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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윤 |
오늘날 동남아의 국가 구분과 국경은 대부분 유럽 열강의 오랜 식민통치와 독립전쟁과 세계 대전을 거쳐 오는 동안에 승전국들에 의해서 획정되었다. 2002년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를 포함하여 11개국이 분포된 동남아는 지리적 구분에 따라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5개국으로 구성된 대륙부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동티모르, 필리핀 등 6개국의 해양부로 나뉜다.
이들 해양부 국가 중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말레이반도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령 칼리만딴 북부 남중국해에 위치한 브루나이 등 4개국은 과거 동남아 최초의 불교왕국이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역이거나 영향권이었다. 이들 국가는 바다의 실크로드(Silk Voyage) 시대 이전부터 장대한 믈라유 문화권(Malay World)의 동방무역(東邦貿易)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13세기부터 15세기 초엽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바다의 실크로드는 향료군도(香料群島)에서 산출되는 각종 향료를 유럽 시장으로 실어 날랐다. 향료군도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와 파푸아 사이에 산재된 말루꾸(Maluku) 군도로 일찍이 유럽에는 몰루카스 군도(Moluccas Islands)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비사막을 건너 중국 대륙의 장안(長安)과 지중해의 베네치아(Venezia)를 연결했던 육상 실크로드(Silk Road)는 유럽 사회의 번영에 따라 상품의 다양화와 물동량의 확대를 재촉하였다. 이에 따라 물고기 떼를 쫓던 연안 어업의 바닷길이 국제교역을 위한 먼 바닷길 비단길로 발전하였는데, 향료군도로부터 유럽 시장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각종 향신료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12월부터 3월 말까지 인도양을 거쳐 불어오는 동남풍과 동북아에서 남중국해로 불어오는 서남풍이 이곳에서 만났다. 15세기 후반 말라카 왕국의 전성기에는 전 세계 80여 개 지역에서 무역상들이 모여들었다.
믈라유(Melayu)족은 처음부터 말라카해협(Malacca Strait)과 자바해(Sea of Jawa)를 잇는 동방 무역로를 장악하였다. 이 광활한 지역을 석권했던 고대 왕국들이 모두 믈라유족의 무역왕국이었던 까닭이다. 이들 왕국은 스리비자야(수마트라), 마쟈빠힛(자바), 말라카(말레이반도) 등 세 왕국이었으며, 마쟈빠힛 왕국은 내륙 농업을 겸한 무역왕국이었다.
영어 표기의 말레이(Malay)족을 의미하는 한정적인 종족 개념이 아니라, 한층 포괄적인 의미(종족과 문화와 왕국을 포함)를 내포한 믈라유족은 왕실 후예뿐만 아니라 토착종족까지 광범위하게 섭렵하는 만다라식 개념이었다. 이들 믈라유족은 지역과 통치자와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하나로 뭉쳐 단결하고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여 왕국의 번영을 이끄는 순기능적 강인함을 보유한 종족이었다.
믈라유족이 개척한 바닷길 비단길은 곧 씨암(Siam)족과 크메르(Khmer)족이 가담하였고, 머지않아 중국 무역상들이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바닷길을 통한 동방무역의 번영은 스리비자야에서 마쟈빠힛을 거쳐 말라카 왕국에 이르는 동안 이 지역의 중심 종족이었던 믈라유족이 이끌었다. 믈라유족의 무역망을 필리핀 군도로부터 아프리카 동남부 마다가스카르까지 연결하여 장대한 믈라유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필리핀과 마다가스카르도 믈라유족이 이들 국가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다. 마하티르(Mahathir Mohamad)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말레이시아를 통치하는 동안 IMF 위기를 넘기고 국가 경제를 살려냈다. 그는 서방세계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워 아시아적 가치를 공격할 때마다 말레이시아가 말레이문화권의 중추임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대륙부 동남아는 불교문화권으로 자리 잡았고, 해양부는 이슬람과 가톨릭문화권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믈라유 문화권은 믈라유족의 포용성으로 다양한 종교를 섭렵하였지만, 그중에서도 국제교역의 매개체 역할을 한 이슬람을 가장 많이 받아들였다. 필리핀과 태국 남부도 믈라유 문화권이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는 각각 세계 최대의 가톨릭 국가와 남방불교 국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필리핀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영내에 파묻혀 있는 동티모르도 가톨릭 국가이다. 이 때문에 해양부 동남아시아에서 불교문화를 다룰 국가는 스리비자야 왕국 이래 믈라유 문화권의 큰 물결을 이어 온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 4개국으로 좁혀진다.
