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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 다들 읽어보셨지요?
이야기를 간단히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노인이 우연히 길에서 거위를 발견해 집에 데려왔더니
글쎄 이놈의 거위가 황금알을 낳는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거위 덕분에 주인이 부자가 되지만
그만 욕심이 지나쳐 거위 배를 가른다는
참으로 황당한 결말의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은
거위 주인의 어리석음을 탓하지만,
단지 거위 주인의 무지함을 비판하기에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너무 피상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혹시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만약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거위 주인이
IQ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바보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주인은 바보같이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요?
..
그 이유를 추론해 보자면
그 내용만으로 한 페이지가 넘을 것입니다.
혹시 거위 주인이 있지도 않은 황금알을 가지고
파생상품을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오늘날처럼 그럴듯하고 세련된
파생상품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ㅋ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거위 주인과 모든 마을 사람들을 속인게 아닐까요?
어쩌면 황금알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들이
누군가가 계획한 일종의 거대한 사기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거위 주인은 거위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배를 가를 수밖에 없는 어떠한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임에 분명합니다!!
..
사실 우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매우 유사한 비이성적 실수들을
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여러 황당한 정책들도 마찬가지지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는
사실 오래전부터 늘 있어왔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가
대책없이 부채를 늘려가는 것도
결국 거위의 배를 가르는 최악의 결말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화속의 불행한 거위 주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똑똑한 인간들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
좀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경제 시스템인 부채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이 시대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과거 사악한 은행가들이 고안해 낸 그들의 비밀이
‘지급준비제도’라는 그럴듯한 이름 뒤에 숨어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통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다는
토마스 제퍼슨 식의 고전적 비난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 시스템은
결국 소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착취 시스템이고
오늘날의 화폐야 말로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갖고 있는 미국은
그 거위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결국 미국은 스스로 거위의 배를 가르게 될 것입니다.
..
자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어
거위 주인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스스로의 손으로 가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해 볼까합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라는 것을
‘질료’가 일정한 ‘형상’을 취하여
하나의 개별자가 되는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과정을 ‘다비드 상’의 제작 과정에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비드 상을 만들 재료인 대리석이 ‘질료인’이고,
그 대리석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지의 구상이 ‘형상인’이며
대리석을 깎아 내는 미켈란젤로의 손이 ‘동력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제작 과정에 가장 핵심은
바로 동상을 만든 목적, 즉 ‘목적인’입니다.
만약 ‘목적인’을 제외한다면
‘다비드 상’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만들어 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파악하기 보다는
그 세계의 근본 목적, 즉 ‘목적인’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 극단적인 형이상학적 이해를 추구한 이유이지요.
그러나 근대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과거처럼 완벽히 파악할 수 없는 ‘목적인’에 매달리기 보다는
실리적인 측면에서 ‘동력인’을 강조하는 기계론적 우주관이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목적인'은 우리의 사고 방식에서 추방되게 되지요!
글리고 그러한 기계론적 우주관의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서구 유럽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이후 지구의 역사와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으니까요.
결국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논리적 도식에 이어
그 논리에 근거한 중세의 형이상학적 숙성기간을 거쳐
근대의 기계적 세계관의 탄생을 거치며 확립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사고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과거 방식의 형이상학적 사고들은
실용성이 떨어지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폄하되었고
종교적 열정들은 이성적 사고의 부족에서 오는
일종의 가벼운 정신병으로 이해가 되고 있지요.
..
그러나 생명의 진화의 과정이 어떠한 의지가 배태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적 현상으로서 완벽한 우연의 결과로 볼 수 없듯이,
인간의 사고방식의 변화 또한 어떠한 의지가 배제된
완벽히 우연한 정신적 진화의 결과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의지의 발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에 의거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조그만 구명정에 의지해 삶과 죽음의 순간을 오가는 우리 인간들은
철학적 노력 없이 우리이 사고를 통제하고 제약하는
그 이면의 의지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
일반적으로 인간과 역사의 상관관계를 논할 때,
역사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견해는
인간의 의식이 시대적 산물이라는 결과론적 해석이고
반대로 인간의 의지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견해는
루소의 말처럼 역사의 주인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변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도덕적 관점의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통합적으로 보는 사고가 바로
변증법적 사고이지요.
언 듯 보면 서로 상반된 주장 같으나
역사는 개인에게 오는 것인 동시에
모든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헤겔은 역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정신이며
또한 정신이 역사를 실현시키기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사유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말장난으로 들리는 것은
이러한 사유가 정작 역사를 살아가는 개인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철학이 답이 없는 무익한 문제에 전착하고 있다고
과학은 우리의 삶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는 선입견은
시스템 지배자들이 퍼뜨린 루머에 불과합니다.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과학 또한 철학의 한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을 살아가는데 헤겔의 변증법이 큰 도움이 된다면
결코 말장난으로 들리지 않겠지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통합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정작 자신들이 기여하고 있는 시스템의 핵심을
제대로 볼 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말장난으로 들리고
말장난으로 들리니 별다른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본인들이
누군가가 의도한 현 시스템의 창조와 운영에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시스템에 의해 완벽히 제약을 받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 메커니즘에 대한 전문적인 혹은 세부적인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에 별 쓰잘데기 없다고 생각해온
시스템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역사적 통찰력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행복도 그 통찰력에 달려있는 것이겠지요!
많은 분들은 Well-Being이 삶의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Over-Being을 이루지 못하고 기존의 시스템 속에 종속되어 있다며
Well-Being은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결국 그들(?)은 우리의 Over-Being을 막음으로서
우리들의 Well-Being을 막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오늘날의 많은 종교들도 Over-Being을 빙자하여 Well-Being을 추구하며
오히려 Over-Being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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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삶에 대한 혹은 시스템에 대한 성찰과 통찰력은
단지 논리적으로 구성된 학습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각을 넘어서 있는 일종의 통찰력,
혹은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깨달음이 필요하지요.
