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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예그리나
"어머니 이민신청이 기각됐다고요?“
“죄송합니다. 이민성에서 그렇게 연락왔네요.”
이민 알선 컨설턴트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진구의 왼쪽 무릎이 툭 꺾였다. 가계에서 생선포를 뜨던 중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반쯤 손질한 멀렛트 생선이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옆에서 생선을 튀기던 아내도 일손이 덜덜 떨렸다.
“뿌글뿌글~치이이익~”
튀김 생선만이 기름 솥에서 요란스레 타들어갔다. 세상일에 아랑곳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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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다녀온 오클랜드 변두리 요양 병원에서 바라본 어머니의 원통해하는 표정이 진구 눈에 밟혔다. 특수 시설 침상에 누운 진구어머니가 두 눈을 끔벅거리며 토해낸 하소연이라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 뉴질랜드 아들네 보러온 게 뭔 잘못이라고~“
정신질환 발작으로 국가 지정 시설에 갇혀 있는 어머니 얼굴이 흔들거렸다.
진구 어머니는 뉴질랜드에 여행 왔다가 쓰러지셨다. 분노조절 문제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 한국에 두 여동생이 있어 부모 초청 이민은 불가하대서 차선책으로 시도한 인도주의적 이민 신청이 기각되다니...
진구는 극도의 무력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남태평양의 여름 12월, 녹색의 계절도 무색했다. 부단히도 열심히 살았던 이민생활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50 대 후반 가장의 양쪽 어깨에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흙더미가 덮친 격이었다.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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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는 내팽개친 생선을 한쪽으로 던져놓고 장갑도 벗었다. 대충 손을 씻고 근처 현지인 성당으로 발길을 급히 옮겼다. 고해실로 들어갔다. 무릎을 꿇고 외국 신부님께 고해했다. 몇 마디 꺼내기도 전에 그만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도저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도망치듯 고해 실을 뛰쳐나왔다. 성당 밖 녹슨 철조망을 붙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은발의 노 신부님도 수단을 입은 채, 뒤따라 나왔다. 사제의 손으로 망가진 철망 옆 진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알수 없는 격정의 분출은 활화산 마그마처럼 뜨겁게 온 몸을 녹여냈다. 이민생활, 갈 곳 모를 노모의 불법체류(?). 쉼 없이 온몸을 쏟아 부었던 노동, 어디로 출구를 찾아야 할지 막막해 한계를 느낀 몸통이 그만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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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에게 그 날의 생생한 절규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이후 숨 막힌 세월이 흘렀다. 뉴질랜드 이민 27년의 강물이 남태평양에 녹아들었다. 10 여년간 해왔던 생선가계 일, 생선 수 만 마리를 포 뜨고 손질했다. 하루 50여 마리씩 주 6일 꼬박 일했다. 그 생선을 쌓아놓으면 큰 산더미였다. 어머니는 성한채로 기다려주시지 않았다. 세월은 말없이 흘러만 갔다.
생선 더미위에 쏟은 땀과 눈물 그리고 피가 헛되이 되길 원치 않았는데. 알알이 맺힌 결실의 정수 속에 어머니의 이민 승인이 환생하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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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가 노스쇼어 메모리얼 파크에 차를 갖다 댔다. 수많은 가족묘들이 다소곳이 자리해있었다. 어머니 묘소 앞으로 걸어갔다. 준비한 소주 한 병과 장미꽃을 제대 앞에 올렸다.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묘역 주변에 부었다. 어머니께서 힘들고 적적할 때 홀로 마셨던 소주였다. 몇 잔을 계속 따라 묘소 둘레에 적시게 부었다. 고향 술 냄새가 났다. 콩바매던 어머니의 적삼에 배인 땀 냄새가 어우러졌다. 마지막 남은 잔은 진구가 들이켰다. 속이 확 올라왔다.
옆 잔디에 그대로 누었다. 팔베개를 했다. 하늘에 양털 구름이 노닐었다. 어미 양 옆에 어린양이 기대어 누운 형상이 보였다. 새들이 날아와 지져귀었다. 옆에 놓인 장미송이를 갖다 코에 댔다. 빨간 장미, 진한 핏빛 향기가 났다. 이어 노란 장미, 가을걷이 내음이 올라왔다. 마지막 하얀 장미, 겨울 눈 그리움이 배어나왔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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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내려놓고 이민을 가지. 이 상태로 계속 살다가는 일찍 죽겠어.”
진구의 뜬금없는 푸념에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세웠다.
“웬, 이민이야. 당신이 회사에서 과로 탓에 뇌출혈로 쓰러지긴 했어도... .”
“이민 간 후배 녀석, 김 대리가 내 소식을 들었나봐. 연락이 왔더라고.”
진구 부부에게 뉴질랜드 이민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진구가 고국 대기업에서 격무에 쓰러졌다. 뇌졸중 초기로 간신히 생명은 부지되었다.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결단을 촉구했다. 상황에 몰려 우여곡절 끝에 뉴질랜드로 왔다. 후배 도움으로 적응하다, 조그만 생선가계를 인수해 자리를 잡았다.
