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친구 돌뿌리 김석근이 의 연락으로
경기도 "안양 산죽회" 일동이 경주 남산 문화재 답사를
오신다고 하여 포석으로 나갔다.
차량 두대에 70명 이상 정도의 많은 인원이 오신데 대해
어떻게 안내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당 하는데로 성심껏
안내 하기로 했다.
행선지는
용장리 - 설잠교- 용장사지- 삼륜대좌불-마애여래좌상 -삼층석탑
-연화대-비파골-금오봉정상-상사바위-바둑바위
-마애석가여래(큰바위부처님)-상선암-삼릉계석불좌상-선각여래좌상
-선각 육존불- 마애관음보살상-냉골 석조여래좌상-상릉-경애왕릉
-삼체석불-지마왕릉 - 포석정
이 코스는 경주남산의 보물은 몇점을 빼고 거의 접할수 있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접할수 있는코스다.
나름대로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빠뜨린 부분도 있고
말주변도 부족하고, 또 뒤늦게 못 들은 분들도 있고해서
이코스를 다녀온 사진이 있어 내용을 아는대로 적어
보내 드립니다.
모쪼록 멀리 까지 귀한 분들이 오셨는데 좀더 알차고
재미있게 안내해드리지 못한점 깊이 사과드리며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산에 오르려면 먼저 마음속에 있는 모든것을 내려놓아야한다
그래야만 천수백년전 신라인의 마음 불심 문화가 보인다.
왜냐하면 경주남산은 바위하나 돌조각하나에도 신라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1000여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
1000년 전 신라 사람들이 불심으로 드나들던 그때의 마음으로 - -
상갑이도 부인과 함께 천오백년전의 역사속으로 들어왔다
용장골 들머리에서 -
남산에 오르려면 먼저 마음속에 있는 모든것을 내려놓아야한다
그래야만 천수백년전 신라인의 마음 불심 문화가 보인다.
왜냐하면 경주남산은 바위하나 돌조각하나에도 신라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1000여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
1000년 전 신라 사람들이 불심으로 드나들던 그때의 마음으로 - -
들머리에서 약15분 정도 올라가면 설잠교가 나온다
여기에서 설잠교위를 건너 좌측 미륵의 세계로 오를수있는 수미산( 불국토)
을 향한다
저어기 숲사이로 사람들이있는 저곳이 "용장사지" 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때 창건된 사찰로 고승인 대현스님의
고사가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은 쓸쓸히 크고작은
돌축대 일부만 남아있다.
또한 이 절에는 조선초기 세조때 매월당 김시습이 기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쓴 절이기도하니
약 800여 년에 걸친 긴세월 동안 용장사가 존재했음을 알수있다 .
매월당 선생은 용장사 뜨락에 북향화(목련)을 심어 영월에 귀양가 있는
단종 임금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목련은 꽃봉오리가 펴질때면 항상 북쪽을 향해 피어나기때문에
북에 있는 임금을 그리는 꽃의 별칭으로 붙여졌다.
자 !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잘 봐야합니다. 이 두사람을 보는것보다
저- 위에 산 봉우리를 잘 보시면 하늘과 맞닿아있는 삼층석탑이 보이죠 - - ?
이 탑은 자연과 탑신이 일체가 되도록 두개의 기단으로 건축되었는데,
금오산 중앙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 기단을
다듬어 얹고 삼층석탑을 올렸는데,
이것은, 하층기단은 제석천을 지키는 수미산이고 탑위의 푸른하늘은
수미산정의 천상계로 서라벌 벌판을 미륵불이 굽어 살피는
불국토로 만들었다.
제가 들머리에서 한 말이 마음을 비워야 보인다.
또, 수미산정으로 올라간다고 했던말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동화 되어야 불국의 문화가 보입니다.
