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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현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형식적 호들갑이라도 떨어야 할 한국불교계(더 정확히는 한국불교를 이끄는 장자종단 조계종의 대표자나 주요 종무행정 기관 책임자들)는 조용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참담한 상황이 초래된 원인을 분석하며, 대책을 마련하고, 책임을 물을 것은 묻는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할 일련의 과정으로 분주해도 모자랄 이들이,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식의 생뚱맞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한국사회 제2종교 전락’이라는 엄중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보이는 대담함과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또 이런 현실을 침묵으로 방관하는 한국불교계 전반의 무기력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언제까지나 한숨을 쉬거나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현실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암울한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적확한 처방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불교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을 찾아가 노하우를 공유하고, 심기일전해 불교중흥의 기틀을 차근차근 다져나가는 일이 아닐까.
지금, 왜 미황사를 말하는가 미황사의 이런 배경에는 전각(殿閣, 사찰의 건물) 불사라는 ‘하드웨어’의 완성과 함께, 20여 채가 넘는 전각들이 어느 곳 하나 쉴 틈 없이 수행 및 신행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이상적으로 적용되는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전각 불사, 즉 미황사의 하드웨어를 이끈 현공 스님(전 미황사 주지)은 오늘의 대찰 미황사의 사격을 주도한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현공 스님은 전통 가람의 사격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으로 매우 유용한 시설을 갖춘 불사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대웅전과 응진전 등 3, 4개 정도만이 남아 있던 쇠락한 고찰이 23개 동의 각종 전각을 갖춘 대가람으로 훌륭하게 중창될 수 있었던 데는 불사에 대한 현공 스님의 탁월한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드웨어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황사보다 더 규모도 크고, 화려하게 중창된 사찰들은 얼마든지 많다. 중요한 것은 힘들여 구축해놓은 하드웨어를 팽팽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 즉 불교 콘텐츠이다. 이것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지어진 대찰이라고 하더라도 말 그대로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수한 명산대찰들 가운데 덩그러니 집만 지어놓고 활용을 하지 않은 채 비워놓거나 창고용으로 방치된 전각들이 없지 않은 것은 바로 소프트웨어의 부재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를 미황사는 주지 금강 스님의 빛나는 아이디어와 원력에 힘입어 다양하고 효율적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프로그램 개발로 훌륭하게 해결했고, 이를 실천해냄으로써 한국불교의 희망으로 그 위상을 단단히 했다.
금강 스님은 ‘새천년의 시작’이라며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0년에 미황사에 왔다.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백양사에서 참사람 운동 관련 소임을 맡은 후 운문암 선방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2000년 2월 미황사에 바랑을 풀었다. 그러자 당시 미황사 주지였던 현공 스님은 금강 스님에게 절을 맡겨 놓고는 자신의 거처를 산내 암자로 옮기고 절 살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황사의 중창을 위해 금강 스님이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현공 스님의 예지력에 따른 결단이었다. 졸지에 절 운영의 책임을 떠맡게 된 금강 스님은 1년 동안 주지직을 대행하며 절을 관리했고, 이듬해 2001년 2월 3일 정식으로 미황사 주지 임명장을 받았다.
