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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여행을 간략히 마치고 하카다로 올라와 시모노세키 맞은편의 고쿠라 성을 답사할 계획이었으나, 하카다에 내리니 벌써 날도 어두워지고 피로도 하여 바로 텐진(천신)의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일찍 텐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자이후(태재부)로 갔다.
후쿠오카는 가운데 나카강을 경계로 텐진 지역과 하카다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하카다역이 수많은 철로로 매우 복잡다단한 곳이라면 텐진역은 그보다는 못미치나 버금가는 곳으로 보인다.
후쿠오카현의 텐진은 마치 우리의 강남역 수준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인파가 물밀듯이 오가며
선로가 3개나 놓여진 텐진역내의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은 실어나르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지하철을 타고 니시테츠 다자이후역으로 갔다.
니시테츠 다자이후역
어린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왔다. ^^
역 앞에는 항상 관광안내소가 있다. 여기서 관광지도를 얻을 수 있다. 한글로 된 것을 찾았다. ^^
3박 4일 북규슈 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곳이다.
대체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많았다.
우리나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 덕분에 먹고 사는 구조가 되었다.
세상은 과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다음에는 인도인들이 찾아오려나??
일본의 어달 가나 명소에는 도리이가 서있다.
타이코 블릿지(대고교)라니 커다란 북이 있는 다리라는 뜻이렸다. 아주 아름다운 연못 정원이다.
수많은 인파를 비집고 한 컷
도리이는 곳곳에 서 있다. 태고교가 있는 연못 앞에도 있더니만 텐만궁 입구에 또 도리이가 있다.
'텐만궁'이라는 액자가 세로로 걸려 있다.
텐만궁(천만궁) 본전 앞마당에는 관광객으로 그득하다.
밤새 내린 눈이 지붕에 남아 있어서 겨울다운 운치를 준다.
텐만궁은 일본 역사상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845~903)라는 실존 인물을 사후에 천신으로 신격화해서 "학문의 신'으로 모신 곳이다. 이후 이곳은 전국의 텐만궁의 총본산이 되었으며, 치열한 대학입시를 치르는 일본에서 1년에 700만 명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합격을 기원한다고 ...와우!!! (유홍준, 207쪽)
우리나라도 입시지옥 국가의 대열이지만, 역시 일본은 이것을 종교적으로도 크게 기우는 능력이 탁월하다. ㅋㅋㅋ
'수험합격' '기원수부' 플래카드를 붙여 놓고 고객들을 맞이하는 합격기원 접수처.
대신 기도를 해주는 곳인가 보다 ㅎㅎ
다자이후는 7세기 이래로 교토 중앙정부의 서일본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후쿠오카에서 하카다와 텐진이 가장 번영한 곳이지만,
당시만 해도 남쪽으로 훨씬 떨어져 있는 쓰쿠시 평야를 내려다보는 다자이후가 가장 번영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문화 유산도 이곳에 다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유일하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덴만궁이다.
신전에 모셔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신동으로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썻다.
당나라 사신를 접대하는 자리에서도 해박한 학식과 뛰어난 문장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천황의 신임을 얻어 우대신에 올랐다.
894년 미치자네는 20차 견당사에 임명되자 이제 일본은 더이상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올려 더이상 견당사를 파견하지 않게 되었다.
신전 앞에는 각계에서 보내온 술병이 전시되어 있다.
새해에는 새로 빚은 술을 신께 올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일본 문화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과 국민적 신망을 얻었던 미치자네는
불행하게도 당시 실권자 후지와라의 반감을 사서
다자이후의 권수(곤소노치)로 좌천되었고,
교토에서 쫓겨나 규슈에서 유배생활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다자이후로 온 후에 아들이 죽고 그 자신도 2년만에 세상을 뜨는 비극이...
미치자네 사후에 천재지변이 잇따라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원령이 저주를 내렸다고 믿고
덴만의 천신으로 삼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학문의 신, 성심의 신, 글씨의 신으로 신적 이미지가 강화되고
전국적으로 널리 추앙받게 되었다.
역대로 유명인사들이 여기를 참배하면서 규슈 굴지의 유적이 되었고,
덴만궁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이곳은 덴만궁의 총본산이 되었다고 한다.
신전 가운데에는 어떤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 하나 놓여 있다.
기도접수처가 여러 곳이다. 그만큼 기원드리는 사람들도 많다는 뜻이렷다. ㅋ
연리목으로 자란 녹나무. 두 그루가 붙어버려 부부목이라고도 한다.
미치자네가 매화를 좋아하여 본전 앞마당에는 청매, 홍매, 백매가 그득하여 2월이면 입시철과 겹치면서 텐만궁은 꽃구경 하랴 입시 기원하랴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미치자네는 고향을 떠나면서 와카를 지었는데,
"동풍이 불면 향기를 실어 전해다오.
매화 주인이 떠났다고 봄을 잊지말고."
