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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길거리를 걷는다. 회색깔의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친다. 죽은 시체의 눈을 한 사람들은 그 누구와도 눈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곧 눈이 올 것만 같은 시린 공기만이 남자와 악수하며 겨울이 왔음을 알렸다. 산에는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며 죽음을 싣고 온 겨울을 이겨내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는 입을 작게 오물거리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가 파란 지붕으로 되어있는 조그마한 집 안에 들어가자 그의 예상대로 두 명의 사람이 이미 그 안을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명은 거뭇거뭇한 수염과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로 벽에 기대어 앉아 선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에 다크서클이 길게 늘어졌지만 비교적 말끔한 차림을 한 또 한 명의 사내가 그를 툭툭 치며 깨웠다.
“이보게, 형식. 상호가 왔다네.”
눈을 비비며 일어난 형식은 상호를 보고도 크게 하품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혁이 한 번 더 형식을 툭툭 치며 눈치를 주자 그제야 형식은 상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상호, 자네 왔는가?”
상호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형식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래전부터 그들과 알고 지낸 상호는 이 둘 또한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죽은 시체의 눈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밖은 어때?”
“글렀어.”
준혁의 물음에 상호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새 지도자가 들어선 이후로 똑같지 뭐. 홍위병들의 눈을 피하려고 감정조차 내보이기 싫어갖고는,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눈으로는 재빠르게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지. 이거야 원, 시체나 다름없어.”
“지금 같은 세상에 홍위병이 뭐람.”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형식이 끼어들었다. 홍위병은 정식 명칭이 아니었으나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대 때의 홍위병과 비슷하다고 하여 홍위병이라고 불렸다.
“그 놈의 홍위병. 자기네들이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법을 어기는 자들을 심판하겠다고 이리저리 쏘아 다니고 있으니 스스로 시체가 되지 않으면 홍위병에 의해 시체가 되고 말거라는 걸 사람들도 알고 있는 거지. 요 앞 광장에서 1인다역을 맡아 일인극을 하던 여인 기억나나? 왜, 그 체격이 남자 못지않게 우람한 여인 말일세. 그녀가 이번에 인민재판을 받게 된다더군.”
“이번엔 또 무슨 연유로?”
“그녀의 연극에 비속어가 나오나본데, 그걸 지나가던 애엄마가 듣고는 자기 아이의 정서에 해로운 연극을 한다며 그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지 뭐야? 그걸 듣고는 그 여인도 화가 나서는 말싸움을 벌이다가 손이 나가버린 모양이야. 애엄마가 뒤로 자빠져서는 허리가 삐끗했다며 부상을 당했다고 주장을 했고 그걸 지나가던 홍위병이 보고는 폭행죄로 여인에게 인민재판을 선고해버렸어.”
형식이 분노로 씩씩댔다. 형식은 어렸을 적부터 부당한 일을 보면 절대 넘어가지 못하였다. 그런 성격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사건들이 끊이지를 않았지만, 그 덕에 그의 주변에는 그의 인품에 감명 받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다. 준혁과 상호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 시국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 떠나버리고 결국 남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지고 말았다.
“범죄 말살 정책? 개나 주라 그래. 어떻게 인민재판 따위로 범죄가 없어질 수 있겠어?”
“그러나 취지는 좋았다는 말도 있어.”
준혁의 말에 형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준혁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거지같은 사상에 동조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런 시선도 있다는 거지. 실제로 그 정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범죄 처벌 수위가 낮아 살인범들이나 강간범들이 고작 3년형을 선고받고 그것도 모자라서는 모범수다 뭐다 하면서 감형되곤 그래서 사람들의 불만이 컸었잖아. 그런데 범죄를 일반 민중들로 하여금 처벌하게 하라는 이 범죄 말살 정책이 실행되고 나서는 살인이나 강간과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줄었지.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바로 민중들과 그들을 이끄는 홍위병들이 나서서 죄목을 써둔 팻말을 목에 채우고 그 팻말을 본 사람들이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서 때리고 돌을 던지고 패고 하다 보니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줄 수밖에. 그리고 그 팻말은 절대 제 손으로는 뺄 수 없다는 게 또 하나의 메리트지.”
