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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도의 공식 명칭은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다. 2006년에 승격된 제주특별자치도는 우리나라에선 아주 특별한 광역지방자치단체 라고 할 수 있다. 특별법에 의하여 자치경찰제도의 실시, 교육자치권의 확대, 그리고 대한민국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권한의 일부를 합법적으로 이양 받아서 자치입법권과 자치재정권을 위임 내지는 부여받고 있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다.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상당수의 해외여행객들이 무비자로 제주도를 드나들 수 있는 경우가 그 한 사례가 되겠다. 비수교권 여행자가 대한민국을 방문하려면 반드시 비자가 필요하지만, 제주도에 한해서만은 자기 집처럼 드나들어도 된다는 말이다. 이유는 단 하나, 와서 돈을 펑 펑 쓰고 가라는 말이다. 외국인의 부동산을 포함한 투자제한도 대단히 자유롭게 제주도에 한해서 풀어 준 결과로 제주도의 상당한 토지와 건물이 해외자본에, 특히 중국인들 소유가 되었다.
특구로 지정하고, 법률을 바꾸어 가면서 여러 가지 제약을 풀어주고 제도적 심사와 절차를 생략해 주면서 까지 실행한 결과는 거대 외부자본 유입과 시장경제 논리에 따른 투기 극성이었다. 생태계를 위협하는 정도의 마구잡이식 난개발이 횡행했고 각종 사행성 사업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외부자본에 의한 시장성 논리의 결과는 곧 모든 이익은 다시 외부(외국)으로 빠져나가고, 단기 투기를 노린 개미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길거리에 나앉는 파행을 마구마구 양산해 내기 시작했다.
훌륭한 정치가와 행정가들이 충분히 이런 것들까지 예견하고 국익에 필요한 조치라 생각하여 실행에 옮겼겠지만, 거기에 다른 상당히 많은 부작용들이 심각하게 발생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 시작과 저변에서 대한민국은 좀 더 냉정하고 심도 있게 (개발)과 (환경보존)에 대해서 고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나에게는 씁쓸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주도가 특별자치도로 승격되고 관광특구 사업의 특수를 누리게 되는 데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2003년에 방영된 SBS TV드라마 <올인>의 영향을 결코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올인>은 영향력을 넘어서 열풍이었으며 후반부에 들어서는 거대한 광풍과도 같았던 것이다. 이 드라마의 상당부분 중요한 장면들이 제주도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서귀포시 성산읍 섭지코지에 설치된 드라마 세트장 (올인 하우스)는 이국적이리만치 빼어난 풍광으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모든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제거 도대체 어디야?’ ‘동남아 유명 관광지에서 찍었나?’
당시 88 서울올림픽 이후로 해외여행 자유화가 실시되면서 동남아 관광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던 즈음에서 해외여행을 동경하면서도 쉬이 떠나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그야말로 언제든 쉽게 꿈이 현실이 되는 새로운 영역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동남아 보다 멋진 곳이 많은데 뭐 하러 돈 싸들고 죽어라 사서 고생을 하면서 해외를 나간단 말이야? 다들 살만해 지니까 헛지랄들 하는 거여. 제주도랑 울릉도를 지들이 다 가보기나 했대? 홍콩이나 방콕이 다 뭐여. 서귀포가 있는데......’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너도나도 제주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드라마 <올인>이 동남아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얻게 되자 해외 여행자들 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제주도는 미어터졌고 숙박업소와 관광버스와 음식점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외지의 거대자본들이 눈치를 챘고 내노라하는 장사꾼들이 전방위적으로 제주로 몰려들었다. 돈이 쏟아져 나올 분야에 투자를 시작했으며, 이권을 위해서 장애가 되는 제도 개선과 법규 허용을 합법과 비합법을 총망라해서 추진하고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물가가 치솟는 관광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으며 이내 자본주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투기 체험장이 되었다.
<올인> 드라마가 성공리에 종영되었으니 당연히 세트장을 철거하고 섭지코지를 원래의 모습으로 원상복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끝내 세트장을 철거하지 못했다. 제주도를 찾아오는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하나 같이 제주도를 찾아 온 이유 중의 첫 번째가 바로 송혜교와 이병헌이 성장하고 거닐던 해안언덕의 수도원(교회)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바람 부는 언덕위에 세워진 송혜교가 살았던 수도원이 없는 섭지코지는 이제부턴 제주도가 아닌 게 되는 것이다.
세트장의 철거가 아니라, 이제부턴 세트장의 보존에 제주도가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새로운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목재에다가 합판을 붙이고 페인트칠을 했던 (올인 하우스)가 그만, 태풍 매미로 인해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제주도로서는 제도가 어떠니 허가권이 어떠니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허겁지겁 서둘러서 세트장의 목재를 철거하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세트장의 원형을 고스란히 감쪽같이 복원 시켜 놓았다. 성산음 고성리의 섭지코지에 들어선 지하2층에 지상1층 규모로 복원된 교회건물은 제주도가 투자를 맡았지만, 이 시설을 관광특수에 맡게 활용하기 위하여 민간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 냈고 운영을 맡을 법인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올인> 드라마를 성공시킨 제작사가 올인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새로 완공된 교회 건물의 소유권을 사들였고, 제주도는 이 법인의 지분 25%를 매입했다. <올인> 열풍은 해가 바뀌어도 식을 줄을 몰랐다. 한 해에 200만 명이 넘는 여행자들이 섭지코지를 찾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엄청난 투기자본과 투기꾼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찾아서 섭지코지 노다지 땅에 빨대를 꼽으려 시도하기 시작했다.
섭지코지는 대대손손 신양리를 포함한 인근 여러 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억새밭 사이로 밭을 일구고 보리와 고구마와 유채를 심으며 농사를 지어왔다.
관광특수를 노린 자본들이 섭지코지 인근을 해양관광단지로 제주도로부터 지정을 받아냈다. 외부자본에 의한 난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자본들이 모여들어 ㈜보광제주를 설립하고 마침내 제주도로부터 관광단지 개발사업 승인을 받아냈다. 동시에 섭지코지에 농사를 지어온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개발 후의 청사진만을 그럴싸하게 늘어놓으며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가구만을 남겨 놓은 채 섭지코지의 모든 사유지를 ㈜보광제주가 매입했다. 동시에 사들인 대지에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쳤다. 어느 날 갑자기 올인 하우스를 가려면 한참이나 먼 길을 삥 돌아서 힘겹게 찾아가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어서 보광은 섭지코지 관광단지를 제주투자진흥지구로 새롭게 지정을 받아냈다. 투자유치의 특혜권을 따낸 것이다. 부동산 취득의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를 모두 감면 받았다. 그런 후에 1만이천 평 정도의 미개발토지를 중국자본의 ㈜오삼코리아 측에 약 3배의 시세차익을 남기고 팔아 버렸다. 관공서(제주도)를 상대로 온갖 혜택을 다 받아내고 다시 땅장사로 엄청난 수익을 남기고 손을 뺀 것이다.
보광이 제주도에 관광단지 사업승인을 받으면서 제안한 허가조건에는 호텔과 콘도, 해양수중전망대, 해양수족관, 해양공원, 해양레포츠센터 조성이 전제되었다. 하지만 보광은 당장 돈이 회전이 되고 이익을 남기는 호텔 콘도만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휘닉스 아일랜드)인 것이다. 해양관광단지 조성을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내고, 대형 리조트 사업체를 벌인 것이다. 거기에다 미개발지를 중국자본에게 거대한 이익을 전제로 팔아 넘겼다.
