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
김창식
수류탄(手榴彈)
후반기군사훈련을 받은 그 시절 ‘금마(金馬)’는 말야. 비만 오면 여기저기 개울이 흐르고 웅덩이가 생겨. 수류탄 투척 연습을 하고 부대로 돌아오는데 지랄 같은 비가 오더군. 푸른 입술의 훈병들은 무릎까지 차오르는 수렁을 건넜어. M-1 소총을 거꾸로 메고 판초 우의를 입은 채. 마음이 비감해지더라고. 아마 ‘진짜 사나이’가 아니었던 게지.
“하나, 둘, 서이, 너이! 별이 지는 새벽길을~”
우린 조교의 구령에 맞춰 노래를 불렀지. 단조(短調)의 군가였어. 이어서 조교의 구령도 없는데 누가 노래를 선창하더라고. 눈치 보며 일단 따라했지. 무슨 노래냐고? 고향무정(故鄕無情). 이상한 것은 정한(精悍)한 조교도 그때만은 눈감아주었다는 것이야. 그때 우리 모두 누굴 생각했겠어? 그래, 당연하지. 어머니! 그 다음엔? 사실을 말하자면 내겐 그녀가 먼저 떠올랐어. 웃는 듯 마는 듯 창백한 그녀 얼굴. 바람 부는 수면에서처럼 흔들리다 동심원(同心圓)의 외곽 너머로 사라져 버리더군.
자대에 배치되고 나서 실제로 수류탄을 몇 번 투척하였어. 그러나 수류탄이 터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지. 수류탄을 던지고선 그보다 빨리 눈을 감아 버렸거든. 정작 수류탄이 터지는 것을 목격한 것은 제대하고 나서야. 아무래도 안전핀 조작을 잘못했던 것 같아. 아니면 너무 갑작스런 것이어서 눈감을 틈이 없었거나. 내 사랑이 바로 눈앞에서 수류탄(手榴彈)처럼 폭발했어. 참으로 장관이더라고. 난 천지사방으로 비산(飛散)하는 ‘꽃의 환영(幻影)’을 보았지. 내가 눈이 먼 것은 아마 그때부터 일거야. 그래서 내 몸엔 파편(破片)들이 훈장처럼 박혀있는 것이고.
블랙호크 다운
1970년대는 청생통(청바지, 생맥주, 통기타), 장발과 미니스커트로 특정 짓는 ‘청년문화’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어. 그 시절 비루한 청춘들은 단속을 피하려 거리를 다닐 때면 전전긍긍,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았지. 미니스커트가 저항의 상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답긴 했었어. 물론 어울리는 사람의 경우긴 했지만.
그때는 분식집과 탁구장의 전성시대이기도 했어. 한 집 건너 분식집이요, 두 집 지나 탁구장이었다고. 그곳은 허접한 젊음이 즐겨 찾던 인기음식점이자, 단체오락장이라고 할 수 있지. 동아리 모임도 활발하였는데, 이를테면, YMCA 독서모임이나 외국문화원의 회화클럽에서 메인미팅이 끝나면‘애프터(뒤풀이)’는 분식집에서 가졌지. 취향대로 찐만두나, 쫄면, 볶음밥을 나누어 먹으며 못 다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어. 그곳을 나와서는 3차로 탁구를 치러갔지. 비싼 생맥주는 사실 자주 마시진 못했고.
탁구장에는 대개 선객(先客)들이 있어 순번을 기다려야 했고, 일행이 많을 땐 주로 복식게임을 했지. 음흉한 남학생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는데, 마음에 둔 여학생이 파트너가 되었으면 은근히 바랐던 때문이었어. 그래야만 어깨를 부딪는다거나 공을 서로 주우려다 손끼리 맞닿는 행운을 기대할 수 있었잖아. 그런 기회는 매번 무산되기는 했었지만.
뭇 여학생들 중 포크가수처럼 긴 생머리에 무릎 위 한 뼘 가죽 미니스커트가 어울리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어. 공을 상대 진영으로 받아넘기며 머리칼을 이리저리 쓸어 넘기는 모습이라니. 가끔 헛손질을 하기도 했는데, 웬걸 그게 더 멋있더라고. 그녀가 땅에 떨어진 공을 주을 땐 여자라서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무릎을 맞댄 채 주저앉았다가 공을 주워 들고선 그 자세 그대로 올곧게 일어서곤 했지. 아, 그럴 때마다 눈부시게 빛나던 흰 무릎의 순수(純粹)!
나는 그녀에게 ‘헬리콥터’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흠모(欽慕)하여 마지않았어. 그녀는 흑요석(黑曜石)처럼 빛나는 ‘수직상승비행기’ 같았지. 그것은 단단한데다 조신하기까지 하여 한 번도 엎어져 내리지 않았다 하대. 뿐더러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땐 강한 와류(渦流)가 생겨 아무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잠자리비행기가 더 이상 탁구장에 날아들지 않더라고.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이제나 저제나 헬리콥터의 출현을 학수고대하였지. 얼마 후 믿기지 않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어. 블랙호크 다운! 그것이 추락했다는 것이야. 그것도 낯선 마을 어느 소총수의 눈 먼 총탄에 맞아.
김창식
전남 순천 출생. 2008년 『한국수필』로 등단.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제3호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연수님, 나중 '광화문 잠수함' 도 소개드리겠습니다. ^^
과거를 호명하는 글, 그 속에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양 주간님, 날쌘 수리가 먹이를 채가고 비둘기들은 모여 구구거렸죠.
~장발, 통기타,탁구장, 당구장~음악다방~ 문득 문득 스쳐갑니다~
그 탁구장은 종로2가 고려당 뒷골목 '반쥴' 카페 옆에 있었습니다. ^^
수류탄 파편이 흩어지고 어이없게도 블랙호크가 추락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전 그 광경을 보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저러면 안 되는데...!"
김선생님 글은 항상 그림이 선명해서 좋아요 "눈부시게 빛나던 흰 무릎의 순수(純粹)!"처럼.
나문석 신임 회장님 감사합니다. 뵙고 인사드려야할 텐데요...
1970년대 "청생통" 스무 살 청년이 됩니다. 그즈음 저는 꼬마.
ㅎㅎ 어쩐지 어려보이더라니...! 기분 좋으시죠? 황 편집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