“아예 홍위병 납셨네.”
형식이 빈정댔다. 형식과 준혁 사이에 작은 말다툼에도 상호는 애써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의 앞에 일어나는 어떤 상황에도 초연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의 주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에 지쳐있는 상태였다. 부모님이 누명으로 홍위병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이후로 더욱 그러하였다.
“폭력으로 처벌을 하는 것도, 심지어는 중범죄에 한해서 살인마저 용납된다는 것도, 그리고 그 처벌을 민중들이 하는 것도 전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결국 새로운 범죄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라고.”
“그래 그래 알았어. 자네 말이 맞아. 요즘 신경이 예민해져서 내가 헛소리를 했나보군. 자네도 알잖아. 홍위병들이 우리를 고깝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홍위병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찍히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를 백안시하고 있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다보니 일반 사람들 또한 분위기에 동조하여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더군. 작은 동네다보니 여론이라는 게 쉽게 만들어지지. 마치 사람들이 세상에 범죄가 없어지고 선한 사람들만 남기겠다는 사이비 같은 사상이 쉽게 퍼지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내가 예민해진 모양일세.”
준혁을 비롯한 이 세 사람과 같은, 범죄 말살 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지도자의 독재에 세뇌당하거나 사상에 심취해있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가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홍위병들에 눈치를 보며 말을 사렸다.
“그러고 보니, 상호, 자네 부모님이 누명을 쓰게 된 것도 제도에 불만을 품은 자네가 찍혔기 때문 아닌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을 눈여겨보고는 자기네들로 끌어 모으는데 열성적이었던 상호는 그 날 이후로 오직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준혁과 형식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홍위병에게 찍힌 자들은 홍위병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남모르게 차별당하거나 무시당하였다. 그러다 일을 크게 낸 것이 상호 부모님의 인민재판이었다. 이는 상호뿐만 아닌 준혁과 형식에게도 큰 두려움을 안기게 하기 충분했다. 특히 사교성이 좋던 준혁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계속 힘들어했으며 나아가 큰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 준혁의 심정을 알고 있기에 상호와 형식도 준혁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들만의 고통으로도 벅차있었고 실제로 큰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일이 터진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상호에게 아무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형식은, 상호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하기 충분한 상황이었으나, 형식의 얼굴이 경악과 분노, 그리고 서글픔이 뒤범벅된,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 차올라있었기에 상호는 차마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준혁이 홍위병에 붙었다네.”
상호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형식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상호의 표정이 경악으로 뒤덮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홍위병에게 우리가 비밀리 모았던 사람들의 명단을 넘겼다더군. 이제 명단이 넘어간 사람들도 우리처럼 무시당하게 생겼어.”
“사실인가? 거짓일 수도 있잖아.”
“홍위병의 눈치를 실실 보며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는 동욱이 말해준 것이니 사실일세.”
상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해온 준혁이 배신을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배신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힘들었던 준혁의 심정을 몰라준 것에 드는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상호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건 준혁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우리가 틀린 게 아닐까?”
형식이 고통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틀리고 준혁이 옳은 선택을 한 거라면? 실제로 범죄는 나쁜 것이니 없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에 좋은 거지. 준혁 말대로 솜방망이 처벌이 아닌 폭력과 같은 수위 높은 강한 처벌만이 범죄가 만연했던 우리 사회에 약이었던 걸 수도 있어. 그게 옳은 것일 터니 사람들도 거기에 동조하는 걸 테지. 암 그렇고말고.”
형식의 말은 마치 쓰라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세뇌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수의 사람이 옳다고 해서 그게 옳은 일이라는 법은 없어.”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준혁이 그들 편에 붙을 리가 없지.”
“자네도 알잖아. 준혁은 외향적인 성격이야.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피하거나 빈정대고 무시하는 것을 못 견뎌했고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그를 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는 힘들어했어.”
