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시에 있는 전통사찰, 아직 3곳이 남았다. 홍룡사와 원효암은 예전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산막공단 안으로 들어와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나는 왜 이곳에 홍룡사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원효사'가 있다. 원효사는 마애불을 관리하고 있다.
원효가 처음으로 수행한 암굴이 있다는 설명문엔 고개를 갸우둥하였다.
마애불은 많이 마모가 되어 있다.
홍룡사, 원효암을 들렸지만 계원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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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룡사에는 문화재가 없지만 관음전 옆에서 떨어지는 홍류폭포는 장관이다. 양산 제8경이다.
내가 원효였어도 홍류폭포 주위에 암굴을 파고 수행했을 테다.
원효암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걷기로 했다. 1.6km나 1.8km 되겠다.
수행삼아 이 길을 걸었을 원효를 생각하지만 나는 원효에 대해 아는 것은 단편이다. 원효의 삶을 다시 배워야겠다.
어둠 속 심한 갈증, 손에 잡힌 바가지에 물이 있어 벌컹벌컹 들이켰다. 속까지 시원함을 느꼈을 테다.
햇빛이 들어온 새벽, 자신이 마신 물은 해골에 담겨진 물이었다. 구토가 날만도 하였겠다.
의상은 중국으로 향했지만 원효는 돌아섰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인식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 인식을 바꾸면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장 씨 성을 가진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고기 반찬이다.
맛 있다고 권하는 친구와 그의 가족들, 맛이 있었다. 고소한 느낌이었다.
저녁을 물리고 친구는 내가 먹은 게 쥐고기라 했다. 구역질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도 알고는 먹을 수 없다.
마음에 있다.
마음이 인식하고 있기에 구별을 하는 것이다. 이 구별하는 마음을 지울 수 있다면 세상에 못 먹을 고기도 물도 없다.
홍룡사에 오기 전에 내 착각으로 원효사를 갔다. 여기에 원효사가 있는 줄 몰랐다. 산막리를 지나 호계리, 산 중에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인 마애불이 있는 곳이다. 반고굴이라고 이 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원효가 최초로 암굴을 짓고 수행한 곳이라고. 확인이 필요하다.
천성산을 의지하고 있는 절들은 거의 원효와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천성산은 원효의 세계이다.
원효, 그 부모는 누구였을까?
요석공주와 부부연은 사실일까? 아니, 요석공주가 실제 있었을까?
오이를 먹거나 참외를 먹고 아이를 임신, 출생한 아이를 동리 밖에 버렸다.
학이나 비들기가 생명을 보호하고있는 것을 본 아이의 어머니가 거둬서 키웠다.
총명한 그는 일찍 출가하여 훗날 큰 스님이 되었다. 도선과 국일의 이야기이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과 같다. 남자를 모르는 어미가 아이를 출산하였다. 이를 어땋게 해석할까?
신라시대는 지금과 같은 윤리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처녀가 동네 남정네와 눈이 맞아서 또는 겁간을 당해서 임신하고 출산하였을 수도 있다.
애비를 모르는 자식, 그 자식을 키울 수 없어 동구 밖에 버렸다. 그런데 2~3일이 지났지만 죽지않고 살아 울기에 데려다 키웠다. 먹고 살기 어려우니 어릴 때 절에 보냈다. 나는 이렇게 느끼고 받아 들인다.
불교의 계도 발전했을 것이다. 신라시대 모든 승려가 미혼은 아니였을 것이다. 대처승이 가능했을 것이다.
원효는 공주가 아닌 여인네와 살림을 살았을 것이다. 그 아들이 설총이다.
원효처럼 대선사는 각색이 필요하다. 후세 후학이 윤색을 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원효암에 가까이 왔다.
이런 곳이라면 원효가 수행처 삼을만 하다. 산경이 멋진 곳이다.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법당을 청소하는 보살 인물이 반반하며 육덕이 찰지게 생겼다. 상하가 반반이라 엉덩이가 크고 얼굴엔 엷은 색기마저 있다.
방아을 찧는다면 옹녀가 울겠다. 이런 욕정, 원효도 가졌을까?
6시, 관광객이 없는 홍룡사이다.
물소리와 풀벌레소리.
대웅전 붉그스레한 불빛이 귀향하라고 권하는 것 같다. 평온함이 내 손가락 끝에서 논다.
가라고 내쫓는 중이 없으니 더 머물다 가야겠다.
2021년 10월 2일 저녁 홍룡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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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호계리 마애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 경남 양산시 호계리 / 원효사
천성산 홍룡사(千聖山虹龍寺) / 전통사찰
- 경남 양산시 상북면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중국의 승려 1,000명에게 천성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할 때 창건한 사찰이라 전한다.