수미산 :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으로 가는산
사왕천 : 불교의 육욕중 첫번째 하늘로 사천왕이 다스리며 수미산의 중턱
도리천 : 수미산의 정상에 해당하며 석가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환생한곳
또한 선덕여왕이 도리천에 묻어달라한 그곳이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계 100년에 해당하며 1,000세까지 머물수 있다(3,650만년)
제석천 : 불교의 수호신이며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 있는 하늘의 임금
야마천 : 공거천, 즉 천상을 말하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 200년이고 2,000세까지 머문다(1억4천6백만년)
도솔천 : 인간세 에서 덕업을 많이 샇고 불심이 깊으면 도솔천에 태어나는데
미륵불이 계시고 천상인이 즐기는 곳이니 곧 불국이며 부처가 되었다는 뜻이다
수미산 도리천에서 바라본 남산의 가을
이곳은 용장사 터에 있는 삼륜대좌불로 보물 187호이다
자연바위의 기단위에 북 모양의 중대괴임을 하고 그 위에 원반석을
층으로 쌓은 이러한 양식은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특이한 형태다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 이라 존명도 알수 없어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기단부의 둥근 원반석 1층 2층은 보통모형이나 3층원반은 3겹 연꽃 방석 이다
윈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이나 특이하게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모습이 승상이란 말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장사에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이 기도하면서 미륵장륙석상을
돌고 있으면 미륵 부처님 또한 스님을 따라 돌았다는 글이 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처럼 이 석상이 미륵불이라 한다면,
기단석 위가 사왕천이 되고 처음의 둥근반석 위는 도리천,
두번째 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마지막의 연화 원반대좌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이 된다.
이 엄청난 예술품, 천수백년전의 보물을 찬찬히 감상해 보시라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 보물 913호)
삼륜대좌불 옆에 아차 하면 못 보고 그냥 지나쳐버릴 바위벽 한켠에 숨이 막힐정도로
아름답게 부조된 부처님이 계신다.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가슴부분의 옷깃 속으로 접혀들어간 점은 남산 미륵곡 보리사에 있는
석불좌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옷 주름 표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층단을 이루면서 부드러운 물결처럼
처리되어 섬세한 편이다. 왼쪽어깨 바깥부분에 글씨가 있는데 "태평 2년8월"에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내용인데
마멸이 심하다. 이 마애불은 당당한 자세의 불신표현이나 부드러운 옷 주름선의 흐름, 섬세한 조각기법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때 양식이 남아있으나 시대적으로는 8세기 중엽의 석굴암 조각보다 약간 후대로 보고있다.
(4층으로 착각 할수있다. 밑부분은 기단부 임 - 기단부는 갓이 없는것으로 알수있다)
자 - ! 여기가 아까 저 밑에서 올려보았던 용장사지 삼층석탑 (국보 186호 )
아까 이야기 했던 말을 다시한번 살펴 보며 공부해 보자
이 탑은 자연과 탑신이 일체가 되도록 두개의 기단으로 건축되었는데,
금오산 중앙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 기단을
다듬어 얹고 삼층석탑을 올렸다.
이것은, 하층기단은 제석천을 지키는 수미산이고 탑위의 푸른하늘은
수미산정의 천상계로 서라벌 벌판을 미륵불이 굽어 살피는
불국토로 만들었다.
(오래전 새벽에 찍은 사진)
제가 들머리에서 한 말이 마음을 비워야 보인다.
또, 수미산정으로 올라간다고 했던말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동화 되어야 불국의 문화가 보입니다.