생선가계 이름을 바꿨다. 딸아이 수아가 얘기해 원래 이름 Yeah에 Grina를 덧붙였다. 고국 외할머니 댁 평창 동네 이름, ‘예그리나’가 인상적이었다고, 엄마 아빠에게 그 뜻까지 설명해 주었다.
“‘예그리나’란 이름엔 ‘서로 나누는 사이’란 뜻이 있대요.”
딸아이의 기특한 마음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민까지 왔으니 만나는 사람끼리 그렇게 되길 당연히 바랬는데, 상호 명에 넣어두니 왠지 든든했다. 상서로운 비장의 무기를 간판에 숨겨둔 느낌이었다.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님들과 이웃 가계와 그리고 만나는 모든 뉴질랜드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값이 펼쳐지길 바랬다.
간판 상단에 ‘Yeah Grina’로 쓰고, 그 아래 ‘Fish & Chips’를 덧붙였다. 그 뜻을 이민생활하면서 재현해보기로 했다. 상호에 호기심을 느낀 손님들에게 그 뜻을 알려주니 한층 친근감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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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이 수의대에 간다고? 신기하네. 강아지와 양들이 그렇게도 좋니?”
“엄마, 아빠 ! 나 뉴질랜드 동물 치료해 주라고 보낸 것 같아.”
딸아이는 어릴 적부터 동물에 남달리 관심이 많더니 전공으로 수의대를 택했다. 하나 있는 딸아이, 수아는 성심껏 공부해 더니든에 있는 수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일반 의대를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인데도 수의과대학을 진학했다.
뉴질랜드는 동물 가축들이 많아 할 일이 많았다. 수백만 마리 양과 소 그리고 개들로 수의사의 손이 필요했다. 당연히 가축의 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수의사의 역할이 필수였다. 섬나라 뉴질랜드에는 동물 전염병이 돌게 되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 뒤따랐다. 가축을 정기적으로 점검했다. 방역체계가 잘 정착된 나라였다.
수아는 수의과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딸과 진구 부부는 두세 달에 한번정도 만났다. 주로 방학 때였다. 의대 전 학년 과정 6년간을 떨어져 살게 되었다.
수아는 쉬는 날도 가축 농장이나 동물 병원에 나가 실습하는 걸 좋아했다. 말 못하는 소나 양 그리고 개들도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 여기며 애정을 쏟았다. 딸은 동물을 친구처럼 대했다. 무언의 말이 통했다. 서로 생명감을 나누는 사이, 예그리나였다. 수의사가 되려면 강인한 체력이 필수 조건이었다. 40~50 kg쯤 되는 양 한 마리 쯤은 번쩍 들어 검사대 위에 올릴 체력은 되어야 했다. 그런 힘이 없으면 실기 면접에서 불합격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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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 두고 온 장모님이 교통사고로 운명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날 벼락같은 소식에 그만 둘은 망연자실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급히 고국 행 직항 비행기 표가 필요했다. 성수기라서 겨우 한자리밖에 없었다. 우선 아내만이라도 먼저 고국으로 떠나도록 서둘러 수속을 밟았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생선가계도 문제였다. 누구하나 자리비우기가 어려웠다. 아내 빈자리에는 단골손님인 마오리 남자가 아르바이트식으로 거들게 되었다.
아내가 장례식에 삼오 제까지 다 치르고 시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시어머니가 뉴질랜드 아들을 보고 싶다고 간절히 소원했다. 뉴질랜드 한번 가게 해달라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여 고민을 했다. 몇 차례 진구와 전화하던 아내가 마음을 정해버렸다.
나이 들어 소원이 아들 만나보고 싶다는데, 이번에 이를 거절하면 평생 후회거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몸 성할 때,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오클랜드 주변이라도 모시고 구경 좀 시켜드리고 싶었다. 일이 바쁘다고 효도를 나중에 한다하고 노모를 뒤로 놔두었다가 막상 세상을 뜬후 후회 하는 이가 많았다. 양가 부모님중 살아 계신 분은 시어머니 한분이었다. 살아생전 서로 나누는 사이도 머잖아 끝이 올 것 같았다.
결국 출국 준비를 도와 시어머니를 아내가 모시고 뉴질랜드에 왔다.
어머니는 석달짜리 여행비자로 들어오게됐다. 생선가계도 나와서 구경도 했다. 된장국 저녁밥을 차려놓고 기다릴 때도 있었다.
손녀도 주말에 올라와 함께 온가족 오클랜드 근교 구경을 했다. 어머니가 들판에 양떼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어린아이같았다. 수아가 할머니에게 동물 의사될거라며 학교생활 이야기를 재밋게 들려줬다. 바닷가 미션베이 맛집에 들러 큰 대접에 수북한 특산 홍합 요리도 함께 먹었다. 벨기에산 맥주 한잔도 함께 건배했다. 어머니가 맥주맛에 흐뭇해 하셨다. 한국 막걸리마시는 것 같다고 했다. 벨기에에서는 일하다 중간에 우리 막거리처럼 마시며 힘을 얻는다고 얘기드리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후식으로 특산 모뵌픽 아이스크림도 사서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아껴드시다가 껍질부분, 콘 맛을 음미하시는 듯했다. 우리나라 샘베과자 맛이라고 좋아하셨다.
