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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25. 주님의 만찬(2)
2015년 5월 17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기념하고 전파함
고린도교회가 사랑과 교통을 위해 모여서 식사를 함께 했던 소위 애찬은 계층 간의 격차만을 들어내고 분열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바울은 이를 강하게 책망하고 자기가 받은 주님의 만찬에 대한 계시를 제시하였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다. 고린도 교회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사랑을 나누자 했던 애찬(아가페)이라는 것은 계층 간의 격차를 요구했다. 그리고 분열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니까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바울은 이것을 강하게 책망하고 자기가 받은 주님의 만찬에 의해서 필요한 주님의 계시를 열어 놓았다. 성경으로는 최초로 만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교통을 위한 하나의 몸을 위해 친히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으로 잔치를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모으셨다. 이 잔치는 하나의 몸, 하나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교통을 위한 하나의 몸을 위해서 친히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으로 잔치를 준비하고 제자들을 모으셨다. 이 잔치는 하나의 몸, 하나의 생명을 위한 것이었다.
하와는 아담의 생명을 대표하는 갈빗대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아담은 이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라 하였던 것이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몸, 이것이 완전한 연합이다.
하와는 아담의 생명을 대표하는 갈빗대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아담은 이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렇게 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될지라.’ 이렇게 했던 것이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몸, 이것이 완전한 연합이다.
세상에도 연합은 많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연합하는 것이다. 미국은 합중국이다. 연합된 나라라는 뜻이다. 우리는 한 나라에서 8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미국은 8개의 나라가 합해서 된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이해관계가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중국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갈라질 수 있는 것이니까 진짜 연합은 한 생명의 한 몸이어야 한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생명은 한 몸과 한 생명이다. 이해관계가 없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문화를 만들었고 이 문화는 인간들을 각각의 계층으로 분열(바벨) 시켰던 것이다. 이 분열이 교회 안에도 들어왔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목적으로 모여도 결과는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다. 모순되게도 좋은 목적으로 일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분열의 주동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의 문화를 만들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가면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농사짓는 사람도 나오고, 악기 부는 사람도 나오고, 칼날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도 나온다. 이것들은 인간 문화를 의미한다. 이 문화는 인간을 각각의 계층으로 분열시켜 놓았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서로 능력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니까 서로 다 갈라져 있다.
이 분열이 교회 안에도 들어왔다. 그래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학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이런 식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적으로 모여도 결과는 분열을 초래한다. 이게 아주 아이러니 한 일이다. 교회는 다 좋은 목적으로 모였다. 그런데 가보면 분열된다. 왜냐하면 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열이 생긴다. 모순되게도 좋은 목적을 일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분열의 주동자가 된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무슨 좋은 목적으로 ‘모이자.’ 하면 갈라져 버린다. 모이자는 말을 안했을 때는 그냥 있다가 갈라져 버린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세계 교회의 연합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을 했다. 그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것 때문에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 지금 우리 나라의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있다. 그이후로 WCC와 NCC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주님은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또 이와 같이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 하셨다.
주님은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한 만찬의 자리를 마련하셨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또 이와 같이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니 곧 언약의 피니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실 줄 아시고 일부러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았다. 의도적이다. 목적을 가졌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음식이라는 것이 자기의 몸과 자기의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이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생명, 한 몸을 위해서고 한 몸의 한 생명을 위해서다.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것은 “...에 이르도록” 하라는 뜻으로서 새기라는 말이다. 돌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게 하듯이 생명에 각인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그의 왕국을 가져오는 것이다.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말은 ‘~에 이르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 말을 우리말로 하면 ‘새기라.’는 뜻이다. ‘아주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하라.’ 그런 말인데, 돌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듯이 생명에 각인 되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돌에 새기듯이 새겨 놓으면 이것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할 게 아닌가!
우리 생명 속에 새겨진 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전한다. 우리가 지식으로 안 것은 어느 환경에 가면 없어진다. 그런데 생명 안에 새겨진 것은 죽을 때까지 안 없어지고 계속해서 전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를 기념하라.’는 말은 이렇게 기념행사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에 이르도록, 죽을 때까지 전하는 데 이르도록 그렇게 새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명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어떤 기억도 학습으로 해 놓은 것은 다 사라진다. 그러나 생명 안에 새겨진 것은 죽을 때까지 안 사라진다.
우리가 수영을 해 보면 사람이 물에 뜬다는 것이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그냥 물에 뜬다. 그런데 사람만 안 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뜨는 때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평생 안 잊혀 진다. 한 번 뜨면 그 다음에 어느 물에 들어가도 다 뜬다. 그런데 지식으로 배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진다. 그래서 ‘생명으로 새겨진 것은 이렇게 안 없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수영장에 가면 그냥 알 수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그의 왕국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다. 그냥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쫙 내려와서 이렇게 전시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오신다는 뜻은 그분의 왕국이 오신다는 뜻이다. 왕국이 안 오는 데 오시면 뭘 하시겠는가? 왜 초림 때 와서 십자가를 졌는가 하면 자기 나라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오실 때는 나라를 가지고 와야 한다. 나라가 없이 오시면 또 십자가에 달릴 게 아닌가? 그분은 나라를 가지고 오신다. 나라 없는 설움이라는 것이 아주 무서운 것이다. 유태인들이 왜 600만 명이나 학살을 당했는가? 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었다. 민족은 있는 데 나라가 없다.