2. 스리비자야 왕국과 경쟁 왕국들
동남아 고대국가의 구조는 만다라(曼陀羅) 형태였다. 해양부 동남아에서는 만다라를 만달라(Mandala)로 칭하는데, 사람 이름으로도 많이 쓰인다. 불교 용어로 만다라는 중생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덕(德)을 나타내어 둘러앉은 모양의 그림으로 그려진 군신상(群神像)을 말한다. 동남아 고대국가의 통치구조는 지배자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라, 지배자가 중앙에 서는 동심원 형태, 즉 만달라 형태였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선명하지만 파문은 점차로 약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중심은 있고 변경이나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다.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세금과 노역을 바친다. 7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에 등장한 제국(帝國) 형태의 만달라는 이전 시대의 불교문화권의 만다라와 달리 더욱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왕권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수마트라의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장장 7세기에 걸쳐 장수한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과 캄보디아 톤레사프(Tonle Sap) 호수 인근에서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영한 앙코르(Angkor) 왕국이 각각 해양부와 대륙부 동남아를 대표하는 제국형 만달라 왕국이었다.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
스리비자야(650~1377)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태국 남부, 자바와 칼리만딴 일부 지역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스리비자야를 스리위자야(Sri Wijaya)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바(Java)를 자와(Jawa)로 표기하는 하는 인도네시아 신철자법(1972년)에 따른 것이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史料)를 통한 분석에는 미치지 못하나, 고고학자들은 이 고대 왕국의 생존 방식이 농업에 의하지 않고 해상무역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왕국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세데스(George Coedes, 1886~1969)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중심지는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이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산스끄리뜨어로 된 비문을 통하여 스리비자야는 불교왕국이자 강력한 해상무역 왕국이었음이 밝혀졌다. 말라카해협의 전략적 해상 요충지에 위치했던 이 왕국은 일찍이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당(唐)나라 승려 이징(義淨)이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가 전해지고 있다. 귀로에 그는 믈라유 전 지역이 이미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향하에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믈라유는 오늘날의 말레이반도를 말한다.
산자야 왕국과 사일렌드라 왕국
스리비자야 왕국의 발흥과 거의 같은 시대에 좁은 순다(Sunda)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바에서는 산자야(Sanjaya) 힌두왕국과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왕국이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과 수마트라와 자바 사이의 순다해협의 주요 항로를 장악했으나, 내륙의 농업 지역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쌀의 섬 자바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스리비자야의 국제교역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말레이반도 남단의 조호르(Johor)와 수마트라 북단의 아쩨(Aceh) 등지에서도 식량 일부가 조달되기도 하였다. 산자야 왕국이 곧 스리비자야의 주요 식량 공급지가 되었으나 머지않아 수마트라와 자바 간의 해상무역 주도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스리비자야와 산자야는 한동안 긴장 관계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멸망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으나 산자야와 조호르-아쩨 간에 동맹이 이루어졌고, 이들의 삼각 동맹으로 스리비자야에 식량 공급이 축소되어 점차 목을 조이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스리비자야는 이처럼 항상 식량 공급원에 신경을 썼다. 산자야와 쟁패하는 동안 스리비자야 왕국은 자바 동북부에서 발흥한 불교문화 배경의 사일렌드라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같은 불교왕국인 사일렌드라가 산자야를 대신하여 스리비자야의 새로운 식량 공급원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군도의 불교문화는 이때 만개하였다. 현존하는 주요 인류 문화유산의 하나이자 공식적인 세계 최대의 불교 유물인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전성기에 축조되었다. 9세기 초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완공한 것으로 믿어지는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와 발리 문자의 합성어로 ‘언덕 위의 승방(僧房)’이라는 뜻이다.
힌두 산자야 왕국의 후손들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외곽지대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850년경 산자야 왕과 사일렌드라 공주 간의 결혼동맹으로 중부 자바의 통제권이 다시 산자야 왕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산자야 왕국을 전성기로 이끈 라카이삐카탄(Rakai Pikatan) 왕은 자신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로부두르에 견줄 수 있는 힌두사원을 남기고 싶었다. 보로부두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850년부터 856년 사이에 축조된 쁘람바난(Prambanan) 힌두사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세워졌다. 세계적인 힌두 유적지의 하나로 알려진 이 미려(美麗)한 석조건축물은 로로 종그랑(Loro Jonggrang)사원이라는 별칭으로 오늘날 중남부 자바의 족자카르타(Yogyakarta)에 남아 있다. 쁘람바난 사원이 세워진 동네 이름이 쁘람바난이다. 이 사원이 축조될 당시 쁘람바난은 부유하고 화려한 왕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산자야 왕국의 번영에 따라 중부 자바는 한동안 힌두왕국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통치되었다. 동부 자바로 세력권을 확대한 힌두왕국은 10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맞아 990~991년 사이에 스리비자야 왕국을 공격하여 한때 왕국의 중심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25년 후 스리비자야는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자바의 힌두왕국의 위대한 군주 다르마왕사(Dharmawangsa)를 제거한 후, 그의 영토를 수많은 봉토(封土)로 분할하였다. 이후 다르마왕사의 조카 아이르랑가(Airlangga)가 다시 산자야 왕국을 회복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스리비자야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1019년 다르마왕사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부와 서부 자바에는 오늘날까지 거리와 호텔 이름으로 다르마왕사가 많이 남아 있다.