“외국에 나와 살아도 이렇게 서로 나누며 사는 모습이 복이야. 그거면 됐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오랜만에 미션베이 나무 그늘 벤취에 앉아 정담을 나눴다. 해수욕장 미션베이 벤취에 앉아 멀리 랑기토토 섬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즐거운 이야기가 앞에 보이는 남태평양을 건너 고국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함께한 오클랜드 가족 휴일이었다. 오붓한 시간에 모두 흐뭇해 했다. 예그리나의 꽃이 만개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소일거리를 찾아 손보셨다. 무성한 집 텃밭도 가꿨다. 상추, 풋고추, 된장에 삼겹살까지 구워 저녁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잘 모시고 왔다고 위안을 느꼈다. 가계에서 고단해도 덜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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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째, 안타까운 사달이 벌어졌다. 아내와 종일 일하고 퇴근해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 표정이 울그락 붉으락 했다. 급기야 도마를 내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데크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조각을 치우던 아내의 손등에 검붉은 피가 솟았다. 광기어린 어머니를 진구가 등뒤에서 감싸안았다. 어머니가 거세게 뿌리쳤다. 어찌나 힘이 장사던지 진구가 내동댕이 쳐졌다. 어머니는 실성한 채로 목놓아 울부짖었다. 광란의 상태로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옆집 키위가 뛰어와 보더니 위급상황을 진정시키려고 111 에머전시에 신고했다. 얼마후 경찰차와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경찰과 구급요원의 손에 제압되었다. 바로 구급차에 실려 노스쇼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여러 검사와 응급 치료가 병행되었다. mental disorder로 판명이 났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분노 충동이 일어나면 조절이 불가한 상태라했다. 가족이나 이웃에 해를 끼칠수 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24시간 집중 관리와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한달이 다 돼갔다. 진구 부부는 생선가계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여행차 와서 이런 변고를 치른지라 까마득했다. 딱히 병 중상이 차도가 별로 없었다. 병원비 청구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주변 사람들 말을 듣자니 어머니가 세달이 넘으면 한국으로 추방된다고도 했다. 영어하나도 안되는 어머니가 병원 시설에 갇혀 치료를 받는다는 게 힘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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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 부부는 매일 새벽 6시에 북쪽 알바니 집을 나서서 남쪽을 향해 하버브리지를 건넜다. 서둘러 센트럴 다운타운 시마트 옥션장을 찾았다. 싱싱한 횟감 생선을 골라 큰 플라스틱 박스 두 개에 가득 담아 나왔다. 이어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서쪽 뉴린 지역, 특수 요양 병원으로 향했다. 하루 먹을 음식 세끼분을 넣어드렸다. 간호원한테 끼니마다 잘 챙겨 드리라고 간곡한 부탁도 했다. 먹을 것을 우리 음식으로 매일 갖다 대며 얼굴이라도 보니 조금은 어머니가 위안을 삼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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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계는 오클랜드 남쪽 지역인 오타라 상가지역에 있었다. 섬나라 사람들과 원주민 마오리들이 많이 살았다. [예그리나-피시 앤 칩]. 진구 생선 가계 이름이 특출났다. 아무튼 풍성하고 맛 좋은 피시와 감자 튀김 그리고 싱싱한 생선 포가 잘 팔렸다. 옆집에는 중국인이 하는 돼지고기, 로스트 포크 음식점이었다. 훈제해서 기름기 뺀 돼지고기를 국수나 밥위에 얹어주었다. 우선 양이 풍성해 덩치가 큰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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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 부부의 하루 동선 거리는 오클랜드 전체를 통과했다. 하버브리지 북쪽 집에서 오클랜드 중심 다운타운 시마트 경매장까지 이른 아침에. 시마트에서 서쪽 요양병원까지. 그리고 서쪽에서 남쪽 생선가계까지. 종일 일하고 모터웨이를 타고 남에서 출발해 하버브리질르 건너 북쪽 집으로 퇴근했다. 출퇴근만 해도 150km가 넘었다. 고생을 해도 일단 돈이 벌렸다. 그맛에 그나마 어느정도 피로감이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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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신분으로 뉴질랜드에 왔다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 진구 부부가 일하다 어머니를 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성심성의껏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해 벌수 있는 만큼 더 벌고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게 두 부부의 목이라 여겼다. 자신들이 못하는 부분을 국가가 해주니 열심히 벌어 병원 치료 비용을 세금으로 보태는 데 일조했다. 그 이유에서 버는 만큼 세금 신고도 제대로 했다. 사람사는 도리라 여기는 당위성을 알고나니 사심이 없었다.