더하여 보광은 애초부터 섭지코지로 향하는 입구 하나만을 허용하고 나머지 길은 모두 폐쇄해 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섭지코지 해안의 대부분을 휘닉스 아일랜드를 이용하는 사람만을 위한 프라이빗 비치로 개발하려 했었다.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섭지코지를 드나드는 길목에 설치된 현지주민들의 상가가 모두 철수까지 하면서 제주도 차원에서 반발이 심하게 되자 결국 철회했다.
거대자본의 극심한 이윤추구 아래 현지주민들이 생기는 이익은 전혀 없게 변해갔다. 모두가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현지주민뿐만이 아니라 인허가를 내준 제주도 공무원들까지 후회를 감추지 않는다. 아름다웠던 섭지코지엔 지금 자본주의의 병폐가 가득하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산 일출봉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사라졌다. ‘자연경관의 사유화’ 라는 새로운 신조어가 탄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휘닉스 아일랜드는 여론을 의식한 듯, 단지 내에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로 하여금 글래스하우스를 짓게 했다. 그리고 옆으로 지니어스 로사이라는 갤러리를 지었다. 요즈음은 (올인하우스) 때문에 섭지코지를 찾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글래스 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에서 멋진 사진을 찍으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신세대나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혹 안도 다다오의 건축이 섭지코지를 더 빛나게 만들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등대에 올라 성산 일출볼을 바라보면서 눈 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가로막고 서있는 이 차가운 느낌의 썰렁한 건물에 안타까움을 넘어서 한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개의 주차장에서 섭지코지를 제한된 통로를 통해 드나들고는 있지만, 사태의 추이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또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안도 다다오의 건축과 성산 일출봉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나로서도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휘닉스 아일랜드가 이럴 판에 그럼 원조 겪인 ‘올인 주식회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운영회사 측은 <올인>의 열기가 식어들기 시작하자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송혜교가 자란 수도원(교회)를 털어내고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 궁전 같은 새로운 건물로 리모델링한 후에 카페와 기념품점 등의 상가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경영진간의 마찰과 투자자본의 부족 등으로 심각한 내환을 겪은 끝에 이사진 6명이 모두 말소되는 사태 끝에 ㈜올인은 해체되었다.
돈을 빌려 준 채권자가 올인 하우스의 건물지분에 대해 경매를 신청했다. 그러자 현지주민 신양리와 고성리가 제주도를 상대로 토지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애초에 이 땅은 마을 공동소유였는데 70년대 특별조치법에 의해서 공유지로 제주도가 공권력을 앞세워 강제로 가져가 버린 경우였던 것이다. 결국 올인하우스의 토지는 마을공동체가 되찾았다.
하지만 건물의 경우는 지역 여성경제인이 경매에 응찰하여 소유권을 확보했다. 여성경제인은 이곳을 새롭게 꾸며서 커피숖으로 운영을 추진하였지만, 토지소유권을 가진 마을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증개축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성경제인은 땅까지 사서라도 커피숕을 사업으로 하겠다는 주장이고, 마을주민들은 적정선에서 건물을 마을 공동재산으로 구입하여 커피숖을 자신들이 운영하겠다고 주장한다.
올인하우스는 결국 방치된 채 주변 경관이 빼어나기로 이름난 선지코지에서 흉물로 전락한 채 무단 방치되고 있다.
투기자본에 의한 개발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한 번 훼손된 자연은 복구하자만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지금 섭지코지는 (개발이냐) (보존 내지는 복구냐) 하는 딜레마에 깊게 빠져있다.
‘풍경의 사유화’ ‘자연환경의 사유화’는 제주도를 넘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점점 대두되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개발의 후유증이 제주의 곳곳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입각한 투기자본은 오로지 막대한 이익이 창출되는 극소수의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골프장과 초대형 리조트와 고급 음식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관광산업에 대한 물질 질적 향상이 골고루 합리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올인 하우스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투자가 무한정의 이익을 남길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섭지코지의 휘닉스 아일랜드의 경우만 하더라도 무리한 개발이 남긴 후유증과 상처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섭지코지 두 곳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시키고 등대를 향해 정해진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대형 리조트와 곤도와 아고라 인근의 일반주택처럼 보이는 개별 임대주택들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는 활성화된 고급 리조트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중문단지들에 비해서 이용자들이 별로 보이지 않을뿐더러, 단지의 조금 안쪽에 위치한 콘도시설들은 다소 충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건물의 안쪽과 계단 주위는 그야말로 폐허로 변해가는 방치된 재개발 지역을 보고 있는 듯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사가 안 되는 것이다. 돈 벌이는 둘째 치고 현상유지에 필요한 관리비용조차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쯤이면 대개는 보다 거대한 자본에게 회사를 넘기고, 새 업자가 자본을 투자해 리모델링과 새로운 운영지침을 보태야만 하는데, 어떤 자본가도 더 이상은 이곳에서 투자금 이상의 흑자를 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는 결과이다.
자본주의적 시장논리에만 입각해 마구잡이식으로 난개발을 자행했던 외부의 거대자본도, 그네들의 말과 일부의 향응이나 반대급부에 쉽게 넘어가 인허가 과정에서 심도 있는 심사도 펼치지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도장을 찍어준 제주도의 행정책임자들도 서서히 닥쳐오고 있는 개발의 후유증과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는 서로 나 몰라라 책임전가에만 혈안이다.
개발권을 가진 사업주체측이나 인허가를 허락한 제주도나 누구도 이런 드러난 폐해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방치된 추악한 흉물스런 잔해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가 뒤따라야 하는데, 이런 추악한 난개발의 끝머리에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선뜻 해결을 위해 나서지도 않는 것이 뻔한 결론이다.
그나마,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Glass House)는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이고, ‘이 땅을 지키는 수호신’ 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는 유민 미술관으로 재단장하여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갤러리로서 전시회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아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니어스 로사이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 보면 되겠다.
이 외에도 섭지코지에는 삼성 리움 미술관의 설계자로 잘 알려진 마리오 보타의 아고라(Agora) 라는 우리로 만든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이 인근에 설치되어 있다.
무분별한 마구잡이식 개발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느 정도 보상차원에서 시도되고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건축학적으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빼어난 건축물을 제주도의 곳곳에 설치하게끔 만드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안도 다다오의 지니어스 로사이와 글라스 하우스가 섭지코지에 처음 들어섰을 때 엄청난 파문과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것이 사실이다.
‘섭지코지를 돋보이게 만드는 제주의 자연환경과 썩 잘 어울리는 세계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건축물’ 이라는 사람들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훼손시키고 일출봉의 전망을 가로막고 있는 흉물스런 콘크리트 덩어리‘ 라는 혹평이 그치질 않았다. 나 역시도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모 방송국이 기획 제작한 ’제주의 건축‘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지 않았나 싶다. 건축과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도 지금은 이런 수준 정도의 건축물과 의미와 가치를 가진 개발이라면 기꺼이 찬성에 한 표를 던질 것만 같다.
아마도 내 마음이 이런 방향의 개발 정도라면 하고 기울게 된 것은 본태 박물관(本態)을 보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라 기억하고 있다.
건축 설계자 안도 다다오는 자신만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리트 위에 전통과 현대 공예품을 설치해 인류 본연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도록 했다’ 기하학적 형태의 건물에 물과 자연의 빛을 끌어들여 자연과의 통합과 조화를 꾀하고 있다. 한마디로 건축으로서의 용도뿐만이 아니라 미적 기준을 뛰어넘는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안도 다다오만의 건축철학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내가 새롭게 제주도에....... 그리고 제주도에 새롭게 설치된 건축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본태 박물관이었다.