수미산 :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으로 가는산
사왕천 : 불교의 육욕중 첫번째 하늘로 사천왕이 다스리며 수미산의 중턱
도리천 : 수미산의 정상에 해당하며 석가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환생한곳
또한 선덕여왕이 도리천에 묻어달라한 그곳이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계 100년에 해당하며 1,000세까지 머물수 있다(3,650만년)
제석천 : 불교의 수호신이며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 있는 하늘의 임금
야마천 : 공거천, 즉 천상을 말하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 200년이고 2,000세까지 머문다(1억4천6백만년)
도솔천 : 인간세 에서 덕업을 많이 샇고 불심이 깊으면 도솔천에 태어나는데
미륵불이 계시고 천상인이 즐기는 곳이니 곧 불국이며 부처가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가 수미산으로 보면 도리천에 속한다
저 보살님은 무슨 바램이 더 있어 돌을 올리는가 -
아마도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는가
경주의 불국사나 황룡사, 석굴암 등이 지배층의 대작불사로 왕족과 지배층의 공간이었다면
남산은 백성들의 불심을 보듬은 곳이었다. 왕족들이 화려하고 우람하고 거대한 절집을 세웠다면,
백성들은 아예 남산을 통째로 불국토를 이루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삼국통일의 와중에 전쟁터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백성들의 신산한 삶과
그들이 닿고자 했던 이상세계를 남산에 그려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남산의 숲길에서 저절로 부처를 만나러 오갔을 신라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잠깐 ! 위와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라 - ! 톱니같은 자국이 보이죠 ?
남산에는 이렇게 갈라진 바위들을 많이 볼수있다.
이것은 옛 장인들이 바위를 자를때 아래 사진처럼 구멍을 파서
콩을 채워넣어 물을 부으면 그 콩이 불어나서 바위를 갈랐다.
그리고 겨울에는 이 구멍에 물을 부어, 그 물이 얼게되면
부풀게 되어 바위를 갈랐다고하니, 이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인가 - !!
이렇게 갈라진 바위는 톱니처럼 보이겠죠 -
수미산정을 다 올라오니 5.16 도로가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걷고 내어다 보면서
발자욱 마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이 천년수도를
어떻게 해야할까 - - -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삼화령으로 갔다가 다시 금오봉으로 와야 하는데
그냥 금오봉으로 가기로했다
대신 삼화령에대해 잠깐 집고 가자
삼화령은 금오산, 고위산과 이곳 연화대를 삼화령이라 하는데
남산은 정말 불국토로 생각했다는것이
남산은 미륵불과 연관이 깊다
충담선사가 해마다 3월삼짇날과 9월9일 중구절에는 꼭 차를 끓여 미륵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 삼화령에 미륵불과 관련있는 세분 석불이 있었는데 지금 경주박물관에 옮겨져있다
명확치는 않으나 연화대를 미륵불이 있었던곳으로 생각을 한다
용장사지 위로 올라가면서 본 연화대
위의 사진은 "비파골"이다
여기서 잠깐 ! 금오봉을 지척에두고 비파골이있다
32대 효소왕이 망덕사 준공식에 제지내러갔다가 남루한 차림의 노승이
비파암에서 왔다고 공양을 청하자
왕이 별로 달갑지않게 선심쓰듯 공양이나 하라고 말하며
돌아 가거던 왕과 함께 공양 했다는말은 하지말라고 했다.
이 누추한 노승이 예 - 왕께서도 대궐에 가시거든 진신석가와 공양했다는 말은 하지마시오
하고 구름을 불러 날아가버렸다.
그제서야 왕이 후회를 하고 신하들께 찾으라했지만 비파골짜기 바위에
지팡이를 남겨놓고 사라져버렸기에 왕이 석가사를 짖고 공양을 올렸다는전설이 있다
정상에서 인증 샷 - !
정상에서 상선암 쪽으로 내려가는계단
상선암 윗쪽 상사바위
옛날 이 아랫마을 큰 부잣집에 머슴으로 있는 돌쇄와
이집 아씨에 얽힌 슬픈 이야기다.
돌쇄와 아씨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나 이사랑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란것을
잘 아는 돌쇄는, 어느날 남산 이바위 아래서 종의 처지를 비관하며 목배달아 죽었다.
그날밤, 아씨의 꿈에 그리운 돌쇄가 나타나 이바위에 자기가 있다 하므로
다음날, 그곳에 가보니 돌쇄가 목매어 죽어 있었다.
그리운이의 죽은 모습을 보고 아씨또한 목매달아 버렸다.