주변에 보면 돈 잘 버는 자영업자들이 세무신고 누락으로 몇 년후 세금폭탄을 맞곤 했다. 뉴질랜드에서 세무를 담당하는 IRD(In Rand Avenue)는 한국의 국세청과 같았다. 막강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터라 불의를 과감히 척결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 온 국민로 부터 신뢰받는 정부 기관이었다.
지난 달에도 스시가계를 10여년 하면서 지점까지 몇 개 낸 사람이 급기야 IRD로부터 거의 백만달러 이상의 벌금이 강제 추징되었다. 은행에 있는 잔고가 어느날 다 빠져 나간 거였다. 향후 5년간 자신의 이름으로 비즈니스도 못하고 은행 어카운트도 못 열게 되었다. 당사자에겐 천지가 무너지는 고통이었다. 이민자들이 하는 소규모 업체에도 세무사찰의 칼날이 다가왔다. 식당, 빨래방, 여행업체, 건강식품점등이 세금 폭탄을 맞고 줄줄이 도산되었다. 과도한 욕심은 화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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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허리야!”
진구가 이마에 땀을 훔치면서 허리를 간신히 폈다.
“오늘 오전에 웬 횟감이 그리도 많이 나가지?”
아내가 옆에서 시원한 진저비어병을 따서 진구에게 건네며 말을 받았다.
“오늘 마오리들 씨족 잔치가 열린대서 엄청 주문들 하네.”
“이렇게 장사가 잘 되면 돈은 쌓이는데, 몸이 축나겠어.”
“그래도 그게 어디야. 다른 가계 일하는 사람들은 장사 안돼 힘들다던데.”
바쁜 가게 일에 손 놀림이 빨라진 진구와 아내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현지인 키위들과 남태평양 섬나라 사람들과 원주민 마오리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즐겨찾는 생선 횟감은 멀렛트, 스내퍼, 가와이, 트라벨리 등의 생선이었다. 우리말로 치면 송어, 도미, 고등어, 존도리 쯤 되었다.
예그리나~. 함께사는 이민사회.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민와서 이룬 나라, 뉴질랜드는 서로 나누며 사는 지구 공동체였다. 예전에 읽은 뉴질랜드 통계 기사가 떠올랐다. 세계 176개국에서 온 이민자의 나라라고 했다.
원주민 마오리들은 멀렛트란 생선을 유독 좋아했다. 송어과였다. 보기에도 도톰하니 살이 많이 붙은 생선이었다. 이 생선포를 사다가 집에서 온갖 양념을 해 훈제식으로 불에 익혀 먹었다. 양념 향기도 좋고 뱃속이 든든했다.
신선도 높은 횟감은 한쪽에 진열돼 단골들에게 팔렸다. 나머지 생선은 포를떠서 피시 앤 칩 튀김 음식으로 만들었다. 그 일은 아내 엘 리가 맡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진구가 간밤에 잠도 잘 못잔터에 피곤이 몰려 잠시 밖에 나가 쪼그려 앉아 냉수를 들이켰다.
단골손님인 아일랜드 출신 피터가 가계에 들어오다 깜짝 놀란 얼굴로 진구에게 물었다. 어디 아프냐고. 진구는 겸연쩍게 웃었다. 피터가 여러번 채근하기에 진구가 그간의 어머니 사정을 이야기했다. 한달 지나면 세달 여행자 비자 기한도 만료되는지라 추방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토로했다.
추방돼도 한국에서 치료해줄 돈과 보호자가 마땅치 않았다. 두 여동생이 있는데 큰 여동생은 최근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둘째 여동생은 나약한 몸으로 병을 달고 살았다. 자기 몸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정성을 기울여 매달렸다. 어머니가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부부가 생선가계일은 열심히 하면 어머니는 모시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질랜드는 노약자들한테는 아주 정성을 다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어 믿을 만했다. 피터가 한참을 듣고 나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Humanitarian Immigration!”
진구가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Humanitarian Immigration?”
피터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모든 형제들이 뉴질랜드에서 영주권 받고 살면 부모를 초청 이민으로 할 수 있는데, 진구한테는 해당되지 않았다. 여기에 다른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바로 인도주의적 이민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우선 한국 이민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라고 귀뜸해줬다. 피터도 수소문해 알아보겠다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진구 눈이 번쩍 뜨였다. 피터가 주문한 횟감위에 스내퍼횟감을 수북하니 더 얹어 주었다. 교민지 맨 뒷부분 직업란에서 이민 변호사를 찾아보고 일일이 전화를 했다. 자신있게 해보겠다는 이민알선 업체가 없었다. 마지막이다 싶어 전화한 회사에서 할 수 있다해서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날 일 중간에 시간을 냈다. 상황이 촉박한지라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그 업체에 갔다. 한 몸에 뱃살이 볼록 나온 이가 명함을 건네 주었다. 이민 컨설턴트 대표라 써있었다. 모든 이야길 듣더니, 할 수 있다며 조건을 바로 제시했다. 선수금 $8천에 총 진행 비용 $4만. 도합 $4.8만을 우선 입금하라고 했다. 진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일도 해보기전에 $4.8만을 먼저 달라니? 교민지와 교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내며 요란을 떠는데, 성공 실 사례가 없었다. 이민을 떠나올 때, 호주에서 살다 온 선배가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이민자의 약점을 잡고 사기 치는 브로커들 조심해. 급하게 결정하지마. 많이 알아보고 신중히 결정해. 의외로 신뢰를 갖는 현지인들도 많아. 잘 알아봐.’