아이르랑가는 자바 힌두왕국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번영을 되찾았다. 아이르랑가 통치 시기에 수많은 인도 고전이 산스크리트어로부터 자바 고어로 번역되고, 자바의 토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 자바의 전 지역은 이전의 왕국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영하였다. 동부 자바를 계승한 통치자들은 내륙의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동시에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해상무역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1222년 자바의 새로운 강자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이 동부 자바 말랑(Malang)에 세워졌다. 싱하사리 왕국은 1275년과 1291년 두 차례에 걸쳐서 스리비자야의 대군이 침공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던 자바 주변의 해상무역을 엄중한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즈음 몽골의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이 1293년 강력한 함대를 앞세워 싱하사리 왕국의 정복에 나서 자바에 등장하고 있다. 경쟁 상대가 바뀌고 자바에서 후원 세력이 사라진 스리비자야 왕국은 주변으로부터 식량 공급까지 원활하지 못하여 국력이 서서히 소진(消盡)되었다.
앙코르 왕국
동남아 대륙부의 최대 왕국인 앙코르(Angkor) 왕국도 자바를 거쳐 바닷길을 건너온 힌두불교를 배경으로 크게 번영한 왕국이었다. 8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동남아 고대 왕국들은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축조하였는데, 보로부두르(Borobudur)와 앙코르와트(Angkor Wat) 이외에도 쁘람바난과 버강(Pagan) 등지에 대표적인 유적이 남아 있다. 앙코르와트는 오늘날 캄보디아에,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은 인도네시아 자바에, 버강은 미얀마에 있다. 이들 동남아의 고대국가는 모두 중국에 조공사절이나 교역사절을 보냈고, 중국 왕실은 이러한 사절단의 왕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초기 동남아 교역국가로 삼불제(三佛齊)와 부남(扶南)이 등장한다. 삼불제는 스리비자야 왕국이며, 부남은 앙코르 왕국의 전신인 푸난(Funan)이었다. 푸난은 쩐라(Zenla)로 발전하는데, 쩐라의 중국식 명칭은 진랍(眞臘)이었다. 이 왕국이 바로 크메르(Khmer)족이 메콩(Mekong) 강 하류의 거대한 천연 호수 톤레사프(Tonle Sap) 인근에 세운 앙코르 왕국이었다.
8세기 말(연대 미상)부터 834년경까지 쩐라를 통치한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는 스리비자야 영향하에 있던 자바 왕국들의 간섭을 벗어나 톤레사프 인근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 영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특히, 관개를 통한 인공적인 벼[禾]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식량 확보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아 왕권 확립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앙코르 왕국의 번영과 영화는 지속되지 않았다. 똔레쌉 호수 주변의 광활한 농경지는 충분한 식량원이 되었기 때문에, 스리비자야 무역왕국의 경우와 달리 식량부족이 앙코르 왕국 쇠퇴의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메르족, 군소 고산족과 함께 주변 국가에서 잡아온 수많은 전쟁포로가 톤레사프 주변의 농경지에 군거하며 식량을 생산하고 앙코르 왕국 건설에 동원되었다. 왕국 건설 사업은 전쟁에 의존했으나, 전쟁은 항상 승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자야바르만 7세 왕 이후의 앙코르 왕국은 동쪽과 서쪽에서 참(Cham)족과 씨암(Siam)족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머지않아 북쪽의 비엣(Viet)족이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대륙부 동남아 최대의 왕국이자 찬란한 앙코르 제국은 주변 국가의 협공으로 점차 국력이 쇠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추어 씨암족이 크게 발흥하여 12세기경부터 앙코르 왕국에 대한 적극 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쑤코타이(Sukhothai) 왕국을 세워 앙코르 왕국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왕실의 수많은 학자와 장인(匠人)들도 주요 대상이었다. 오늘날의 태국 영토로 영역을 확장하고 수코타이를 전성기로 이끈 람깜행(Ramkhamhaeng) 대왕이 창제한 태국 문자도 앙코르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3. 스리비자야 왕국과 구법승들
700년 넘게 장수한 인도네시아 스리비자야 왕국은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500년 동안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부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 왕국은 수마트라 남부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말라카(Malacca)해협 양안(兩岸)의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태국 남부와 미얀마와 자바에 걸쳐서 광대한 통치권역을 형성하며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말라카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차지했던 스리비자야는 8세기 말에 이미 400~600톤 규모의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정기 무역항로를 개척했었다. 이 왕국의 통치자는 불교도였으며, 중국과의 교역 품목 중에는 비단과 도자기 이외에도 사찰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용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징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당나라 고승 이징(義淨)이 찬술한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당시의 상황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스리비자야에서 1,000명이 넘는 승려를 발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온 장사꾼들이 자주 어울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징은 이어서 인도로 가는 학승(學僧)들은 한두 해쯤 스리비자야에 머무르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추천했다. 그는 672년 37세 때 광저우(廣州)를 떠나 바닷길로 스리비자야의 수도 빨렘방을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범어를 배우고 범본(梵本) 불경을 얻어 694년 당나라로 돌아왔다. 이징은 12년에 걸친 인도와 당, 당과 인도 간의 바닷길에서 만난 남해 제국(諸國)의 여행기를 통해서 인도와 스리비자야 왕국 등 여러 나라의 불교 상황과 승려들의 생활상,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사회와 풍물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징은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삼장(三藏)이라는 불계 최고의 칭호를 하사받은 당대 으뜸의 고승이었다. 이징의 속명(俗名)은 장웬밍(張文明, 636~713)이며, 유럽에서 발간된 그의 번역본들은 Yijing 혹은 I Tsing으로 원저자명을 표기하고 있다.