“하지만 우리가 옳다는 보장도 없잖아? 준혁은 그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형식은 끊임없이 괴로운 감정을 실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언제나 옳은 길을 추구해왔지만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배신은 그로 하여금 사고를 엉망으로 만들게 했다. 그는 자신이 옳은지 틀린지 처음으로 헷갈렸다. 상호의 말은 형식에게 더 이상 닿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호는 그저 그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상호를 찾아오지 않던 형식이 한 달이 지나서야 다시 상호를 찾아왔다. 형식의 마음을 헤아려 형식에게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상호는 그를 찾아와준 형식이 반갑고 고마웠다.
“내 친구 중에 강준이라고 있어.”
뜬금없는 그의 말에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상호를 아랑곳 하지 않고 형식은 말을 이어나갔다.
“강준은 일을 하느라 외국에 자주 나갔다오는 친구인데, 이번에 오랜만에 만났지.”
외국에 자주 나갔다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지도자는 국가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통제하고자 하였고, 외국으로 나가는 일은 고사하고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만 해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마당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덕에 그리도 얼굴이 밝아졌나?”
“그것도 있고, 그가 전해준 말 덕택도 있지. 그가 그러더군. 외국에서 이런 정책을 펼치는 미친 놈이 있다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다고. 이건 명백한 독재이고 억압인데, 이 나라 국민들은 그러한 억압에서 나온 스트레스를 범죄자들에 폭력으로 해소하고 그걸 범죄를 없애기 위한 선한 일이라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기에 죄책감마저 들지 않고 오히려 범죄를 말살하자는 사상에 심취해있는 것이라고 하네. 외국에 우리나라 일이 전해지고 있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한다더군.”
“결국 다수가 그르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들어서야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하는군.”
“그래, 준혁의 배신 이후 계속 생각했어. 내가 이상한 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정책이 옳다고 말하는데 반감을 표시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건 아닌가. 근데 그저 우리나라가 이상한 거였어.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고.”
형식은 신나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을 모아 계몽시키겠다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말이었지만 상호는 형식의 밝은 표정을 보면서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을 현실로 바꾸기도 전에 형식이 이야기한 강준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 전해졌다. 거의 집에만 있었던 상호가 들었을 정도면 형식 또한 이미 들었을 터였다. 듣기로는 강준이 자그마한 뒷산에서 담배를 피우고 버렸다는 어이없고도 사소한 잘못이 원인이었다고 했다. 경범죄로 인해 죽게 되는 일은 거의 없기에 더 자세히 알아보니 방화미수죄로 처리되어 중범죄가 되었고 산불이 번져 아랫동네로 퍼지게 되면 다수의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었으니 크게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 홍위병의 주장이었다고 한다. 상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형식을 찾아갔다. 형식은 퀭한 눈으로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감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준을 죽인 이 중에 준혁이 있다더군.”
상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준혁이 사람을 죽이다니……! 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형식을 바라보았다. 또한 준혁의 배신이 이전과는 다르게 뚜렷하게 실감이 나 슬픔이 물밀듯 솟아올랐다. 자신이 이 정도인데 친구에게 친구를 살해당한 형식은 더욱 힘들 것이리라. 그렇기에 상호는 형식이 그 말 한마디만을 남겨놓고 그의 곁을 떠날 때 붙잡을 수 없었다.
형식이 발걸음을 돌린 곳은 준혁과 상호와 과거에 멋모르고 만들어낸 기지와도 같은 모형 잠수함이 있는 바다였다. 그는 모형 잠수함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추억에 잠기고자 할 때 뜻밖의 인물을 만나고 말았다. 모형 잠수함 안에 준혁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산만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안녕.”
형식은 만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인사를 해버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분노를 표출해야 마땅한 그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준혁은 무언가에 쫓기듯 형식을 바라보더니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인사하는 형식의 행동조차 보지 못한 듯 싶었다. 이내 그는 형식에게 다가와 팔을 잡았다. 억센 힘에 소스라치게 놀란 형식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형식은 그의 손을 때리고 할퀴었다. 그제야 그는 손을 놓았다. 살려줘, 준혁이 애원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준혁은 갑갑함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보는 형식마저도 갑갑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형식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을 열려했지만 고장 난 모양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때 다시 준혁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부탁이야, 살려줘.”