그러니까 왕국을 가지고 온다. 이것이 목표다. 왕국을 어떻게 가지고 오겠는가? 하늘에서 왕국을 만들어 가지고 온다. 말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들으면 하늘 어디에다 준비해 두었다가 한꺼번에 확 내려오겠는가? 왕국과 함께 온다는 뜻이다. 왕국과 함께 오려면 무슨 수속이 있어야지 그냥 오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밀리고 밀려서 골고다 까지 밀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무슨 수로 자기 나라를 가지고 오겠는가? 그것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목표는 마귀에게 유린 된 인간을 되찾아서 창조의 목적대로 자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율법을 주셨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목표는 마귀에게 유린된 인간을 되찾아서 창조의 목적대로 자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그냥 이렇게 장난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지어 놓았다. 나라란 말은 통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능력, 그것이 나라다. 그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창조했는데 마귀는 왜 사람을 유혹했는가 하면 그 나라가 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속에는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분열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이삭과 야곱을 거치고, 그 다음에 애굽에 가서 많이 키워서 광야로 나오게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갖게 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가나안에 나라를 세우게 했다. 이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목표가 죽으면 천당 가는 것, 이것이 구원의 목표가 아니고 그 나라가 되는 것이 목표다. 그 나라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땅 위에 자기 나라가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그렇게 말한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말 같지만 대단히 슬픈 말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면 땅에는 없단 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왜 그런가? 그 나라가 땅에 와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임하십시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그 말은 하늘에서는 하나님 마음대로 되는 데 땅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늘 그 기도를 해야 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망해버렸으니까.
율법을 주신 것은 이미 유린 된 인간을 돌아오도록 가르치는 것이었으나 인간이 너무 깊이 빠져있음으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셨다. 그는 죽음을 통하여 만유를 포함한 구속(되돌림)을 이루시고 인간을 유린하고 조롱하는 거역한 천사에게서 인권을 회복하심으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우편에 오르셨다.
또 율법을 주신 것은 왜 주었는가? 이미 유린 된 인간을 돌아오도록 가르치려고 주신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먹고 지금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거역하고 있는 그 인간들을 되돌아오게 하려고 그래서 율법을 주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효력을 발생하지 못했다. 율법이 선하고 온전한 줄은 다 안다. 사람들도 알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이 온전하다는 것을 다 알 고 있다. 하지만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그렇게 말한다. 해도 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다 지킬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율법이 무슨 못 지킬 법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니다. 그런데 왜 못 지켰다고 하는가 하면 그 율법을 주신 이의 마음과 같지 않다. 그러니까 주신 이의 마음 다르고 지키는 이의 마음이 다르고 그러니까 아무리 지켜도 마음에 만족이 안 되는 것이다. 한 몸 안에서 된 일이 아니면 내가 만족이 안 된다. 똑 같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을 보낸 것이다. ‘종을 보냈더니 이렇게 밖에 안 되니까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리라 하고 보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하셨다. ‘종들을 보냈더니 욕하고 때리고 이렇게 보냈다. 이번에 아들을 보내면 영접하리라. 하고 아들을 보냈더니 상속자니까 죽이고 우리가 갖자.’ 이렇게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비유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보냈는가? 율법으로 약속으로 계약으로 문서로 안 되니까 아들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생명을 상징한다. 내 생명의 표현은 아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나와 하나도 닮은 데가 없다면 곤란하다. 어디 발가락 하나라도 닮아야지 전혀 닮지 않았다면 누구 아들인지 모른다. 참 이상하다. 어디가 닮아도 닮는다. 뒷모습이 닮아도 닮고 목소리가 닮아도 닮고 하여간 어디가 닮아도 닮는다. 생명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을 보냈다. 이 말은 이제 아들들이 되게 하려고 보냈다. 아들 하나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이 아들을 통해서 아들들이 되게 하려고 불렀다. 율법을 지키도록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왜 그런가? 아들이 아니니까 안 되었다. 내 손이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보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만유를 포함하는 구속을 이루었다. 만유를 포함한 구속, 이것은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구속은 되돌린다는 말이다. 되 물리는 것인데 예수께서 이루신 일은 여러 가지 많다. 보여주신 것도 많고 하신 말씀도 많고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구속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결정적인 일은 우리를 되돌리는 것이다. 원위치로,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던 그 원위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위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만약에 이 구속이 예수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 모세가 더 큰 일을 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별로 없다. 병자나 고치고 다녔지 한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모세를 생각해 보라. 애굽에서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엄청난 일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보다 큰가? 아들이 왜 큰가? 그는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 사람들아 육신적으로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애굽에서 종살이 했단 말이다. 종살이 하던 것을 벗어나서 본래 하나님 백성이었으니까 본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한 것, 이것이 유월절이다.
그래서 ‘광야에 나가서 무엇을 하려고 가느냐?’ 하고 바로가 물으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갑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백성이니까 ‘우리가 원래 하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이다. ‘우리는 원래 하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멀리 가지 마라.’ 그랬다. ‘멀리는 가지 말고 가까운 데 가라.’고 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멀리 가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를 떠나려는 판인데 멀리가지 말라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모세의 구속은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종노릇하던 데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는 백성을 만든 것이다.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안 바뀌었다. 그래서 그 후로도 많은 노력을 했다. 양식을 바꿔주고 그래서 생각을 바꿔주고 그랬는데 그래도 안 되어서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다 죽고 새로 태어난 사람만 가나안에 갔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후에, 40년 후에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갔다. 이것은 새 생명을 상징한다. 새 생명만 갈수 있다. 아들을 통한 생명만 갈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이렇다. 굉장히 중요하다.
죽으심을 통해서 만유를 구속한, 되돌림을 이루시고 인간을 유린하고 조롱하고 거역하는 천사에게 인권을 회복한 것이다. 사람은 원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지어졌는데 종이 되어버렸다. 마귀의 말을 듣고 종이 되버렸다. 천사는 원래 종이니까 자기보다 나은 자가 있으면 안된다. 그래서 인간들을 다 자기와 같이 되게 만들었다. 선악과는 자기가 먹은 양식이다. 자기가 먹은 양식을 줌으로써 자기와 같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천사에게서 인권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되돌린다는 말이니까 우리 인권을 권세를 되찾은 것이다.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
승천하였다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인간을 유린한 마귀를 제치고 하나님 통치의 영역으로 오르셨다는 것이며, 보좌 우편에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정의 주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승천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공중권세 잡은 자를 제치고, 지금은 공중권세를 누가 잡고 있냐 하면 마귀가 잡고 있다. 공중권세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625전쟁 때 우리는 비행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소련제 미그21 로 그때 당시로는 굉장히 좋은 비행기였고 최신의 비행기였다. 그것을 밀고 내려왔다. 지상에는 탱크를 밀고 오고 공중에는 미그 21기가 내려오니까 꼼짝할 수 없다. 그래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그런데 뒤로 미군이 반격을 했다. 미군 비행기에 미그21이 당하지 못했다. 비행기 성능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종술이 떨어졌다. 왜냐하면 미국은 기름이 풍부하니까 많은 훈련을 해서 조종사들이 세계 제일의 조종사들이다. 그런데 북한은 기름이 부족해서 연습을 못하니까 공중전을 하면 다 떨어졌다. 공중에서 다 없어졌다. 그래서 초반에만 미그기가 날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없어졌다. 그래서 북한 상공에는 미군이 점령했다. 제공권을 장악했다. 제공권을 장악하니까 지상에서 뛰어봤자 공중에서 폭격을 해대니까 어쩔 수 없다.