혜초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신라 스님 혜초(惠超, 704~787)는 열여섯의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가 금강지(金剛智)라는 중국 이름을 쓰고 있던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밀교승 바즈라보디(Vajrabodhi)의 가르침을 받았다. 혜초 스님이 20세가 되었을 때, 스승의 권유로 천축국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혜초는 723년 광저우를 떠나 이징의 여행길을 더듬어 바닷길로 인도에 닿아 다섯 천축국(동천축, 남천축, 중천축, 서천축, 북천축)을 섭렵하고, 중앙아시아와 일부 러시아 지역을 거친 후 일찍이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졌던 파미르(Pamir) 고원을 넘고 둔황(敦煌)을 지나 727년, 4년 만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실로 치열한 구도(求道) 여행이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E. Pelliot)가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했던 혜초의 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아홉 장의 황마지(黃麻紙)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였다. 총 길이 358센티, 너비 28.5센티의 황마지 두루마리는 앞과 뒷부분이 많이 잘려나갔으며,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는 글자까지 합치면 6,300여 자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여러 관련 자료를 통해 추정하면 《왕오천축국전》의 전체 분량은 약 1만 1,300자로 추산된다고 한다. 둔황은 오늘날 중국 서북부 간쑤성(甘肅省) 주취안(酒泉)에 있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나 모로코 출신 탐험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 1368)의 여행기 《리흘라(Rihla)》보다 5세기를 앞선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 스님은 출발지로부터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방향과 소요 시일, 경유지에서 만나는 왕국의 도읍지와 규모, 통치 상황, 주변 왕국과의 관계, 지형과 기후, 음식과 각종 특산물, 의상과 풍습, 주민들의 언어생활, 불교의 발전 정도와 기타 종교 상황 등을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징과 같은 바닷길을 택한 혜초 스님은 사전에 이징의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를 거듭거듭 독파하였을 것이고, 이징의 권고에 따라 얼마간 스리비자야 왕국에 체류했을 것이며, 잘려나간 《왕오천축국전》 앞부분에 이 왕국에 관한 사실적 묘사를 충실하게 남겼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로부두르 |
4. 언덕 위의 승방(僧房) 보로부두르
보로부두르(Borobudur) 대탑사원은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마걸랑(Magelang) 남서쪽에 위치하는데, 인도네시아의 역사문화 중심도시인 족자카르타(Yogyakarta)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로부두르는 ‘바라(bara)’와 ‘부두르(budur)’ 두 단어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 바라는 산스끄리뜨어의 비하라(vihara)에서 차용하였는데,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나 불교 사원이 있는 공간’을 뜻하는 비하라(bihara 또는 wihara)로 쓰이고 있다. 부두르는 비하라의 어원과 달리 발리(Bali)어의 브두후르(beduhur)에서 차용하여 부두르로 변형되었으며, ‘위쪽’이라는 뜻이다. 이는 인도네시아 불교문화에 정통한 수타르노(Soetarno R.) 교수가 1986년에 출간한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고찰(古刹)(Aneka Candi Kuno di In-donesia)》에 나오는 각주 설명의 일부이다. 보로부두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위쪽의 절’ 또는 ‘윗동네의 절’이 된다.
보로부두르는 캄보디아 씨엠레아프(Siem Reap)의 앙코르 사원과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에 위치한 산치(Sanchi) 사원과 더불어 세계 3대 불탑(佛塔)으로 알려졌다. 기네스북은 2012년 오랜 논란 끝에 이들 세 사원 중에서 보로부두르를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위쪽의 절이나 윗동네의 절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큰 재 너머 대승원(大僧園)’으로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봐도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에 현존하는 세계 최대 불교 사원의 이름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세상의 많은 큰 불교사원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역발상(逆發想)에서 누군가가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언덕 위의 승방(僧房)’으로 작명해 놓았다. 이 또한 불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불자들의 최대 축일은 와이삭(Hari Raya Waisak)이라고 한다. 와이삭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둘 다 기초한 인도 달력 2월인 비사카(Visakha) 월의 보름날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석탄일을 음력 4월 8일(2017년은 5월 3일)로 정하고 있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비사카 월의 보름날을 축일로 삼고 있어서 2017년의 경우 5월 11일이다. 이날을 베삭(Vesak)이라 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어 발음의 편의에 따라 와이삭(Waisak)으로 불린다. 북방불교의 석탄일과는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과 성불과 열반이 모두 이날 하루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와이삭을 공식적인 국가 종교휴일로 채택하고 있다.