모레(2022년 1월 2일) 새해의 첫 일요일을 맞게 되면 다시 안덕면으로 발걸음을 돌려서 방주교회(方舟)를 찾아서 새해 첫 주일예배에 참석할 계획을 세웠다. 내 경우에야 일 년에 한두 번 어쩌다 참석하는 돌팔이 기독교인이지만, 챠밍여사는 순종형 순수 신앙을 고수해온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신앙생활을 존중하는 배려이면서, 인공 연못 위로 교회 건물이 마치 떠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이 그의 유작으로 제주도에 선물로 남겨준 훌륭한 건축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속의 노아의 방주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까?
아울러 주일 예배 참석 이후로는 남은 여행 기간을 제주의 건축과 박물관이나 미술관 순례와 같은 문화체험으로 채우고 싶어 계획을 세워두었다.(물론 결과적으로는 이런 계획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타미 준의 작품으로는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지역에 세워진 포도 호텔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핀크스 리조트 안에 제주의 전통 초가와 오름을 형상화 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포도송이처럼 느껴지는 건물을 설계했다. 그런가하면 비오토피아 내부의 생태 공원에 조성된 수(水)풍(風)석(石)박물관 또한 이타미 준이 설계한 새로운 형태의 주거공간 이다.
그런가하면 롯데 호텔이 운영하는 럭셔리한 리조트 안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송효상과 이종호를 비롯해 켄고쿠마, 도미니크 페로 등의 최고로 각광받고 있는 건축가들이 제주의 자연과 환경에 조화를 이루도록 예술혼을 불태운 건축물들이 사방에 산재해 있다.
‘제주의 건축 탐방’ 이라는 하나의 주제만으로도 충분히 매력 있는 테마의 여행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모레부터 우리의 남은 여행 스케줄은 오로지 ‘제주의 건축 탐방’ 이라는 테마에 맞추어져 있다.
유민 미술관(지니어스 로사이) 입구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회원제 헬스타운으로 운영되는 ‘아고라’를 관람할 수가 없다면, 섭지코지에서 적어도 지니어스 로사이는 들려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다.
오늘은 우리가 안덕면의 펜션을 나와 성산의 새로운 펜션으로 숙소를 옳기는 날이자 2021년이 마감되는 그믐날(12월31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본래 계획은 이러했다.
섭지코지를 둘러보고 성산 일출봉으로 향해서 그 유명한 ‘성산 일출봉 불꽃놀이’ 스케줄을 확인하고, 일단 새로운 숙소로 가서 체크인을 하고나서, 좀 쉬었다가 불꽃놀이 행사에 참여해서 그믐밤을 새하얗게 불태우고, 지치면 숙소로 돌아가 쉬었다가 새벽에 다시 나와서 일출봉에서 맞이하는 새해 일출을 맞이하기로 충분히 계획을 세웠고, 불꽃놀이를 함께 즐기려 추위에 대비해 방한장비와 하늘에 날릴 풍등까지 미리 준비를 해왔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섭지코지에 더 머물면서 유민 박물관을 즐겨보기에는 다소 시간이 충분하질 못했다. 결국 모레부터 새롭게 시작될 ‘제주 건축 둘러보기’ 테마 여행에서 잠시 섭지코지 지니어스 로사이를 다시 다녀가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이쯤에서 패스.........
‘성산 일출봉에서 그믐밤을 하얗게 불태우고 새해의 새아침 일출을 맞이하자!!!!’ ‘태리 세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이를 망각한 노년의 로망)
개뿔!!!
주책없이 섣달 그믐밤을 노인네들이 펜션도 아니고 성산 일출봉에서 새하얗게 불태우기는 뭘 불태워?
하이고야! 꿈도 야무졌지........ 그나이에 혹한의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고 새해첫날 아침 일출을 보겠다고 야무지게 꿈을 꾸었든 것 자체가 개꿈(?)이었던 것이지. 암! 아무렴!
'해너미 불꽃놀이와 해맞이 성산 일출봉 행사'가 유명하기는 유명했나 보다.
일출봉 진입로에서 부터 길게 줄을 서기 시작해서 주차장에 들어거시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얼씨구?
딱 주창장까지만 극심한 혼란을 보일 뿐........ 일출봉 으로 향하는 계단과 잔디밭과 억쇄밭은 썰렁함을 넘어서 몇 몇 하산하고 있는 여행객을 제외하고는 그야말고 적막강산이 아닌가?
불꽃놀이 행사를 확인하려고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렸는데 청천벽력 같은.......... '코로나 19 사태로 모든 행사가 전면 취소되었습니다.'
헐!
또........ 헐! 헐! 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새해 일출 행사들이 대부분 취소 된다는 이야기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독도, 그리고 성산 일출봉의 행사만은 진행된다는 안내를 확인에 또 확인까지 했던 우리였다. 그러다가 급기야....... 코로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고 판단하여 '완전 취소' 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관(官)이 주도하는 최소한의 행사만이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생중계 될것이라고 안내해 준다. 행사 장소로 가까지 가기도 전에 해병대 전우회분들이 접근 자체를 가로막고 나선다. 허락받은 행사 관계자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단다. 다음날 새해 일출 행사 제재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보다 더 엄중하게 '완전 폐쇄'된다고 한다. 일출봉은 물론 인근의 해안과 오름에 이르기까지, 일출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모든 예상 가능구역에 대하여 전면 제한 폐쇄를 이미 진행시키고 있다고 한다.
2021년의 마지막 섣달 그믐 행사와 2022년의 신년맞이 행사는 모두 취소되었고 장소적 제한을 실시한다면서, 오로지 인터넷 방송과 티비를 통해서 참여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날을 위해서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강행했건만............ '코로나 19. 너 가만 안둔다.'
멘붕이 찾아 온다.
'어쩌자고.......... 제주도야! 너가 우리에게 이러면 안되지?'
허니 어쩌겠어? 어쩔 것이여?
주차장 옆 기념품점에 들러서 주변에 나누어 줄 요량으로 기념품을 몇가지 고르고 있는데......... 산산히 부서진 기대와 허망함에 맘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지정되지가 않는다.
'이렇게 된걸 어쩌겠어? 일단 새로운 숙소로 가서 체크인을 해 놓고 나서 궁리를 해보자.'
우리는 서둘러 부랴부랴 성산 일출봉 지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숙소 선택은 나름 탁월했던 선택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제주도 도착하는 날 좀 무리를 하면서까지 밤길을 달려 서귀포 안덕면까지 이동해야 했지만, 그 역시 썩 잘한 일이었지 싶다.
안덕면의 수 펜션에서 내다보면 오렌지 농장 비닐하우스 너머로 서귀포 앞바다가 보인다. 밤새 고기잡이 어선이 밝혀놓은 불빛은 새삼 여기가 제주도라는 실감을 거듭 거듭 깨우치게 만들어 준다. 호젓하고 깨끗하고 따뜻한 숙소였다. 여행하는 입장에서 입지조건과 가성비 까지 따져본다면 아주 만족스런 숙소라고 평가하겠다. 흠이라면 한 가지........
