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세례명
- 중세 문학에서 유아 세례 모습.
귀족 가문의 경우, 아이가 태어난 지 6주가 되면 어머니가 아이를 직접 안고 교회로 가 세례를 받도록 했다.
“세례명이 어떻게 되세요?”
처음 만나는 사람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는 질문입니다. 세례명을 들어보면, 성경의 인물, 초대 교회의 교부나 순교자, 또 이들 성인의 이름을 딴 사람 중 시성된 분의 이름이 많습니다. 세례 때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본받고 싶은 성인이나 나와 관련 있는 성인의 이름을 정하죠. 사실 세례명이 세례의 핵심은 아닙니다만, 우리나라처럼 신자가 다수가 아닌 선교 대상 국가에서는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생일 이상으로 영명축일을 축하하기도 하니까요. 근데 세례명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요? 또 여느 기념일과 달리 세례를 받은 날이 아니라, 세례명 성인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이유는 뭘까요?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 때 새 이름을 갖는 관습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신자들 아이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도록 이교도의 이름 대신 성경의 인물이나 순교자의 이름을 권했습니다만, 어른의 경우 신자가 된 뒤에도 이교도 신과 관련 있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물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이교도 느낌이 나서 성경의 예언자 이름을 새로 사용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최대의 박해였던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시기,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요한 1,47)이 되고자 서로를 이사야, 다니엘 등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 명단을 보면 그리스도교식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아나스타시오(부활)’, ‘살루시아(구원)’, ‘나탈리아(성탄)’처럼 신앙이나 교회 전례와 관련된 이름들이 늘어났고,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경우, 주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주교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식 이름을 갖고 있었죠.
- 11세기 풀다 성사집에 실린 보니파시오 성인의 삶
719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지시를 받아 게르만족에게 복음 번파에 나섰다. 초대 마인츠 교구장으로 754년 프리슬란트 지역 선교 중 이교도에 의해 순교하였다(아래 그림).
오늘날처럼 세례 때 새 이름을 받는 사례는 옛 로마 제국이 아닌 지역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7, 8세기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중부 유럽을 누비며 게르만족에게 세례를 줬는데요, 그때 이교도 이름을 버리고 그리스도교식 이름을 갖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예처럼 세속적, 영적 신분이 바뀌거나 새로운 일을 맡으면 이름을 새로 받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런 사례가 세례명의 모델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재도 수도원 입회를 하거나 교황이 되면 새로운 이름을 받지요. ‘독일의 사도’라고 부르는 보니파시오 성인의 이름도 원래 ‘평화의 친구’란 뜻의 빈프리트였지만, 그레고리오 2세 교황에게서 게르만족 선교 사명을 부여받으면서 ‘보니파시오’란 새 이름을 받았죠. 게르만족에서 ‘복된 삶을 가져다주는 이’가 되길 바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 무렵 ‘아우스트로발두스(부활절+용감한)’, ‘고데트루디스(하느님+평화)’처럼 게르만식 이름에 그리스도교 요소가 가미된, 길고 발음하기 힘든 이름도 기록에 등장합니다.
유럽 선교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에는, 세례 때 그리스도교식 개명이 보편적이진 않았습니다. 오딜리아 성녀나 성녀의 아버지와 조카 수녀원장들처럼 게르만 이름 그대로인 신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 이야기한 오딜리아 세례 장면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딜리아는 그리스도교식 세례명이 아니라 에르하르트 주교가 이름 없던 아이에게 원래 신분에 걸맞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오딜리아는 고고 독일어 ‘ot’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유한 이’, ‘상속자’, ‘값진 이’란 뜻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대제의 이름도 같은 의미입니다. 게다가 아일랜드 선교사를 뒤이은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세례 때 게르만 이름의 유산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교를 펼칩니다. 그래서 이 무렵 유럽 성인들에는 아델라, 콘라트, 노르베르트와 같이 원래 게르만 이름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 (좌) 14세기 덴마크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성인력
6월 달력으로 성 요한 세례자(6.24),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6.29), 그 지역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헨리쿠스 웁살렌시스 주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우) 1614년 로마 예식서(Rituale Romanum)
1614년 바오로 5세 교황이 펴낸 최초의 로마 예식서. 미사와 성무일도서를 제외한 전례를 사제가 어떻게 집행해야 하는지 규정이 실려있다.
지금처럼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는 관습은 중세를 거치면서 뿌리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 문학에서는 아기가 태어난 지 6주가 되어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묘사됩니다만, 내세의 구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받으려 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아기의 구원까지 생각하게 된 거죠. 이때 부모나 대부모는 세례 당일 성인력에서 성인 이름을 골라 이름을 붙였고, 그게 실제 이름이 된 겁니다. 다른 그리스도교식 이름 대신 유독 성인의 이름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 글에서 다룰 성인 공경 전통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관습은 12세기 귀족부터 시작해서 13~14세기 평민들까지 널리 퍼졌고, ‘세례명(toufname)’이란 중세 독일어 단어도 중세 후기에서야 등장합니다. 게다가 세례 때 교회 문서에 아기의 세례 기록을 남겼는데, 이게 그 시대 유일한 출생 증명서였습니다. 사실상 영명축일을 생일과 같게 여기게 되었고, 세례일이 아니라 영명축일을 축하하게 된 계기도 여기에 있는 거지요. 예를 들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11월 10일 밤에 태어났는데, 다음날 세례를 받으면서 마르티노 성인의 이름을 따라 마르틴이 된 겁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와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톨릭에서 세례명과 영명축일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본당 사제에게 이교도 이름 대신 반드시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지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세례명의 관습이 자리잡게 됩니다.
* 차윤석 베네딕도 - 서울대교구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친 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문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분도통사」를 비롯한 여러 번역을 했으며, 「교양으로 읽는 용선생 세계사」(1-15권) 기획, 집필했다. 현재 <사회평론>에서 단행본 본부장을 맡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가을(Vol. 55), 차윤석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