실망한 채 면담비로 $200을 던져주고 사무실을 터덜 터덜 걸어 나왔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산 시원한 콜라를 들고 공원 나무아래에 앉았다.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쉬지않고 계속 마셨다. 한 병을 다 목 안에 털어넣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Humanitarian Immigration 변호사를 찾았어요.”
피터한테 온 전화였다. 자기 나라 아일랜드 출신 변호사라고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귀뜸해주었다. 진구 가계와 10분도 안걸리는 거리였다. 팬뮤어 5거리에 있는 상가건물 2층에 있었다.
피터 소개로 만난 이민 변호사 안드레아는 2m가 넘는 후리후리한 키에 얼굴도 시원스러웠다. 옛날 기아농구단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장신 한기범 선수를 연상케했다. 기린처럼 선한 눈매에 신뢰가 묻어났다.
진구의 사정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이후 진구가 간략하게 정리한 서류를 건네자 꼼꼼히 살폈다. 10여분 기다리라 하고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룹 팀 회의를 한 모양이었다. 팀원들의 의견과 경험을 듣고 확신에 찬 얼굴로 나왔다.
진구와 안드레아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1시간 쯤 애기를 나눴다. 안드레아는 이민성에 인도주의 이민을 신청해 좋은 결과를 안겨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에 대해 갖는 간절한 아들의 효성도 존중해주었다. 하늘의 도움도 필요할 거라 덧붙였다. 착수금으로 $2천을 제시했다. 나머지는 그대 그때 일하며 비용청구를 하는데, 시간당 $2~300정도로 생각하라고 얘기해 주었다.
결과가 승인될 때 좀 추가 청구를 하겠다고 했다. 진구는 흔쾌히 승낙했다. 믿음이 갔다. 진행하며 과정별 수고비를 내는 것, 합리적이라 생각이 들었다.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알려줬다. 관련 서류도 한국에 요청해 영어로 공증해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한국민의 정서를 파고들어 인도주의적 선처를 호소했다. 무려 1년 6개월. 모든 서류를 올려 이민 신청을 마무리했다. 결과를 기다렸다. 한자락 희망을 걸었다. 하루하루 고된 일을 하면서도 혹시하는 기대로 버텼다. 근 한달을 보낼 무렵이었다. 안드레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소리가 너무 차분했다. 죄송하다고 말끝을 흐렸다.
기각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변호사 팀도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상당히 자신하는 태도였는데 케이오 패 펀치를 맞자 회사의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이다. 그걸 두고 뭐라하겠는가. 진구도 괴로웠다.
마음이 곤고할 때 들르는 근처 바닷가, 카우리 소나무 아래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덜퍼덕 잔디에 주저앉았다. 망연히 멀리 남태평양 수평선에 시선을 보냈다. 아지랑이인지 신기루인지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닷바람이 스산하게 귓가를 스쳤다.
조용필 꿈의 가사가 반추되었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타국은 고향의 향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어깨가 파도소리 따라 들썩이려던 차, 벌떡 일어났다. 멀고도 외로운 길, 다시 걸어야했다. 급기야 현지인 성당에 들려 노 신부님께 하소연을 했다. 아시아 담당 신부였다. 정서가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상심이 깊던 며칠후, 피터가 가계에 찾아왔다. 안드레아 변호사로부터 소식을 접했다고.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의사를 들었단다. 진구를 독려했다.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보완해가기로 했다. 한국 어머니로서 겪은 일제치하 식민지 생활, 625 전쟁 참화, 아버지가 북한 군의 총을 맞아 다리를 잃은 아픔, 당시 참상을 담은 흑백 사진도 덧 붙였다. 인도주의적 접근에 최선을 다했다.
노모는 뼈빠지는 고생으로 가정을 일구어 냈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 홀로 아들과 두 딸을 키우며 고생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썼다. 두딸이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운 여건, 병원기록과 진단서 그리고 의사 소견도 첨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풍습도 덧붙였다. 아들에게 의지한 어머니의 고독함과 인생말년에 아들과 살다 마무리 하고픈 심정등등... . 참고 자료지만 정성껏 준비했다.
엘 리가 출근하다 요양병원에 들러보니, 시어머니는 불안으로 화병이 도진 상태였다.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중에도 그 일이 자꾸 눈에 걸렸다. 시어머니 생각에 속이 아팠다. 펄펄 끓는 기름통에 밀가루 양념한 생선을 튀기던 중이었다.
“핫! 뜨거!”