그의 노래에 감응한 매화 한 그루가 교토에서 이곳으로 날아와 먼저 꽃을 피웠다는
'비매' 전설이 전해져 온다고...ㅋㅋ
오래된 녹나무 위로 풍란 같이 생긴 기생식물이 붙어있다.
1500년 묵은 녹나무. 천연기념물이라 적혀 있다.
녹나무의 위용이 신사를 압도하고 있다. ^^
덴만궁 신사의 사무소
한겨울에 가장 일찍 꽃피는 납매화
신전 앞에는 거대한 수수대가 있다. 손을 깨끗이 씻고 본전으로 들어가는 절차가 있다고 한다.
손씻는 수수대의 오른 편으로 텐만궁 보물전이 있다.
우리네 절에 있는 성보박물관 같은 곳이렸다.
텐만궁 내에는 매화나무 가지가 곳곳에 엉켜 있다.
텐만궁 신사를 지나오면 바로 위쪽으로 규슈국립박물관이 나온다.
입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 높이로 올라가면
비로소 규슈국립박물관이 나타난다. 산 위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지어놓았다. ㅋ~
실내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혼잡했다.
2층에서는 "황금의 아프가니스탄전"이 열리고 있었다.
규슈박물관의 상설관은 3층에 있었다. 동아시아 해양문화 교류전이 전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여 ...ㅠㅠ
둘러보고 그냥 나와야 했다. 내용이 별 것도 아닌데...
덴만궁과 규슈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신사의 앞거리는 더욱 많은 관광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들 관광객들이 다들 입에 물고 먹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우메가에모치'다.
붕어빵 굽듯이 하는듯한데, 재료가 찹쌀이고 안에는 팥앙금을 넣었다.
맛이 어릴 적에 설 명절이면 먹을 수 있었던 찹쌀떡 안에 팥앙금을 넣어 만든
바로 그 맛이어서 무척 신기했다.
나가사키에선 초등 때의 전차를 똑같이 보았는데, 다자이후에선 어릴 적 설 음식 맛을 보다니...ㅎㅎ
점심으로 먹은 라면과 공기밥
반찬이라고는 절인 무우 3쪽이다. 이걸 세 사람 먹으라고 주다니...ㅠㅠ
라면집에서도 '우메가에모치'를 팔고 있었다. 한 개에 120엔(1200원)
별 것 아닌듯 하지만 그때 먹은 구운 찹쌀떡의 구수하고 달달하고 따끈한 맛은 오래 갔다.
나가사키에 가면 달달한 카스테라를 먹어야 하듯이
덴만궁에 오면 구수한 군 찹쌀떡 '우메가에모치'를 먹어야 한다.
우리도 이렇게 전통있고 맛있는 먹거리를 관광지마다 개발하면 좋겠다. ㅎㅎ
길거리 양쪽으로 이런 모치떡집이 즐비하다.
여기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
유배지에서 미치자네가 쓸쓸히 지내고 있을 때 곁에 살던 비구니 노파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맛있게 빚은 찹쌀떡을 따뜻하게 구워 바쳤는데,
미치자네가 아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미치자네가 죽었을 때 관 위에는 매화 한 가지와 군 모치떡이 놓여 있었다고 전한다.
이 노파도 훗날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돈궁 대명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ㅋ
오후에는 다자이후 관청터로 가기 위하여 니시테츠 다자이후역사 앞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좌석이 10여석밖에 안되는 아주 자그마한 미니버스다.
다자이후 관청 유적지
다자이후 관청은 백제 멸망기에 일본의 제명여제가 백제구원군을 보내기 위한
전진기지로 설치한 곳이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부여와 공주 이외의 백제 지역은 여전히 굳게 지키면서
수도 회복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제 장수 흑치상지는 임존성(충남 예산)에서 군사 3만을 모아 주변 200여성을 회복했고,
의자왕의 사촌동생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한산)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을 노렸다.
복신은 왕조를 부흥시키기 위해 당시 왜국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을 백제왕으로 옹립하고
660년 10월 왕자의 귀환을 요청했다.
이에 왜는 661년 1월 먼저 화살 10만발과 종자용 벼 3천석을 보냈고,
3월에는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
661년 9월 부여풍을 백제로 보내면서 아베 히라후 장수 휘하에 병사 5천을 딸려 보냈다.
복신은 왜의 지원군과 함께 사비성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해 임존성으로 후퇴했다.
이때 내분이 생겨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부여풍은 복신을 죽인다.
그리고 부여풍은 나당연합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야마토 정권은 800척의 군선과 2만 7천명의 병사를 지원했다.
663년 8월 27일~28일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이 금강 하구의 백촌강에서 혈전을 벌였다.
결국은 백제와 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병사 1만이 전사하고 전선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마침 대한항공 여객기 한 대가 후쿠오카 공항으로 내리는 모습이 잡혔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선에서 불타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환하게 하고 바닷물을 붉게 했다'고 썼다.