그 뒤로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이름했고 이 바위 아래서 바위 위의 움폭 파인곳에
돌을 던져 얹혀지면 소원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유효하다 ( ㅎ ㅎ - )
여기는 내가 하도 여러번 사진을 올린곳이기에 낯이 익을거다
너무나 아름다운모습
저 - 건너 큰바위부처님 (나는 늘 이렇게 부른다) 모습을
제일 아름답게 볼수있는곳이 여기다. 나는 여기서 예불 드릴때가 많다.
상선암 위의 상사바위 위에서 바라본 석가여래좌상
헉 ! 갑자기 왠 전복 ?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시간이 12시가 가까웠으니
뭘좀 먹어야제. 갑이 마나님 가져온 과일에 커피에 요기를 좀하고
참 ! 여기 앉은곳이 신선이 바둑을 둔 "바둑 바위"인데
사진 찍는걸 깜밖했다
자 - 이 부처님은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 문화재 158호 ) 이다
상선암 바로위의 이 부처님은 높이가 7m로 삼릉게에서 가장 큰 부처님이시다
광배는 자연 암반을 깎아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만 듯 거칠게 보인다
머리는 광배로 삼은 바위와 떨어져 보일 만큼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어깨 부분은 광배 바위 면에서 조금 떨어지게, 나머지 몸은 바위 면에 그대로 붙여서 선으로 그리듯 새겼다.
밑그림은 그냥 자연바위에 선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돋을 새김으로 윤곽도 뚜렸해지며
얼굴은 완전히 도드라져 깨끗하게 새겨졌다.
또한 옆에서 보면 바위에서 부처님이 서서히 앞으로 솟아나오고 있듯이 조각 되어있다.
이것은, "자연과 부처, 인간,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하나" 라는
옛 신라 장인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또 하나는, 법흥왕 이전 신라인의 고유신앙이 바위신이었다고 한다.
바위에서 부처님이 나타나고 있는 이 형상은
바위에향한 고유신앙을 부처로 바뀌게하는 바램도 여기에 묻어있다고 볼수있다.
풍만한 네모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코는 오뚝하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큼직하다.
쉽게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대함에서 뿜어나오는 위엄뿐만 아니라
자비에 넘치는 얼굴 모습이다
나는 이 큰바위 부처님이 좋아 특별히 큰산을 가지 않으면 주말에 늘 이곳을 찾는다.
상 선 암
상선암에서 10분정도 내려가다 우측골에 우뚝 서있는 보물
삼릉계 석불좌상 ( 보물 666호)
순백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하대석 없이 땅에 있는 지대석 위에 직접 놓은 중대석 위에 얹혀 있다
8각 중대석엔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寶相華)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나라의 꽃송이인 것이다.
이 불상대좌에는 이렇게 찬란한 광채나는 꽃송이를 만들기 위해
애쓴 신라인들의 무한한 정성이 어려 있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새겼는데 불꽃들이 춤추는 듯 약동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화려하고 생기에 넘치는 석불광배는 경주남산에서 뿐 아니라 전 신라시대 불상에서도 예가 드문 걸작이다
이 불상은 어느 방향에서 보나 아름답다.
곁에 있는 바위들이며 계곡의 여울 등에 잘 조화되도록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여래상의 존명은 아미타여래라 생각한다. 서쪽을 향해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파손되지 않고 원형대로 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 - -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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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 석불좌상( 보수하기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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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석불좌상은 8~9세기경 조성된 작품으로, 오랜 세월동안 도굴등으로 머리는 땅에 떨어져 있고
광배도 떨어져 조각나 널려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등에 이르러 정확한 고증작업 없이 불상의 안면을 콘크리트로
보수 처리하는 등 엉성한 모습으로 오히려 훼손되어 있었다
2007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 삿갓골 제1사지 석불입상, 남산 미륵곡석불좌상(보물 제136호),
안계리 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92호), 남산 용장계석불좌상 등
비교적 안면이 온전한 석불 등을 참조해서 보수했다
광배의 경우 10여 개로 조각난 편(片)을 접합해 원형을 살리고자 했으며,
결실된 상부는 새로운 석재로 조형해 통일신라시대 광배의 윤곽에 최대한 가깝게 조성했다
1910년모습 (좌 흑백)파손된 머리가 좌대옆에 보인다
정비 전 모습 (우)는 어디로가고 없고 얼굴모습은 딴판이다
삼릉계석불좌상의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 줄 돋음새김 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식물 모양의 장식 무늬 등이 한층 돋보인다.