우리도 인간이 하려고 하면 왜 안 되느냐 하면 공중에 조종하는 놈이 있어서 그렇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다. 나는 내 맘대로 안 된다. 왜? 공중에서 권세를 잡고 있으니까, 그 말은 영계에서 주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 이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있는 한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된다. 땅위에서 아무리 전쟁을 잘해봤자 공중전에 못 견딘다. 공중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데 숨어있는 군대가 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군대이다. 이것을 제쳐야 인권이 회복된다. 우리가 분명히 인권이 회복되어도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도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있으면 계속 전파를 보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안 된다.
그래서 천사에게서 인권을 회복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 이 말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이겼으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왜 임하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어서 그렇다. 공중에서 막고 있는데 내려오려고 해도 내려올 수가 없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파를 보내도 공중에서 막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전파를 보내도 오지 않는다. 은혜의 전파가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생각하면 끝이 없는데 은혜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원망할 것만 생각이 난다. 하나님은 왜 이랬는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나한테는 왜 이것밖에 안주는가? 이런 것만 남아 있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은 다 어디로 가고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받고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도 받고 자란 것은 하나도 없고 중간에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그것만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지 그것만 남아있다. 왜 그런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어서 공중에서 가로막은 것이 있다. 부모의 은혜가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선악과이다. 선악과로 보니까 내가 잘한 것은 생각이 나는데 남이 잘한 것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은혜를 알면 사람이 다 된 것이다. 은혜를 알면 다 된 사람이다. 은혜 아닌 것이 없지 않은가. 부모의 은혜 선생의 은혜 하나님 은혜까지 가지 않아도 그것만 알아도 사람이 다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은혜까지 안 사람은 완성된 사람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는 그 은혜가 전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아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몰랐구나.’ 이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잠자다 깨난 사람처럼 ‘내가 다 받았는데 몰랐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천지개벽이 다른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는데 생각이 바뀌면 천지개벽이 되는 것이다. 은혜를 아무리 받고도 모르는 사람은 계속 불만뿐인데 어느 날 확 바꿔져서 이것도 은혜고 저것도 은혜면 세상이 바꿔진 것이 아니냐. 확 바꿔진 것이다.
그러니까 승천했다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를 물리치고 하늘의 제공권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유린한 마귀를 제치고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올랐다. 하나님이 아무리 통치하려고 해도 이 막이 놓여져서 하나님의 통치가 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행정의 주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보좌 우편이라는 말은 조선 왕조로 말하면 좌의정이다. 임금 앞에서 볼 때 좌의정인지 우리가 알 때는 우의정이 높을 것 같은데 좌의정이 더 높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것과 임금이 보는 것이 달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오른 손으로 임금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이 좌의정이다. 임금의 주권을 가졌다는 말이고 임금의 주권을 다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 하나님의 행정의 주권을 잡았다. 왜?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물리쳤으니까. 그래서 6.25때 제공권을 잡고 나서 북한은 밀리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일본 비행기가 가볍고 빠르고 훨씬 많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조금 늦게 했지만 더 큰 비행기를 만들었다. 돈이 많으니까 더 큰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큰 비행기와 작은 비행기가 전쟁을 하니까 전쟁이 될 수 없다. 고사포 거리가 다르다. 아무리 작은 비행기가 장착을 해서 간다고 해도 오백 미터밖에 못 간다면 더 큰 비행기는 칠팔백 미터를 가니까 전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일차적으로 제공권을 잃었고 두 번째는 제해권을 잃었다. 일본이 군함이 많은데 작다. 배가 작으니까 큰 대포를 설치할 수가 없다. 그런데 미국은 배가 크니까 대포도 크고 길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데 싸우는데 전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원자폭탄만으로 패전을 한 것이 아니라 해상권을 잃고 패전했다. 그래서 일본 열도가 완전히 포위가 됐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해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을 했다. 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는데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은 심연이라는 뜻인데 큰물이라는 뜻이다. 그 바다 때문에 땅이 갇혀있었다. 그런데 그 바닷물이 걷히고 뭍이 드러났다. 예수님께서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승리가 확보됐다는 말이다. 왜 그랬는가? 아들로서, 순수하게 인권으로서, 주여 믿습니다. 해서 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인권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마귀와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이 일부러 한 전쟁이다. 성령이 그를 데리고 광야로 나갔다. 우리처럼 시험을 한 것이 아니고 전쟁하기 위해서 데리고 나갔다. 거기서 승리를 못하면 복음을 전해도 소용이 없다. 거기서 마귀를 제압하고 나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탱크를 제압한 것이다. 이것은 지상권이다. 처음엔 지상권을 제압해서 전쟁하고 다음에는 십자가에서 제공권을 장악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았다. 하나님의 행정의 주권을 잡았다.
이 주권은 구속의 결과로 얻으신 교회를 통해서 다시 오실 주님의 왕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주권은 구속의 결과로 얻은 교회를 통해서 다시 오실 주님의 왕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혼자 실행할 수 있느냐 하면 실행할 수 없다. 교회가 있어야 그것이 실행이 가능하다. 아무리 공중 권세를 다 장악하고 바다를 장악했다고 해도 육상에서 육군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육군이 있어야 점령을 하지 육군이 없으면 폭격만 하고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조금 있으면 도로 나온다. 죽은 것 같은 바퀴벌레가 살아나듯이 폭격을 해놓으면 다 죽을 것 같은데 또 살아난다.