무얼 원하는 건데, 왜 그러는 거야, 형식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알 것 같았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와 세상이 요구하는 정의. 그리고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그. 무엇을 선택해도 절망감밖에 남지 않는 현실. 사실 처음 준혁을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싸늘함이 온 몸을 엄습한다. 그에게 손을 뻗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 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까. 형식이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가 달려들었다. 준혁의 눈 안엔 불안감 혹은 두려움만 가득한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기반이 된 건 슬픔이었다.
슬픔은 분노로 이어진다, 우리들 사이에서 이 말을 곧장 하곤 했다. 그리고 준혁의 눈에서 그 말의 진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슬픔이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슬픔이 곧 분노였고 분노가 곧 슬픔이었다. 그의 손이 다가옴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뱀처럼 몸을 타고 올라온 무언가는 이내 목을 조른다. 심장박동이 느껴지고 기침이 나왔다. 켁켁 거리는 형식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비정하기만 할 따름이다. 눈앞이 흐려진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나.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 불현듯 그와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간 건 형식뿐만이 아닌가보다. 준혁의 눈에도 형식과 같은 것이 비추어있었다. 그들은 고독해져만 갔다. 같이 만들어낸 작은 집은 쌓아올린 모래성마냥 금방 쓰러질 줄 알았건만 의외로 견고하고 단단해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하였다. 갇혀버린 우리는 그저 방안을 서성거리기만 하였다. 준혁은 곧 쭈그려 앉아 그 자리에서 몇 시간째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지 못해서인지 굉장히 슬퍼보였다. 형식은 미워해야할 준혁에게 분노는커녕 측은함만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말을 걸었다.
“과거에 우리는 버려진 모형 잠수함으로 진짜 잠수함을 만들겠다며 셋이서 며칠 동안 잠도 안자고 만들다가 결과물을 보고는 깔깔 웃고 말았지. 결국 잠수함도, 집도 아닌 엉성한 무언가를 만들어 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어. 그때 그 순간 하나하나가 좋았어. 잠수함의 기능 하나 없는 모형 잠수함이었지만, 우리는 진짜인양 대서사시를 써내곤 했지 지금 우린 결국 우리가 만든 가짜 잠수함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지만 그 때처럼 우리의 상상으로 우리의 꿈을 만들어보자고, 자네.”
형식은 그를 위해 분필을 주워 문을 만들어주었다. 그러고는 진짜 문인마냥 과거처럼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꾸며내면 꾸며낼수록 분필로 그린 문이 진짜 문이 되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형식은 문을 또 만들고 또 만들었으며 세 번째 문을 다 완성할 때까지도 준혁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준혁은 무엇에 얽매여있나. 며칠간 준혁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형식은 발끝이 축축해져가는 것이 느껴지자 아래를 보았다.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물이 나올 곳은 없었다.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맛보았다. 짰다.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며칠간 그는 앉아서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형식은 준혁 대신 나가기 위해 그가 만든 문을 열어보았다. 문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준혁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일이 지나자 준혁의 눈물은 꽤나 가득 차올랐다. 둥실거리는 그의 몸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허우적거린다. 슬픔 아래로 가라앉는 그의 육체는 억눌러져있었고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였다. 문을 그려냈듯, 갇힌 방에 멋대로 하늘을 그려낸다. 만들어낸 하늘은 늘 푸르렀다. 그러나 허상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그를 비웃고 조롱한다. 물속에 깊숙이 가라앉은 준혁의 육신을 보건데 아마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 물속에서 준혁의 손이 뻗어 나왔다.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그는 계속하여 손을 뻗었다. 안쓰럽다. 무엇을 잡으려는 것일까. 허상의 하늘을 날아보고자 하는 그의 몸부림에 외면하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형식은 준혁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 심지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새와 자기 자신조차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직 준혁만이 날아오를 수 없었다. 그만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아아, 집으로, 집으로 가자! 준혁이 원하고 형식도 원한다. 그러나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바로 그들이 만든 집이었다. 형식은 무력함에 손발이 시려왔다. 무엇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조차 잡지 못한다. 준혁은 문 쪽으로 점차 헤엄친다. 아, 이제야 알았다. 그는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형식은 문을 잠가놓았다. 그가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가 이곳에 갇혀있기를 바라며. 그가 우는 것조차 외면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준혁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그는 형식으로부터 억눌려있었고 형식에게 얽매여있었다. 슬픔을 빙자하여 그를 감추었다. 그 누구의 앞으로도 꺼내놓지 못하였다. 물은 계속하여 차올랐다. 숨이 막혔기에 형식은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물과 함께 그도 빠져나갔다.