아내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딴 생각하다 생선 반죽을 덩어리 통째로 기름솥에 넣다보니 첨벙하며 기름이 확 튀어올랐다. 그게 왼쪽 얼굴에 튀어 작은 화상을 입고 말았다. 화상입었을 때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엘리가 가계 한쪽에 있는 화분에서 알로에를 잘라 그 즙으로 얼굴에 문질렀다. 화상약도 발랐다. 따가웠다. 순간 눈물주머니가 툭 터져버렸다. 주책 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그때였다. 중년의 키위 여성 손님이 들어서다말고 움칫했다.
“무슨 일 있어요?”
눈이 퉁퉁 부은 엘리 두 손을 꼭 잡았다. 흐느끼는 엘리를 의자에 앉히고 위로해 주었다. 덴 부위를 약으로 닦아주었다. 엘 리가 운 게 화상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여성 손님이 딱 알아챘다. 그간의 어머니와 관련한 인도주의 이민 신청 사정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엘리 시어머니미의 난감한 여건에 공감을 보냈다. 듣다말고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키보드로 뭔가를 쉴 새 없이 쳐 내려갔다. 진구 가계 켬퓨터에 USB를 꼽더니 프린팅을 했다. 아래에 서명을 하고는 진구에게 건넸다. 2차 이민 신청시 레프리, 추천 서류로 추가하라고 알려주었다. 진구가 얼떨떨한 채 서류를 받아보니 서명 위에 IRD 스탭이라고 적혀있었다. 신뢰하는 공기업 IRD 국세청 직원이 써준 레프리는 큰 힘이 될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한국인의 정서, 특히나 아들을 의지하는 노모의 심정을 간절히 알려주었다. 진구가 먼저 한글로 장문의 글을 썼다. 그걸 신춘문예에 당선된 한국 친구에게 주어 고쳤다. 긴 문장을 줄여 짧고 감명깊게 다시 썼다. 이것을 오클랜드 대학 교수인 성당 교우에게 영문 번역을 부탁했다. 또 한번의 과정을 거쳤다. 절절한 탄원서같았다. 키위 영문 번역을 한 뒤 공증 변호사의 서명을 받아 추가 자료로 제출했다. 이민 변호사의 꼼꼼한 검토와 보완 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이민성에 접수했다. 그날, 진구는 생선 가계 근처에 있는 키위 성당에 가서 무릎꿇고 간절한 마음을 올렸다. 사람이 할 수있는 일은 다했다. 나머지는 신께 맡기는 심정이었다.
진구가 자주 들르는 현지인 성당 사제께서 가계에 불쑥 들어오셨다. 손에 든 하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진구에게 건네 주었다. 어머니 이민 신청 2차 서류 접수시 레프리 추천서로 쓰라고 했다. 함께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기운이 진구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최종심 결과를 기다리며 또 다른 준비도 구상했다. 만약 이번에도 안되면 뉴질랜드 총리인 헬렌클라크에게 호소문 탄원을 넣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생각을 하며 진구가 생선손질하다 그만 칼이 빗나갔다. 왼쪽 팔목 깊숙이 찔렸다. 검붉은 선혈이 도마위로 낭자했다. 엄청 많은 양의 피를 쏟았다. 급히 도착한 111 구급요원이 서둘렀다. 응급조치후 진구를 앰뷸런스에 싣고 오클랜드 남쪽에 위치한 미들모어 에머전시 병동에 후송했다. 특별 진료와 시술후 가까스로 긴급상황이 수습되었다. 팔에 붕대를 동여맨채 침대에 누워 지긋이 눈을 감았다. 쉬지 않고 달려온 이민 생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 일은 많은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어머니는 ? 가계는?
요즘 아내 엘리도 부쩍 잦은 실수로 넘어졌다. 튀는 기름에 데이기 까지 했다. 진구까지도 부창부수였다. 주의력이 산만해져 한 것을 또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는 자동차를 후진하다가 옆 차를 긁어 먹기도했다. 작업장에서 안전사고까지 나니까 불안했다. 불쑥불쑥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했다. 혹시 어머니같은 병세로 고생하는 건 아닌지,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언제까지 이런 불안정한 날들이 계속되려나~?
상념에 젖어있는데, 다급하게 뛰어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병실 문이 확 열렸다. 아내였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여보!”
하며 울컥이는 목소리로 달려들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 이민 승인됐대!”
목소리가 떨렸다. 이어 내민 건 어머니 인도주의 이민 승인 서류였다. 진구가 벌떡 일어났다. 싼타가 따로 없었다.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성탄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는 12월, 주말이었다.
그날, 교민신문에는 대문짝만한 큰 뉴스가 떴다. 이민 컨설팅 회사가 파산 신청을 내고 호주로 종적을 감췄다는 기사였다. 이민 신청을 처음 상담한 그 회사였다. 이민 신청을 볼모로 한 대 규모 사기극이었다. 사기당한 교민들이 엄청난 절망과 낙담에 빠졌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간절한 심정으로 이민 신청을 원하는 이들 뒷통수를 친 거였다. 거액의 선수금을 받아챈 뒤 잠적한 대표 얼굴이 악마로 떠올랐다. 그 때 기억에 철렁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4만 8천 달러를 날릴뻔 했다. 진구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며칠후, 옆가계 중국로스터 포크 식당 여주인이 울먹이며 들어섰다. 10년을 함께 일해온 식당이었다. IRD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세금 폭탄을 맞았다고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쎄 빠지게 일해 번 돈이 다 날라갔다고 울었다.