그러니까 공중권세를 잡아도, 제해권을 잡아도 전쟁에 승리한 것은 아니다.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다. 지상군이 들어갈 수 있어야 승리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먼저 지상군을 점령을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돌로 떡을 만들어 봐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빌딩에서 떨어져 봐라. 이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어떻게 하셨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는데서 마귀는 그냥 도망을 쳤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사람인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생각했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항상 죄인입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했다. 물론 중간에 잘못해서 선악과를 먹기는 했지만 그것만 뱉으면 완전하다.
유리병 속에 똥을 넣었어도 빼버리고 퐁퐁으로 씻으면 된다. 그러면 그 유리병은 깨끗한 것이다. 하나님이 오죽이 만들어놓았겠는가. 플라스틱 통처럼 만들었겠는가. 플라스틱 통에는 무엇을 한번 담아놓으면 배어들어서 냄새가 안 없어진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인간은 구제불능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유리병으로 만들어 놓았다. 3천도에 구워서 유리병으로 만들었다. 똥이 들어가든지 양잿물이 들어가든지 뭐가 들어가든지 씻어 내면 없어지게 되어 있다. 원래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승리는 정해져 있다. 교회를 구속하신 이유는 바로 똥이 들어 있던 유리병을 똥을 퍼내고 깨끗이 씻어낸 것과 똑같은 것이다. 원 위치로 돌아 왔다. 이것은 똥병이 아니고 물병이다. 구속의 결과로 얻은 것이 교회다. 예수님이 바람을 잠잠케 해서 교회가 나온 것이 아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서 교회가 나온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해서 교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구속해서 얻은 결과는 교회다. 이것은 유일한 선물이다. 교회가 유일한 생산품이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더라도 교회를 얻지 못했다면 또 실패다.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 교회가 왜 중요하냐? 하면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땅위에서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교회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나라가 만일 어떤 나라와 싸워서 그 쪽 나라를 다 뺐었다. 그 쪽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거기 가서 살 사람들이 없으면 뺏으나 마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월남에 사람들 사서 넣겠습니까! 우리가 뺏은 땅에다 누구를 갖다가 넣겠습니까! 아무도 안 가려고 하면 그러면 그 땅이 빈 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적은 없었지만 빈 땅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도로 적이 들어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렇게 말을 했다. 우리 생각 같으면 한꺼번에 몰아내면 얼마나 좋겠냐! 고 생각하지만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그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싹 몰아내고 나면 빈 공간이 된다. 빈 공간이 되면 도로 잡초가 난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점령하라고 했다. 우리가 점령할 사람들이 생길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점령해 가라고 했다. 그러니까 구속받은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이겨놔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다.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약의 요점은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구속의 결과로서 교회와, 교회의 승리로 다가오는 왕국에 있다.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 구속을 새겨 전파함으로서 왕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의 요점은 십자가를 통한 구속, 가장 중요한 요점이 구속이다. 구속의 결과로서 교회, 교회의 승리로 다가오는 왕국,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구속을 이루어 놓으셨다. 구속을 이루어 내고 구속 받은 사람이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왕국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의 요점은 아들을 통해서 구속하고 교회를 얻고 그리고 왕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요점이다. 새 언약의 요점!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 구속을 새겨서 전파함으로써 왕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왜 성찬을 하느냐? 왜 우리가 이것을 새겨야 되느냐? 왜 우리가 먹어야 되느냐? 새겨서 전파함으로써 왕국이 오기 때문에 왕국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전파한 만큼 왕국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새겨서 전파하라고 하는 것이다. 기념하고 전파하라!
구속 받은 사람들은 한 덩이의 떡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다. 주님은 죽으심의 결과로 교회를 얻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주님이 왕국을 가지고 다시 오시게 하기 위하여 그 때까지 그의 구속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때까지의 교회 존재 이유다.
구속 받은 사람들은 한 덩이의 떡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을 비유한 말씀은 한 알의 밀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고 그렇게 말씀 했다. 이 많은 밀들은 떡을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 같으면 빵을 만들기 위함이다. 한 덩이의 떡 이것이 바로 교회다. 밀알들이 많은데 그 밀알들을 갈아서 한 덩어리를 만든 것이 빵이다. 밀알 그대로 있으면 빵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대로 있으면 밀이지 빵이 아니다. 그것이 갈아져서 뭉개져서 떡이 돼야 그래야 빵이 된다.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그 말만 했다. 그 다음에 떡이 나온다.
그러니까 주님의 죽으심은 죽으심의 결과로써 교회를 얻으셨다. 자신이 죽으시고 교회가 나왔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얻으신 것이 교회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주님이 왕국을 가지고 다시 오게 하기 위해서 그 때까지 왕국이 올 때 까지 왕국이 나올 때 까지 그의 구속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왕국이 올 때까지 새겨진 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으신 그분을 전파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을 전파해야 하나님 왕국이 된다.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에서 왕국을 만든 다고 만든 것이 캐톨릭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캐톨릭이다. 알고 보면 캐톨릭은 하나의 왕국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전해서 왕국이 된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의 종교 왕국을 만들어 놓았다. 바티칸 시티는 외형은 왕국의 모형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이탈리아 전체가 캐톨릭 왕국이었으나 무솔리니가 그것을 빼앗아 버리고 바티칸시티만 왕국으로 남겨 놓았다. 실제적인 영토, 등기상의 영토는 바티칸 시 뿐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캐톨릭 인구가 있는데 이것은 왕국이다. 그래서 교황이라고 부르고 교황을 그들의 황제로 생각한다.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국의 모양은 그대로 갖추고 있다.
