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문학
김도향 시인
우물, 혹은 꿈
시작詩作을 시작한 지도 언 스무 해가 넘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백일장 시간에 수수께끼 상자 같은 원고지 들고 막막한 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었던 시절이 아득하다. 서른 후반 늦깎이로 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시인이 되어 지나간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에게 고향은 한 편의 서정시였다. 고적한 시골마을 이촌 그 시절은 개울물처럼 즐겁기만 했다. 또래 소녀들과 달빛 구경은 참으로 고왔다. 집에 우물이 없어 샘터에 물을 길러 오는 일은 제일하기 싫었다. 물론 겨울 흰 눈이 내릴 때 빨래하러 가는 날은 손발이 얼어터지는 초죽음이었다 황소 소죽을 끓이는 것은 내 차지였다. 학교를 파하고 한 짐 풀을 베어 곧장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꿈같은 기억들이 오고 간다.
저녁밥 짓는 연기
밀밭 어둠처럼 흥건히 깔릴 때
찌그덕 찌그덕 빈 물지개 지고
동구 밖으로 쉼없이 걸어나간다
내 키의 석자는 됨직한 깊은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 넣고
퍼 담아도 퍼 담아도 담은 만큼 채워지는 물속
목욕하는 성근별을 퍼올린다
오르다 떨어져나간 별들은 사금파리처럼 하얗게 깨어진다
깻묵 묻은 내 얼굴도 헹구어 퍼담고
살아 꿈틀거리는 별을 모아
가만 가만 숨죽이며 온다
큰 항아리에 부어 두고 뚜껑을 닫는다
매일 매일 조금씩 꺼내어
마시고 음미하면서 샛별을 꿈꾼다
항아리 바닥이 거의 보일쯤이면
나는 또 그 짓을 하러 동구 밖으로 줄행랑 친다
―김도향, 「물 길러 간다」 전문
이따금 저녁노을은 초가지붕 위에서 붉기도 하였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저녁밥 지을 물과 소죽 끓일 물을 길으러 동구 밖까지 가야 했다. 시 [물 길러 간다]는 그때의 정겨운 기억들이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찌그덕 거리는 물지게 마냥 고달팠다. 그래도 두레박 한가득 찬물을 퍼 올리면, 싱싱한 꿈이 살아나는 것도 같았다. 퍼 담아도 퍼 담아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어떤 끈질긴 생명의 원천 같았다.
간통이라도 한번 만끽하고 픈
고적한 우물가 열무 씻는
소리만 샬라샬라
두레박으로 퍼내고 퍼내어도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네
아무도 몰래 생산해 놓은 샘물
내 것인 양 마구 퍼내었네
금은보화라면
엿하고 바꾸어 먹으련만
세 동이를 퍼내든가
네 동이를 퍼내든가
늘 그만큼 채워지는 마술나라
금 나오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그런 도깨비나라도 있었다네
하루에도 서너 차례 우물가 찾지만
처녀총각 눈 맞추어 달아난 일 없고
혼자서 춘향이 마음 되어 다소곳이
물 길어 올리지만
이도령같은 그림자 하나
얼씬 거리지 않았네
―김도향, 「앵두나무 우물가에」 전문
[앵두나무 우물가에] 역시, 그때 함께 나온 추억의 시이다. 여름철이면 솜털가시 돋은 열무를 씻어 보리밥에 비벼 먹으면 절로 배가 불렀다. 내가 살던 동네는 몇 가구 되지 않는 조용한 시골이라서 소꼽친구도 몇 명 없었다. 밤이면 샛별이 나의 친구였다. 반딧불이도 친구였다. 바람 소리가 무서워 마당 옆 변소도 못 가서 언니를 깨우곤 하였다. 그래도 마을 우물은 늘 나를 반겼다. 그곳은 동네 처녀 총각의 사랑의 자리였다. 여자들의 수다 방이자, 모든 소문의 진원지였다. 그 많은 동네 사람들을 ‘우물’은 다 먹여 살렸다. 소녀인 나는 그때 가장 많은 상상을 한 것 같다. 맛있는 빨간 앵두처럼 새콤달콤한 꿈들을 무진장 꾸었다. 무한정 퍼먹어도 재생되던 나의 우물. 우물물은 내 시의 시작이자 화수분이다.