와이삭 축제는 매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에서 행해진다. 불자들은 축제에 앞서 보로부두르에서 약 7㎞ 거리에 위치한 문띨란(Muntilan) 마을의 믄듯(Mendut) 사원에 모여 봉축 불공을 드리고, 보로부두르까지 불경을 봉독하며 도보로 행진한다. 도보 행진 중간에 잠시 빠원(Pawon) 사원에 머무르는데, 믄듯과 빠원 사원을 거쳐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에 이르는 길은 일직선상에 있고, 옛날에는 돌벽돌을 깐 도보 순례길이 이들 세 사원을 연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도보 행진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로부두르에서 와이삭 축제가 벌어지면, 인근의 주민들과 많은 관광객이 운집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 행사가 비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관광 상품화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불교문화는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 그만큼 보로부두르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의 불교왕국 시대는 7세기 중엽 수마트라 중심의 스리비자야 왕국이 열었다. 같은 시기에 자바에도 스리비자야의 불교문화 영향이 전파되어 힌두왕국과 쟁패하면서 8세기 중엽 자바 동북부에서 사일렌드라(Sailendra)로 크게 발흥하였다. 이로써 수마트라와 자바에 불교문화가 만개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이때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축조되었다. 사일렌드라 왕조는 9세기 초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완공하였다. 산자야 힌두왕국과 결혼동맹으로 자바의 주도권이 산자야로 넘어가면서 보로부두르는 점차 사일렌드라 불교왕국과 불교도들의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1006년에 일어났다. 인근 머라삐(Merapi) 화산의 대폭발로 두 자바 왕국의 터전이 사라지면서 보로부두르 대탑사원도 화산재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는 반론도 있다. 사원 축조의 완성과 동시에 불교의 깊고 오묘한 뜻에 따라 인위적으로 덮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원 기초를 닦은 흙과 사원을 덮고 있는 흙이 화산재 말고도 사원 바닥과 같은 성분의 흙이라는 것이다.
800년 넘게 흙더미에 묻혀 있던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재등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 1781~1826) 덕분이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네시아가 유럽 정세의 변화로 잠시 영국의 통치하(1811~1816)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때 영국 총독으로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에 등장한 인물이 싱가포르의 설계자인 래플스 경이었다. 말레이어에 통달하고 말레이문화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그는 자바의 각종 고문서와 자료를 통해서 보로부두르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1814년 탐사에 착수하여 수개월 만에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보로부두르는 다시 네덜란드의 수중에 놓이면서 고초와 쇠락을 거듭하였다. 여러 차례 대륙부 동남아로 진출을 시도했던 네덜란드는 다수의 보로부두르 불상의 머리 부분을 절취하여 불교왕국인 태국의 왕에게 진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총 504기의 부처님이 모셔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의 불상 중 약 35%에 두상 부분이 없는 이유이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 1973년부터 10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 세계인들의 앞에 웅자(雄姿)를 드러내게 되었다. 1990년대 이래로 연간 250만 명이 방문하는 보로부두르는 1991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이적인 불교사원 보로부두르는 폭 124m의 정방형 위에 9층 건물 높이로 세워져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원래는 높이가 42m였으나 현재는 35.3m로 침하되어 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가로 세로가 각각 50㎝, 높이가 30㎝ 크기의 안산암(安山巖)과 화산암(火山巖)을 깎아 돌벽돌로 사용하였는데, 내부의 공간 없이 접착제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1만 4,165㎡에 달하는 면적 위에 100만 개가 넘는 돌벽돌 350만 톤을 완벽한 배수시설 위에 차곡차곡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쌓아 올렸다. 보로부두르를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사원을 중심으로 반경 30㎞ 이내에는 보로부두르 축조에 사용한 돌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로부두르에는 총 73기의 종탑 모형의 스투파(stupa)와 504기의 부처님이 있다. 필자가 보로부두르를 대탑사원으로 칭하는 연유이다. 이곳에는 4개 층에 거쳐서 5㎞에 달하는 회랑이 있고, 회랑 좌우 면에는 총 2,500개의 부조(浮彫)가 있다. 이 부조에 등장하는 인물은 1만 명이 넘는다. 거대한 조각 작품의 숲인 셈이다. 조각 중에는 항해 중인 대형 선박들이 많이 나온다. 사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이미 인도네시아 군도는 해상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 회랑을 따라 돌면서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종탑 모형의 스투파가 있고, 스투파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몸에 손을 대고 소원을 말하면, 언젠가는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이른 아침에 안개가 걷히기 전에 보아야 한다. 안개 속에 잠긴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면, 누구나 속세의 모든 허물이 정화되어 극락의 문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하나둘씩 조명이 켜지는 늦은 시간에 좀 멀리 떨어져서 보는 보로부두르도 장관이다. 내세를 확신하는 불자들은 보로부두르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5. 인도네시아와 주변 국가의 불교문화 개황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대 인구 대국으로 전체 인구 2억 5,300만 명(2016년)의 87%가 무슬림인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이다. 국토도 동남아의 적도 상에 1만 7,508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동서로 최대 6,000㎞, 남북으로 2,000㎞로 길고 넓게 분포되어 육지 면적만 192만㎢에 달한다. 