실제적인 왕국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모양은 왕국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캐톨릭이다. 개신교는 모양마저도 없으니 어쩌면 개신교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개신교는 모양마저도 없으니 갈 데라고는 천당 밖에 없는 것이다. 캐톨릭인들은 지상에서 자기들의 왕국이 있는데 개신교인들은 지상에서 자기들의 왕국이 없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수직적으로 왕국이 내려온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기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몇 월 몇 일에 온다고 해서 기다린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뚝 내려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동네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 안식교 사람들은 높은 데로 오신다고 했다고 다 높은데 가서 살고 있다.
이런 것들은 땅위에서 왕국이 없어서, 그분이 통치하는 영역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지금 현실적으로 그 분이 통치하는 영역은 교회뿐이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을 새기고 있고 그로 인해서 구속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통하는 곳이지만 세상은 안 된다. 세상은 예수님의 나라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다. 교회만이 하나님의 나라고 교회만이 예수님의 나라다.
그러니까 교회는 땅위에서 굉장히 귀중한 존재다. 비록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에게는 이 지구상에서 교회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자기 나라기 때문이다. 내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지 한국은행에 돈이 얼마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다.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명령을 할 수 있고 자기가 통하는 곳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교회 보다 좋은 것이 많다. 똑똑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사람도 많고 좋은 것이 많이들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좋은 것을 찾아다니시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못 났어도 교회로 오신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니면 안 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를 않는다. 그러니 교회 밖에 오실 데가 없다. 오늘 대구 지상으로 하나님이 오신다면 어디로 오시겠는가? 지금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는 곳으로 오시지 말씀을 안 듣는 곳으로 뭐하러 가겠는가? 그러니까 말씀을 하시면 듣는 곳으로 가신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말씀을 하시면 듣는 곳에 계신다. 멀리 어디에 산중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어디 기도원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말씀이 통하는 곳에 계신다. 인간적으로도 그렇다. 자기 말을 듣는 사람에게 가지 자기 말을 안 듣는 사람에게 가겠는가? 친구의 경우 내말을 들어주고 교통이 되는 사람이 친구이지 전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다. 여러분 주변에 혹시 그런 친구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말은 절대 안 듣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다. 잘 들어야 친구가 생긴다.
이 땅위에서 왕국을 준비하는 유일한 존재가 교회다. 이것이 또한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교회가 아니어도 좋은 것이 많다. 물론 교회도 좋은 것이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는데 왕국을 준비하는 곳은 교회뿐이다. 우리는 지금 왕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왕국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한다. 나라가 임하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이는 내가 왕국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오겠는가? 내가 죽으심을 오실 때 까지 전해야 오는 것이다. 그것은 전하지 않고 입을 딱 다물고 앉아 있으면서 ‘나라이 임하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소서’하고 자기 혼자 골방에서 이러고 앉아있으면 나라가 임하겠는가?
여러분들도 직장에 나가시는 분들은 알 것이다. 직장에 나가서 입 딱 다물고 앉아있다. 몇 년씩 다녔어도 입 딱 다물고 앉아있다. 이러면 이 사람이 구속을 받은 사람인지 안 받은 사람인지 이 사람 속에 뭐가 새겨져 있는 사람인지 안 새겨져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모른다. 왜냐하면 혹시 입을 열었다가 자기가 혹시 실수하면 지탄받을 까봐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안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 모르겠지만 하여간 무슨 이유로 안하고 있다. 그러면 왕국이 어떻게 오겠는가? 왕국이 안 온다. 공원에라도 가서 와라 하니까 누구라도 오는 것이지 길례자매가 뭐 유명한 말 했겠는가 생각해 봐라 별거 아닌 말을 했는데 사람들이 온다. 그러니까 입을 열어야 무엇이든 오지 입을 닫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온다.
우리는 지금 왕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인데 왕국을 준비하려면 무엇이든 해야 준비가 되는 것이지 가만히 있는데 준비가 되겠는가 첫째는 기도를 그렇게 해야 하고 둘째는 내가 왕국을 준비하러 다니는 사람이 돼야 한다.
교회는 구속과 왕국 사이에 있다. 구속과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피 흘린 양이 왕이 되어 그의 왕국을 세운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나 선한 마음으로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있다.
교회는 구속과 왕국 사이에 있다. 구속 받았다. 왕국이 아직 안 오고 있지만 올 것 아니겠는가 구속과 왕국사이 그런데 구속과 왕국 사이가 교회다. 이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수도 있고 그렇다. 때와 기안은 아버지께 속해 있다 너희 알바가 아니고! 이렇게 돼 있다. 너희는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 그래서 날짜를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고 그런 것인데 어떻게 날짜를 정하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컴퓨터로 어떻게 계산해서 날짜를 정해가지고 세계에 발표하고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날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가 하기 달렸다.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왕국은 더 크게 올수도 있고, 더 적게 올수도 있고, 더 빨리 올수도 있고 더 늦게 올수도 있고 그렇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한테“아버지 내가 언제 장가갑니까?”이렇게 물으면 아버지가“스물다섯 살 먹으면 장가가라”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스물다섯 살 먹어도 안 크면 어떻게 가겠는가? 아니 스물다섯 살 먹으면 장가보내주마 했는데 이놈아가 크지 않고 있으면 열다섯 살 밖에 안 되고 안 크고 있으면 어떻게 스물다섯 살이라고 하고 장가를 보내겠는가? 켜야 장가를 가는 것이다. 혹시 스물다섯 살에 장가를 보내 주마했다가도 이 녀석이 빨리 커서 스물 살만 되도 장가가게 됐으면 장가를 먼저 보낼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날짜를 정해 놓고 있겠는가 자기가 크기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다. 돈 버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 사람하기에 다렸다. 언제 돈 버느냐?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돈 벼냐? 이것은 말이 되지만 언제 돈 버냐? 몇 년도면 돈 버냐? 이런 것을 점쟁이를 찾아가 물어보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기하기 달렸는데 점쟁이보고 언제 내가 돈 버냐고 물어보면 되겠는가 점쟁이들도 다 알지만 돈 벌어먹으려고 하니까 그냥 가르쳐 주면서 “당신은 30살만 되면 돈 벌 것이요”이렇게 말해 준다. 이 말은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다.