황소 한 마리
어떤 면에서 ‘시’란 놈은 황소걸음과 같다. 뚜벅뚜벅 평생 혼자 열심히 걸어가며 써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황소 풀 먹이는 일은 전적으로 내 차지였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햇살이 쨍쨍한 날에는 나무그늘 아래서 황소가 풀 뜯는 것을 지켜보며 지냈다. 아련한 아지랑이가 날고 흥얼흥얼 콧노래 부르다가 그도 심심하면 삐삐풀을 뜯어서 빨며, 황소의 배가 남산만 해지기를 기다려 해가 뉘엿뉘엿 서산 넘어갈 때쯤이면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한 생각을 끌고 가는 일은
고삐 풀린 황소 한 마리 끌고 가는 듯하다
열두 고비를 넘고 넘어야 닿을 수 있는,
한 눈 파는 사이
남의 콩밭으로 황망히 뛰어들고
한 고삐 늦추는 사이 또 논물 핥아먹고
한숨 돌리는 순간 또 다른 길로 접어드는,
깜박 조는 사이 산등선 하나 넘고
코앞에 끌어다 놓으면
다른 암소 엉덩이 쳐다보고 침 질질 흘리는,
오보쯤 가다가 풀 한 번 뜯고
십보쯤 가다가 되새김질 한 번 하고
오리쯤 가다가 오줌 한 번 지리고
흐르는 강물처럼 한 곳에 멈출 줄 모르네
그러다가
꽃처럼 피워놓은 똥무더기
마침표 찍듯 흔적없이 사라지네
―김도향,「생각 끌고 가기」전문
소코뚜레의 긴이까리를 잡고 놓칠까봐, 도망 갈 까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살폈다. 시도 그렇다. 사물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관찰하여야 좋은 시가 된다. 황소가 칼날 같은 속새 풀을 혓바닥으로 훌칠 때마다, 나의 시도 움찔움찔했다. 노랑나비가 날아다니고 보랏빛 꿀풀을 꺾어서 나는 허기진 배를 채웠다. 긴긴 수평선을 보아도 긴 빨래줄을 보아도 긴 소이까리가 떠오른다. 아마 나에게 서정시란 그런 그리움과 아련한 기억인지도 모른다. 한 생각을 끌고 가는 일처럼, 고삐 풀린 황소 한 마리 끌고 가는 것은, 시 한 마리 끌고 가는 것과 비견된다. 잠시도 한눈팔 시간 없이 열심히 행간을 채워야 좋은 시가 된다. 오보쯤 가다 풀 한번 뜯고, 십보쯤 가다 되새김질 한 번 하고, 오리쯤 가다 오줌 한 번 지리고, 잠시 잠깐이라도 생각을 놓치면 엇길로 가고 번뇌 망상에 사로잡히고, 일념이란 황소 한 마리 끌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평생 ‘시’의 고삐를 잡고 가야 할 까닭이다.
가출인 듯 출가인 듯
왜, 나에게 시는 그렇게 아득했을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산사의 풍경처럼 그렇게 들려왔다. 고단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밤늦도록 시에 몰입하였다. 시를 배워가는 일은, 꽃 한송이 피우는 일과 다르지 않는 듯 했다. 내게 꽃피는 작약은, 자음마냥 모음 마냥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꽃잎이 한 장 두 장 열릴 땐, 불경의 경전처럼 느껴졌다. 산새소리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법어였다. 그 당시 내게 시는, 수좌가 화두를 잡고 동안거 하안거에 든 것처럼 경건하였다.