준혁은 고독했다. 고독했고 슬펐다. 그는 형식을 죽이고 싶었고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의 끝이었다. 죽음에 잠식되어가고 취해갔다. 늘 푸르렀던 하늘과는 다르게 어둠이 깊게 가라앉는다. 준혁은 형식을 조른다. 아니, 형식이 준혁을 조르는가. 준혁이 형식을 조르고 형식이 준혁을 조르고 또 준혁이 형식을 조르고 형식이 준혁을 조른다. 튀어나온, 목의 혈관은 형식의 것인가, 준혁의 것인가.
그 누구도, 주변에 있지 않았다. 형식 혼자뿐이었다. 처음부터 형식은 혼자 그곳에 있었다. 형식의 손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형식이 사라진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형식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상호는 혼자 길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눈이 올 것만 같은 시린 공기가 상호의 주위를 맴돌았다. 몇 시간 후, 그의 예측대로 눈이 내렸다. 눈이 그의 손끝에 닿음과 동시에 손끝의 차가움은 그의 팔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차가웠다. 중추 신경, 특히 뇌가 서서히 어쩌면 빠르게 얼어붙고 있었다. 퍼런 서슬이 그의 목을 옥죄이고 있었다. 이따금 숨을 쉬기가 힘들어 바둥거리곤 하였다. 그렇게 축 늘어지다가도,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던 심장박동 소리가 사라질 때쯤 그의 의식이 돌아오곤 했다.
‘왜?’ 그는 항상 의문을 가졌다. 사람들은 왜 살아가는지, 왜 나는 걷고 있는지, 왜 아무도 뛰지 않고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는지,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그에겐 무의미했다. 거무스름한 얼굴을 한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고는 있지만 대화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뻣뻣해진 몸뚱어리에 입만 뻐끔뻐끔 움직이며 거품을 내고 있었다.
뇌 속에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가라앉고는 고인 물 마냥 썩은 내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곳을 한 곳 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오지 않는 죽은 바다. 실은, 호수이지만, 실제로 바다를 본 적 없는 이 지역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호수를 ‘바다’라 불렀고, 그 또한 이곳을 바다라 불렀다.
파도는 고사하고 작은 물결조차 일지 않는 고여 있는 이 바다는 곧 썩은 내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긴 건 이때쯤이었다. 고인 바다엔 낡은 잠수함만이 둥둥 떠다녔다. 달에 처음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처럼 누군가 바다 저 끝에 발자국을 찍기 위해 이 잠수함을 탔던 걸지도 모른다. 그때의 이 잠수함은 분명 누군가의 선망을 받고 누군가의 소망을 실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그저 녹슬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버려진 고철덩어리가 되었을 뿐이다.