그것이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백촌강 전투는 동아시아 4개국이 뒤엉킨 혈전이었다. 더이상 회생할 수 없는 참패를 당한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은 대거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규슈로 도망와서 수성(미즈키)을 쌓고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수성 이외에도 다자이후의 시오지산(사천왕사)에 대야성(오노 조)를 쌓고,
세토 내해에 여러 곳에 백제식 성을 쌓았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로 쳐들어갔고 왜로는 더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이에 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이를 게기로 더욱 강력한 율령국가 체제를 만들어
702년 다이호 율령(대보율령)을 반포하여 천황제를 확립하고
나라 이름도 '일본'이라 부르며 비로소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도독부고지>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다자이후 전시관에서.
백촌강 전투에 대한 설명이 지도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제명여제는 661년 7월에 죽고, 그 아들 천지천황이 이어서 27000천의 병력을
백제에 파견한 것으로 나온다.
태재부(다자이후)의 방어망
수성, 소수성, 대야성, 기의성 등을 쌓아서 태재부를 방어하는 일종의 나성을 둘러쳤다고 한다.
대야성터의 유적들
<<일본서기>>에 천지천황 664년에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쿠시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채워서 방어하는 '수성(미즈키)'이라 불렀다'고 한다.
수성을 한국인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유홍준 교수도 강조했건만,
날씨도 예상 외로 차갑고 바람이 많이 불어 유감스럽게도 답사하지 못했다.
유홍준 교수는 당시 왜가 백제를 도운 이유가 무엇인지?
과연 고구려, 산라, 백제의 3국시대는 올바른 인식인지?
거기에다 가야와 왜를 더하여 5국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완전히 남의 나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700년 무렵,
즉 통일신라와 일본의 탄생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요시노가리 유적터를 근거로 한반도에서 2300년 전에 일본 열도로 이주한
도래인의 역사를 훑어 보았듯이,
왜의 최초 국가 야마토는 도래인들이 만든 국가로 볼 수 있고,
그 후로도 백제와 왜의 관계, 가야와 왜의 관계를 보면
백제와 가야와 왜국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공동의 해양문명국'을 운영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자이후 관청터를 살펴보고 걸어나오면서 주변의 마을을 찍어 보았다.
다자이후 관청터 건너편의 마을
8세기 들어서 율령국가의 기틀이 잡혔을 때 다자이후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청사 앞에는 광장이 형성되고 20여개의 관아가 배치되었으며, 학교지구도 있었다고 한다.
청사안에는 종루와 고루가 배치되었으며 누각이 있어서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다자이후는 당나라와 신라의 사신이 하카다항을 통해 들어울 때 후쿠오카성 에
홍로관(고로칸)을 따로 지었다.
다자이후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 율령정치가 붕괴되면서 기구가 서서히 축소되었고
관리도 이 지역인이 맡으면서 무사화되었다.
규슈 지역의 총독부로서 센고쿠(전국)시대까지 유지되었지만 근세 들어서 다자이후는 폐지되었고
청사는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1968년부터 유적터가 발굴되면서 새롭게 유적공원으로 태어났다.
1274년 몽골군의 1차 침입 때 몽골군은 하카타항으로 들어와 후쿠오카 일대를 초토화하면서
일본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그때 몽골군은 육지에 진을 치지 않고 배로 돌아가 숙박을 했는데,
그날 밤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몽골의 전함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침몰해버렸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일본인들은 이 폭풍을 가미카제(신풍)이라 부른다.
학업원 중학교
이노우에 야스시라는 일본 작가는 <<풍도>>라는 역사소설에서 이 사실을 기록했고
고려나 일본이나 똑같이 몽골의 희생자로 서술하여
번역자 장병해씨는 눈물로 이 책을 읽고 번역했다고 한다. (유홍준, 226쪽)
중학교 교문이 한옥(왜옥?)으로 되어 있다.
니시테츠 도후로마에 역 앞 광장. 왼편의 수성병원 간판에 눈이 간다
우리가 탔던 것과 같은 미니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고대국가가 5국시대라면
가야와 왜에 대한 인식의 눈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유홍준 교수도 그러한 견해를 피력했지만
나 또한 10년전 처음으로 교토와 오사카, 나라 등지를 방문하면서
돌아와 최인호 작가의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읽으면서
그 망국의 한을 가슴깊이 사무치게 묻어야 했던 비극의 역사를 다시 보았다.
그의 '잃어버린 왕국'이 백제가 아니라 왜와 일본이 아닐까?
하긴 가장 최근에 갈라진 남북한조차
가슴에 품지 못하는 민족이
2200년전의 요시노가리가 어떻고
664년의 백제왜연합군이 뭐고
3국이면 어떻고, 5국이면 어떠랴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 있다만
21세기 민족의 시대가 끝나고 동아시아 공동체 연방이 다시 떠오른다면
우리는 과거를 들춰서 서로의 우의와 친선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전쟁의 비극과 고통의 상처를 떠올리면서 평화와 공존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기록이자 자료이자 지혜의 보고가 될 것이다.
요시노가리, 아리타, 나가사키, 다자이후에 얽힌 한일관계사는...
이날 저녁 후쿠오카 7시 25분 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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