나흘을 제주도의 서쪽 안덕면에서 지내고 성산면의 그림 그리는 펜션으로 옮겼다. 나머지 절반을 이곳에서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집으로 가기위해 새벽 배를 타야 하니까 제주읍내 여객선 터미널 부근의 모텔을 얻어 간단하게 잠만 자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림 그리는 펜션 역시 수 펜션 못지않게 아주 만족스런 숙소였다.
성산 일출봉에서 한라산쪽 산간지역으로 좀 떨어져 억새밭에 사방으로 둘러싼 들녘 한복판에 좀 썰렁하게 펜션 서너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원적인 모습이었다. 드나드는 접근성에 있어서는 작은 애로가 되겠지만, 그만큼 외단 전원에 호젓하게 남겨진 듯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단, 이곳에도 수 펜션과 똑같은 단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좀 비좁다는 느낌이 아쉬움으로 강하게 남았다.
계속 바쁘게 밖으로 돌아다닐 것이라는 생각에 별반 불편함을 못 느낄 것이라 생각해 골랐던 것인데, 며칠을 짐을 풀어놓고 여유롭게 쉬고자 했더니만....... 좀 비좁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들었다. 예약 시 다음 크기의 방으로 선택하였을 것을, 더하여 부킹닷컴 레벨 3의 회원이다 보니 숙소 업그레이드 문자가 서너 차례나 왔었는데 그냥 무시해버렸던 일을 무척 후회하게끔 만들었다. 쬐끔만 큰 방을 골랐을 것을.........
‘세리 할머니야. 일출봉 불꽃놀이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다고 이렇게 마냥 방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 젊어서야 긴 밤이 마냥 좋았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뭐? 항상 뜸들이지 말고 그냥 생각한 대로 시원하게 말을 하라니까? 당신이 요리조리 눈치를 살피며 말을 뜸들이면 불쑥 이 사람이 또 뭔 일을 저질렀나 하는 불안 공포가 생긴단 말이야. 그냥 말해. 잔머리 굴리지 말고. 벌써 시커먼 속이 다 들어다 보여.’
‘이 사람이? 내가 무슨 사고뭉치여?’
‘사고뭉치 맞지. 그래서 이번엔 무슨 꼼수를 부리려는 건데. 어서 툭 털어놔 봐.’
‘그게 그러니까 말인데.......... 듣고 나서 미쳤다고 하는 건 아니지?’
‘또 뭔가 사고 칠 궁리를 했구먼? 미쳤는지 아닌지는 들어보고 나서 판단 할 문제이고, 도대체 이번 꿍꿍이는 또 뭔데?’
‘어차피 섣달그믐은 밖에서 올나이트 하려고 했었잖아?’
‘그게 어디 올나이트냐? 불꽃놀이 구경하고 들어와서 쉬었다가 새벽에 일출 보겠다는 것이었지? 추운데 밖에서 밤을 샌다고? 그게 미친 거지.’
‘아무튼 그거나 저거나........ 원래 우린 어두워지면 나가서 저녁 먹고 서귀포 올레 시장에서 장보고 불꽃놀이 행사 참석하려고 채 시장도 보지 않고 숙소로 왔기 때문에 먹거리 준비도 부족하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저녁이랑 내일 아침까지는 충분해. 술도 충분하고.......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라고. 요리조리 돌리자 말고 핵심을 털어 놓으라고.’
‘미쳤다고 할 까봐서........ 나가자. 일단 나가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일출봉 행사 대신 그믐날의 일몰을 찾아가는 거야. 아침에 왔던 길을 다시 가서 제주도 일몰이 멋있다는 산방산이던 수월봉 자구네 포구이던 송악산이던, 어디서건 멋진 일몰을 이참에 찾아가서 보는 거야.’
‘그럼 아침까지 머물렀던 지역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거야? 한 사십분은 걸리던데. 오 마이 갓.’
‘그게 다가 아니지. 예전과는 다르게 이번 여행에서는 뭔가 서귀포 올레시장이 마음에 안 든다며. 예전엔 제주시장 보다 서귀포시장이 훨 좋았는데 시장재건이 된 이후로는 제주시장이 예전에 우리가 일부러 찾아다니던 재래시장 분위기라면서. 그래서 말인데....... 일몰을 보고 나서 제주도 동문시장을 가는 거야. 군것질도 실컷 하고, 회도 뜨고 갈치도 사서 숙소로 와서 파티를 하는 거야. 제야에 종소리가 울리는 티비 방송을 보면서 말이야. 바야흐로 2022년 새해맞이 파티. 어때?’
‘그럼. 지금 나가서 어찌되었던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자는 말이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좋아. 콜이야. 어디 한 번 같이 미쳐보는 거지 뭐.’
헐!!!
이렇게 쉽게 오케이가 나올 줄 알았으면 그렇게 고민하지 말았을 것을.......
지나간 여행에서 제주 올레길 5코스를 트래킹 했을 때 쇠소깍을 거쳐 지나갔었다. 하여 이번 여행에서는 계획에 없었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여행 프로가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많은 방송채널들이 넘쳐나도록 제주도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근자에 쇠소깍이 자주 등장했던 기억 때문에 아주 잠시라도 들려 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산에서 안덕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으니까?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여행지라 할 수 있는 쇠소깍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 이라 해서 ‘쇠둔’ 이라 불러다 전한다. 여기에서 ‘쇠’는 ‘소’를 뜻하고, ‘소’는 ‘웅덩이’를 가리킨다. 더하여 ‘깍’은 ‘끝’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효돈천을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였다 가는 장소란 의미다. 몇 몇 여행객들이 보트를 타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겨울을 보트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잠시 쇠소깍에 들렀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일몰 전망대를 향했는데 어쩌다보니 의외로 시간이 지연되었는지라 제대로 된 일몰을 명승지에서 멋지게 관람할 기회가 어긋날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여, 가장 가까우면서도 지리적 환경이 익숙한 산방산 전망대로 향했는데......
아뿔싸!!!!!
개뿔! 일몰은 무슨........
쇠소깍에 들렀을 때만 해도 해안 쪽 날씨가 맑은 듯해서 한껏 멋진 일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일몰 명소의 한 곳인 산방산 전망대에 도착하니........ 바다 쪽으로 구름이 몰려 내려앉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엇비스무리 짝퉁 일몰이 슬적 비켜나 앉아있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보야. 우리가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 해오지 않았니? 사는 동안에 일출 일몰에 목숨도 걸지 말고 제발 속지 말자고. 그런데 또 폭싹 망했네. 헐!’
미얀마 바간의 일출도,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의 일몰도........ 결론적으로는 다 개뿔 이었다. 앙코르 와트 일몰 까지도 그랬고........ 조지아 카즈베기의 일출을 제외하고는........ 혹여, 그리이스 산토리니 일출과 일몰이라면 기대를 좀 해볼까?
2021년 그믐날의 일몰이 폭싹 망했으니....... 내일 아침 2022년의 일출은 기대해 볼 수 있을까?
기대는 무슨 기대? 일출 명소들을 밤새 군경이 지키면서까지 완전 페쇄 시키는 마당에 말이다.
이럴 땐........ 맛있는 먹거리와 소맥으로 기분을 전환시키고 지친 심신을 새롭게 재무장 시키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가자. 제주 동문시장으로......... 그런데........
와!!!! 사람 많다. 그야말로 인산인해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개개인의 삶의 이치를 표현하고자 할 때 희로애락(喜怒哀樂) 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 이라는 네 가지 감정에 우리네 인생살이의 거의 대부분이 담겨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렇다면 ‘여행’은 네 가지 감정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집 떠나면 개고생이니 돈 들여 시간 들여 사서 고생이니 별의 별 이야기들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그래도 설렘과 간절한 염원이 담긴 여행은 기쁜 일이겠으니 희(喜)에 속한다고 해야겠다.