교회는 구속과 왕국 사이에 있다. 그런데 이 구속과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국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너무나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있으니까 제가 여러분들한테 말할 때는 쉬운 것 같지만 막상 보니까 강이 너무 크게 보인다. 그래서 ‘아이쿠 내가 이 말한 다고 되겠는가!, 내가 입 벌린다고 그 나라가 되겠는가! 조용히 살다가 가자 직장생활 하면서도 모른 체하고 그냥 조용히 살다 가지, 일 이나 잘 하고 가지! 여기서 내가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왕국이 금방 오겠는가!’이래서 못 한다. 금방 왕국이 온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다.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돈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온 정신이 다 팔리는 것을 봤다. 돈이 보여서 그렇다고 한다. 아직 벌어서 오는 사람은 못 봤지만 빠진 사람이 많다. 왕국도 그렇게만 보인다면 금당 올 것이다. 그런데 왕국은 그렇게 안 보인다. 멀리 보이고 언제 올지도 모르고 그렇다.
‘야 이 대구교회 갖고 되겠느냐?’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한테 이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 그럼 대구교회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말입니까?”이렇게 묻은 사람도 있다. 나라라는 것이 크다고만 나라인가? 아니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다고 나라인가? 작아도 나라가 있다. 싱가포르도 나라다.
그러므로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이것이 문제다. 왜 건널 수 없는 강인가 하면 피 흘린 양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이분은 있을 곳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이고 아무도 변호해줄 사람도 없고 옹호해줄 사람도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되어서 왕국을 세운다는 것은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된다. 천당에 간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겠지만 어린양이 사자가 된다는 이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를 흘리고 죽은 그 사람이 왕이 된다는 그것이 세상 상식으로 이해되겠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이 필요하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다. “병이 나을 줄 믿습니다.”는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왕이 되겠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 사람이 왕이 되겠냐는 것이다. 이것을 믿을 수 있겠냐는 그 말이다. 어려운 문제다. 말을 시작하기는 했는데 너무 어려운 문제다. 세상에 있는 어떤 지식으로도 어떻게 도를 닦는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용납이 안 된다. 가능하지 않다. 예수 믿으면 좋은 사람이 된다는 이런 것은 가능한데 그 나라가 온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직적인 종말론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해서 와장창 하면 하늘에서 폭탄 떨어지듯이 떨어질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한다. 90년 10월에 사람들이 휴거한다고 하얀 옷을 입고 등에는 번호를 써 붙이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들어가는 것을 mbc에서 촬영을 하고 그랬었다. 내가 몇 번인데 옷만 남고 나는 사라질 것이라고 인터뷰를 했었다. 이런 것은 믿어져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왕이 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이다. 혹시 하나님이 어떤 조화로 내 몸만 쏙 빼가서 옷만 남는 것은 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린양이 사자가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그 말이다. 천당에 간다는 것도 믿어지고 다른 것은 다 믿어지는데 이것만은 믿기 어렵다.
이 건널 수 없는 강에 누가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세상에 어디에 이런 다리가 있는가?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이런 다리가 없다는 것이 우주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 사자와 어린양 사이, 왕국과 구속 사이,......여기에는 교통하고 연합하는 다리가 필요하다.
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있다. 이 건널 수 없는 강에 누가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세상 어디에 이런 다리가 있겠냐는 것이다.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이런 다리가 없다는 것이 우주적인 문제였다. 다리만 있다면 문제가 아닌데 이 다리가 없다. 이 문제가 어떤 문제인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다. 창조자가 피조물이 되겠나, 피조물이 창조자가 되겠나 이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자와 어린양 사이를 놓고 보면 가능한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 왕국과 구속 사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는 교통하고 연합하는 다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생겼다.
문제의 중심은 사람과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할 수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 교통한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다 해왔던 일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교통을 했다. 그렇지만 왕국이 되지는 못했다. 모세같은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40주야를 있다가 내려왔다. 심지어는 얼굴에 빛이 날 정도였다. 그 정도로 하나님과 많은 교통을 했었다. 그런데 다리가 되지는 못했다. 자기는 교통했는지 모르지만 온 백성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교통이 안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주어졌다.
그래서 죄 없는 어린양이 이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일 같이 제단에서 번제물로 드려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 단번에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9:12)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교통하는 왕복차선의 길을 위한 다리를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죄 없는 어린양이 이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같이 제단에서 번제물로 드려져야 했다. 왜 매일 번제를 드려야 하는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로 가려면 번제부터 드려야했다. 그래야 지성소까지 갈 수가 있다. 번제단에서 나온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뚜껑에 피를 뿌려야했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제사장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상징하기 위한 그림이다. 죄 없는 어린양이 매일 같이 죽어야했다.
그런데 히브리서 9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영 단번에 한 영원한 제사들 드렸다고 한다. 매일 같이 드리는 양의 피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께서는 영 단번에 제사를 드렸다.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다.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땅위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법궤에 가기 위해서도 매일 같이 양이 죽었다. 그래도 매일 죽어야지 매일 죽지 않고서는 지성소에 못 간다. 그리고 대제사장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단번에 드리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교통하는 왕복차선의 길을 위한 다리를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다리를 놓았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신 것 같이 교회는 구속과 왕국 사이의 다리가 된다. 이 다리로서의 교회를 얻으신 주님은 이제 보좌 우편에서 땅을 향한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권을 행사하신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신 것 같이 교회는 구속과 왕국 사이의 다리가 된다. 어떻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셨는가? 왜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교통이 안 되었는가? 사람 속에는 선악과가 있기 때문에 교통이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 같이 다 아는데 어떻게 교통이 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맞대놓고 토론할 사이가 못 된다. 신분상 처지가 안 된다. 그런데 선악을 아는 지식이 나에게 들어오면 맞대놓고 삿대질하면서 토론한다. 왜? 자기가 옳은 것이 있으니까.
