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돋보기 -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1335 ~ 1408 , 재위 1392 ~ 1398)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을 건국한 시조 입니다 또한 훗날 고종(1863 ~ 1907)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태조 이성계를 태조 고황제로 추존하기도 합니다
명실공히 조선이 황제국가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태조 이성계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화두는 아마도
'위화도 회군'이 아닐까 합니다
이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건국의 단초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으로
많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화도 회군은 1388년 고려 우왕15년에 추진된 요동정벌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항명으로 그 성격을 규정짓고 인식한게 오늘날의 지배적인
시각이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태조 이성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대두 또한 사실 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인 이석씨의 증언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남긴 시가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말하자면 호연지기가 충만한 장부의 기상을 엿볼수 있는, 또한 우리민족의
고토수복의 염원을 느낄수 있는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 시는 이석호 교수가 번역했다고 합니다
>>>> 백운대에 올라 <<<<
손 당겨 댕댕이덩쿨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만약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리
登白雲峰
引手攀蘿上碧峰
一庵高臥白雲中
若將眼界爲吾土
楚越江南豈不容
이 시는 삼각산 백운대에 오른 이성계 장군이 읊은 것으로
비단 한반도나 만주뿐만이 아닌 중국본토까지도 기꺼이 차지하겠다는
놀랍고도 호방한 의지가 담겨 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러한 태조 이성계의 북벌의지가 있었기에 조선초기의
북벌정책은 꾸준하게 추진될수 있었다고 사료됩니다
태조때 추진된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
세종때 최윤덕,김종서 장군의 평안도,함경도 확보는 바로 이러한 조선왕조의
북벌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1455 ~ 1468)치세에 와서도 이러한 북방정책은 계승되는데 바로 신숙주를 사령관으로 한
야인정벌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종때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조선초기 까지만해도 북방정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태조 이성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 이지만 고조부인 이안사(목조)가 원나라로부터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받을만큼 오늘날의 만주일대가 활동무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에도 여진족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
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성계 휘하의 장병들중에는 여진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퉁두란 장군입니다 퉁두란 장군은 훗날
태조 이성계로부터 이지란 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게 되지요 퉁두란은 여진족
출신인데 퉁두란의 고향이 바로 오늘날의 함경도 북청 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는 가급적 행군 속도를
늦추었다고 합니다 회군 도중 사냥까지 한 것으로보아 분명 의도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바로 이즈음에 많은 여진족 군사들이 이성계 부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 숫자는 무려 천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는 이성계가 이들이
자신의 부대에 합류할수 있겠끔 시간을 벌기위한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당시
이성계가 여진족으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재위시절 함경도 땅을 방문하는데 태조실록을 보면
이때에 여진족의 환영 열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53년 김종서 휘하의 장수였던 이징옥이 난을 일으키면서 대금황제라 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약속받은것도 당시까지만해도 여진족이 우리와 매우 가까웠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는 적어도 여진족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와 결코 이질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참고로 고려 공민왕(1351 ~ 1374)재위시
여진족의 지휘자인 삼선,삼개가 고려에 침입해 왔는데 바로 이 삼선,삼개
형제의 어머니가 이성계의 고모였다고 합니다 다시말해서 삼선,삼개는 이성계와
고종사촌이었다는 얘기 입니다 달리해석해 본다면 이성계 장군의 가까운
친척들중에는 여진족 또한 적잖게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또하나 태조 이성계를 볼때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태조 이성계의 후계 구상
입니다 알려진대로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후임으로 막내아들인 방석을 내세우게 됩니다 이는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중국과는 대별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당시 여진족이나 몽골은 중국과는 달리 막내상속이 보편적 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태종 이방원 역시 굳이 장자상속에 얽메이지 않고 3남인
충녕대군(세종)을 자신의 후임으로 삼게 되지요 우리가 굳이 중국식 가치관을
의식하지 않고 바라본다면 충분히 자연스럽고 이해할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 오늘날 우리가 호칭하고 있는 '만주'라는 지명은 청태종 홍타이시가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