세계 최대의 도서(島嶼) 대국이기도 한 이 나라의 내해(內海) 면적은 650만㎢로 육지 면적과 합치면 미국(984만㎢)과 엇비슷한 842만㎢가 된다.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공화제이며 종교적으로는 세속국가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등식이 적용되어 모든 국민은 국가가 보장하는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국가종교로 이슬람 이외에 힌두교와 불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나아가서 유교(儒敎)까지 보장하고 있다. 당연하게 국가 공휴일에 종교 축일이 가장 많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의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0.8%인 170만 명이 불교도로 나타났다. 2016년의 인구를 같은 백분율로 적용해도 불교도는 약 2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잠재적인 불교도는 이 수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2006년 2월 유도요노 대통령에 의해서 유교(儒敎)가 인도네시아의 여섯 번째 국가종교로 공인되면서 주민등록증(KTP)에 자신의 종교를 유교로 명시한 국민이 전체 인구의 약 4%에 달했다. 1,000만 명이 넘는 숫자다. 거의 모두가 중국계인 이들을 잠재적인 불교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하르토 정권 32년 동안, 군부의 반중(反中) · 반공(反共) 정책에 따라 이들은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냈다. 많은 숫자가 해외로 탈출하였고, 불교 사찰이 폐쇄되었으며, 한자 간판이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중국 문화를 상징한다 하여 붉은 글씨를 엄금하고, 촛불까지도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직도 이들이 선뜻 불교도로 나서기를 꺼리는 이유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중국계 국민에 대한 인식과 행정적 경계가 와히드(A, Wahid)와 메가와티(Megawati S.) 대통령 통치기를 거치면서 점차 우호적으로 변화하였다. 유도요노(S. B. Yudhoyono)는 자신의 통치 말기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문서에 중국(中國)은 띠옹꼭(Tiongkok)으로, 중화(中華)는 띠옹후아(Tionghua)를 사용한다는 대통령령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불교는 다양한 불교문화가 혼재되어 발전해왔다. 그 갈래를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고대 인도의 초기불교인 마하야나(Mahayana), 태국의 테라바다(Theravada), 일본의 선불교(禪佛敎), 뜨리다르마(Tridharma)라 칭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道敎)가 합쳐진 유불선교(儒佛仙敎),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건축했던 사일렌드라와 마쟈빠힛 왕조에서 번성했던 밀교 형태의 탄뜨라야나(Tantrayana) 등이다.
이 나라의 불교도는 대부분이 중국계이다. 이들은 수도 자카르타(Jakarta) 일원에 거주하거나, 수마트라 리아우(Riau) 주와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를 에워싸고 있는 리아우군도 주, 그리고 인근의 주석(朱錫) 산지인 방까벌리뚱(Bangka-Belitung) 두 섬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은 모두 전통적인 중계무역항 싱가포르항(港) 인근에 모여들었던 중국인 후예들의 군거지다. 비록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이슬람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자바(Jawa)족이나 발리(Bali) 동쪽 롬복(Lombok) 섬의 사삭(Sasak)족 중에 불교도가 발견된다. 이들의 불교는 중국계 후예들과는 차별적으로 과거 스리비자야 왕국의 불교적 전통이 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 글로독(Glodok)에 금덕원(金德院)이라는 큰 절이 있다. 다르마박티 사원(Wihara Dharma Bhakti)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와 공자를 같이 모신 서원(書院) 같은 사원이다. 이 사원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시대 초기인 1650년에 중국 남부 푸젠(福建) 사람들이 세웠다. 금덕원의 중국어 발음인 킴텍레(Kim Tek Le)라고 명명하고 고단한 이주노동자들의 안식처로 삼았다. 네덜란드는 오늘날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 건설을 위해서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주로 푸젠성 출신들이었다. 1740년 10월에 벌어진 앙케(Angke) 사건은 과다하게 집중된 중국인들에 놀란 네덜란드 VOC정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대량학살이었다. 만 명의 중국인들이 희생되었고, 킴텍레(金德院) 사원도 이때 소실되었다. 초기 불상들이 잿더미 속에 남아 있었고, 생존한 중국인 후예들이 그 후 계속된 정치적 격변의 인위적 재앙 속에서도 금덕원은 재건과 복원을 거듭하였다. 이곳에는 1825년에 제작된 범종이 남아 있어서 오늘도 먼 곳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믈라유족 이외에도 중국계와 인도계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공존하는 나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100년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하면서 신생 독립국가에서 정권을 책임지게 된 믈라유계 지도자들은 중국계와 인도계 주민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하였다. 이들 중국계와 인도계 주민은 영국 식민통치 시기인 20세기 초부터 중반 이전에 말레이반도로 대거 유입되었다. 주석광산에서 일한 중국계는 무역과 금융, 상업과 유통 쪽으로 발판을 굳혔고, 고무농장으로 몰려들었던 인도계는 점차 사회 직능분야로 파고들었다. 기관차 운전기사 등 특정 기술 분야와 의사, 변호사, 건축설계사, 회계사, 보석감정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여 종족 분규에 휘말리지 않을 독자적인 분야로 진출하였다. 인도계 주민들이 주로 맡아 하는 환전상(換錢商) 같은 소시민 금융업이나 점성술사 같은 직업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태국 다음으로 전체 인구 대비 중국계 주민이 많은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중국계 정당이 있고 믈라유계와 인도계와 더불어 거대한 연립여당을 형성하고 있다. 2010년 인구센서스에에 따르면 전체 인구 2,833만 명의 23.4%인 663만 명이 중국계였다. 2017년 추계도 나와 있는데, 전체 인구 3,130만 명에 같은 비율을 적용하면, 73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주로 삐낭(Penang),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 조호르(Johor), 뻬락(Perak), 슬랑오(Selangor), 사라와크(Sarawak) 등에 군거한다. 쿠알라룸푸르와 슬랑오는 금융 중심지이며, 삐낭과 조호르는 무역항이고, 뻬락과 사라와크는 광업(鑛業) 중심지다.