여행도 우리네 인생과 마찬가지로 계획한 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다반사요, 건강이 허락되면 돈이 부족하고, 돈이 허락되면 건강이 따라주지 않듯이 역경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런 고난의 시기가 되면 우리는 무엇인가 기분을 전환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상황을 타개하거나 반전의 계기를 삼을 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럴 때 꼭 필요한 것 중에 한가지이자 최고의 덕목이 바로 즐거움(樂)일진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즐거움 중에서 만병통치약처럼 가장 필요한 즐거움으로 식도락(食道樂) 만한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여행에서 식도락은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경우는 집에서 생활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중에도 식도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 손 크고 용맹하며 죽어라 걷기에 달인이신 태리할망구께서 자주 다짐처럼 늘어놓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말이야........ 유럽 여행이 싫증이 날 정도까지는 이슬람 국가 여행은 당분간 뒤로 미루는 것은 안 될까? 음식이야 세계 어느 나라 음식이나 적응할 수 있고, 생활환경의 불편함이야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나선 여행이니까 견디겠는데......... 터키나 모로코에서 겪었던 것처럼, 술(wine)이 없는 여행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어. 하루 종일 죽어라 열심히 돌아다녔으면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씻고 맛있는 음식에다 어느 정도의 술은 마셔주어야 피로가 풀리고......... 흠 흠 흠(알콜 의존자는 아니지만) 여행이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야? 일단은 술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나라는 버킷 리스트에서 뒤쪽으로 조정해 주라,’
충분히 일리가 있고 선뜻 수긍이 가는 요청이다.
여행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최고의 즐거움중의 하나이다. 거기에 식도락(食道樂)이 수반되고 더하여 주도락(酒道樂)이 필요충분조건으로 포함된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
제주시의 동문시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밀려서 쓸려 다닐 정도였다. 주차장도 만원이어서 주차타워의 옥상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하지만.........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니 한 순간에 실실 허튼 웃음이 터져 나오고 신체의 중간부분에서 아우성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순간만큼은 여기가 지상낙원이요 무릉도원이다.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지, 세상에 없는 상황이 생겨도 성산의 숙소까지는 무사히 갈 배짱이 있지, 여행의 중간쯤이라 경제적 실탄은 주머니에 두둑하지(멀쩡하게 사용 좀 해달라는 카드도 있지), 작금의 상황에 맞추기라도 한 듯 우리의 신체리듬은 폭식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기다려라. 어디 죽지않을 만큼만 먹어보자.
세상에나!
통통한 오징어 통구이가 관능적이면서도 대단히 육감적인 느낌으로 까지 훅 다가오기는 살면서 처음 느껴본다.
산골짜기 외딴 주막의 흐트러진 치맛단 사이로 흔들리며 내비치는 주모 엉덩이처럼 탱탱하고 뺀지르르한 흑돼지 족발은 다소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로 강한 유혹으로 다가온다.(도대체 우리 동네 족발하고는 뭐가 다른 거지?)
조선의 선비가 멀고 먼 장안이나 낙양의 유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상황이 이랬을까?
동남아 여행의 메리트는 뭐니 뭐니 해도 야시장의 풍성한 식도락이 으뜸이 아닐까 싶다. 마치 지금 우리가 방콕의 카오산 로드나 페낭의 거니 드라이브나 프놈펜의 야시장 투어를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유럽에서는 바르셀로나 길거리 음식, 시칠리아 팔레르모 길거리 시장, 피렌체 길거리 시장을 늘 추억 속에 담고 살고 있지만......... 오늘부터는 제주 동문시장도 추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열심히 맛을 본다. 가히 천국이라 할만 하다. 아쉬움으로 남는것은 몇가지를 사서 까만 비날봉지에 담고, 회도 뜨고 또 맛이라도 보려고 문어 숙회와 딱새우를 추가한다. 제주도 재래시장은 충분히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걸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동시에 단호하게 터져나오는 대갈일성.
'뭔 걱정이야? 남으면 아침에 몽땅 집어놓고 끓여서....... 모처럼 아침밥을 먹어보는 거지. 새해잖아?'
헐!!
유럽여행에서 나를 가장 크게 유혹하는 것은 빵이다.
새벽산책에서 뒷골목을 걷다보면 이곳저곳에서 방금 막 구워낸 빵이 커다란 자루와 상자에 담겨서 트럭에 실리고, 새벽 작업을 하는 건설 노동자와 청소부와 경찰들이 좁은 빵공장에 선채로 진한 커피와 막 구워낸 빵으로 이른 아침식사를 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한다. 이스탄불과 조지아 카즈베기와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날고 허름한 빵공장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 유럽 여행은 이른 새벽의 빵 굽는 냄새로 기억된다.
다음은 길거리에서 가볍게 마시는 커피 문화다. 묘한 매력과 중독성이 무척이나 강하다. 길거리 골목마다 위치한 작은 간이매장에 겨우 삐끔 열려있는 쪽창으로 앙증맞은 작은 잔에 진하디 진한 에스페레소 한 잔과 반쯤 물을 담은 유리잔이 나온다. 에스페레소를 한 입에 탁 털어 놓고는 그대로 돌아서는가 하면 진했음인지 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고는 돌아선다. 세 병이 나란히 서면 그 쪽창 앞이 좁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사람들이 줄을 서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의자도 없고, 커피 한 잔 마시는데 채 일 분이 안 걸린 듯하다. 계산은 오로지 동전뿐이다. 짤랑 짤랑 유로화 동전이 오고 간다. 싸면 1유로, 주로 1.5유로, 2유로 받는 데는 실내 카페에서나......... 유명 브랜드에만 모여서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우리네 커피문화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낯선 풍경이다. 나도 도전해 보았다가(우리나라에서는 나도 진하게 마시는 편인데) 종국엔 포기를 했다. 하여 우리는 언제나 아메리카노를 택한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기 시작하면 유럽의 거리와 길목마다에는 진한 에스페레소의 향기가 난다.
그 다음은 와인이다.
와인을 가까이 한지도 비교적 짧을뿐더러 와인의 품질과 특성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고급 와인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마셔 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이제 겨우 신 맛과 떫은맛의 구분과 그것들이 조화로운지 아닌지에 대해 약간의 눈을 떠가는 정도라 해야겠다. 항기에 대해서도 좋다 나쁘다는 느끼지만, 어떤 국가나 지역의 특징적인 맛과 향에 대한 나름 적정선의 기준은 전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형편에 따라 늘 가까이 두고 나름 열심히 즐겨보려고 하는 타입이다. 나에게 와인은 그저 포도를 주 원료로 만든 향긋한 음료이거나 결코 무겁지 않은 알코올일 뿐이다. 다른 음식을 먹을 때 있으면 좋겠고, 피로를 풀거나 기분전환을 할 때 커피만큼이나 즐기고 싶은 기호식품일 뿐이다. 그것이 고급인지 아닌지, 비싼지 안 비싼지는 나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다. 포루투갈 포루투나 조지아 시그나기, 그리고 아르메니아 예레반 인근 포도농장을 둘러보고 시골마을 식당에서 마을 사람들이 직접 담군 하우스 와인에 깊게 매료되었었다. 포도를 수확해서 항아리에 담그고 발효와 숙성을 시켜서 제대로 된 병에 담가 상품으로 만들기 직전에, 자기들이 마시려고 따로 담았던 것을 그냥 청량음료 1.8리터 공병에 담아서 내다 파는 포도주를 말한다. 포도주스가 약간 발효가 된 상태라 할까. 그런 하우스 와인을 조지아에서는 3리터에 2천오백원 정도에 사서 실컷 마셨었다. 우리나라 생수값 정도라 해야 할까?
