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한 神의 영역 침범, 그 오만한 당당함을 탐닉하다
悳泉 나병훈
묵념, 5분 27초
황지우(1952∼
1.
이 시를 만나면서 강은교 시인이 어느 문학칼럼 쓴 호소문이 번뜩 뇌리를 스친다. “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아직도 거기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이다” 그러하다면 도대체 시란 황지우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그는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라는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실험적인 설문의 도움을 청한다. 그는 시를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지금 이 시대를 위한, 지금 이 시대의 유언(遺言)”으로 쓴다고 진술한다. 그 진술이 “오만인가? 당당한가? 위험천만한가? 아니면 천진난만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기발한 작시법이지만 전위적이지 않는가? 필자는 택일을 할 수 없어 고민 끝에 ‘ 당당한 오만함’으로 설문지 여벽에 주기(朱記)하고 만다. 틀, 진부함과 상투성은 그의 시에서 이미 지워져 있으므로. 이미 40년전 등단하자마자 이미 떠나고 있었으므로.
2.
근거는 하나 더 있다. 결구에서 그는 동 시대에 맺어진 악연의 고리를 풀어낼 수 없으므로 이 시대의 유언(遺言)으로 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그 고백의 언저리에는 특유의 풍자와 부정의 정신으로 형상화 되는 동시대의 감시자로서의 슬픔이 배어있지만 ‘당당한 오만함’이 고여 있을 터. 결국 그의 시는 그러한 오만함으로 지금 서 있는 이 시대를 풍자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시의 행간에는 당당하게 정치성, 종교성이나 일상성이 골고루 감칠맛이 나게 하는 독특한 마법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3.
그러한 마법이 흥건하게 흐르는 이 황당한 실험적이며 지극히 전위적인 시라 할 수 있는 「묵념, 5분 27초 」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읽어야 할까? 어떤 시인은 시를 일컬어 “ 神을 닮은 인간의 눈”이라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神의 영역을 파훼해 버리는 시 형식의 담대한 파괴도 시라고 명명 할 수 있을까? 제목만 던져놓고 시 쓰기는 독자들에게 툭 던져버리는 전위적인 예술행위로 과연 시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시의 문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 쓰기가 ‘ 영원히 대답 없는 무모한 질문’이라고들 하지만 이 시는 오만의 극치이자 당당함의 실체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쓴 시를 불신하고 모독하며 두 번 다시 보기 싫은지언정 그는 정통적인 시의 길을 잃어버리기위해 모태적으로 타고난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게 황지우 시인의 진실한 민낯이기 때문이다.
4.
외형상 5분 27초가 흐르는 시의 행간을 살피자.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는 일찍이 “문학에서 형식을 떠난 내용은 없다”고 했던가? 대저 문학,종교 철학에서는 무(無)는 곧 유(有)이며 유(有)는 무(無)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 안(無)으로 말을 되새김 질 해야 하는 숙명’일터. 그 되새김은 이 여백의 빈 공간에서 잘 갈무리되어 세상 밖(有)으로 뱉어질 것이다. 여백의 무(無)는 독자에게 베푸는 시의 성찬으로서의 유(有)가 비로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시라는 진실을 황지우 시인은 이미 간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여백이 시의 본문으로 구성되기에 어느 시적 구조보다도 시의 바다에서,숲이나 허공에서 더 미학적인 상상력을 잉태하며 꿈틀거릴 수 있으며, 이는 지체없이 현실을 구성하는 실재의 모습으로 형상화 될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5.
1년 전 남해 여행 시 우연히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 들른 일이 있다. 1980년대 친우인 이성복 시인과 쌍벽을 이루며 암울했던 시대에서 들꽃처럼 항거했던 한국의 대표 현대시인의 체취가 전위적인 냄새로 묻어나고 있었다. 부정의 시학. 혁명과 시의 시대에 현실참여 문학의 아이콘이 되었던 한 시대의 불신과 모독으로 점철 된 오만한 당당함이 문자.기호,몽타쥬등 들과 어우러져 기증된 황지우의 체액들과 버물어져 오롯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神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으니...
겁이 덜컥 나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