고심을 거듭한 금강 스님은 사찰 홈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조계사, 송광사 등 한두 대찰에서나 홈페이지에 관심을 가졌던, 따라서 한 손에 꼽아도 충분할 만큼 사찰 홈페이지가 없었던 시절에 지방의 쇠락한 고찰에서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금강 스님은 시간과 공간의 차별이 없는 사이버공간의 특성을 사찰 경영에 활용해야 한다는 소신과 아이디어로 어려운 재정에도 무릅쓰고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금강 스님의 생각은 주효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많은 사람이 미황사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멀어서 평생 한 번 찾아가기도 어려운 거리에 있는 절이지만, 홈페이지 개설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황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초창기인데도 하루 평균 700여 명이 접속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들이 지속적으로 미황사 홈페이지를 찾도록 유도하고, 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홈페이지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금강 스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님은 당시의 상황을 “참 열심히 했다. 방문자가 남긴 글에 일일이 답변을 달고, 미황사를 담은 사진도 열심히 찍어서 올렸다. 밤을 지새운 적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니 방문자도 늘어나고, 이 방문자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오프라인으로, 즉 실제로 미황사를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가 세상에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제1회 어린이 한문학당에 참가한 초등학교 4, 5, 6학년 아이들 31명의 호응은 뜨거웠다. 7박 8일이라는 짧지 않은 교육과정을 이수한 아이들은 겨울방학에도 한문학당을 개설해줄 것을 이구동성으로 요청했다. 아이들의 요청으로 겨울에 개설한 두 번째 어린이 한문학당에는 외국에 나간 학생 2명을 제외한 29명의 학생이 참석했다. 그 이후 18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린이 한문학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모집 때마다 신청자가 넘쳐 애초 여름방학에만 개설된 계획을 겨울방학에 하는 것으로 늘렸지만, 그것도 부족해 여름방학에는 어린이 한문학당을 2차례씩 시행했다. 마감하고 나면 유명한 큰스님이나 금강 스님과 친분이 있는 스님들을 통해 추가로 참가시켜 달라는 ‘로비’가 치열할 정도로 어린이 한문학당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물론 어느 누구의 로비든 단 한 차례도 통하지 않았지만. ‘어린이 한문학당’ 출신 학생들은 과정을 마친 이후에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스스로 뜻을 모아 중학생을 위한 한문학당 프로그램을 운영해달라고 사찰에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속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이런 학생들의 요청에 의해 ‘중학생을 위한 문화학당’이라는 특별 프로그램이 10여 차례 개설돼 진행되기도 했다. 올해(2017년) 여름 열린 제47회 어린이 한문학당에는 무려 49명이 참가했다. 한문학당 출신으로 대학생이 된 청년들이 8명이나 찾아와 자원봉사해 준 덕택에 정원을 훌쩍 초과한 인원인데도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었다. 2000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어린이 한문학당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 수는 2,000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 한문학당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을 현재 이명호 박사와 함께 매뉴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매뉴얼이 완성되면 전국 사찰에 배포해 프로그램을 공유할 생각에서다. 매뉴얼은 올겨울쯤 책자로 만들어진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 어린이 한문학당의 매뉴얼을 참고로 해서 내년 여름부터는 더 많은 사찰에서 한문학당이 개설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미황사 프로그램을 그대로 적용해도 좋고, 각 사찰에 맞게 응용해서 시행해도 좋다는 바람이다. 다만 될 수 있으면 몸과 마음의 변화가 될 수 있는 1주일 이상(7박 8일) 프로그램으로 시행해줄 것을 권한다. 2박 3일 프로그램으로는 몸과 마음에 프로그램이 체화되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강 스님에 따르면 한문학당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8일 동안 절에 머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적어도 이 정도의 기간이 되어야 집 생각, 부모 생각, 친구 생각을 접고 비로소 절의 환경과 프로그램에 전념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에는 부모와 연락도 할 수 없고 부모 등 가족의 자원봉사도 금지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에 큰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많은 학생이 중학교 진학 후 겪게 되는,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온다고 금강 스님은 말한다. 금강 스님은 며칠 전 결혼을 한다며 남편이 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킨 한 여학생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맺은 인연이 이렇게 끈끈하게 계속 이어지는 경우를 맞을 때마다 보람이 크다는 것이다.