절 옆에 있는 폭포는 승려들이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듣던 목욕터였다고 하며,
창건 당시에는 낙수사(落水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 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의 승려 법화(法華)가 중창하였고,
1970년대 말에 부임한 주지 우광(愚光)이 꾸준히 중건 및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옆에 있는 홍룡폭포는 높이 14m인 제1폭과 10m인 제2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하늘의 사자인 천룡이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다음-한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발췌, 문구 수정함.)
천성산은 원효의 세상이다.
천성산은 원효산이었다. 천성산에 화엄을 설법한 화엄벌도 있다.
천성산을 의지하는 절들은 대다수와 원효와 인연을 말하고 있다.
천성산에서 멀지 않는 곳에 불광산이 있고 거기에 척판암이 있다.
척판암의 전설을 가진 곳이 대한민국에 여러 곳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홍룡사는 10여 년만인 것 같다.
추석 저녁에 장모, 처, 딸과 아들 등과 홍룡사에 바람 쐬러왔다.
30분이면 화엄벌에 간다는 내 말에 준비없이 야간산행을 하였다. 적어도 1시간 30분은 걸리는 곳이다.
보름달, 화엄벌은 황홀하였다. 아이들과 처, 장모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였다.
홍룡사는 조금 변하였다. 일주문과 주차장이 눈에 띈다.
대웅전과 무설전, 관음전, 산신각, 가홍정 등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일주문
가홍정
홍류폭포 제2폭
산신각
대웅전
지장보상,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무설전
천수천안관음상
무설전에서 내려다 본 대웅전, 배롱나무 꽃이 필 때는 화려하겠다.
종각
요사채
당대 유명 서화가인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이다.
홍룡폭포 앞에 있는 관음상.
관음전과 홍룡폭포 제1폭, 양산 제8경이다.
홍룡사에서 원효암까지 1.6km, 원효암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나는 걷기로 하였다.
홍룡사 야경
천성산 원효암 / 전통사찰
홍룡사에서 원효암까지는 계속 오르막이지만 내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
누군가의 정성이 탑이 되었다.
화엄벌로 가는 삼거리, 이 길을 걸으면 10여 년 전 나의 무모함에 실소를 했다.
원효암이 보인다.
종각
대웅전
대웅전 앞에서 본 산경, 금정산과 오봉산, 무척산 등이 보인다.
천성산 정상을 찍고 원효암을 걸쳐서 낙동정맥은 계속 남으로 향한다.
석조 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430호
지장보살, 약사여래, 관음보살
닫집이 화려하다. 내원궁 도솔천.
대웅전 외벽은 원효에 관한 그림이다.
의상과 중국으로 가기 전, 충남 어느 산골에서 해골에 든 물을 마셨다. 일체유심조~!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민중들에게 춤과 노래로 불법을 전했다.
세존의 명호만 읊어도 극락왕생한다고 민초들을 위로하였다. 그래서 원효가 위대한 것이다.
중국 승려 천 명을 구했다는 전설, 척판암.
천 명의 승려에게 설법하는 원효.
마애 아미타삼존불입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1호
보수 작업 중이다. 이번 달 말이면 끝난다. 선명한 마애불을 볼 수 있겠다.
종각 옆에 있는 비석이다.
내용은 근래 일어난 일을 적어놓았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약사전 가는 길.
약사전
번개가 약사여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저 바위, 약사여래가 보이는가? 불심을 가진 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다.
요사채
사성각
목각 탱화다.
의상대사(우)와 원효대사 초상
사성각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밖에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자연 동굴에 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백운산 계원사 / 전통사찰
- 경남 양산시 중부동
구전에 따르면 가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가 1924년에 중건된 것으로 파악된다.
2003년에 요사채 옆의 절개지 작업 도중 신라시대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출토된 7점의 완형 토기들은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음-대한민국구석구석 발췌)
계원사(계원암)은 차로 갈 수 없다. 내비를 이용하면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지금은 졸음 쉼터, 예전엔 시외버스정류장이었다. 졸음 쉼터에 주차하고 걸어갈 수 있으나 나가는 문이 없다.
통로를 막은 것이다.
양산 중부동에 주차하고 걸어야 한다. 1km 이내이니까 어렵지 않다.
가야시대 창건하였다는 위 글은 생각할 여지가 많다.
중부동 고분군을 가보지는 않았다.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겠다. 무덤과 이 절 터와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신라시대 기와가 나왔다고 그 시기로 창건을 끌어올리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빼도 박을 수도 없는 유물이 나왔다면 모를까.
양산은 신라시대 삽량주였으니 이 지역 호족의 원찰로써 절이 존재했을 수도 있겠다.
신호등을 건너 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지나면 된다.
'중부동고분군, 북부동산성 700m'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일주문도 없다. 사천왕문이나 금강문, 보제루 등도 없다. 단촐한 사찰이다.
산 속에 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앞에 있어 차 소리로 시끄럽다.
작은 연못
양산시내
양산시내, 석계 방향, 멀리 영축산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