나의 맨 위 꼭대기에 계신 분, 연세로 봐도 내 아버지 같은 분, 배운 것으로 봐도 유일한 내 스승, 교단 행정으로 봐도 유일한 머리, 어떻게도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 내 안에 선악과가 있으니까 옳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분에게 항거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도 없었다. 나도 나이 많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른들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단숨에 그 순간에 내가 일어나서 가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선악과가 그렇게 용기를 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다. 대번에 제명처분이 내려왔다. ‘나는 모릅니다. 알아서 하십시오.’하고 한 마디 하고 나왔는데, 다음 날 제명처분이라는 전보가 떨어졌다. 그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분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힘을 믿고 ‘알아서 하십시오.’하고 내밀고 왔는지 모르겠다. 돈도 없고 아무데도 갈 데도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1분만 생각했어도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듣고 나서 1분이 아니고 약 20초 만에 대번에‘알아서 하십시오.’하고 나와 버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에게 용기 있다고 했다. 우리 교단에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제 서른한살짜리가 그 모양으로 해놓았으니까 어찌되었겠는가. 그리고 그 뒤로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4년 동안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와 그분과 나 사이가 비슷하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 내가 용기있는 사람도 아니고 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었는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니까 뭐가 되는가? 사람만 고스란히 남았다. 아무것도 없고“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이 사람만 남았다. 물위를 걸어가는 것도 없어지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도 없어지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다. 아무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만 남았다. 왜 죽는가? 나는 피조물이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그렇게 능력이 많으면서 왜 죽었는가?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내가 능력 많은 것이 나냐? 이게 나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이 나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리가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것이 다리가 되었다. 어린양이 왜 매일 같이 죽었던가? 그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시니까 다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것을 받은 것이 우리다.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 이것 때문에 우리도 되돌아 왔다. 내 인생이 그것이 아니구나.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람도 아니고, 사탄이 준 모든 지혜와 지식이 있다고 해서 내가 피조물이 아닌 것도 아니구나. 괜히 내 위에 덮어 씌웠을 뿐이지 내 본색을 보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똑같다.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존재고, 숨이 코에 붙어있는 존재다. 사람이 사는 것이 굉장한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아니다. 숨 떨어지면 끝이다. 숨 쉬다가 5분만 쉬지 못해도 죽어버린다. 그런 인간이 선악을 안다고 까부니까 하나님과 교통이 되겠는가? 안 된다. 하나님이 보시면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대들었던 나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와서 가시밭길에서 헤매는 것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똑같다. 인간이 못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이 한 자리에서 이 자리에서만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것이다. 나도 지혜롭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때는 지혜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 같으면 잘잘못은 고사하고 엎드려서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라고 했을 일인데, 왜 그건 안 되고 그건 온데간데없고 어른 공경이니 이런 것은 다 어디를 가고 없고 어려서부터 배운 공자왈 맹자왈은 다 없어지고 딱 그것만 남았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배웠으니까 사람의 도리를 배웠다. 그 순간에는 배운 것은 다 날라 가고 없다. 4년 동안 내가 반성이 안 됐다. 내가 전혀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잘못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왜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 그 외 합리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다.
이 사이를 누가 매꿀 것인가? 무엇이 매꿀 것인가? 우리가 주님을 보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사람을 봐야 내가 빈껍데기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뭐가 된 줄 알고 까불었구나. 교회는 이런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구속과 왕국 사이에 다리가 되는 것은 교회뿐이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다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교회뿐이다. 구속 받은 이 생명만 다리가 될 수 있다.
이 다리로서의 교회를 얻으신 주님은 이제 보좌 우편에서 땅을 향한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자기와 같아야 그 주권이 행사되지, 교회 따로 주님 따로이면 주권이 행사되겠는가? 안 된다. 교회를 얻으신 것은 예수님의 승리다. 우리가 교회가 된 것은 주님의 승리다. 또 주님의 영광이다. 대구교회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인가?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캐톨릭을 보면 정말 영광스럽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것이 표현되는구나, 이렇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많다. 교황이 다니는 것을 봐도 왕이 다니는 것과 똑같다. 그럴싸하게 제복도 입고 호위병도 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천명 이천명 모여봤자 하나님이 영광스럽다고 보이겠는가? 안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해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영광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가 목소리 크다고 된 것이 아니고, 구속 안에서 오실 때까지 새겨서 전파할 때 그렇게 된다. 그래서 오실 때까지 기념하고 전하라고 한다. 우리가 캐톨릭처럼 잘 꾸며서 하나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해야 영광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진실이다.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속에 내가 들었다. 그의 죽으심을 전할 때, 객관적으로 성경에 써있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안에서 구속을 받았다. 알고 보면 그분을 전하는 그것이 나다. 돈 얻으러 손 벌리고 다니는 것이 거지다. 거지가 따로 있는가. 가만히 있는데 거지인가? 밥 달라고 다니는 것이 거지 아닌가. 마이크 들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가수 아니가. 노래도 부르지 않는데 가수인가?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영광이다. 그 영광이 우리 영광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전해서는 영광이 안 된다. 아무리 다른 것을 전해봤자 우리가 하나님 영광이 되지 않는다. 이 다리로서의 교회! 우리는 그 다리로서의 교회다. 이 다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교회 없으면 그분의 주권은 행사할 수 없다.
교회는 주님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산 바 된 그의 죽으심의 유일한 소득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왕국이 임할 때까지 자신에게 새겨진 구속의 은혜를 전해야 한다. 새겨지지 않으면 끝까지 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밤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고,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는 주님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산 바 된 그의 죽으심의 유일한 소득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왕국이 임할 때까지 자신에게 새겨진 구속의 은혜를 전해야 한다. 전해야 존재 이유가 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 구속받은 사람은 이것을 전할 때 존재 이유가 있다. 전하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
새겨지지 않으면 끝까지 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새기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밤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새겨주기 위해서 그날 밤을 마련하신 것이다.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한다고 하였다.
만찬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정과 관계 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마치면서“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하셨다. 왕국을 기대하신 것이다.
만찬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정과 관계된다. 그냥 친교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정과 관계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마지막 밤에 그것을 전하려고 마지막 만찬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마치면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하셨다. 이 말은 왕국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왕국이 올 때, 너희와 내가 같이 마실 것이다. 왕국이 오지 않으면 마시지 못한다는 말이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왕국 안에서 마시기 전까지는 마시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행정은 구속 안에 있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시행 되고 왕국은 교회와 더불어 온다. 교회는 땅위에서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주님의 몸이다.
