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연인 혹은 비운의 예술가 까미유 끌로델
"생각하는 사람"으로 너무나 유명한 미술가 로댕~ 그녀 뒤에 빛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한 이름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까미유 끌로델”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뉴스>
지금도 로댕 전시회를 하면 항상 함께 전시가 되는 그녀의 작품들. 그녀와 로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하다. 시인 뿔 클로델의 누나이자 로댕의 연인이며, 제자인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아마 지금도 저 하늘에서 자신이 로댕의 연인, 제자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불리는 것. 그리고 로댕과 함께 전시되는 것을 한탄하며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천부적인 재능과 빼어난 미모, 예술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정열을 소유한 천재 예술가인 까미유 끌로델. 그녀는 누구의 누나며, 누구의 제자, 누구의 연인으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아닌 빛으로서 존재하길 염원했다. 로댕의 연인이 아닌 정당한 부인이길 바랬고, 그녀는 그녀 스스로 천부적인 화가이며, 예술가이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평생 그 목표를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죽은 지금도 힘든 그녀 스스로 독립된 온전한 이름. 왜 그녀는 뛰어난 재능과 예술적 능력과 작품에도 그녀의 이름 하나 찾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그녀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로댕과 까미유의 작품 회복-파이낸셜뉴스> 그녀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의 고통은 조금 덜 했을까? 하지만 여성의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그녀의 천재성은 여성이라는 편견 앞에서 평가절하 되었으며 로댕의 연인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녔다. 그녀에게 있어 로댕은 하나의 문이자, 거대한 벽이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파리,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20세 처녀 까미유 끌로델(이자벨 아자니)은 예술계의 거목인 오귀스트 로댕을 찾아간다. 로댕은 까미유의 재능과 미모에 끌려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조각이 있는《지옥의 문》 제작팀의 조수로 고용한다. 이후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이며 작가와 모델인 동시에 공동 제작자 그리고 24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선 연인 관계가 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재능을 사랑하고, 유부남의 불륜녀가 아닌 온전히 그를 소유하고 싶은 그녀는 그 관계를 견딜 수 없었고 끌로뗄은 1893년 로댕의 작업실을 떠나며 독립을 선언하지만, 끝까지 그녀는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까미유 끌로델이 로뎅의 조수로 일한 지옥의문 중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상- 서울경제>
이자벨 아자니와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까미유 끌로델'에서 첫 장면은 한 밤 중 묘지의 흙을 주워 담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여자의 눈은 광기에 가득 차 있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이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 그리고 자신에게 온전히 오지 않고 오로지 불륜의 연인으로만 존재한 로댕에 대한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광기인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로댕은 다른 사람의 남편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인 그는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없고, 오로지 로댕의 그림자로만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절망한 그녀는 우울증과 피해의식, 편집광적 증상을 보이며 거리를 방황하고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댄다. 자신이 공들여 작업했던 조각품을 망치로 깨부수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만큼 지저분하게 만들어 이웃들의 항의를 받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로댕의 몇몇 작품을 두고 자신의 모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실은 역사 속에 감추어졌지만 그녀는 이런 주장과 기괴한 행동으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게 된다. 결국 그녀는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채 정신 병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실려 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그곳에서 살아간다.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에는 수많은 속설들이 떠돈다. 로댕이 까미유를 시기해 사랑을 그만두게 했다는 설도 있고, 까미유가 이를 견딜 수 없어 혼자 떠난 것이라는 말도 있다. 또, 로댕이 까미유의 재능을 아까워해서 평생 몰래 그녀를 후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누구의 도움이나 동정이 아닌 그녀 자체에 대한 인정이었을 것이다.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까미유 끌로델> 그녀가 원하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이었던가? 자기 이름을 건 작품, 자신의 작품의 인정. 그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인가? 그녀는 그렇게 갈망하던 자신의 명성과 작품의 인정을 얻어내지 못하고 뜨거운 열정, 천재성들을 모두 거세당한 채 그곳에서 죽어간다. 그녀가 정신 병원에 수감해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조차도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여성인 엄마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 입장에서도 그녀는 시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딸. 조용히 남편 내조를 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회 윤리에 어긋나는 집안에 오히려 누를 끼치는 딸이었던 것이다.
< 다나이드(Danaid)
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을 위하여 구상된 것으로 단테(Alighieri 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 속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우스(Danaus) 왕의 딸을 의미한다. 다나우스는 50명의 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신탁에서 자신의 사위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이에 왕은 딸들을 시집을 보내면서 하룻밤만을 보내고 남편을 죽일 것을 명한다. 이에 한명의 딸을 제외한 49명의 딸들이 모두 남편을 죽이게 된다. 지옥에 간 다나이드들은 모두 결코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퍼 나르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네이버 미술작품 정보)>
<까미유 끌로델의 성숙(중년) - 이 작품 속에서 떠나는 남자를 붙잡고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이 끌로델을 연상케한다.>
영화에서는 '다나이드'와 '키스', '칼레의 시민들' 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소개된다. '다나이드'는 로댕이 까미유를 모델로 삼아 신화 속, 불운한 그녀들을 창조해낸 것이다. '다나이드'는 신화에서 첫 날 밤 남편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평생토록 밑이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워야만 하는 벌을 받는 인물이다. 달빛을 받아 항아리로 재탄생하는 그녀의 몸이 사회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재능을 표출하고, 투기가 금지된 사회에서 로댕에게 집착하고 그의 명성을 시기하는 까미유 클로델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 항아리는 그녀의 욕망과 열정, 육체 그러니까 까미유 자신인 것이다.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작품에는 로댕과 끌로델이 빚은 서로의 초상, 로댕이 끌로뗄을 모델로 만든 '회복', 끌로델의 작품 '왈츠' ‘성숙(중년)’ 등도 있다. 무릎을 꿇은 채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끌로뗄의 작품 ‘성숙’에 나타난 '애원하는 여인'은 남성성의 사회와 무자비하고 냉혹한 예술계의 풍토에 희롱당하고 짓밟힌 천재 예술가 까미유 끌로뗄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끌로델의 작품 기도하는 여인과 왈츠-주간한국> 오늘은 “미친다.”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 미친다는 게 무엇인가 열정을 가지고 빠진다는 의미로 성공한 사람들의 표본적인 성격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광기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듯하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미치는 것이 남성에게만 허용되었던 때였다. 여성이 미친 것은 사회악이며 죄였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재능을 지닌 여성들이 마녀라는 오명 속에서 살아야 했고, 마녀 사냥 속에 불에 타 죽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재능이 없는 듯 숨기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 시대가 한 사람의 재능 있는 여성의 인생을 빼앗아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보여 주었을 많은 작품들이 눈에 밟히며 지금 이 시대도 혹시 그런 여성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주위에 주체할 수 없는 예술과 능력의 광기에 힘들어하는 여성들을 권장하고 보듬어 주는 사회가 되도록 함께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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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권익 원문보기 글쓴이: 국민권익
첫댓글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아까운 재능을 꽃피우지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우리 선조들중에도 있다. 허균의 누님이신 허난설헌이 있다. 시와 그림이 뛰어났지만 모두 불태워져,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