어느 불자가 수도했는지
임자없는 암굴이 역사를 지켜오고있다
삼릉계 선각 여래좌상 ( 문화재 159호)
이 선각상 역시 유홍준 전 문화부장관이 입에 침이 마르듯 자랑하는 보물이다.
석불좌상에서 능선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약 10m 높이의 큰 바위에
선각으로 된 여래 좌상이 나온다.
큰 연꽃위에 앉아 얼굴만 돋을 새김으로
옆으로 떨어져서 보면 입체적이다.
암벽 중앙에 지름 2.5m 되는 큰 연꽃위에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는 如來像(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껍고 커서
균형잡힌 얼굴이라 할수 없으나 소박하여 위엄이 있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같은 것은 가늘게 그어 變化(변화)를 주었다
全體(전체)에서 소박하고 구수한 맛이 풍긴다. 그러나 신라 불상들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年代(연대)는 高麗時代(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는것이 특이하다.
삼릉계 선각육존불 ( 문화재 21호)
성각여래상에서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또 보물이 있다
그림으로 그려서 쪼아낸듯한 이런 작품은 보기 드문일로 선각 마애불 로는
어뜸가는 작품으로 평가 되고있다.
앞쪽 삼존불은 좌우 협시불이 웃옷을 벗고 꽃쟁반을 들고 꿇어 앉아있는
모습은 보기드문 작품이다.
냉골 석조여래좌상
이렇게 등산로로 내려오면 길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끈이 있기때문에
존명을 정하긴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이 없지만 인근 계곡을 잘 찾으면 목을 두상을 찾아낼수도 있다. 그렇게만되면
어디에도 뒤지지않는 예술작품이라고 한다
석조여래 좌상에서 10여m 떨어진곳에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 유형문화재 19호)
기둥모형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부처님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들고있고
이마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어 자비로운 중생을 구제 해주는 관음보살 임을 알수있다
돋을 새김으로한 뒷 바위 자체를 광배로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삼릉 (사적 219호)
8대 아달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이 능을 설명 하기전에 지증왕릉 천마총을 한번 생각해 보자
천마총은 엄청난 숫자의 보물들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은 돌무지 덧무덤이라고 해서 땅에 목곽과 부장품을 놓고 위에 호박돌을 쌓은 후 다시 봉분을 쌓는 형태로
3세기에서 6세기 초반 경주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 대표적인 예가 천마총이다.
이 형태의 무덤은 세월이 흘러도 봉분이 무너져 내리지 않기에 경주 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보셔도 무방하며 도굴도 쉽지 않기에 발굴을 하면 삐까번쩍 보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삼릉의 이 능 들은 도굴로 파혜쳐 졌을때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 돌방 무덤 형식이다
이 봉분둘레에 김유신 묘처럼 석을 둘렀던 것으로 다 없어지고 흙무덤만 남았다
돌방무덤은 말 그대로 돌로 석실을 만들고 한쪽에 입구를 내 출입문을 만든 후 돌방에 시신을 안치 후
입구를 막고 그 위에 봉분을 쌓은 형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해 봉분의 크기가 작아졌으나 추가 매장이 가능한 형태였습니다
안타갑게도 도굴이 용이해 경주의 상당수의 돌방무덤은 도굴을 당했습니다.
다음은 이 릉 주인에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라말기 52대 효공왕(김씨)이 아들이 없어 백성들께 왕의 추천을 요구한바
추천 된 사람이 바로 53대 박씨, 여기 3릉중 가운대 릉의 주인 신덕왕이다.