불교는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교 다음으로 비중이 큰 종교이다. 주로 중국계 국민이 불교를 믿는다. 불교도의 분포를 나타내는 다양한 수치가 있는데, 약 20%를 중심으로 적게는 19.2%부터 19.8%까지, 많게는 21.6% 등, 여러 통계가 있다. 2017년 인구(공식 추계) 3,130만 중 약 23%가 중국계인데, 전체 인구의 20% 정도가 불교도인 셈이다. 중국계 중에도 당연하게 비불교도가 있듯이, 이 나라의 불교도에는 소수의 태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을 비롯하여, 스리랑카계와 미얀마계도 포함되어 있다.
다종족국가인 말레이시아는 정치적으로 짜 맞춘 종족 간의 화합구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종족 문제나 종교 문제를 깊게 다루는 조사나 연구를 법률로 금하고 있다. 대부분의 세밀한 통계는 외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면 된다. 2017년 추계를 다룬 최근 통계에는 50.1%가 믈라유족, 22.6%가 중국계, 11.8%가 원주민, 6.7%가 인도계, 그리고 기타 종족이 8.8%로 나타나 있다. 이 중에서 원주민들(주로 사바의 카다쟌족과 사라와크의 이반족)은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서 믈라유계 국민의 숫자를 늘리는 데 활용되었다. 종교 분포로는 61.3%가 이슬람, 19.8%가 불교, 9.2%가 기독교, 6.2%가 힌두교, 그리고 나머지 3.4%가 토속신앙 등 여타의 종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계 국민이 주로 신봉하는 이 나라의 불교는 중국의 도교(道敎)와 원시불교인 마하야나가 혼합된 형태이다. 중국계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삐낭 섬에 켁록시(Kek Lok Si)라는 사원이 있다. 극락사(極樂寺)다. 웅장하고 세밀함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켁록시는 동남아를 대표하는 불교 사찰 중 하나인데, 1890년에 시작하여 1905년까지 축조하였고, 다시 1930년까지 보완하였다. 이 사원은 초기 말레이반도로 건너오기 시작한 객가(客家) 출신 기업인들이 만들었다. 객가 사람 중에는 독실한 불교도이자 말레이시아의 저명한 기업인 겸 정치가로 탄쳉록(Tun Dato’ Sir Tan Cheng Lock, 1883~1960)이 있다. 우리말 표기 한자로는 진정록(陳禎祿)인데, 그는 오늘날의 말레이시아가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던 1949년 말레이중국인협회(MCA: Malayan Chinese Association)를 결성했다. 그리고 말레이계 지도자들과 끈질긴 협상을 통하여 종족 간의 정치적 대타협을 이루어내어 다민족국가를 위하여 화합과 융화를 추구한다는 최선의 차선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싱가포르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중국인의 나라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지난 1970년대 이래로 계속해서 종족 구분을 하지 않고 정치적 · 사회적 통합을 국가 목표로 규정해 왔다. 그래서 특정 종족성을 나타내지 않고 모든 싱가포르 국적자를 싱가포르인(Singaporean)이라고 부른다.
1970년에 207만 명이던 싱가포르 인구는 1980년에 241만, 1990년에 305만 명에 달했고, 2010년에 5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2016년 공식 통계로 561만 명에 이를 만큼 증가 속도가 놀랍다. 동남아의 강소국 싱가포르는 2025년까지 650만의 인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 나라의 정치적 안정과 꾸준한 발전상에 힘입어 투자이민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2010년 이후의 인구 증가 추세는 가파르지 않다. 홍콩 등지의 중국인 고액 투자자를 선호하던 정부가 ‘젊은 두뇌’의 유치로 이민정책을 선회한 까닭이다. 한 · 중 · 일 등 동아시아 주요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등 이웃 아세안 강대국을 주요 타깃으로 싱가포르 유학을 장려하고 이들을 이민 권유 대상자들로 삼는다는 것이다. 2016년 싱가포르 국민의 평균 연령은 40세인데, 이를 상한선으로 보고 젊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싱가포르인으로 리크루트하는 데 정부가 적극 나서고 있다.
섬나라 싱가포르 국토 면적의 변화를 보면, 인구 증가 추이 못지않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965년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분리 독립할 때 581.5㎢였던 국토가 2016년 공식 통계에 의하면 719.1㎢로 무려 138㎢나 확대된 것이다. 국토가 4분의 1가량 확장된 것인데, 매년 엄청난 국력을 동원하여 해안 매립을 계속해온 결과다. 그것도 주변 국가들과의 마찰과 갈등과 질시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해안 매립 공사에 필수적인 모래와 자갈을 공급해 온 인도네시아 측은 싱가포르가 인도네시아의 국토를 훼손한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싱가포르의 종족 분포는 2016년 통계로 전체 인구 561만 명 중 중국인이 74.1%, 말레이계 13.4%, 인도계 9.2% 순이다. 여타의 소수종족은 유럽인과 중앙아시아인 등 3.3%에 불과하다. 중국계가 대종을 이루듯이 같은 해의 종교 분포 통계도 중국계의 중심 종교인 불교가 33%로 으뜸이며, 불교도는 185만 명에 달한다. 기독교가 18.8%, 이슬람이 14%, 도교나 중국 토속신앙이 11%, 힌두교가 5% 순이다. 다종족국가를 상징하듯 기타 소수 종교(무신교 포함)가 18.2%나 된다. 1987년 인구센서스에서도 전체 인구 278만 명 중 33.9%인 94만 3,400명이 불교도로 나타났다.