우리의 이러한 통찰력과 깨달음을 가장 방해해 온 것은
지나치게 합리적 사고에 경도되어 있는 근대의 학문들과
선과 악의 대립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는 기성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근대의 학문들이
진정한 종교적 추구의 노력을 전근대적인 비합리의 영역으로 몰아버린 후
오늘날의 기성 종교, 특히 Hebraism 전통을 갖고 있는 서구의 유일신 종교들이
시대착오적인 과거의 교리나 근거 없는 믿음에 집착함으로서
오히려 자신의 영역을 우스꽝스러운 광기의 영역으로 폄하시켜 버렸습니다.
무서운 것은 과거 중세 사회의 종교화 현상이나
근대 이후의 탈종교화 현상 모두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지향점을 갖고 있었던 어떠한 세력의 의지의 반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서 부터는 음모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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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신의 존재에 대해 늘 ‘?’ 마크를 들이대며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기를 좋아하지만
짧은 우리 인간의 문명의 역사에서도
우주 시스템의 원리를 체득하고
스스로 신을 닮고자 했던 존재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외계존재이건 지구의 인간이건
사실상 우리와 같은 존재인 그들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신의 원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창조물로 변형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과점에서 인간의 문명이란
신의 의지이기 이전에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존재들의 의지입니다.
지구를 거대한 학교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학생으로 비유하지만
학교에는 학교를 주도하는 교사도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너무 학생입장에만 몰입해 있으면
함께 존재하는 다른 입장은 못 보게 됩니다.
과거 피라밋을 세운 것은 이집트의 노예들이었을지 몰라도
피라밋의 근원은 지배자들의 의지인 것입니다.
지구의 역사는 피지배자들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수 지배자들의 역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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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같은 고대의 텍스트들은
이와 같은 신의 창조의 원리를 깨닫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
혹은 그런 집단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신에게 도전한 그러한 사악한(?) 인간들이
결국 신의 노여움을 사고 패배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역사는 그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패배 이야기에
대부분의 피지배자들이 환호할 때,
그들은 그들의 시스템을 더욱 은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그 시스템의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었고
겉으로 가짜 왕들, 가짜 선지자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뜻을 이루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이야기는
신에게 도전하는 무모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경보다 앞선 수메르 신화에서는
엔키의 아들 마두둑의 이야기로 설명이 되지요.
하지만 바벨탑을 쌓은 존재들이 정말로 있다면
겉으로 보여지는 바벨탑은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저 위가 아니라 바벨탑 아래,
즉,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아마 바벨탑은 땅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부터
노예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모든 오벨리스크는
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종교적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는 그들의 권력이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상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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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성 종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일부 성직자들의 탈선이나 피상적인 가르침 때문이 아닙니다.
가장 큰 이유는 거대 종교들의 역사를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기존의 종교들은 진정한 내면의 신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신을 통해 그들의 영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그들의 수단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들은 신비와 종교로 대중들을 지배했다면
이제는 합리성과 논리로 대중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종교는 세속화되고 일종의 취미로 격하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종교적 미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과학과 문명이라는 종교가
여전히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에 확립된 과학적인 사고가 만든 모든 방법론은
직감과 예언, 신비로운 느낌 등의 모든 주관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그들의 시스템을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서만 바라볼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들이 볼 수 있는 것만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봐도 되고
무엇은 보면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의지가 시스템 이면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그러한 은밀한 의지들은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들의 의지들에 대한 이야기인
음모론에 동물적인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음모론을 인정해 버리면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확인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니까요.
오늘날의 시대의 무지는 가장 큰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무지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토끼굴은
늘 호기심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정체를 밝히고자 노력하는 음모론에
적절한 팩트와 유머를 집어넣어 우스개 소리로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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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여러 시스템들이
자생적이고 우리의 자발적 의도에 의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자발적 의지를 상실한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 소수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배의 노를 젓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배의 방향은 선장의 결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종종 그 배가 가서는 안 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예상할 수 없는 예외적인 실패로 간주합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주인이 그 거위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되는,
즉, 완벽히 합리적이고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체계적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 불가능한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 앞에 그들은 ‘이해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놓고
서프라이즈! 혹은 믿거나 말거나! 같은
역사의 후미진 구석으로 던져버리게 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현대인 답게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요.
어쨌든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모든 오해는
거위가 낳는 황금알의 진위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고
거위 주인이 실제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채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많은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음을 알 수 있지요.
..
세상을 살아가는데 합리적이고 논리적 사고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합리적인 방법론, 즉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방식에 매몰 될 경우,
그의 눈에는 오직 ‘황금알을 낳는 거위’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거위 주인과 독자들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혹시 누가 의도적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알이 정말 황금알인지? 아무런 의심없이,
오직 ‘황금알’ 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 소중한 거위의 배를 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거위 주인은 자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키우고 있으면서도
그 거위의 진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음모론자라고 비난합니다.
마을의 금은방 주인은 물론 명망 높은 학자와 목사까지 나서서
그 알이 정말 황금알이라고 확인해 주었으니까요.
결국 주도적인 몇몇이 짜고 치는 사기판에
억울한 희생자로 인생을 종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를 읽으며
어리석은 거위 주인을 비웃었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거위의 배에 칼을 대게 되었을 때쯤
진실을 깨달아봐야 이미 늦은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트루먼쇼’는 지금도 절찬 상영 중인 것입니다!!
첫댓글 비빔밥님,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자발적 의지를 상실한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 소수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대다수는 저절로 이런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엘리트들의 대가리에서 나온 게지요.
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