54대 경명왕(맨 아래릉)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 이다.
또 하나의 릉, 3릉 인근에 있는 비운의 왕 55대 경애왕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 (경명왕 동생)로서 릉 위치는 3릉 남쪽에 쓸쓸히 누워있다.(박씨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왕비와 궁중 시녀들과 함께 백제의 견훤에게 잡혔다.
경애왕이 보는 앞에서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시녀들이 참살당하자 스스로 자결한 비운의 왕이다.
견훤은 왕이죽자 이전 왕조의(김씨 왕조) 족친들중에 한명을 골라 우선 신라통치를 맏겼다.
그왕이 신라의 마지막왕 56대 경순왕(김씨)이다.
경순왕은 백제의 침탈과 겁탈 신라백성들의 핍박을 보다못해
당시 힘이 대단했던 고려에 정권을 내어주려한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경순왕은 우리가 죽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백성들의
핍박은 더 볼수가 없다 하고 고려 왕건에게 백성을 구제하는 조건부로 나라를 맏긴다.
마의태자는 홀로 금강산으로 떠나 풀뿌리 약초로 연명하다가 쓸쓸하게 죽게되고
천년사직의 신라는 그렇게 문을 닫게 됩니다.
경순왕의 릉은 경주에 이장하지도 못하고 지금 경기도에 홀로 계십니다.
배리삼존석불입상 보물 63호
삼국시대의 석조삼존불입상이다. 보물63호이며 7세기초기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에 그냥 넘어져 있던 것을 조선시대인 1923년에 일으켜 세우고 토담으로 담장을 둘렀다.
그동안 보호각 없이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가 보호각 건립을 위하여 1987년과 1988년 2차례에 걸쳐 주변을 발굴하고 보호각을 세웠으나 그 뒤 보호각으로 인한 빛의 차단으로 잔잔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담장 때문에 통풍이 잘안되어 풍화가 가속된다는 지적이 많아 담장을 철거하였다.
보호각이 설치되기 전의 배리삼존불
우협시보살의 모습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아랫쪽 완전히 잘라진 모습이 보인다)
보호각이 없을 때 본존의 미소.
원래 노출되어 있던 이 삼존불에 기와로 지붕을 이어 보호각을 설치한 이후로
본존불은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잃어버렸다
삼국시대 만들어진 불상들은 대부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통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들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귀엽고 명랑한 미소를 띠고 있어 매우 친근한 인상을 준다. 신체비례도 거의 5등신에 가깝다. 아마 불교 유입 초창기에 만들어져 부처의 위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에 아기 같은 모습, 천진스로운 미소, 신체를 다 가린 두꺼운 옷, 시무외인·여원인의 수인, 4등신대의 비율은 삼국시대 불상들의 특징들이다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마애불과 태안마애불, 김유신장군의 전설이 있는 단석산 신선사의 미륵불, 선도산 아미타삼존불 등이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삼존불은 흔히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양협시로 한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으로 해석된다
부처님의 손모양을 수인(手印)이라 하는데. 우리가 문서에 도장을 찍듯이 부처님은 손모양으로 약속을 표시한다.
중앙의 본존불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모두 펴서 위로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편 시여원인(施與願印)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협시보살(협시불)
협시보살(脇侍菩薩)은 부처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말한다.
보살(菩薩)이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로 '보디사트바(bodchi-sattva)'라 하는 데 '보디'는 깨달음을 '사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또는 마음을 뜻한다.
소리나는 대로 옮겨 보면 보리살타인데 이것을 줄여 보살(菩薩)이라고 부른다.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여래의 뜻을 받들어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上求菩堤下化衆生)하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보살의 좌우를 구분할 때는 본존을 중심으로 한다. 바라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할 때는 향좌(向左), 향우(向右)라고도 한다.
