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도와의 인연외 1편
김인술
1970년대 필자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일이다. 외진 낙도에 사는 사람들을 돕자는 운동이 일고 있을 때였다.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외딴섬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동포들을 위해 그들보다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사는 육지 사람들이 돕자는 차원의 운동이었을 것이다.
낙도에 물품을 보내주기도 하고 섬 학교 어린이들을 초청하여 서울을 견학시켜주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고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런 선행은 보는 이들에게 흐뭇한 마음을 선사했다. 당시 필자가 학생회장이었던 우리 학교에서도 학생회에서 낙도 어린이를 돕는 차원에서 어린이신문을 보내기 위해 모금이 결의되어 전교생이 참여하는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때 어린이 신문 5부씩을 10여 개 섬에 1년간 보내줄 수 있는 기금이 모였다. 이 기금을 신문사에 기탁하고 정기구독을 의뢰했었다.
당시 학생회장직을 수행하며 낙도와 인연을 맺어 신문을 보내주는 과정에서 경기도 옹진군 대청도에 있는 선진포국민학교의 어린 초등학생들과 5학년 담임 김호진 선생님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아 전체 조회 시간에 소개하고 게시판에 붙여놓기도 했다. 학우들이 정성을 모아 보낸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졸업하고 얼마 후 직장생활을 할 때 우연히 당시 받았던 답례 편지와 스크랩해 두었던 신문기사를 책상을 정리하다 발견하고 옛일을 회상하며 읽게 되었다. 그때 신문 기사에 앞으로도 계속 이런 운동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한 기사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졸업한 후이고 후배들이 이 운동을 이었어야 했는데 잇지 못하고 1회성으로 끝남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형 오빠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게 되어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처럼 여러 학교에는 보내주지 못하더라도 답례 편지를 받은 대청도 선진포국민학교 한 군데 만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도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기에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사회 초년생 봉급쟁이로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장으로서 가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봉급은 전액 어머님께 생활비로 드리고 용돈으로 봉급의 10% 정도를 받아쓸 때였다. 당시 봉급이 3만 원 정도였으니까 용돈은 3천 원으로 한정돼 있었다. 이 용돈 범위 내에서 보내야 하는데 한 달간 교통비며 담배 등 용돈도 빠듯한 액수였다.
당시는 사회나 직장 분위기가 대부분 담배를 피우는 추세라 나만 안 피우면 꽁생원 같은 취급을 받는 분위기여서 담배를 끊기도 쉽지는 않았다. 당시 필자는 골초는 아니었고 2~3일에 한 갑 정도 사교용으로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때 느낌으로는 하얀 와이셔츠 주머니에은하수나한산도담뱃갑이 보이면 아주 멋있어 보여 필자도 항상 넣고 다닌 기억이 난다. 낙도에 신문을 보내려면 결국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신문값을 알아보니 당시 1부에 300원 정도 했고 5부 정도를 보내려면 약 1,500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다. 한 달 담배 값을 계산해 보니 3일에 한 갑만 계산했을 때 당시 담배 한 갑이 200원 정도 했으니까 약 2,000원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뱃값만 아끼면 낙도 어린들에게 어린이신문 5부는 보낼 수 있었고 그러고도 500원 정도 남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담배 연기로 사라지는 돈만 절약하면 낙도 어린들이 매일 기쁜 마음으로 신문을 받아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학생회장시절 신문사 인터뷰에서 이런 일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포부도 밝혔었는데 당시 1년 정도 보내주는 1회 성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당시 답례 편지를 보내준 선진포국민학교라도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당시 선진포국민학교는 낙도 오지라서 한 학년이 15명 내외 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다. 1학년은 신문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2~6학년까지 한 반에 1부씩 받아 볼 수 있도록 5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소년조선일보를 방문해서 매달 선불 하기로 예약하고 신문을 보내기 시작했고, 낙도에서 고생하시는 선생님들께는 샘터 잡지 1부를 정기구독해서 김호진 선생님 앞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해가 거듭되면서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고맙다는 편지를 수 차례 받았고 방학 때면 김호진 선생님과 인천에서 만나기도 했다. 인연이 깊어지면서 낙도 어린이들을 서울에 초청하는 행사도 가졌다. KBS 방송국을 비롯해 국회, 어린이 대공원 등을 견학하고 숙박은 집에서 시켰다. 그 당시 필자는 중동을 드나들며 일찍 기반을 잡아 자그마한 4층 건물을 가질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때 대청도에서 잡은 아주 큰 홍어를 선물로 가져와 가족들이 포식했던 기억도 난다.