미황사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역사는 조금 더 빠르다. 절이 있는 곳이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인 까닭에 무전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하룻밤 재워달라며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절에 머물게 하며 예불도 시키고 울력도 시켰는데, 어쩌면 이것이 미황사 템플스테이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의 축적이 바탕이 되어 2002년 월드컵 당시 조계종 포교원에서 템플스테이 사찰을 모집했을 때, 미황사는 자신 있게 템플스테이 사찰 지정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이때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겠다고 신청한 사찰은 대부분 월드컵 경기장 주변에 있는 대찰이나, 교구본사 등이었다. 축구 경기장도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한 사찰 가운데 템플스테이를 신청한 곳은 미황사가 유일했다. 그 이후 조계종에 문화사업단이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전체적인 템플스테이 홍보를 해주면서 미황사 템플스테이는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됐다. 정성을 다해 열심히 운영하다 보니 미황사가 템플스테이를 가장 잘하는 절로 꼽히게 되었고, 금강 스님은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템플스테이 운영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강사 역할까지 심심치 않게 맡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황사 템플스테이의 성공비결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부족한 시설이지만 깨끗하게 관리하고,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음식을 제공하며, 주변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을 활용한 프로그램 등 절에서 일상으로 하는 일과들을 프로그램화해 템플스테이에 적용한 것 등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일상을 프로그램화한 것이 참가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금강 스님은 분석했다. 금강 스님은 특히 미황사가 가진 지리적으로 멀리 있다는 단점을 장점으로 돌리는 것에 주목했다. 미황사를 ‘무조건 하룻밤은 머물고 가야 하는 절’로 인식시켰고, 이런 인식이 확산하면서 먼 곳에 있는 사찰은 오히려 템플스테이를 하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절로 자리매김해갔다. 대부분의 사찰은 토 · 일요일 등 사람이 많을 때 템플스테이 참가자도 몰리는 경향이 있지만, 미황사는 ‘1박 이상은 머물러야 하는 절’로 인식된 이후 365일 언제나 요일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기와 기간에 구애됨이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더불어 높아졌다. 언제든 참가가 가능한 템플스테이 시스템은 자연히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종류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참여할 수도 있고, 가족이나, 단체가 참여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 상시로 진행되고 있다. 중고교 동창들이 함께 참여하거나 직장 등 단체로 오기도 하고, 고등학생 수학여행을 템플스테이에 참가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인근 중고등학교 출신들이 고향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한다며 찾아오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수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계절의 특성에 맞춰 여는 이벤트성 템플스테이 인기도 높다. 동백꽃, 화전놀이, 초파일, 괘불재, 가을 트레킹 템플스테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운영되고 있다. 완전하게 열려 있는 것이다. “1994년 종단개혁 불사 이후 저는 이제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얀마의 마하시 선원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언제든지 수행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지요. 또 서옹 스님께서 주창하셨던 참사람 운동을 사찰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템플스테이 사찰을 월드컵 기간 중에 모집한다고 해서 신청을 한 것이지요.”(금강 스님)
어느 것 하나 의미가 덜하고 중요하지 않은 프로그램이 없겠지만, 미황사의 대표 프로그램을 꼽는다면 간화선 수행을 바탕으로 한 ‘참사람의 향기’일 것이다. 7박 8일 일정으로 매월 한 차례 열리는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은 지난 2005년부터 시작됐다.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면서 이들을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행형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했기도 했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은 금강 스님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 없이 숙명처럼, 또 초인처럼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스님의 이런 각별한 원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사람의 향기’는 매월 3번째 토요일부터 4번째 토요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평균 한 해 참여 인원은 20명 안팎이고, 지금(2017년 8월 현재)까지 무려 104회나 진행해왔다. 신참자(처음 프로그램 참가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연 10차례 실시하는데 참가인은 연간 150~200명 정도가 된다. 구참자(1회 이상 참가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연 3차례 진행되는데, 20명 안팎으로 참가인은 연간 50명 내외에 이른다. 이 프로그램에는 외국인들도 종종 참가한다. 그동안 프랑스, 브라질, 러시아, 미국, 독일인 등이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미황사는 외국인 참가자를 위해 영어, 독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통역자를 배치해놓고 있다.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금강 스님의 중앙승가대 후배 학인 스님들도 참여를 신청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중앙승가대 학인 스님을 위한 참사람의 향기’ 프로그램이 10여 차례 진행됐다. ‘참사람의 향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간화선 수행프로그램이다. 간화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프로그램. 수식관을 통해서 번뇌를 없애는 수행, 집중하는 습관 등을 익힌 다음에 직관수행으로 들어간다. 간화선 수행을 위주로 하면서 일대일 면담, 수행지도 및 면담(점검), 다도 시간, 요가, 수행론 강의, 선의 역사 강의, 육조단경 강의, 좌선의 강의 등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 사실 잘 설계된 프로그램만큼 중요한 것이 이것을 수행할 인력 문제인데, 미황사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넉넉하지 않은 재정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금강 스님은 처음 주지를 맡았을 때부터, 하고 싶고 해야 할 것을 위해서는 재정상황을 생각하기 전에 사람의 역할을 먼저 생각했다. 