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식 시집 {꿈길} 출간
[소녀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김현식 시인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순수를 발견하고 그것을 향한 마음을 키워간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순수의 형상은 귀중한 것이다. 까마중 열매처럼 검은 눈을 감고 신비로운 세상을 유영하는 것 같은 아가의 모습이나 파란만장한 생의 그늘에서도 연민과 사랑의 행로를 잃지 않는 아내의 잠든 모습이 순수의 표상이다. 그것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기쁨이고 희망의 원천이다. 굳은 흙더미를 밀어 올리는 연둣빛 싹, 무거운 침묵 속에 반짝이는 밝은 미소가 생의 원동력이다. 마비되었던 다리의 발가락이 움직일 때 나오는 기적의 경이감이나 오래된 상처에서 새살이 돋을 때 얻게 되는 천진한 기쁨은 동질적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순수의 정신이요 천진의 향심이다. 김현식 시인의 시정신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눈은 청징하고 섬세하다. 그는 우리 몸의 미세한 혈관과 내장의 숨은 계곡과 습지를 밝은 눈으로 탐사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정신으로 세상과 인생을 관찰하여 시를 쓴다. 순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세상의 어두운 구석이나 부패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다시 맑고 고운 곳을 바라보며 순수 지향의 몸짓을 일관되게 지켜 간다. 순수한 세계를 끝까지 추구하려는 그의 걸음이 조금 느려 보이지만 특유의 천진함으로 각박하고 삭막한 세계를 물리치며 정직한 거북이처럼 별이 빛나는 저곳을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그의 고독하고 빛나는 항해에 뜨거운 공감의 박수를 보낸다.
----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교수
김현식 시인의 시가 ‘서정’이라는 자장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서정은 시인의 내면이 신성한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궁극적 본향을 우러른다는 점에서 아름다우며, 시적 형상이 시간의 축적 안에서 발효해가는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맑고 눈부시다. 서정성을 논의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훼손되기 이전의 ‘시원’을 어떻게 발현해 가느냐의 문제인데, 그의 경우에는 ‘순정’이라는 태도가 개입된다. 여기에서의 순정이란 지순함이다. 시력 십 년을 한결같이 의사로서의 귀한 소명감을 시로 드러낸 올곧은 발화와 삶이 곧 시이며 시가 곧 삶이 되는, 즉 시인과 시가 은유적 등가를 이루는 곡진함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이번 시집 『꿈길』은 자신의 이상을 의술과 시로 실현하는 길일 터,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도로서 그의 삶과 시가 숙연하게 무르익어가는 순례 길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 - 김명원 (시인, 대전대 교수)
김현식 시인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전주예수병원에서 외과과장을 지냈다. 2006년 {애지}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나무늘보}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시의 향기香氣}가 있다. 대한대장항문학회 부회장과 대장항문전문병원인 서울송도병원 병원장을 역임했으며, 2009년도에는 ‘포브스 코리아 100대 명의名醫’로 선정되는 영예의 관冠을 쓰기도 했다. 현재는 ‘시인-의사’로서 충북 충주에서 ‘두리장사랑 외과의원 원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인간의 영혼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고, 의사는 인간의 병든 육체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다. 김현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꿈길}은 ‘시인-의사의 길’이며, 그는 이 ‘시인-의사의 길’을 너무나도 순수하고 정직하게 걸어간다. 그 ‘꿈길’은 순수지향의 길이고, 세계평화와 만인평등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시집의 제목을 ‘꿈길’로 정했다. 그것은 이 시집에 들어 있는 「꿈길」이라는 시가 시집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마다 꿈을 지니고 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런 의미에서 ‘꿈길’이란 자신이 정당하게 걷는 길이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다. 김현식 시인의 꿈길은 어떠한 길일까? 그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은
꿈길
진찰실로 가고 있다
병실로 가고 있다
꿈길로 가고 있다
태연하고 전혀 상관치 않는
가로수들이 졸고 있는
국도를 간다 지방도를 간다
꿈길을 간다
언덕 위에 꼬막집이 있는
조용한 시골길을 간다
소박한 식사를 할 수 있는
할매식당이 있는 시골길을 간다
꿈길을 간다
인생의 도반과 함께 가는 길은
모두 꿈길
처음 가보는 길도
가끔 다니는 길도
자주 다니는 길도
모두 꿈길이 된다
요사이 새로운 꿈길이
하나 더 생겼다
학생 때 헤어진 후 아직까지 만나지도
못한 옛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다
「꿈길」 전문
김현식 시인의 꿈은 소박하다. 진찰실이나 입원실로 가서 환자를 보는 일상적인 일을 하거나 아니면 가로수들이 졸고 있는 국도, 지방도를 따라 조용한 시골로 가는 것이다. 할매식당 같은 허름한 식당에서 간소한 식사를 하고 인생의 도반과 더불어 갈 길을 간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모두 꿈길이 된다고 한다. 처음 가보는 길도 자주 다니는 길도 모두 꿈길이라면 그의 꿈길은 평등 평화의 길이고 차별 없는 대동 화합의 길이다.
