후국들에 대한 정벌전을 일으켜 패자의 야망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빈번한 원정과 당시 속국으로 간주했던 월나라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여 결국은 월왕 구천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자신은 자살로 마감하고 만다.
월왕 구천 (越王 句踐)
가장 전형적인 중국 사람들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사람이다. 왕의 신분으로 포로로 잡혀가 3년 동안의 오왕 부차를 위한 노예생활 끝에 마지막에는 부차의 대변을 핥아 충성심을 보이고 석방되어 20년 동안 노심초사하여 부차의 신임을 얻은 후에 부차가 중원 정벌에 심혈을 기우리는 틈을 타서 그 배후를 공격하여 일거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차지한 아주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함으로 해서 목표가 사라지자 그 밑에서 같이 고난을 같이 했던 ‘범려’는 토사구팽의 화를 피하기 위해 그 곁을 떠나고 그래도 설마 하고 머물렀던 ‘문종’은 결국은 구천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구천이 죽은 월나라는 아무런 동기도 없이 패자의 지위를 잃고 2류국으로 전전하다가 전국시대 초나라에 의해 병합당한다.
전국칠웅(戰國七雄)
기원전 453년 북쪽의 패권국 진(晉)나라의 세가였던 ‘한, 위, 조’ 3가가 당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지가’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삼분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다. 기존의 秦, 초, 연, 제와 합쳐 전국칠웅이라고 한다. 전국 시대 패권을 차지한 순서대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1. 魏
‘한, 위, 조’ 삼가 중 ‘위나라’에는 ‘위문후’라는 명군이 나타나 내정 개혁과 인재발탁에 힘써 전국 시대 초기 패권을 차지했다. 하북성 중부에 위치했던 중산국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고,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를 등용하여 서쪽의 진나라를 제압했으며, ‘이극’이라는 사람을 기용하여 농업생산을 장려 국가의 경제력을 증대시키고, ‘서문표’라는 사람을 업의 태수로 삼아 미신을 타파하고 관개사업을 시행하여 산출된 농업생산물은 위나라 국가의 부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나 ‘서문표’가 미신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귀신의 일로 사람의 일을 재단하는 자는 귀신으로 취급하겠다.'라는 명언은 후의 중국 역대 군주들의 정치적인 규범이기도 하다.
즉 죽은 사람의 일로 산 사람의 일이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는 명제는 군주라 할지라도 종교의 명분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복잡한 중국역사의 전쟁에서 종교전쟁이 끼어들지 않은 것은 ‘서문표’의 명쾌한 정의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2. 齊
망각한 ‘위나라’의 패권을 무너뜨린 ‘제나라’의 군주는 ‘제위왕’과 그 아들 ‘선왕’이다. 병법가 손빈을 등용하여 당시 막강한 ‘위나라’의 군대를 계릉과 마릉에서 두 번에 걸쳐 궤멸시켜 ‘위나라’를 2류국으로 전락시키고 대신 패권국으로 올라섰으나 그 뒤를 이은 ‘제민왕’ 때에 이르자 월왕 구천의 2세쯤으로 여겨지는 ‘연소왕’에 의해 ‘제나라’는 거의 멸망직전에 몰렸다가 ‘연나라’의 내분으로 간신히 복국에 성공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시황’에 의해 가장 마지막으로 병합된다.
3. 秦
남쪽의 ‘초나라’와 마찬가지로 춘추시대부터 서쪽의 오랑캐 정도로 여겨졌다가 춘추 초기 ‘진 목공’이라는 걸출한 군주가 나타나 패자를 넘보는 위치까지 갔으나 ‘진 목공’이 죽을 때 ‘진나라’의 대소 신료177명을 순장시킴으로써 국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2류국으로 전락된다.
순장제도가 시행됨으로 해서 군주가 죽을 때 같이 죽어야 되니 능력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나라’에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순장 제도를 폐지한 ‘진 헌공’의 뒤를 이어 기원전 361년 즉위한 ‘진 효공’은 ‘상앙’을 등용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효과적이라고 불리는 개혁 즉 변법을 단행하여 ‘진나라’를 일약 강국의 위치에 올려놓고, ‘진나라’는 그 변법으로 인하여 140년 후에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진나라’가 중원 진출의 계기가 된 사건은 ‘제나라’에 의한 ‘위나라’ 군대의 궤멸이다. 당시 ‘위나라’의 주력은 산서성 남부의 서쪽에 집중 되어 있었다. ‘진나라’는 ‘위나라’ 때문에 감히 황하 서쪽의 위수의 지류 낙수를 넘어 올 수 없었다. ‘제나라’에 의해 ‘위나라’의 주력부대가 ‘제나라’에 의해 궤멸 당하자 그 도성을 동쪽의 개봉으로 옮긴다. 그 기회를 틈타 ‘진나라’는 낙수를 건너 ‘위나라’의 황하 서쪽의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것이다.
비록 ‘상앙’은 ‘혜문왕’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상앙’이 시작한 변법은 ‘혜문왕’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계속 시행되어 ‘진나라’의 국력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어 전국시대 말기에 가서는 나머지 6국의 국력을 전부 합친 것에 필적할 수 있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효과적으로 시행한 결과 증대된 국력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고 볼 수 있다.