초청이 제의가 여러 번 있어 한 번 가보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배가 1주일에 1편밖에 없어 최소한 일주일 휴가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하면서 1주일씩 휴가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외국에서 1년여 근무하고 1달 휴가 기간일 때 방문 기회가 주어졌다. 미리 방문을 통보하고 인천항에 여객선을 타러 갔었다. 배를 처음 타보는 터라 서울에서 일찍 간다고 갔지만 수속 밟을 시간이 부족해 간발의 차이로 배를 못 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필자는 배를 타본 경험이 없어 버스처럼 표를 끊어 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 큰 여유 시간 없이 도착했다. 큰 오산이었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섬이라 보완 검색이 철저했고 수속 시간이 많이 걸려 출항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너무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얼마나 벼르고 별렀던 방문인데 떠나는 배를 발을 동동 구르며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도 속상하고 아쉬워서 연안부두 파출소에 들러 사연을 얘기했더니 해양경찰들이 쾌속정이라도 불러 배에 승선시켜 주려 무전을 쳐주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 결국 방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기증하기 위해 선물로 준비한 시계는 인천 해안파출소에 기증하기로 했다. 비록 성사는 안 되었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이해하고 쾌속정이라도 불러 승선시켜주려 했던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시계는 그곳 연안부두 파출소 벽에서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한 사연을 안고 연안부두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으리라!
그 뒤 인천 연안부두 싸이로 건설을 우리 회사에서 수주해 건설하게 되었는데 현장 파견근무를 자원했다. 이는 이루지 못한 낙도 방문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여름휴가를 이용해 대청도를 방문하려면 연안부두 가까이에 근무하면서 배편을 알아보는 것이 용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정기여객선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도 해양 일기가 좋지 않으면 수시로 바뀌는 상황이라 향후 일기예보를 보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상대로 파견 근무하던 해 여름휴가를 이용해 대청도 선친포국민학교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신문을 처음 보낼 당시 고등학교 담임이셨던 이덕근 선생님은 고향이 황해도이신데 생전에 바다 건너 서라도 고향을 한번 보고 싶다 하셔서 사모님을 모시고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인천에서 공해상을 돌아 대청도까지 10시간 이상 배를 타고 도착한 것으로 기억한다.
방문 소식을 듣고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방문 인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밤에는 학부형들께서 대청도에서 자신들이 잡은 홍어로 홍어회, 홍어탕, 홍어찜 등 풍성한 요리로 선생님들과 함께 큰 대접을 받으며 밤늦도록 즐겁게 어울린 생각이 난다.
다음날 차가 없는 섬에서 면장님의 유일한 관용차를 내주시어 섬을 일주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관용차를 운전하던 운전기사가 신문을 받아본 국민학생이 자라서 면사무소에서 공익근무를 하던 때여서 차 안에서 신문을 받아보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대청도를 일주하고 돌아와 다음날은 백령도에도 들어가 심청전 소설 속 인당수를 관광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또한 김호진 선생님은 낙도 근무를 천직으로 생각한다며 낙도 지킴이를 자처해 숙연해지기도 했다. 지금은 정년을 하셨을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렇게 시작된 낙도와의 인연은 20여 년간 이어질 수 있었다.