지금 우리 부부는 유럽에 한참 빠져 있는데........ 우리에게 유럽은 빵과 커피와 와인으로 기억된다. 물론 여기에 치즈랑 하몽과 초콜릿이 더한다면 황홀하겠지만 말이다.
이왕 식도락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번에 제주도에서 먹어 본 음식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배를 이용해 차량을 가지고 제주도로 건너가기 위하여 찾은곳이 완도항 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름 식도락을 즐겨보기 위하여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고 식객 선생께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계시는 '백반기행'에서 우리 여행코스와 연계되는 식당들도 검색을 마쳤다.
완도항에서 백반기행에 방연된 두 곳을 찾았는데, 그야말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새삼 방송의 위력을 절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여 부득이 다른곳을 찾아야만 했다. 차량 선적 시간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 그리도 무서운 것이었던가?
완도까지 내려와서 고르고 골라서 들어간 곳이 돼지국밥집 이었다.
헐! 이미 어떤 고정관념 처럼 DNA에 까지 습관적 체질이 배어있었던 것일까?
'굳이 고르기 힘들면 익숙한것을 선택한다. 왜냐고? 최소한 실패할 확률이 적어질테니까 말이다.'
방송에서 극찬한 성산포의 백반집은 장기휴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병환이 있으셔서 영업시간을 단축하고, 요일을 정해 영업을 하셨었다는데 급기야는 무기한 휴업상태였다. 방송에 나온 흑돼지 음식점은 다소 실망스러워서 논하지 않으려 한다. 그 정도 메리트라면 차라리 우리동네 특수부위 삼겹살을 먹던가, 가성비를 따지면 충주에서 유명한 대패삼겹살집을 세 번은 찾아가도 될 정도였다.
지나간 예전의 제주여행에서 한 번은 돼지국수에 당황한 적이 있다. 시뻘건 국수에 커다란 돼지고기 덩어리가 얹어나왔는데........ 우리 고장식으로 하자면, 국수도 아니고 짬뽕 비스무리한 것에다가 뼈다귀 감자탕 한 덩어리가 올라와 있는 형국이랄까? 조금은 역한 냄새가 나고 맛도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기에 종국엔 우리 모두 중간에 남기고 죄짓는 기분으로 나왔던 기억이 있다. 동남아나 아프리카에 가서도 거부감이 없던 우리의 식성도 제주도의 향토음식의 특성 앞에서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치 성게 미역국이 여전히 우리의 기호에는 부합되지 못하여서 생략해야 하겠다.
제주 올레 10코스 중간의 사계포구를 지나다 보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찾아가는 보말칼국수 집이 있다.
보말이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당연히 보말 칼국수도 이번에 처음 먹어 보았다. 울릉도에서 따개비를 처읍 접했을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주도 여행중에 한 번은 먹어 볼 만한 음식이었다고 해야겠다. 다음번에 내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마도 다른 음식을 선택 할 것 같다.
우리 고향엔 아주 널리 알려진 '올갱이 해장국' 이라는 것이 있다. 올뱅이 해장국 또는 다슬기 해장국이라 하기도 한다.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올갱이 해장국은 아주 특색있는 우리고장의 전통향토음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식사랑 안주까지 할 수 있는 고마음 음식이었다. 하지만 자연환경 변화와 물가 상승으로 올갱이 양이 줄어들고 또 줄어들더니....... 이젠 뚝배기 장국 반그릇에 달랑 올갱이 한 숟가락이 전부가 되어 버렸다. 딱 그런 느낌이 이곳 보말칼국수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보말이 좀 더 풍부하던가..... 아니면 가격이 흔히 말하는 칼국수대의 가성비를 가지던가, 제주라는 관광지 물가 특성일까?
보말칼국수 한 그릇 가격은 1만원 이다. 우리고장 칼국수는 6천원에서 7천원 수준이다. 거기에다 맛도 기가 막히다.
서귀포 중문단지에 있는 SNS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라면집 이라고 한다.
수제비나 칼국수는 사양할 수 있었도 라면이라면 언제든지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일부러 찾아가 보기로 했다. 거리에는 라면 한 그릇에 1만오천원 이라는 다소 의외의 가격책정에서 나오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던듯 싶다.
문어라면과 꼬기라면을 시켰는데....... 비주얼은 문어라면이 일단 시선을 땡기고, 국물은 꼬기라면이 더 좋았다 하겠다. 사람들이 밀려오는 것이야 주인의 사업성향이 통했을 터이고, 파격에 가까운 가격책정이 우리처럼 일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 번 왔던 손님이 다시 찾아오는 연속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단 제주도라는 여행지 특성상 일단 사람들을 자극시켜 끌어들이고, 그들이 비싼돈을 지불하고 또 어찌되었던 이런 장소를 선택한 바보짓(?)을 회피하려면 일단 멋진 사진과 여행스토리로 스스로들 치장을 해서 홍보효과를 극대화 시켜주었을 것이니........ 굳이 고객의 재방문에 까지 매달려야하는 부담감은 벗어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재방문 손님이 아니어도 SNS 홍보 효과를 통한 새로운 손님들 발길이 계속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이름은 분명 라면인데....... 베이스는 흡사 짬뽕국물 느낌이다. 고기짬뽕 국물과 해물짬뽕 국물의 차이처럼 느껴진다. 사리를 라면으로 했기에 중화요리 참뽕과는 차별화를 택한것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고도의 장사 수완도 포함된다. 면을 뽑아서 사용하는 짬뽕에 비하자면 만들어진 라면사리를 쓰는 잇점이 시간과 비용과 모든면에서 훨씬 유리하지 않겠는가? 해물짬뽕에는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에서나 홍합이나 조개류와 미더덕과 오징어와 게가 들어간다. 낙지가 제법 들어가는 집도 있다. 낙지가 문어로 둔갑하고 꼬기의 양이 풍부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의 갭 차이를 엄청난 가격대로 회수해 가려는 장사수완이라면........ 절로 고개가 흔들린다. 우리고장 짬뽕의 통상 가격은 8천원 이다. 이름난 내용물이 아주 풍부한 해물짬뽕과 꼬기짬뽕의 경우 1만원 정도이다. 그런데 사리를 수타면에서 가공 라면으로 교체한 문어라면과 꼬기라면의 가격은 모두 한 그릇에 1만오천원 이다.
물론 먹는 순간에는 즐겁고 맛있게 잘먹었다. 다만 먹고나서 돌아설때 무엇인가 개운하지가 않았다.
1만오천원에 문어라면을 먹느니 나는 기꺼이 우리고장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해물짬뽕을 맛있게 먹고나서 지역사랑 상품권 1만원권을 지불하는 것을 택하겠다.
물론 제주도라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뒤끝이 개운치 못한 음식점만 있는것은 아니다. 물론 이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관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맛과 가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을 체험한 것에 준하여 이야기 하는것일 뿐이다.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식도락을 즐기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팁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하나를 사용해 보기로 하자.