사랑한다 그 말 한 마디 하기 위해
자음들, 모음들 또 많은 經들
달달달 곱씹었다
胎中에서부터 되뇌이던 진언
안으로 꽁꽁 다져 마름질하던 주문
산새가 엿들을까
뭇꽃들이 훔쳐갈까
바람이 앗아갈까
두 겹 세 겹 책장 엮듯
굳게 말아 쥔 주먹
한방의 펀치로 무너뜨리며
수류탄 터지듯
한 마디 펑 던진 화두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김도향, 「작약꽃 피우기」 전문
[작약꽃 피우기]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와의 사랑의 언약이었다. 홀로 시의 도를 닦듯 하였다. 그러기를 15년이 흘렀고, 2010년 암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 는 어디에서 오는 가’ 화두를 잡고 좌선에 들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고, 제대로 시 공부에 빠져 보고 싶었다. 절 일을 배워가며 경전을 읽고, 백 팔 배를 하고, 염불을 하고, 사경을 하고, 스님 법문을 들으며, 이전의 나를 잊고 새로운 시를 찾고, 깊고 높은 경지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 와중에 배달되어오는 시집들 읽는 일은 소홀하지 않았다. 틈틈이 제1시집 [와각을 위하여]를 출간하였다. 그 후 제2시집 [맨드라미 초상]도 세상에 내어놓았다.
바람경전
암자에 홀로 앉아 대숲 소리를 듣는다. ‘나는 무엇인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떠올려보면, 모든 것이 인연법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어쩌면 한 줄의 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바람의 경전이었는지도 모른다. 법당 추녀 끝에 매달린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
햇빛 비껴드는 추녀 끝에서 새들은 허기져 죽는다. 죄명 없이 목 줄 메인 물고기 한 마리, 빗방울 지나가며 녹물 입는다. 뒤돌아보지 않는 시간이 뼈마디를 들춰낸다. 남모르게 지은 죄의 찌꺼기들, 큰 죄는 갇힌 세상이었다. 떼로 몰려다니며 여론몰이 했었던, 정적을 모르고 설치며 수행하지 않았던, 성별 없이 종족을 번식했던, 일하지 않고 유랑하며 문전걸식했던, 잠을 자도 눈 뜨고 자라는 어록 한 줄이 추녀 끝에서 허공을 잡는다. 절간의 공양물이 된, 손꼽을 수 없이 몸 흔드는, 마지막 남은 목숨 값 하라고 속죄의 눈물 흘려보낸다.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잊을 만하면 수시로 경책하는 저 양철물고기
―김도향,「바람 경전」전문
천지만물은 인과응보요. 화엄의 세계다. 벗어날 것도 벗어날 일도 아닌 것이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 죄의 찌꺼기는 삼세에 이어져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가 없다. 하물며 양철물고기도 죄 값을 받느라 햇볕에, 바람에 ,빗방울에 뼈마디가 녹아나는데 어리석은 중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삼세에 지은 업을 소멸하고 참회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빌고 또 빌어본다.
달팽이 뿔
우리 인간들은 없는 달팽이 뿔 마냥 무언가를 찾아 허둥대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발버둥 친다. 명예를 찾아, 권력을 찾아, 이름을 찾아, 부를 찾아 시간이 모자라고 시간은 늘 없다. 한번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알려고도, 알지도 못하고서, 백발을 맞고 죽음을 맞는다. 내 안의 진아眞我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헛깨비 놀음에 헛것을 보고 헛짓하다가, 한 생을 마감한다.