4. 楚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강대국이었던 ‘초나라’는 춘추 말기 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은 ‘초 평왕’이 ‘진나라’에 데려온 며느리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오자서 부자’들과 갈등을 빚게 되어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은 ‘초평왕’에게 살해되고 ‘오자서’는 ‘초나라’를 탈출하여 ‘오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오나라’를 강대국의 위치에 올려놓은 ‘오자서’는 ‘오나라’의 군대를 이용하여 ‘초나라’를 거의 멸망직전에 몰리게 되나 일치단결한 ‘초나라’의 군신들의 노력과 ‘진나라’가 보낸 원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자 ‘진나라’의 재상이며 ‘연횡론자’ ‘장의’의 유세술에 농락당해 주변 국가로부터 고립당한 결과 원래의 국가가 발흥했던 형주일대를 ‘진나라’에 빼앗긴 후 나라를 동쪽의 진성으로 옮기고 이어서 계속 쫓겨 다니다가 안휘성 수춘에서 ‘진나라’의 장군 ‘왕전’에 의해 멸망당한다.
광대한 영토에 비해 국가 조직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면이 있었다. 초사로 유명한 ‘굴원’은 전국시대 후반기 초나라의 정치인이자 시인이다. 후에 ‘진시황’이 망하자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였던 오군(吳郡)에서 일어난 기의군 대장 ‘항량’이나 그 조카 서초패왕 ‘항우’ 등은 초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항량’은 망한 ‘초나라’의 왕족 출신 ‘웅심’을 찾아 ‘기의군’의 왕으로 옹립한 것은 전국시대 내내 ‘진나라’에 핍박받아 원한에 사무친 ‘초나라’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5. 趙
전국시대 중엽 ‘조나라’에는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출한 왕이 태어나서 ‘위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서 다시 독립한 중산국을 겸병하고, 다시 그 진출방향을 서북쪽으로 잡아 지금의 내몽고 지방과 영하성 일대의 땅과 주민들을 병합하고 일약 당시 초강대국 ‘진나라’와 세력을 다툴 수 있는 나라로 등장했다. ‘무령왕’은 중국 전쟁사에서 기병을 처음으로 전투에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무령왕’이 도입한 기병을 ‘호복기사’라고 부른다.
당시의 기병은 보병의 보조부대 역할에 불과했으나 ‘무령왕’에 의해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과로 전쟁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무령왕’이 도입한 기병대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반 보병사단과 구분되는 기갑사단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이 후계자 싸움 중에 비명횡사하고 이어서 벌어진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함으로 해서 더 이상 ‘진나라’의 통일의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제거되었음을 의미이다. 특히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이 ‘진나라’ 군대에 의해 몰살당한 사건은 ‘진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단지 시간문제에 해당하게 된 것입니다.
6. 燕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내내 약소국의 위치에 있다가 전국시대 말기 당시 강대국 제나라의 침략을 받아 제나라에 겸병될 위기에 처했으나 주변 국가들의 제나라에 압력을 가해 간신히 제나라에 겸병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어서 즉위한 ‘연 소왕’이 ‘제나라’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황금대를 지어 천하의 능력 있는 인재를 모으는 과정에서 당시 ‘위나라’로부터 사신의 신분으로 ‘연나라’를 방문했던 ‘악의’를 기용하여 ‘연나라’의 국정을 맡긴다.
‘연 소왕’과 ‘악의’의 20년 이상 걸친 국정쇄신을 위한 노력 끝에 어느 정도 국력을 신장시킨 ‘연 소왕’과 ‘악의’는 우선 외교적인 교섭을 시작하여 ‘제나라’ 정벌을 위한 5국 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었다. ‘악의’는 정벌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의 70여 개의 성은 모두 ‘연나라’의 소유가 되었고, 단지 ‘즉묵’과 ‘거성’ 두 개의 성만이 마지막까지 저항하고는 있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연 소왕’이 돌연히 죽고 태자가 그 뒤를 잇자 ‘악의’의 공을 시기한 자의 참소를 받아 소환령을 받은 ‘악의’는 ‘연나라’에 돌아가면 살해될 것을 우려하여 ‘조나라’에 망명하고 그리고 ‘연나라’의 ‘제나라’ 정벌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전국시대를 마감 짓는 마지막 두 주인공이었던 ‘형가’와 ‘태자 단’이 꾸민 ‘진시황’ 암살사건은 ‘연나라’를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규적인 군대를 ‘진나라’를 물리친다는 것은 워낙 차이가 는 국력으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연나라’의 태자 ‘희단(姬丹)’은 ‘형가’라는 자객을 고용하여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기도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조그만 실수로 인해 ‘진시황’ 암살기도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희단’은 그 행위를 추궁 받아 ‘연왕’에 의해 참수당해 그 목은 ‘진시황’에게 보내진다.
7. 韓
전국시대 내내 가장 국력이 약한 국가였으며, ‘진나라’에 의해 가장 먼저 멸망당한다. 법가 ‘신불해’가 재상으로 있을 때 국력이 반짝 했을 뿐 중원의 정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항상 주위의 강대국에 의해 시달림을 받다가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가 ‘한나라’였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