세상은 너무 쉽게 사람을 내쳤다. 내쳐진 사람은 버려지고 이내 붉게 녹이 슬었다. 네모로 이루어진 넓은 세상 속 세모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있다. 그 집단 안에서 태어난 세모 중 하나는 네모들이 핍박하여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이윽고 세모는 네모가 되었다. 반면 다른 세모는 박해당하며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처절하게 죽어갔다. 울을 벗어나면 자신과 같은 세모를 만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걷던 그의 발걸음은 항상 같은 목적지에서 멈추었다. 오는 내내 중얼중얼거리던 그의 입은 끊임없이 '집에 가고 싶다'는,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된 무언가를 내뱉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의 입은 같은 것을 쏟아내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달력은 어제일자까지 'X'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오늘 일자에 크게 'X'표시를 하였다. 그 달의 마지막 날이었다. 달력을 응시하던 그는 이미 끝나버린 그 해의 그 달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찢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폐지 위에는 큰 글씨로 '5월'이라고 써져있었으며 6일 밑에 작은 글씨로 입하(立夏)라고 써져있었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원래는 없었던, 갑자기 생긴 큰 그림자가 바람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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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속 읽으면서 생각 난 것인데 홍위병이라는 단체의 설명이 앞부분에 잠시나마 등장 해야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이 뭔지 모르는 것처럼 독자들도 모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덫붙여 작중의 사회 모습도 작품 초반에 언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도 지금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기때문에 파악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다음으로 작품 중반부까지 사람들의 대화만으로 상황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딱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기에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좀 지루했던 것 같습니다.
1. 소설의 길이에 비해 상징물이 많습니다. 표현주의적 문체이다 보니 의도치 않게 '모형 잠수함'이나 '문'이 뜻하는 바가 많아졌습니다. '바다'로 불리는 '호수'도 소설 속 상황을 드러내는 상징물입니다. 제목이 <세모의 꿈>이다 보니 후반부에서 '세모'나 '네모'가 등장합니다. 모호해서 내포하는 의미도 상징물들이 수도 많습니다. 하나 정도로 줄여서 작품의 주제를 은은하게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개인적으로는 '호수'가 가장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2. 인물도 많습니다. 스파이 노릇을 하는 '동욱', 외국을 자주 드나드는 '강준'이 제시되었으나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소모되었습니다. '준혁'의 정체를 모호하게 드러내
려면 '동욱'을 삭제해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외부 정보통으로 뭉뚱그려도 좋습니다. '강준'이 외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강준'을 죽이는 것은 '준혁'의 정체를 분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아 보입니다. 홍위병 사회의 잔혹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초반에 인물의 대화에서 충분히 언급된 것 같습니다. 소설의 길이상 생략해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3. '준혁'이 '형식'에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아쉽습니다. '준혁'은 정황상 홍위병일 가능성이 높아 '형식'에게 무력하지 않을 겁니다. 홍위병이 아니라 해도 '준혁'은 인물들의 대사로 외향적인 인물이라 언급되어 속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이기 보다는 당당할 것 같습니다. '준혁'이 죄책감을 갖고 있더라도 외강내유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소설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하나의 인물안에 세가지의 인격이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장면의전환이 너무 빠르게 느껴지는것도 있지만 단락 사이에 연결되는 부분이강하지 않아서 그런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가령 준혁이 홍위병에 붙었을때도 위에 단락을 보다가 갑자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반부 홍위병의 설명같은 것들을 독백 말고 대사로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정신착란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 중반부에는 세모가 삼중인격인 주인공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는데, 후반부에 제목은 이런 뜻이라는 듯이 도형의 상징으로 풀어져 조금 아쉬웠습니다. 제목이 추상적인 만큼 제목의 의미가 작품 전체에 녹아져있으면 좋겠습니다.
초반에 소설의 시대 상황을 나타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홍위병에 대한 설명도 많지 않아서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현재의 정권을 찬양하는 듯한 모습을 등장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한번에 이해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좀 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른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주인공들의 나이대가 40대 이상이라면 홍위병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표현되면 좋겠습니다.
2.소설의 시대를 표현해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회색깔이라는 말이 이상했습니다. 깔이라고 하니 왠지 눈깔이란 말이 연상되서 이상했습니다. 회색이라고만 써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눈이 죽어있다는 표현도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이 눈이 죽어 있을 여지는 있으나 그 외의 사람들마저 눈이 죽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현 상황에 순응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아 사람들 모두가 눈이 죽어있다고 표현하는 말을 쓰기는 조금 어렵다고 봅니다.
형식과 준호가 대치하는 상황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을 걸고 분필로 문을 그린다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 주십시오.
시대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지만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습니다. 눈물이 차오르고, 구름이 비웃는 등의 묘사는 심리를 잘 와닿게 하지만, 글의 사회적 현실과 어울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묘사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