없는 길은 만들어서 가기
모래밭에서 숨은 바늘 찾기
바늘 찾아서 황소 사들이기
황소 먹여서 장에다 내다 팔기
바닷물이 마를 때를 기다리기
바다를 메꾸어 밭이랑 만들기
보릿단 세워서 푸른 탑 만들기
탑 꼭대기 올라 태산을 넘어가기
태산에 올라 하늘에 닿기
하늘 무너뜨려 고속도로 닦기
고속도로를 달려가 달 찾기
달 찾아 토끼 만나서 애 하나 낳기
별나라 날아가 별을 따서 목에 걸기
웃다가 실신해 잠들기
꿈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뿔
어디까지 뻗어갈까
꿈속에서 깨어나지 않기
제 가는 길 돌아보지 않고
그 길 따라가다 백발白髮 맞겠네
―김도향,「와각을 위하여」전문
찰라에 살다 갈 목숨들은 이슬이나 쇠똥구리 한 마리뿐이 아니라, 세상만사 우주 또한 변하고 사라지고 예외는 없다.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인간 삶이다. 우주 허공에 무수한 행성들도, 왔다가 잠깐 놀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탐, 진, 치 오욕칠정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동안 째깍째깍 목숨의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도 시의 행간 속에서, 죽은 혼령들의 죄업을 소멸하고 극락왕생을 빌어본다. 아니,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염불수행으로 일념 하고 있다.
없는 나를 찾아 떠나는 구도행
점집 앞에 붉게 핀 맨드라미가 혼령들의 절규 같았다. 못 다한 말들, 못 다 부른 노래, 써 보지 못한 유언장들을 점쟁이의 입을 통해서, 기도의 발원을 통해서, 법력의 진언을 통해서, 붉은 부적을 통해서, 천도재를 통해서 죄업을 소멸하고 중천에 떠도는 영혼을 잠재우고 극락왕생케 염원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천도재를 올리고 금강경탑다라니를 외우거나 망자를 덮거나 태워서 업을 소멸하고, 복을 받고 영혼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얼마나 숭고하고 눈물겨운 일인가, 이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사라지고 없어지겠지만 영혼은 남아 두고두고 못 다한 일들을 하고자 중천에 떠돌며 시절인연이 닿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고 염원하며 기필코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占집 앞 혼령들이 도열했다
삼천갑자를 돌아돌아 왔으리
그때의 기억은 대낮같이 또렸했다
못 다한 말들은 까만
점자로 도드라졌다
부르지 못한 노래
써 갈기지 못한 유언장들
마구마구 퍼부어대 듯
一千 마디 절규
붉은 혓바닥 오방기처럼 휘둘렀다
대신 전해 줄 이도
대변해 줄 이도
답답한 사립문만 삐걱거렸다
간절한 주문인 듯
절절한 진언인 듯
붉게 베어져 나오는 符籍 한 필
해종일 늦가을 볕의 끈질긴 기도
오다 말다 잡히지 않는 바람의 부채질
어금니 꽉 깨문 至誠의 발원문
鏡面朱砂 붉은 인주
化人으로 되살아난
핏물 든 금강경탑다라니 한 채
―김도향, 「맨드라미 초상」 전문
중생들은 본래 없는 도깨비굴을 만들어서 웃고, 울고, 싸우고, 찌지고, 금강경에서 설하는 ‘아상’ 나라는 에고의 집착과, ‘인상’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공업과, ‘중생상’ 부처와 다른, ‘수자상’ 목숨의 한계에 얽매이는 것과, 본래 공한 반야심경의 깊은 비밀을 알지 못한다. 반야심경은 팔만사천법문을 260자 안에 요약한 경전이며 불교 사상의 정수를 담아낸 경전이다. 한 편의 광활한 시의 진경이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재 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 사바하’. 반야 지혜를 성취하는 진리의 요체가 시의 심경이자 오묘한 도법이다. 시 [촛불]에서도 썼지만. 이 우주에 “본래 나는 없었다”. 하여, 나는 밥 먹듯 숨 쉬듯 시와 염불 수행을 목숨 끝까지 활보할 작정이다.
김도향 약력 : 군위 출생. 계간지《시와소금》등단. 시집 『와각을 위하여』, 『맨드라미 초상』.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죽순문학회, 여성문학회, 시산맥회원, 군위문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