비 상 금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종이로 만든 지갑에 비상금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10원도 초등(국민)학생에게는 그리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동전 1원짜리와 5원짜리가 있던 때였으니까 지폐 10원은 꽤 가치가 있던 때였다. 지금의 1만 원보다 가치가 더 있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지만 자신을 지키는 돈은 꼭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비상금 소지를 당부했다. 철없는 때라 돈이 있으면 군것질을 하거나 쓸데없는데 쓸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거의 비상금이라는 것을 모를 때였다. 필자는 어머니의 배려로 비상금을 일찍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상금을 꼭 써야만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도 모르게...
6학년 어린이날로 기억한다. 우리 반에서 집이 멀어 유일하게 자전거로 통학을 하는 문병천이란 친구가 있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지만 지금도 이름을 기억한다. 자전거를 배운지 얼마 안 되어 자전거만 보면 타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집에 남자 어른이 없으니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어 집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손님이 있으면 사정하여 한 번씩 타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이 타는 자전거는 페달에 발이 닿지 않아 가래로 타거나 어른처럼 정상적으로 위로 타려면 불안한 자세에서 탈 수밖에 없다. 옆에서 가래로 타다가 겨우 정상으로 위로 타기 시작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 운전을 배우고 운전면허를 취득 후 운전을 할 때보다 열 배는 더 기뻤던 것 같다.
나는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어 친구에게 사정하여 자전거를 빌리고 들뜬 기분으로 내 짝궁 친구에게 위로 타는 실력도 보여 줄 겸 점심시간에 친구를 뒤에 태우고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다음 학교 밖으로 나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개울에 있는 다리를 지나 약간 경사가 있는 비탈길에서 탄력을 잃고 쓰러지면서 자전거와 함께 냇가에 처박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뒤에 탔던 친구는 내 등을 덮쳤고 나는 가슴을 자전거 핸들 돌출 부위에 심하게 부디 쳤다. 앗! 비명과 함께 한동안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전거는 물속에 빠져 있고 친구와 나는 물속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부상이 없었다. 나는 가슴을 심하게 다친 것도 잊고 남의 자전거 부서 지지나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정신을 차리고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물속에서 꺼내 보니 앞바퀴와 핸들이 휘어 있었다. 상당히 큰 충격이 가해졌던 모양이다.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수리점에 맡기고 수리비를 물어보니 30원 정도 한다고 했다. 일단 수리를 맡기고 학교에 돌아와 빌려준 친구한테 경위를 설명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수리를 맡겼으니 하교 때까지는 고쳐 타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문제는 수리비였다.
그때 번뜩 평소에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는 비상금이 떠올랐다. 아마도 30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솔직히 얘기하고 집에 지원 요청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생각으로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고 또 야단맞을 일과 어린 마음이지만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말씀드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비상금을 쓰기로 결정했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비상금으로 자전거를 수리하여 빌려준 친구는 무난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사고 때 다친 가슴의 통증이 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많이 부어있었다. 양호실에서 소독하고 약은 발랐지만 점점 통증이 심해져 오는데 집에는 가야하고 어머니가 눈치를 채시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좀 어두워져서야 집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이리저리 어머니 눈치를 피해 세월이 지나고 상처는 나았지만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상처 자국이 남아 있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고 상처가 다 나아갈 무렵 분위기에 맞춰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비상금을 긴요하게 썼다는 얘기도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놀라시면서도 아들의 건재함을 보시고 다행으로 생각하시는 눈치셨다. 큰 꾸지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는 충고만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비상금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지갑에 비상금이 없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어머니는 자신 호주머니에는 비상금이 없을지언정 아들 지갑에는 비상금이 떨어지지 않게 배려해 주셨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땐 잡부금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을 담임선생님 책임하에 반장 등이 현금으로 걷었다. 마감일까지 내지 못하는 경우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몇몇 내지 못한 친구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에게 빌리려 사정해 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대부분 통학하는 버스 차비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빌리려다 마지막에 나한테 조심스럽게 부탁해온다. 친구들이 필자를 대하기 좀 어려워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본인이 먼저 언제까지 갚겠다며 정중하게 부탁해오면 두말없이 비상금에서 빌려주곤 했다. 이런 사정을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느꼈을 것이다.