싱가포르의 불교는 2,500년 전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는 초기불교로부터 중국계 세계 이민들과 함께 들어온 전 세계의 다양한 현대 불교까지 혼재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에는 수많은 불교 종단과 불교 재단이 발견된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으로 부처님의 치아를 모셨다는 치안혹켕(Thian Hock Keng, 佛牙寺)이 있다. 1839년에 짓기 시작하여 1842년에 완공되었는데, 성공한 푸젠(福建)성 출신 기업인들이 당시 국제화폐였던 스페인달러로 3만 달러를 모아 축조하였다. 모든 건축 자재를 중국 본토에서 실어왔으며, 못을 단 한 개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싱가포르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바닷길을 지켜준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를 기려서 치안혹켕을 헌정했다. 또 다른 사원으로 진롱시(Jin Long Si, 金龍寺)도 유명하다. 1941년 싱가포르를 기점으로 성공한 여러 지역 출신의 중국 기업인들이 세웠다. 이곳에는 19세기에 스리랑카로부터 싱가포르로 옮겨 심은 보리수가 청청하게 서 있는데, 밑동의 둘레가 8.5m나 되고 높이가 30m에 이른다.
브루나이
세계 최고(最古)의 이슬람왕국이 브루나이(Negara Brunei Daru-ssalam)다. 9세기 초엽에 브루나이 강(江)어귀에 포니(Po-ni) 왕국이 등장했는데, 브루나이 왕국의 전신으로 생각된다. 브루나이의 번영은 12세기 초반 이슬람을 수용하고 동서를 잇는 바닷길 국제교역에 적극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이 나라의 전성기에는 바타비아-브루나이-마닐라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수많은 중계 무역상이 브루나이로 모여들었다. 이 나라는 한동안 오늘날의 사바(sava)와 사라와크를 비롯하여 술루(Sulu) 열도로부터 필리핀 북부 마닐라까지,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령 반자르마신(Banja-rmasin)까지 통치권을 행사한 대왕국이었다. 1658년 왕실의 대정변이 있고 난 뒤부터 브루나이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1888년부터 1984년까지 영국 보호령으로 있다가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였다.
오늘날에는 석유 부국으로 동남아의 강소국이자 절대왕권이 확립된 이슬람왕국이다. 브루나이의 국토 면적은 5,270㎢로 제주도의 세 배쯤 된다. 인구는 2016년 현재 43만 명이며, 평균 수명은 31세로 나와 있다. 이 나라의 모든 통계수치는 법률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중앙에서 관리한다. 국가자산과 정부재정 문제를 비롯하여 국가안보와 사회적 안정을 해칠 수 있는 모든 통계치가 이에 해당한다. 이슬람에 관한 문제나 여타의 종교와 종족 문제도 이 범주 안에 든다. 2014년 통계로 이 나라 국민의 67%는 이슬람, 13%는 불교, 10%는 기독교, 나머지 10%는 토착종교를 믿는다는 자료가 있다.
이 나라에는 술탄왕국의 폭넓은 시혜(소득세가 없고, 의료와 교육을 국가가 책임진다)를 누릴 수 없는 비시민권자들이 많다. 주로 브리티시 패스포트를 소지한 중국계들이다.
브루나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엄격한 이슬람 율법 샤리아(Shariah)를 시행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모든 교육기관에서 이슬람 교육을 강조하고, 여타 종교에 대해서는 포교 행위와 교리에 관한 사소한 홍보도 불용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내 · 외국인을 막론하고 샤리아로 다스린다. 이 나라의 형식적인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신념의 자유’로 해석되며, 이슬람 이외의 종교 행위는 매우 조심스럽다.
무갈(Mughal) 건축양식과 믈라유 전통양식이 조화롭게 배합된 이슬람 궁전 술탄오마르알리사이푸딘(Sultan Omar Ali Saifuddin)이 1958년에 완공되었는데, 아태 지역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사원으로 꼽힌다. 부유한 왕국답게 모든 이슬람사원은 아름답고 정갈하다. 불교사원도 한 곳이 있다. 수도인 반다르스리베가완(Bandar Sri Begawan)에 100년 전인 1918년에 세워진 텡윤(Teng Yun, 登云殿)이라는 이름의 작은 불교사원이다. ■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한국외대 졸업, 인도네시아 가쟈마다대학교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말레이 · 인도네시아어과 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인도네시아사》 《작은 며느리의 나라, 인도네시아》 Budaya Spirit dan Politik Korea(한국의 정신문화와 정치) 등과 공저로 《바다의 실크로드》 《동남아의 이슬람》 등이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 가쟈마다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