요즘 새로 생긴 꿈길은 옛 친구를 찾아가는 추억의 길이라고 했다. 추억이야말로 우리를 순수한 꿈으로 안내하는 정다운 손길이다. 추억의 길을 떠올린다는 것은 김현식 시인의 연륜이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앞을 내다보는 일보다는 지난 길을 돌아보는 지점에 서게 된 것이다. 그가 돌아본 첫 번째 꿈길에 다음 두 친구가 떠올랐다.
김병현,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6반 2인용 책상에 나란히 같이 앉았던
순박하고 마음 좋았던 친구, 점심시간이면 나는
그의 도시락 반찬 묵은 김치를 좋아했다
한여름에도 새콤하면서도 시디 신 묵은지는 바로
그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5학년으로 올라간
후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 정말 보고 싶은 친구다
강대석, 아마 초등학교 5학년 7반이었으리라
하교 때는 자주 같이 가곤 했다 가는 길에는
미니골프장이 있어 우리에겐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곤 하였다
그러다 2학기 때 그는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전학을 갔다 그후로 다시 보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궁금하고 그립다
「그리운 친구들」 전문
초등학교 4학년 6반 교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김병현. 그는 도시락 반찬으로 묵은지를 자주 싸 왔다. 냄새도 퀴퀴하고 맛도 시큼했던 묵은지는 그의 순박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떠올리게 한다. 5학년 진급 이후 다시 보지 못했지만 묵은지의 맛과 냄새를 통해 그의 추억은 생생히 살아서 환기된다. 시인은 김병현을 다시 만나 꿈길을 같이 걷고 싶어 한다. 50년의 세월을 넘어 그의 묵은지 맛을 정겨운 마음으로 다시 맛보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의 친구는 초등학교 5학년 7반 친구인 강대석. 그와는 하교 길이 같아 자주 동행했다. 미니골프장에서 골프 치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기도 했다. 2학기 때 대구로 전학을 간 후 다시 보지 못했지만 그 짧은 동행의 인연이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를 다시 만나 어릴 때의 그 미니골프장을 다시 걷고 싶은 것이 시인의 꿈이다. 50년 저쪽에 삶의 자취를 남긴 그리운 친구들에 대한 꿈길의 상상은 다시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에 대한 기원이기에 애틋하면서도 허전하다.
그 점에서는 「사라진 번호」의 사연 역시 유사하다. 화순의 작은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더니 수몰된 지 오래 되어 마을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시골 고모를 오랜만에 찾아갔더니 낯선 사람이 나와 얼마 전 동구 밖으로 이사하셨다고 전한다. 불현듯 떠오른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결번이라는 메시지만 나온다. 정성들여 보낸 시집은 수취인불명으로 도장 찍혀 반송되어 온다.
이렇듯 기대감은 늘 넘쳤으나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 오래 방치된 빈 항아리에는 먼지만 쌓일 뿐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변해 버린 자리에는 허전하고 애틋한 공백만 남아 있다. 꿈길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들을 아예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꿈길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시인의 고민은 여기서 싹트고 줄기를 벋는다.
그러면 오랜 시간이 흘러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았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되면 어떠할까?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척이나 어릴 때 보고 못 만났던 친구를 다시 보게 될 때 기쁘기도 하지만 기쁨과 함께 슬픔을 맛보는 일도 많다. 왜냐하면 세월의 흐름이 과거의 천진했던 친구의 모습에 주름과 백발을 드리워 실망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동창회에 가 보면 어릴 때 귀여웠던 단짝 친구가 늙고 힘없는 노인이 되어 앉아 있다. 그것은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알아보지 못하였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를
세월에 묻혀 왜소해진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네
예고없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네
원래 사람기억을 잘 못해
어디에선가
스쳐간 사람이리라 여겼네,
태산이, 준령이,
동네 야산이 되어 서 있었네
인고의 세월이 깎아내린
무수한 파편들이
돌무덤처럼 쌓였네
「사미인곡(思美人曲)」 전문
시인은 그러한 체험을 ‘사미인곡’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인데, 늘 아름다우리라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 아주 낯선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때 ‘사미인곡’의 애수는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그리워했던 김병현과 강대석이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고 마멸되어 왜소한 노인으로 내 앞에 선다면 그 실망감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기억 속에서는 태산이요 준령이었는데, 한갓 동네 야산이 되어 서 있다면 그 민망함을 어이할 것인가? 돌무덤처럼 흩어진 세월의 파편을 쓸쓸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현식 시집 {꿈길}, 도서출판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