이는 대인관계에서 신뢰의 바탕이 된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언제라도 손을 내밀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로 자리매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빌려 간 친구들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었기 때문에 한 번도 갚으라는 독촉을 해본 적이 없다. 이는 정말 어려울 때 어렵게 부탁해 빌린 것이기 때문에 빌린 친구도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에 뜻이 있어 사전 준비를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이는 우수반 반장을 해야 학생회장 후보 인지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꼭 반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께서 우선 임시 반장을 지명하고 한 달쯤 지나 서로 얼굴을 익힌 다음 반장을 뽑자는 제안을 하시고 한 친구를 임시 반장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3월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정식 선출방식을 택하지 않고 임시 반장이 그대로 반장을 하면 어떻겠냐는 뜻을 종례 시간에 비치셨다. 누가 얘기를 안 하면 그렇게 결정될 것 같았다. 당시는 담임선생님의 뜻을 거스르기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종례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해 가지고 있는 포부를 밝히고 제가 억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정식으로 급우들의 의사를 물어 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해야 전체를 통솔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주셨고 다음 날 종례 때 담임선생님 입회하에 구두 추천을 받아 무기명 비밀 투표로 하기로 했다. 총 4명의 후보가 추천되었고 그 네 명 중 필자도 거명되었다. 방식은 네 명 중 한 명의 이름을 써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담임 선생님 주관하에 개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우리 반 60명 전원이 투표한 결과 필자 표가 46표가 나왔다. 그리고 3명이 14표를 비슷하게 나누어 간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76.67%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학생회장으로 가는 첫 관문을 통과했고 그해 가을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엇이 친구들로부터 그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어려운 형편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환심을 살 수 있는 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필자의 행동이 무언의 신뢰를 주지않았나 생각한다. 그중에 비상금의 활용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대인관계에서도 식사비나 찻값을 내가 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비상금이 있어야 했다.
필자 어머님은 한 가지 지론이 있으셨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다 보면 예정에 없이 빵집이나 짜장면집을 갈 수 있는데 내 호주머니에 그 값을 치를 비상금이 있으면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마음 편히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누가 못 낼 상황이 되면 네가 내라는 것이 어머니 소신이시다. 이는 어렵지만 아들이 돈 몇 푼 때문에 눈치 보고 비굴하게 처신하지 말라는 배려 이셨다. 그래서 비상금이 필요하다는 지론이시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필자가 성장해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어머니의 영향받아 필자는 아내의 비상금을 배려해 주었다. 시어머님 모시고 살면서 말 못 할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혼 초 첫아들을 낳고 1년간 해외 파견근무를 떠날 때 아내의 손에 내가 가졌던 거의 모든 비상금을 아내에게 내어주고 갔다. 나는 현지에서 가불을 해서라도 쓸 수 있지만 당시 어머님이 살림을 주관하실 때라 아내는 실권이 없었다. 생활비를 타서 쓸 형편이라 비상금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가끔 아내는 그때의 고마움을 표현할 때가 있다. 이런 것에서 부부간의 신뢰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반드시 비상금 소지를 생활화하게 했고 불시에 비상금을 점검하기도 했다. 비상금은 용돈과 별개의 개념이다. 비상금은 있어도 없는 돈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려서 철이 없을 적 비상금을 용돈으로 착각해 써버리고 비상금 점검 시 적발이 될 때면 반드시 벌을 가해서라도 비상금의 의미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조금 커서는 만약 납치나 유괴되어 탈출하려 해도 비상금이 있어야 택시라도 타고 도망칠 수 있다는 가상상황을 예로 들어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지금은 카드사용이 일상화되어 굳이 비상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얼마 정도의 현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지금도 습관적으로 지갑에는 비상금을 넣어 다닌다. 비상금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돈이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