낯선도시나 낯선 환경에서 과연 그 지역에 어떤 특색있는 음식이 있고, 또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보도 부족하고 누구에게 불어보기도 난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SNS 검색을 통해 선택을 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을것이라 생각되는데........ 글쎄다. 검색되는 상당부분의 내용들이 이미 댓가를 받고 누군가가 부풀려 써서 올려놓았거나, 아예 작정하고 장사꾼이 스스로 위장술을 극한까지 펼쳐놓은곳이 허다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심리보다 장사꾼의 수완이 한 발 앞서가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속설 처럼 '택시 기사나 대중교통 운전자에게 물어보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들어 그런곳에까지 장사꾼들의 노련한 상술이 뻗쳐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믿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이럴 때 쓰는 꿀팁이 있다.
제주도든 부산이든 로마든 런던이든 바르셀로나든 어디든지 마찬가지다.
'낯선곳에서 배는 고픈데 어디가야 가성비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싶어지면 식사시간에 맞추어서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관공서 부근으로 가라' 라고 말해 주겠다. 시청. 구청. 아니면 동사무소라도 좋고 우체국. 경찰서. 소방소라도 좋다. 대기업도 좋고 중소기업 공장 부근도 좋다. 그냥 보편타당한 정도의 중산층이 집단적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장소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그 부근에서 가만히 살펴보면 현지 직장인으로 보여지는 사람들이 식사시간에 맞추어 우르르 몰려가는 음식점이 보일 것이다. 그곳이다. 그곳이 그 지역에서 가장 맛있고 대중적일 정도의 저렴한 맛집이다. 99% 확률로 보장한다. 관공서나 회사마다 대부분 저렴한 가격에 구내식당을 운영한다. 하지만 구내식당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근으로 나가서 식사를 해결한다. 직장인이 직장부근에서 식사를 해결하자면 일단 거리적인 한계에 부딫친다. 가까운 곳에서 맛도 있고 가격도 적정한 곳을 찾게되고, 그런 필요들이 정보 공유와 소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는 것이다. 현지인들을 위한 진정한 로컬 맛집인 것이다.
99% 성공할 확률이 높다. 1%는 아마도 그렇게 찾아든 식당이 당신과 궁합이 안맞을 경우 뿐일 것이다. 알레르기나 특정 음식을 특별하게 기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연히 최선의 선택이 될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모처럼 그 팁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서귀포에서 백반기행에 등장한 음식점을 때를 맞춰서 찾아가 보니 온통 여행객들로 넘쳐난다.
곧바로 우리는 SNS로 맛집 검색을 하지않고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가장 가까운 관공서를 찾았다. SNS 정보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꾼들이 쳐 놓은 위장망을 걷어내는 수고를 덜기 위하여 우리는 발품을 팔기로 한 것이다. 내비게이션을 이리저리 드래그 하다보니 '서귀포 소방서'가 눈에 들어 온다.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우리는 아무런 볼 일도 없는 서귀포 소방서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외곽지로 옮긴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신축건물이었다. 엉??? 이러면 작전에 차질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데.........
소방서가 건너다 보이는 도로 저만치 공터 앞에 차를 주차하고 시계를 살피니 오전 11시 50분 이다. 주변을 연실 살피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도로를 건너 온다. 소방서에서도 사라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이곳이 주차금지구역은 아닌것을 확인하고는 차에서 서둘러 내린다. 부근에 길목마다 음식점이 제법 여럿 있었던 터라, 이제부턴 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 들어가는 음식점을 찾아내야만 한다. 너른 공터 옆의 한 음식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확인했다.
우리도 그리로 향했다. 두리번 거리고 살필 요량도 없이 무작정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식당 안에 손님들로 가득했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이 있어서 테이블을 다 치우기도 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제서야 이곳이 순두부 전문점인것을 확인했다.
역시나 우리의 선택은 100% 탁월했다.
음식점에 대한 모든 선입견은 버려라. 서귀포 최고의 맛집은 바로 소방서 앞에 있다!!!!!!
'그래. 이게 진짜 순두부 맛이야. 이 정도는 되어줘야 순두부를 맛있게 먹었네 라고 할 수 있지. 암.'
아마도 내가 먹어 본 순두부 중에서 최고였다고 해도 좋을것 같다. 모든것이 대단히 흡족했다. 이제껏 제주도 여행다니며 먹어본 음식중에서 가장 맛있었고, 여건만 허락된다면 꼭 다시 찾아와서 먹고싶은 맛있는 음식이었다. 음식 자체며 서빙이며 반찬과 식당 분위기도 만족스러웠다.
거기다가 가격까지 착해도 너무 착한것이 아닌가!
우리 고장에서도 순두부 하면 대략 8천원 정도 가격대를 형성한다. 8천 오백원이나 9천원도 있다. 그런데 막 지어내주는 돌솥밥이 추가되면 가격대가 달라진다. 돌솥밥이 나오는 두부전골 경우 1인분에 1만원이나 약간 상회하는 가격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뚝배기 순두부에다가 즉석 돌솥밥이 더해졌음에도 1인분에 8천오백원이라니.......... 헐. 착해도 너무 착한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것인지 한 주 정도 지나서 새해가 되면 부득불 가격이 조금 오르긴 한단다.
'혹, 제주도 여행가셔서 매일 사먹는 음식에 질리시면 서귀포 소방서 코앞에 있는 순두부집을 한번 가 보세요. 가출했던 입맛과 푸근한 옛 정서가 되살아 날테니까요.' 라고 누구에게라도 추천해 드리고 싶다.(어떤 댓가를 받고 기행을 쓰거나 맛집 후기를 쓰는 사람이 절대 아니기에 그냥 믿어주셔도 됩니다)
(음식 체인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자.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세프들의 음식 체인점은 극찬을 하고 기를 써서 찾아가면서도, 흔히들 체인점 음식에 대해서는 일괄적인 통일된 맛과 영양과 잉여 이익창출이 우선이라는 선입견에 쉽게들 폄하하고 외면하기가 일쑤다.
그런데 이틀 후에야 위에 소개한 일품 순두부가 체인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산 일출봉으로 진입하는 마을 사거리 한 켠에 같은 일품 순두부 가계가 눈에 띄고서야 말이다. 아마도 서귀포 소방서 앞이 본점이었지 싶다. 하지만 내 기억과 감동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곳의 순두부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당연히 맛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최고 유명 세프가 서울 부산 제주에 같은 음식점을 열었다고 치자. 모두가 그 유명 세프의 얼굴로 도배된 간판과 실내장식을 갖추고 있다. 내가 찾아간 제주점에 그날 그 세프가 머물고 있었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면 지극히 정상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날 부산점에 있었고, 그의 수제자가 주문한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고 치자. 유명 세프가 요리를 가르쳤고 배운 레시피에 준해서 만든 요리가 나왔다고 쳐도 그 음식은 수제자의 요리다. 메뉴판에 유명 세프의 이름이 붙어있어도 그것은 요리 이름일 뿐 요리 자체는 수제자의 요리다. 수제자의 요리에 유명세프 이름으로 미슐렝 별이 떨어지지는 않은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유명 세프는 한 사람인데, 그의 이름을 딴 여러개의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유명세프의 요리를 극찬한다. 그렇게 훌륭하다던 수제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옆가계를 운영하면 금방 다시 찬밥 취급을 한다. 이건 뭔가 옳지가 않다.