우협시보살
(대세지 보살)
어깨에서부터 발등까지 늘어뜨린 영락은 구슬과 꽃모양으로 장식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걸쳐 유행된 중국 수나라 양식이라 보살상의 연대추정에 열쇠가 된다.
두 팔과 몸체 사이가 뚫려 있어 입체감을 주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양식이다.
보살상 뒤쪽을 자세히 보면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광배는 가장자리에 두 줄의 띠를 두르고 다섯구의 화불을 새겼다
우협시불
이중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에서 다리까지 드리워진 구슬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왼손에는 연봉우리를 들고 있다. 관대를 두르고 머리는 삼면보관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정면에 큰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다섯의 화불(化佛)을 조각한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나비매듭진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두광의 화불은 부처님의 진리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부처님이 계시다는, 온 우주가 부처님 세상이라는 뜻이다.
좌 협시보살
(관음보살)
오른손은 펴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 정병을 들고 있다.
정병을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추정한다.
머리에는 관대를 두르고 삼면보관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광배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다.
상반신에는 천의만을 두르고 있고 옷주름도 거의 생략된 상태이다.
발은 본존불처럼 네모난 모양인데 왼쪽 발이 약간 휘어져 있어 변화를 주었다
좌협시보살
좌협시보살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여 좌협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무늬가 없는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눈은 본존불처럼 지그시 감은 듯 두툼하고 입술선은 직선으로 나타나있어 본존불과 같은 환한 미소는 볼 수가 없다. 볼은 과장됨이 없는 사실적인 양감으로 나타내었다.
어깨는 당당하면서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자세는 바로 선 듯 하나 자세히 보면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삼굴자세 (三屈姿勢)를 취하고 있다.
코를 떼어 갈아먹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 때문에 남산에 있는 불상의 코는 떨어지고 없는 불상이 대부분이다. 코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사람의 코가 아니라 부처님의 코이니 더욱 영험이 있다고 믿었던 그릇된 기자신앙(祈子信仰)으로 불상은 자연스럽게 훼손이 되어버렸다. 코는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 심정적으로는 자존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시대에 훼불(毁佛)을 할 목적으로 소문을 폈다는 설도 있다.
<참고:'신라사람들'의 배동입불상설명문>
필자가 본 배리 삼존불 (보물 63호)
통통한 아이의상 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도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중앙 본존불의 아미타여래가 왼손바닥을 아래로 내린것은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이고
오른손바닥을 올린것은 두려움을 없에주겠다는 약속이다. 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연꽃을 두르고 있다
좌협시보살은 관음보살이며 머리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손에 정병을 들고있어 관음보살님이다
젓살이 빠지지않은 아이처럼 얼굴은 풍만하고 다문입과 아래로 뜬 눈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표현하고 있다
백제시대 불상인 서산 마애삼존불과 얼굴 모습이 유사 하다 던가 하는점에서
삼국시대말,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이라 평가된다.
배리 라는말 - -?
拜자는 절배자다
이곳에 유렴이라는 재상이. 돌아가신부모를위한 재를 올리려고 고승을 모시는데
찾아온 스님이 하도 꾀죄죄 하여 내 쫓았다
이 스님은 아무 말없이 장삼소매에서 작은물체를 내어 땅에 내려놓으니 호랑이되어 타고 갔다.
그제서야 크게 후회하며 수없이 절을 했다는 전설로 이동네를 배리라고 했다
6대 지마왕릉
지마왕 이전부터 백제와 가야, 왜적 까지 자주 침략해 왔으나 평정을 하고
주변의 압독국(지금의 경산)등 소국들을 병합,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형태를 만든 왕이다.
지마왕 보다 7대 일성왕 이야기를 잠깐 해 본다.
보통, 왕의 서열을 아들이나 조카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일성왕은 조카인 지마왕에게 왕좌를 받는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태자다.