하나님의 행정은 구속 안에 있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시행되고 왕국은 교회와 더불어 온다. 날마다 몸인 교회를 통해서 시행될 때, 죽으심이 전파될 때, 왕국은 교회와 더불어 온다. 교회 없이 왕국이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왕국은 교회와 더불어 온다. 쉽게 말하면 교회 없는 왕국은 없다. 교회 없는 왕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더불어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적어도 그것을 맛보고 있다. 종말론자들처럼 전혀 깜깜하다가 그날 갑자기 내려온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는 맛보고 있다. 아직 다 완전하지 않다는 말이지 그때까지 미루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그 왕국을 맛보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간증하는 분들을 통해 왕국을 맛보는 것이다. 승리를 맛본다. 어떤 승리가 온다. 그냥 간증이 아니라 승리의 선포다. 왕국은 교회와 더불어 온다. 지금 우리는 왕국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땅위에서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주님의 몸이다. 몸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했다. 몸이 있어야 행정이 수행될 것이다. 나도 내 몸이 있어야 여기에 와서 여러 분들에게 말씀을 할 수가 있다. 몸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도 주님께서도 자신의 몸이 없으면 땅위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분의 몸이다. 나는 손과 발이 있으니까 움직일 수가 있고 입이 있으니까 내 속에 있는 말을 할 수가 있다. 입이 없으면 말을 못한다.
선포하자! 우리 위해 죽으신 만유를 포함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자! 우리가 선포하면 주님은 오신다. 구속을 선포하자! 인격회복을 선포하자! 잃었던 생명을 되찾았음을 선포하자! 주님의 죽으심의 진실하심과 그 능력을 선포하자! 우리가 선포하면 주님은 오신다. 주님은 우리의 선포를 통해 왕국과 함께 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선포해야 된다. 선포하는 것이 우리 존재 이유다. 은혜를 선포하지 않고 있으면 나는 죽어있는 것이다. 휴면계좌라는 것이 있다. 자고 있는 계좌다. 은행에 가면 통장은 개설하여 돈은 얼마가 있는데 잊어버린 것이다. 찾아가지 않으면 은행에서 휴면계좌라고 한다. 오래되면 국고로 돌아간다. 은행통장은 거래를 해야지 가만히 두면 잊어버린다.
화폐 개혁할 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은행들도 많지 않을 때다. 새 돈으로 농 밑에 넣어놓았다. 화폐 개혁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일어났다. 밤12시를 기해서 화폐 개혁이 선포되었다. 갑자기 선포되니까 농 밑에 넣어놓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 오래 되니까 모른다. 교환할 기간이 다 지나고 나니까 뭘 하다가 보니까 돈 뭉치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소용없는 돈이다. 휴면계좌처럼 너무 오래 잠을 자다가 가치가 없어져버렸다.
우리 인생도 휴면계좌가 돼버리면 우리 가치를 상실해버린다. 선포하지 않고 그냥 있으면 그래도 죽고, 선포해도 죽는다. 이왕 선포하고 죽어야지 선포하지 않고 죽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전해야 한다. 그의 나라가 올 때까지 전해야 한다.
우리 위해 죽으신 만유를 포함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자! 그것이 우리 존재 이유다. 그리고 우리가 선포할 때 우리는 승리를 선포하는 사람이 된다. 또 그럴 때 우리가 기쁨이 생기게 된다. 괜히 혼자 기쁘겠는가? 승리가 와야 기쁘다. 우리가 승리하면 주님은 오신다. 우리가 선포하지 않으면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 우리가 선포하면 왕국이 온다. 우리가 선포하지 않으면 왕국은 오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도 선포하지 않고 있으면 교회에 와도 그냥 숨만 푹푹 쉬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왕국이 오지 않는다. 숨만 쉬다 가니까. 사람들이 간증하고 선포하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조금만 더 하면 간증이 조금만 더 짙어지면 더 짙게 오겠구나. 이렇게 생각된다.
하나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깝게 있는데 너희 가운데 있는데 선포하면 할수록 가까워지고 선포하지 않으면 멀어져버린다. 선포하지 않으면 교회에 와도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요즘은 순모임이 있으니까 순모임에 가서 다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옛날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순서가 오지 않아서 못했는데 지금은 순모임에 가면 다 할 수 있으니까 한 마디라도 하고 가야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면 왔는지 안 왔는지 체크가 안 된다. 사나 죽으나 마찬가지다.
구속을 선포하자! 우리가 어떻게 구속되었는지를 선포하자. 애굽에 나왔던 사람들은 어떻게 애굽을 나왔는지를 선포할 것이다. 유대인 회당에 가니까 랍비가 나와서 마지막 시간에 말씀 전하는데 별 것 하는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를 전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아주 권세있게 선포한다. 우리도 직장에 나가서 내가 구속받은 사실을 선포해야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살던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보고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야 된다.
인격회복을 선포하자! 나는 이 인격을 찾았다는 것을 선포해야 된다. 잃었던 생명을 되찾았음을 선포하자! 주님의 죽으심의 진실하심과 그 능력을 선포하자! 죽으면 패망이고 실패라고 다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진실을 선포해야 된다. 우리가 선포하면 주님은 오신다. 주님은 우리의 선포를 통해 왕국과 함께 오신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니까 우리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한다. 오늘 또 한 번 같이 하자.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미물 밖에 안 되는 이런 존재들을 주님 당신의 마지막 밤에 부르셔서 당신의 몸을 기억하게 하시고 당신의 피를 기억하게 하셔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것을 전하라는 이 신성한 사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이 교회 안에 부르셔서 당신의 약속을 선포하도록 위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존재 이유가 되게 해주시고,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왕국이 임할 때까지, 우리가 이 소식을 전하기를 원하고 이것이 세상 앞에 널리 퍼지기를 원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왕국으로 부르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