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31대 왕(1351∼1374). 이름은 전,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이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 1) 원(元)나라에 갔다가,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妃)로 맞았다. 원나라가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케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원에 반항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원나라에 다녀온 최영(崔瑩)·유탁(柳濯) 등의 보고로 원의 쇠약해 가는 진상을 파악,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호복(胡服) 등 몽고풍속 폐지, 1356년(공민왕 5)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를 복구했다. 또한 내정을 간섭하던 원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세도가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했으며, 100년 동안 존속되어 오던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명(明)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서 명과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있는 원의 잔존(殘存) 세력을 공략, 1370년(공민왕 19)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고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國威)를 떨쳤다. 내정에 있어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전형권을 쥐고 있던 귀족회의 기관인 정방(政房)을 폐지, 신돈을 채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兼倂)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하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1360년(공민왕 9)과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의 우환이 끓기 시작했다. 더구나 1365년(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으로 죽자 불사(佛事)에 전념, 왕비만을 추모하며 국정을 신돈에게 맡겼다.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하므로 사사(賜死)했다. 그 뒤 1372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는데 소년승(少年僧)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까지 하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왕은 이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밀고자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1점뿐이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다 -이상 야후 백과사전의 인물설명 -
공민왕이 살던 시대는 충선왕이 세운 원의 만권당의 영향으로 원시대의 사대부의 그림과 글씨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다. 당시 원의 예원은 조맹부가 이끌고 있었으므로 조맹부의 영향은 상당하였다. 공민왕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맹부 등의 원 사대부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남아있는 공민왕의 작품이 거의 없다시피 할 뿐더러 14세기 고려의 문인화, 원체화 조차도 거의 남아있질 않아 그 자세한 내역을 알 수 없다. 다만 추리해볼 뿐인데, 고려 원체화의 전통을 이은 그림과 원에서 성리학과 전래된 새로운 부류의 그림들이 유행하였을 것이다. 고려의 회화는 고려불화에서 보이듯 상당히 세련도가 높고 회화적인 면과 함께 공예적인 면이 돋보여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완결적인 면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체화에서는 그랬을 테지만 남아있는 고려의 원체화는 없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고려의 몇안되는 작품은 고려회화라는 큰 빙산의 부스러기일 뿐이고 이로서 고려회화를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고려의 회화의 수준이나 질과 양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고려 중기 이녕 등 화원들에 의해 실경산수도 유행했음을 기록상 알 수 있고 공민왕이 그렸다는 석가출산도나 달마도는 사의적인 화풍도 발전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고려의 회화과 매우 다양하고 수준이 높았음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현재 공민왕의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천산대렵도, 음산대렵도 해서 수렵도 형식의 편화가 3점 전하고, 간송미술관에 이양도라고 해서 전하는 영모화편이 한점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전해내려온 기위도가 있는데 이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양도도 공민왕의 그림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실정이고 천산대렵도도 화격이 높은 편이지만 공민왕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는 없다. 본래는 긴 횡권의 작품이었다는데 조선후기에 주인이 아끼지 않자 호사가들에 의해서 조각났다고 한다. 실제로 공민왕의 득의작이 남아있었다면 매우 대단하였으리라 짐작되지만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바이다.
傳 공민왕 天山大獵圖 . 14세기 후반,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는 화면의 박락이 매우 심한편이다. 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다. 두명의 호인이 말을 달리면서 짐승을 몰고 있는 듯한 장면인데 인물들에는 웅혼한 기상이 있고 지금 바로 앞에서 달리는 듯 한 생동감이 흐르고 있다. 인물이나 말의 형태가 매우 세련된 태를 지니고 있고 또한 익숙하여 오래토록 익숙해진 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공민왕의 명성의 어울릴만한 작품이지만 안타깝게도 본래의 긴횡권으로 볼 수 없고 박락이 심해서 이 편화마져도 온전하게 감상할 수 없다. 국립박물관에는 음산대렵도라고 전하는 한폭과 수렵도 한폭이 더 있는데 같은 횡권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傳 공민왕 二羊圖. 14세기 후반~ 15세기, 견본채색, 15.7x22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에 전해오는 공민왕의 이양도이다. 김광국의 석농화원으로 수집된 그림으로 비교적 신뢰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당히 세밀한 영모화로 비록 작은 잔편이지만 고려말 조선초기 즈음의 영모화를 추측할 수 있게 하는 귀한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비슷한 시기의 군양도와 함께 한마리가 그려진 양그림이 전해진다. 군양도의 털이 직모인데 반해 독양도는 간송미술관의 이양도처럼 꼬불꼬불하게 묘사되어있고 양의 전체적 형태나 동세도 비슷하여 주목된다.
필자미상. 산양도. 15세기, 견본채색, 33.4 x 23.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양의 표현이나 산준의 표현에서 상당히 고격이 있어 15세기 쯤의 영모화로 보인다. 고려의 영향이 아직 크게 미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정제된 회화의 면모를 볼 수 있다.
傳 공민왕. 棋爲圖. 14세기, 일본 개인 소장.
두암 김용두 선생의 소장품이었던 관계로 일찍 국내에 알려진 작품이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승된듯 한데, 공민왕의 그림이라고 전하지만 그 유래가 확실하지 않다. 위 두 그림이 비교적 공민왕으로 인정되는 반면 같은 '전 공민왕'이지만 거의 필자미상으로 보아지고 있다. 원체화풍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물산수화로 그림상태는 좋지 않으나 대작이고 솜씨 또한 출중하다. 특히 인물묘사는 박진감이 있어 바둑을 둬본 사람이라면 그 진행과정이 어디인지 짐작케 할만하다. 배경 산수는 도식적인 편으로 화가는 인물에 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정말 공민왕 작품입니까? 사진으로나마 보게되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