늦게 태어나 어린 이유도 있겠지만 선친 남해왕의 유지도 있고해서
그의 매제인 석탈해 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석탈해는 다음 왕위를 선왕인 유리왕의 태자 일성에게 물려 주어야 하나
탲다 일성의 동생 파사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당시, 파사는 대단한 세력을 가진 김씨시조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처가의 위세로
왕위를 받게 되고 그의 아들 지마에게로 왕좌가 이어 집니다.
지마왕이 아들이 없자, 일성은 나이 팔십이 넘어 왕위를 조카에게 받게된
사연도 있어서 소개 했습니다.
마지막 코스 포석정
포석정은 6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양은 전복의 껍질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관련 학계로 부터 실제 모양을 1/2로 축소하여 물을 부어 잔을 뛰워 본 결과
실제로 잔이 돌았으며 중간 중간 잔이 회돌이 현상까지 잃어 난 대단한 구조물로
평가 됩니다.
중국 동진 시대부터 유행한 유상곡수라고 시회(詩會)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시회를 열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하며, 통일 신라시대의 화려했던
궁중생활의 단면을 추정 합니다.
위에서 추정 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평소 이 포석정에서 왕들이 술을 마시며 신라를 망하게 했다고 배웠으며
경애왕 또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기다 죽은것으로 알고 있으나
최근 이 부근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포석" 이란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대
화랑세기에 이 포석 이라는 단어의 뜻이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고, 백제 군사가 코앞에
쳐들어 왔는데 여기 앉아 술과 노래를 했다는것은 이해 하기 힘들고
특히, 연회를 즐겼다면, 대신들이나 토호들과 함께 있어야 할텐데
왕비와 시녀들 등등이 여기 함께 있었다면 - -
이 구조물 인근의 포석 사당이나 아니면 이구조물의 영험을 통해
경애왕은 가족과 함께 어려운 국운을 신에게 간절히 소원하다가
견훤에게 적발되어,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가족이 죽는모습을 보며 자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라
학계에서는 역사를 다시 재조명 해 보아야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산 하니 오후 2시 40분쯤 되었고. 아침 10시 20분경, 수미산을 향했으니
약 4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조금 강행을 했던 관계로 빨리 하산 한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모두에게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몇장밖에 없어 상품으로 이용한 "천년의 미소"와 "천마도" 상품은
돈으로의 가치는 미흡하지만 그뜻이 깊기에 알리려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천마도
천마도는 미추왕릉 즉 천마총에서나온 것으로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서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신라의 회화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며
가치로 따질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자리에 가죽을 대어 만든것입니다.
신의 기운을 보여줍니다.
역할을 합니다.
천마도의 수건을 받으신분은 아마 천마를 타고 도솔천에 환생하실것으로 믿습니다. ㅎ ㅎ
시내곳곳에도 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어머니의 미소에 대해 말해보고자합니다.
그렇게 모두 없에 버렸읍니다.
작품 들이기에 참으로 진귀한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품들이 많았습니다.
제작 연대는 삼국말 무렵[7세기]이라 추정하며.
동원된 장인들은 건물이 준공되어야 고향에 돌아갈수 있었다.
하늘에 뜬 둥근달이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 얼굴로 비추어졌다.
살포시 미소짓는 어머님얼굴을 정성들여 다듬어 내었다.
지난 어느날 그자리에서 깨어진 기와 조각이 발견 되었습니다.
효의 상징인 천년의 미소, 어머니의 얼굴을 준비해 드렸습니다.
도솔천에 환생 하시기 합장 기원 합니다.
첫댓글 신라를 보려면 남산을 보아야 한다 했는데...자주가는 코스말고 구석구석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음 좋겠는데...
대나무밭 가이드 잘 했나 보네
남산은 역시 신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곳이기도 하네 ..... 신라 이전에의 역사도 있다고 하던데 ..... 과연 남산은 옥돌이 유명 하기도 하고 신라 천년의 역사! .... 죽전도 사진과 글을 다 올려주니 더욱 감사하이~~~~~ 산에 가면 이제 알림방에 연락하기 ..... !!!!!
동기야 안내하느라 수고 많아다 ..다음에 대포한잔 하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