그냥 상호를 내걸고 전국에 수십개의 체인점을 낸 맛집의 레시피(음식 체인점)와 다를게 무엇인가? 맛과 영양의 통일화와 가격의 저렴화까지 버젓이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체계적인 관리와 합리적인 운영과 본점에서 처음 내놓았던 맛과 영양의 지속성만 유지해 준다면, 나는 체인점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한다.
어디에서나 뻔한 고속도로 휴계소의 주점부리들........... 헐. 내게는 모두 맛만 좋더구만. 없어서 못 먹지.
다시 제주도에 간다면........ 서귀포엔 순두부 먹으러 꼭 다시 갈 것이다. 여기저기 체인점이 눈에 띄어도 그날의 감동을 기억하려 서귀포 소방서 앞으로 다시 찾아 갈 것이다.
더하여, 제주 먹거리 푸념을 마무리하기 전에........ 음식 체인점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해보기로 하자.
성산 일출봉을 향해 가다보면 초입에 사거리가 하나 나온다.
한라산을 등지고 진행하다 보면 우측으로는 섭지코지 방향에서 오는 일출전망 명소인 해변길이고, 곧바로 건너편 길은 일출봉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고, 좌측은 성산포항구로 우도로 가는 배편을 타러 가는 길이다. 그 사거리의 우측 모서리에 아담하지만 별로 남의 이목을 잡아 끌 정도는 아닌 식당이 하나 있다.
알고보니 역시 체인점이었는데 취급하는 음식이 해장국이다.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가장 흔하디 흔한 해장국집인 것이다.
직업이 현장일을 하는 사람이다보니 주로 밖에서 외식을 하는 편인데, 아마도 그중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음식이 바로 해장국이 아닐까 싶다.
제주도 오려고 완도까지 죽어라 내려와서 기어코 찾아간 집이 돼지국밥집 이더니만, 새해 첫 날 기어코 찾아아들어간 집이 또 해장국집 이다. 오메........ 뼛속까지 깊이 배어있는 한국적인...... 너무나 토속적인 식습관 유전인자.......... 정말로 찡하다. 찡해.
새해 첫 날(2022년 1월 1일) 우리는 어찌되었건 기어코 제주 성산포의 일출을 보았다.
인생 최고의 일출광경 까지는 아니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전국의 일출 명소가 일체히 폐쇄되고 단속중인 가운데에서도 찬란하게 떠오른 해를 보았다.
일출을 보고 나서 다음 여행지로 우도를 계획하였기에 곧바로 성산포항으로 향했다.
열심히 우도를 한 바퀴 걸어서 돌아볼 계획이었기에 우선 든든하게 아침식사부터 하긴 해야겠는데 마당히 사전에 알아 둔 음식점이 없었다. 하여 성산포 일대를 이리저리 돌아보고 도 돌아보았는데....... 새벽부터 성산 일출봉 일대가 철저하게 페쇄되고 철통같은 제재가 펼쳐지고 있음에도 일출을 감상하려는 여행객들이 몰려오느라 성산면 전체가 처다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좀 떨어진 오름 한 곳에 올라 성산포를 건너다 보니 새벽 어둠부터 밀려든 차량 행렬의 불빛으로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이거야말로 일출보다 어쩌면 더 장관이었다.
해는 분명 어제 떠올랐던 그 해이고 내일도 역시나 그 해가 똑같이 다시 떠오를 것인데, 새해 첫 날이 무엇이라고 저렇게들 난리법석을 떨어야만 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뭐가 다른것이지?' 하긴 뭐 이런 푸념도 다........ 나는 이미 다를 방도를 택해 온전하고 느긋하게 새해 첫 날 일출을 볼 여건이 확보되었기에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푸념일 수도 있겠다.
암튼, 그렇게 일출을 보고 나서 우도로 건너가려던 차에 배는 고프고 아침은 우선 해결해야겠다고 동네를 돌고 돌아서 겨우 찾아낸 곳이 바로 해장국집 이었던 셈이었으니.......
헐.
맑은 해장국 하나에 얼큰한 해장국 하나를 주문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고사하기로 하고......... 맛있다. 속상할 정도로 기가막히게 맛있다.
이런것은......... 새벽에 현장으로 출근하기는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쏫아져 작업이 도저히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나와준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고자 우루루 해장국집으로 몰려간다. 뜨겁고 구수한 해장국을 한 그릇씩 꿰차고 식전댓바람 부터 알싸하니 쐬주잔이 몇 잔씩 돌고난 후에 먹어보는 해장국이 참으로 진국인 것을.......... 헐. 제주도까지 와서리 이 무슨 웃기는 씨츄에이션이람?
내가 이렇게 해장국이랑 순두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것을 내 주변사람들이 보게되면.......... '슬슬 미쳐가는것 아니야?' 라고들 이구동성으로 더들어 댈 것이다. 지인들은 모두가 내가 로컬음식파가 절대 아니라고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입맛이 변해가는게 아니라 슬슬 미쳐가는 것이다' 라고 할 것이다.
이제까지도그래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내가 음식을 먹고 사는데 있어서 고추장 된장 풋고추 등등을 먼저 찾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한달 쯤 외국 여행을 해도 김치 생각을 전혀 안하는 사람이다. 라면은 가끔 생각이 나지만 말이다. 그냥 무엇이든 잘 먹는데........ㅎㅎㅎ. 전통 한국음식 보다는 서구인들 음식이 내 기호에 딱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그랬나 보다. 유럽의 도시들을 걸어다닐때는 배낭에 커피랑 과일 한 두개랑 캔맥주를 주로 넣고 다닌다. 길을 가다가 햄버거나 핫도그나 샌드위치가 있으면 길거리에 서서, 혹은 걸으면서 맥주랑 먹고 다닌다. 그것으로 한 끼 식사가 거뜬하다. 고추장 된장은 찾는 일이 결코 없으면서도 치즈 케찹 마요네즈 등은 늘 찾는다. 칼국수, 된장찌개 등등은 챠밍여사랑 결혼하면서 아내의 식성에 맞추다보니 먹게된 음식이었다. 김치찌개의 경우는 보통의 김치찌개랑 우리집 방식의 김치찌개랑 제법 차이가 있었다. 우리집은 김장김치와 얼기설기 썬 돼지고기를 마아가린에 둘둘 한참을 볶다가 특이한 냄새가 진동을 하면 그제서 물을 붓고 끓였다. 한참 쫄아들었다 싶으면 버터를 약간 넣기도 하고, 당시로서는(내 국민학교 유년시절) 처음 등장하여 좀 귀했다는 라면 스프를 넣고 끓였다. 우리아버지표 김치찌개 였다. 흡사 요즘 우리가 접하는 껄쭉한 짜글이가 우리집 방식의 김치찌개였다. 다른 재료가 생기는 날에는 살짝 부대찌개 비슷하게 달라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런 음식이 우리 식구들 중에서도 유독....... 내 입맛에만 딱이었다.
결혼을 한 후에 살림을 해가면서 챠밍여사가 내 음식습관에 대해 처음으로 내뱉은 혹평이 '당신이 아니라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참 대단하셨던것 같애. 60 70년대에 아들을 기르면서 어떻게 고추장 된장을 안먹는 애를 대한민국 땅에서 기를수가 있으셨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참 그게 신기해.
'여보야. 그래도 너는 내 식성 덕분에 고추장 된장 담구는 힘든 일에서 벗어났잖아.'
'잉간아. 유별난 당신 식성 맞추느라고 우리집 엥겔지수가 얼마나 높은줄 알기나 하니?'
헐!
--- 다음 이야기에서 새해 일출과 우도 이야기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