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처음에 '의미'가 계셨고, 그 의미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한처음에 '조화'가 계셨습니다…."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2663?menuid=24&referrerAllArticles=false 네이버 카페- '숨' 영성 - 하느님의 숨. 2026.01.04. 03:25
2026년 1월 4일 주일 -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오 복음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원은 숫자 0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념일 뿐입니다. 0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숫자에 없는 0을 보태면 10배가 더해지지요?! 그러니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 바로 이 0이나 원이고, 이것이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0이나 원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를 규정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바퀴나 동전, 시계판처럼 둥근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원은 0처럼 단지 개념일 뿐입니다. 원은 끝도 없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상징으로 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원은 깨달음을 의미하지만 이 깨달음은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창세기)과 신약 성경(요한 복음 - 새로운 창세기)은 모두 "한처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가 곧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 복음의 서두입니다.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단순히 우리말의 '말씀'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말씀'은 모호한 단어입니다. 문자로 된 말일 수도 있고, 구두로 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어는 더 분명하게 ‘la parole’, 즉 '말해진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야기는 오래된 사전이나 텍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어떤 분에 관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로고스는 단순히 '말씀'만이 아니라, 내적 원리, 의미, 조화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씀을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처음에 '의미'가 계셨고, 그 의미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한처음에 '조화'가 계셨습니다…."라고요. 이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의 익숙한 말과 생각을 넘어 복음이 우리 안으로 더 깊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바로 회개(meta-noia)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meta는 '초월하다' 혹은 '뛰어넘다'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고, noia는 '생각'이나 '정신', '마음의 상태', '이해'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본래 meta-noia는 일상적인 마음과 사고, 관념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원과도 같은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고, '너'와 '나'의 구분이 없으며,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조화와 화합이 이루어지는 깨달음의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말씀"은 "말씀"이지만 일상적인 우리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 깊은 조화와 의미의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는 "말씀"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방의 현자들(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조화롭게, 화해 안에서 서로를 '나'로 바라보며 삶의 참된 의미를 살아가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 삶의 여정에 도반으로서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가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참으로 지혜로운 어른이십니다. 지금은 성탄 시기를 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떠올리곤 합니다만,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은 이 아기가 참된 어른의 상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에서는 이 이야기를 아주 중대한 진리로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우리가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며 이 동방의 현자들과 함께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인 생명과 사랑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이 바로 이 현자들처럼 주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듯, 로고스를 '진리'로 번역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거짓, 특히 체계적인 거짓은 원래의 의미를 깨뜨리고, 표지판을 뒤바꿔 모든 이들을 길 잃게 합니다. 그것은 조화를 파괴하고, 인간 사회를 무너뜨리며, 우주를 파편으로 흩어지게 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것입니다.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서게 하는 거짓을 퍼트리며 서로를 심판하고 단죄하게 만드는 파괴자가 바로 '사탄'(고발하는 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 고통스러운 세상 속으로 로고스께서 들어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 안에서 조롱당하고 고통받으십니다. 태초부터 살인자들은 그분을 뒤쫓았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성탄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성탄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성탄 휴전에서 병사들이 하루 동안 축구를 함께한 뒤, 다음 날 다시 서로를 죽였던 일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을까요? 그러나 희망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분명히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곧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우리가 서로에게 '행복한 성탄', '평화로운 성탄'을 기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며, 어둠은 그것을 이기지 못하였다"(요한 1,5). 이 갈등은 군대의 충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태어난 아기는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 가장 새롭고 가장 어린, 가장 최근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북소리나 광고의 요란한 목소리로 선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말씀은 사람이 되셨지만, 아기처럼 말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누워 계십니다. 오직 침묵 안에서만 이 ‘침묵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이 로고스를 우리의 존재 안에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새싹이 소란을 피우지 않듯, 말씀도 조용히 우리 가운데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침묵 안에서, 우리 존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며 로고스인 이 아기가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기는 매일,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공현은 2,000년 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생명과 사랑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동방의 현자들처럼 다른 이들 안에서 계속해서 태어나시는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며 하느님께는 물론이고 '나'와 함께 존재 전체를 형성해 주는 모든 존재, 특히 우리 이웃들, 형제자매들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이라는 선물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 삶의 여정에서, 이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내'가 원하는 방향을 가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도 그 반대 방향으로 우리의 발걸음이 향하게 하실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방향이 실패나 하느님의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조화와 화합 감사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는 방향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에고는 늘 '나'에게 집중하지만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존재의 원천이신 '말씀'께서는 '우리'와 '전체'를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Jonathan Livingston Seagull)』은 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조나단은 단순히 먹이를 얻기 위해 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아름답게 날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무리의 규범과 충돌합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먹이를 얻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조나단의 자유로운 비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추방합니다. 조나단은 외로움과 실패를 겪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비행의 참된 의미, 즉 자유와 완성, 그리고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른 갈매기들에게도 이 깨달음을 나누며, "삶의 목적은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실현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로 이끌릴 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더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조나단이 무리에서 쫓겨났을 때는 좌절처럼 보였지만,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었지요. 신앙에서도 "내 뜻"이 아닌 "더 큰 뜻" 안에서 방향을 찾을 때, 오히려 삶의 참된 의미와 조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조나단의 이야기는 결국 자기 초월과 내적 자유에 관한 비유인데, 신앙의 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뜻밖의 방향"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쪽으로 물 위를 걸어오셔서 베드로더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로 오게 하신 이야기를 예로 들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나서 베드로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거센 풍랑 위를 걸어오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지요?! 삶의 거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이신 당신께로 방향을 잡도록 끊임없이 동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이 삶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그 모든 것에 존경심을 갖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탄생과 공현의 의미이고 부활의 의미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탄생 안에는 이미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미사 끝에 신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평화로이 가서 주님을 찬양하고 서로 존경하며 삽시다!"라고요... 이것이 바로 매일, 매 순간 우리 서로의 존재 안에서 공현하시는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호명환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