전에 그 가계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IRD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주인이 임금을 제대로 안주고 일만 혹사시켰다고. 세금을 제대로 안내고 착복한 것을 폭로해서 IRD가 예의주시하며 조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엘리가 끓는 기름에 얼굴 화상을 입은 날도, 손님으로 가장한 IRD 여직원이 그 가계에 암행순찰을 왔던 거였다. 손님처럼 음식을 시키고 카드 영수증을 받아갔단다. 나중 세무신고 때 제대로 하나 확인했다나. 그러기를 무려 6개월간 지속했다고. 그러면서 옆 가계와 비교하려고 세금 납부 내역을 두 가게 것을 미리 확인했다는 것. 나중에 두 가계 세금 신고 내역을 보여주기까지 했단다. 피시앤 칩 가계와 로스트 포크 식당의 수입과 세금 내역은 천지차이였다.
진구네 생선가게는 성실 신고한 것으로 판명됐고, 중국 로스터 포크 식당은 터무니없게 축소 신고했다는 것. 두 가계가 천지 차이였다. 진구가계에 들러 써준 레프리 추천서가 이민성 제출 서류에 포함돼 좋은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었다. 똑같은 사람의 판단 기준이 한 가계는 세금 폭탄을 투하했다. 다른 가계는 엄청 큰 지원화력이 되었다. 선은 결국 빛을 발했다. 이민사회의 흑백이 갈렸다. 선진국은 공정분배를 하는 대신 불의엔 철퇴를 가했다.
예그리나 가계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에 현지인 성당이 있었다. 진구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곳에 세인트 피터스 스페셜 스쿨이 토요일 날 운영되었다. 정신 발육에 불편이 따른 자폐아 들을 위한 특수학교였다. 본당 사제이신 톰 신부님이 만든 학교였다. 톰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어릴 때 이민온 분이었다. 열 댓명 정도의 자폐아들이 교육을 받아왔다. 많은 봉사자들이 나와서 아이들을 지도해주었다. 언젠가 딸 수아 또래의 여대생이 와서 점심으로 먹을 거라며 15인 분 피시앤 칩을 주문했다. 음식을 만들며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폐아를 위한 특별 식사라고 했다. 월 마지막 주는 생일 파티를 합동으로 해준다고했다. 아이들이 워낙 좋아하는 음식이라 선물처럼 줄거라고 했다. 그 말에 엘리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도 그 봉사나눔에 함께 할 거라고 다짐했다. 기쁜 마음으로 엘리는 더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그날 음식값을 받지 않았다. 매달 마지막 주는 무료로 드릴테니 그냥 와서 배달만 해가라고 했다. 그러길 벌써 3년째 였다.
진구 어머니, 로사는 요양병원에서 말을 잃었다. 시도때도 없이 불쑥 치솟는 분노와 경련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팔순 나이에 몸도 맘도 기력이 빠져갔다. 처음 몇 달은 서구식 식단이 너무 낯설었다. 빵과 우유 그리고 과일은 보기만 해도 이골이 날 정도였다.
음식을 못먹으니 몸이 버텨날 수가 없었다. 다행이 그 뒤로 아들과 며늘이 매일 생선가계에 출근하다 들렀다. 그렇게 전해주는 한국 음식에 그나마 정을 붙였다. 매일 쓰는 생활영어를 한 개씩 익혔다. 떠듬떠듬 입을 뗐다. 며느리, 엘리가 수첩에 한글로 영어발음을 써준 걸 로사는 중얼거렸다. 굳모닝, 워터, 토일렛, 핸드, 헤드, 푸드... .
며느리 엘 리가 강조해준 말을 써먹었다. 모르면 그림으로 그려서 마음을 전했다. 신기하게도 키위들이 알아채는 것을 보고 내심 기뻤다. 옛날에, 로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광주리, 보따리 장사하며 빌려준 쌀과 돈을 자신만 아는방식으로 그림이나 숫자로 적어두었다. 쌀이 몇 가마니인지, 마늘이 몇근인지, 고추가 몇부대인지 등등... . 그 기억을 살려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수첩에 그림으로 그렸다. 그걸 간호사나 같은 병상에 있는 인도, 중국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대충은 의사소통이 되었다. 말은 제대로 못해도 마음을 열어 통했다.
빨간 벽돌 단층짜리 요양병원, 다른 세상이었다. 로사가 현관 앞에 나왔다. 벤취에 앉아 우두커니 화단과 나무를 바라봤다. 턱을 괴고 비스듬히 퍼져오는 햇살을 쬐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도 바스락대며 일하던 습관 때문인지, 일어나 주변을 왔다갔다했다.