필요한 인력들을 최우선으로 구축하고, 나머지 부분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재정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었다. 즉 ‘재정보다 일(역할)을 먼저 생각하라’는 철칙이 스님에게는 몸에 배어 있다. 부처님의 일이란 원력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금강 스님의 신념이다. 첫 주지를 맡고 4년 임기 동안 사찰을 운영하면서, 설사 손해가 난다고 하더라도 인력은 충분히 쓰고 하고 싶은 것을 최선을 다해 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실천에 나서보았더니 다 이루어졌다. 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금강 스님은 이런 원력을 보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설계하기 위해 전 세계의 이름 있는 명상센터를 찾아 그곳을 프로그램들을 직접 체험했다. 미얀마의 마하시 선원, 쉐우민 선센터, 파욱 센터, 인도의 고엔카, 라즈니쉬 아쉬람, 간디 아쉬람, 오르빌 공동체,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테제공동체, 대만의 불광산사, 법고산사, 일본의 천태종 연력사, 조동종 영평사, 고야산 금강봉사, 미국의 MRO선센터(조동종), 숭산 스님이 세운 프로비던스 선센터, IMS선센터(보스턴) 등을 찾아다니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장단점을 점검하며 오늘의 7박 8일 간화선 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를 완성했다. 의조 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의조 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였다. 당나라 이연수가 지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위(魏) · 제(齊) · 주(周) · 수(隋)의 역사를 다룬 책 《북사(北史)》 제97의 〈서역전(西域傳)〉에 따르면, 우전에서는 모든 백성이 불법(佛法)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찰과 탑과 승려들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육재일(六齋日)을 지키고 제단에 바칠 곡물이나 과일을 손수 씻었다고 한다. 우전국에 대한 기록은 법현이 지은 《법현전》에도 나온다. 《법현전》은 400년 전후의 우전의 불교를 소상히 알려 주고 있다. 《법현전》에 의하면 우전은 부유한 나라로서, 국민은 불법을 신봉하고 수만 명의 승려가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었다. 선선국이나 오이국보다 열 배 더 큰 대국이었다. 사람들의 집 앞에는 높이가 6m 정도 되는 작은 탑이 무수히 세워져 있었으며, 여행하는 승려들을 위한 승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법현 일행이 온 것을 알게 된 우전의 국왕은 일행을 ‘구마제사’라는 사찰로 초청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 사찰은 3천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대승불교 사찰이었다. 식사도 계율에 정해진 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기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하였으므로 이것을 본 법현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경 등 다른 세 명은 먼저 갈차국으로 출발했지만, 법현은 이 나라의 불교의례에 큰 매력을 느껴 얼마 동안 더 머물렀다. 이유는 행상의 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행상이란 꽃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수레에 불상을 싣고 성안을 천천히 행진하는 것을 말하는데, 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의 하나이다. 이 행사는 인도, 서역,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4월 8일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우전국에서는 4월 1일부터 성안의 도로를 청소하고 거리를 장식하였으며, 왕과 왕비, 시녀들이 앉을 성문 위는 큰 막을 쳐서 장엄하였다.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는 구마제사의 승려들은 왕으로부터 깊은 존경심을 받고 있었으므로 행렬의 제일 선두에 서서 걸었다. 행상의 수레는 성에서 3, 4리쯤 떨어진 곳에서 제작되었다. 수레는 바퀴는 4개, 높이가 9m 정도로서 왕이 사는 궁전처럼 크고, 칠보로 장식한 깃발을 드리웠다. 수레의 한가운데는 불상을 싣고 그 양 옆에는 보살상 2구를 배치하였으며, 부처와 보살을 보좌하기 위해 금은으로 만든 비천상을 궁중에 매달았다. 행상의 수레가 성문으로 100보 정도 가까이 오면 왕은 왕관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맨발로 꽃과 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성문을 나가 행상을 맞이하여, 머리를 불상의 대고 예배하고 꽃을 뿌리며 향을 피웠다. 행상이 성안으로 들어오면 성문의 누각에 있던 왕비와 시녀들은 많은 꽃을 뿌렸는데, 그 흩날림은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우전에는 14개의 대사찰이 있었으며, 한 사찰을 행상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 그러므로 모두 14개 사찰의 행상이 끝나는 것은 4월 14일이었다. 이 14일 동안 성안은 석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상의 행렬로 붐볐다. 《법현전》은 우전의 또 하나의 사찰인 왕신사에 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왕신사는 성의 서쪽으로 7,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창건한 지 이미 80년이 되었다고 전한다. 3대의 왕에 걸쳐 건립된 이 사찰 탑의 높이는 75m로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 건물은 금은으로 칠해져 있고 여러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탑 뒤쪽에는 불당이 있는데, 그 기둥과 창문도 모두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또한 아름답게 장식된 승방도 있었다. 이런 기록으로 5세기 초에 번성했던 우전국의 불교가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심 깊은 우전의 왕이 그들 나라의 불교를 이웃 나라에 전했던 것처럼 오늘의 미황사를 일군 금강 스님도 동아시아불교를 대표하는 수행법인 간화선을 현대화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전하고 있다. 어쩌면 금강 스님이 불교일화를 꿈꾸며 경전을 싣고 배에 올랐던 옛 우전국 왕의 후신일지도 모르겠다. ■ 이학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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