서성거리는 모습에 간호원이 나와서 손을 잡아서 벤취에 앉혔다. 불쑥 화가 도질뻔했다. 하는 일이 제지당했다고 생각했다. 간호원이 두손을 꼭 쥐어줘서 간신히 누그러졌다. 간호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일어나 서성거렸다. 오후 해질녁이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를 밟으려고 바삐 움직였다. 그림자는 앞서 도망갔다.
화단 끝 모퉁이에 이르러서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떨어져있는 나무 이파리를 주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새였다. 가드닝하고 가던 정원사가 흘리고 간 이파리였다. 뭐드라~? 아~! 바이올렛이었다. 고국에서 바이올렛 잎을 따서 꺾꽂이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로사 침대 옆 테이블위에 놓인 종이컵을 들고나왔다. 바이올렛 꽃말-영원한 사랑, 양원한 우정!!
그 컵에 화단 흙을 파서 담았다. 그 위에 이파리를 눌러 심었다. 물을 끼얹었다. 침대 머리맡 테이블위에 컵을 올려놓았다. 매일 바라보며 물을 줬다. 가끔 밖에 내다 놓기도 했다. 햇살과 물 그리고 손길이 주어졌다. 며칠이 지나자 이파리 아래로 뿌리가 뻗어 내렸다. 새싹이 한 잎 두잎 솟아났다. 로사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로사는 말못하는 바이올렛과 서로 뭔가를 나누는 사이였다. 새 생명 기운이 로사 몸과 맘에도 뻗쳐 올랐다
서로 통한다는 것, 사물과 미물일지라도, 그건 나눔이었다. 속 털어놓는 친구였다.
이민 변호사인 안드레아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부모님이 아일랜드에서 영국 식민통치하에 말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은터였다. 한국이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한 심정을 이해했다. 부모가 겪은 참상은 트라우마로까지 번졌다.
가족을 제외한 모든 외부 사람들이 두려웠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랐다. 결국 죽으나 사나 가족밖에 없었다. 사는 동안 함께 먹고 자는 것, 그리고 죽을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였다. 그런 정서로 자랐기에 진구와 노모 로사가 한 집에 살수 있도록 돕는 일이 미션, 사명이라도 된 듯이 혼심의 노력을 기울였다.
뉴질랜드는 다른 국가 사람들이 모여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의 나라였다. 다행히 나누고 어려운 사정을 보듬어 주고 서로 챙겼다.
아주 생생한 내 이야기처럼 모든 문건을 정리하고 검토했다. 최종 자료와 함께 2차 신청 서류를 이민성에 올렸다. 안드레아 역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98%까지는 사람이 하니까 최선을 다하면 되었다. 나머지 2%는 화룡점정 같은 것으로 하늘 몫으로 남겨 두었다. 하늘도 감동하면 역사가 쓰여질거라고 믿었다.
생선 가계 이후, 직종을 바꿨다. 모텔 사업이었다. 방 10칸 자리 모텔이었다. 나이들어가는 부부가 운영하는 데 괜찮은 일이었다. 역시 이 모텔 이름도 바꿨다. 스타 모텔에서 예그리나 모텔로 고쳤다. 뉴질랜드는 여행 선진국이었다. 당연히 세계 여행객이 몰려왔다. 더불어 나누는 삶,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길 기대했다.
생선 가계 일에 비해 육체 노동은 적었다. 단지 24시간 끼고 하는 일이라 신경은 항상 쓰였다. 세월이 말없이 흘렀다. 드나드는 손님을 맞이하며 나누는 일이 즐거웠다. 특히나 노 부모를 모시고 여행온 가족을 보면 반가웠다. 자신들이 못한 일을 하는 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응원해 주었다.
그 모텔을 10여년 운영한 뒤, 진구 부부에게도 은퇴 시간이 다가왔다. 딸애도 수의대를 졸업하고 어엿한 수의사가 되었다. 두 내외의 삶에 한 자락 여유의 꽃이 피었다. 남은 인생 조용히 보내며 못다한 여가 생활과 사람사는 도리를 더 하고 싶었다. 특히, 가족중에 몸이 아파 힘드는 경우는 찾아보고도 싶었다. 모텔을 매물로 내놓았다. 마침 잘 알고 지내온 지인이 그 모텔을 사겠다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결국 그 들에게 좋은 가격으로 팔았다.
그즈음, 엘리 여동생이 유방암 투병으로 힘든 상황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결단을 내렸다. 엘리는 고국으로 가서 여동생을 한달쯤 돌보기로 했다. 진구는 모텔 운영을 한 달간 오버랩 지도해 주는 시기였다. 마음에 두워왔던 고국내 산사기행 한달 계획은 뒤로 미뤘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 한달도 그 다음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구가 오클랜드 공항에 엘리를 내려주고 돌아왔다. 하버브리지를 건너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화원에 들렀다. 장미 다발을 샀다. 한국산 소주도 한 병 구했다. 어머니가 계신 오클랜드 공원 묘지로 향했다. 아주 홀가분한 시간이었다. 살아서 함께 해주지 못한 시간, 이렇게라도 챙기게 되었다. 예그리나를 곱씹어보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