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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
“오 주님, 내 아들로 하여금 그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싸우다 패배하였을 때, 도리어 자랑스러움과 구부러지지 않는 심성을 지니게 하옵소서.”
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간구하였던 기도문의 한 구절입니다. 자기 아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싸우다 패배하였을 때, 도리어 자랑스러움과 구부러지지 않는 자세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패배를 수치스럽고 굴욕적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패배만은 면해보려고 사력을 다합니다. 정치도 그렇고, 사업고 그렇고, 스포츠도 마찬가지 입니다. 과열 경쟁 속에, 세상 삶이 온통 비정한 전쟁터로 바뀌어갑니다. 오로지 승리만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면서, 많은 불법과 탈선도 부끄럼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패배란 치욕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직한 패배라면 그 패배를 부끄러워하거나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최선을 다했다면, 자신의 패배가 오히려 떳떳할 것이며, 미래의 재기와 성공을 위하여 더없이 좋은 양약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려본 솔로몬왕이, 인생들이 추구하는 사악한 경쟁과 경영이 허무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현재적인 것에만 너무 집착하여, 더 큰 것과 결과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인생들의 한계를 노래합니다. 과연 인생중에 누가 성공하는 사람인지, 솔로몬은 지혜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속의 경쟁에서 지더라도 악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떳떳하게 사는 법을 배우라고 충고합니다. 세 가지로 정리해봅니다.
첫째, 극한적 투쟁은 모두의 비극을 초래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많은 악고 불법을 부끄럼없이 행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악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악으로 이길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극한 투쟁과 악한 방법으로 이길려고 하는 일은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람들이 악한 일의 징벌이 속히 되지 않으니까, 악행하기에 담대하고, 죄인이 백번 악행하고도 장수하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3절에 보면, 악한 방법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패배란 오직 처참하고 비굴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 국민은, 무릎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했고, 패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오늘날 주변에서 흔히 “결사반대”라는 표현을 많이 봅니다. 국민들도 “쓰레기 처리장 건설 결사반대” “납골당 건설 결사반대” 등등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극한 투쟁을 벌입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의료계 폐업역시 의료개혁이라는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지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극단적 투쟁입니다.
정치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즈음 한빛은행 불법대출 외압의혹사건으로 여야가 극한적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보다는,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이,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물고 뜯는 극한적 사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긴박한 대결과, 먹느냐 먹히느냐의 무자비한 생존전략만이 난무합니다. 교단 총회도 그러합니다. 힘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명예로운 패배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처절한 죽음과 비굴한 패배가 있을 뿐입니다. 서로 패배시키기 위한 “개판의 정치”만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버스가 언덕 아래로 돌진하고 있듯이, 모두의 비극적인 파국을 향한 투쟁만을 열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에의한 극단적 투쟁은 인간성의 황폐화와 공동의 파멸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금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부 선수단중에는 선수들이 힘을 내게 하는 약물을 복용하여, 도핑테스트에 걸려 경기 출전이 금지 되었습니다. 서울 올림픽 때는 캐나다의 벤 존슨이 100m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역시 약물복용 한 것이 드러나, 후에 금메달이 박탈되고 육상계에서 제명된 적이 있습니다. 그 약물은 순간적으로 힘을 내게하지만, 사람을 파멸케하는 대단히 해로운 화학약품입니다.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야할 운동경기가 지나친 경쟁으로, 서로 파멸경쟁을 하는 셈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적 경쟁은, 결국 우리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극한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상처뿐인 영광”입니다. 인간은 결코 다른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자신만 행복을 즐길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처절하게 패배시키고, 나 혼자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만의 착각입니다. 아무리 경쟁이라할지라도 상대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여유는 필요합니다. 경쟁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선의의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부 주보에 이런 유머가 실려 있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늦은 밤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하루종일 시달리다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잠을 깨우는 전화벨소리는 참으로 짜증나는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전화내용은 학생의 장난전화였습니다. “거기 공동묘지 화장터지요?” 잠이 덜깬 이 남자는 핏대가 머리 끝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농담전화인줄 안 이 사람은 이성을 되찾고, 순간이나마 침착하게 여유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점잖게 멋진 복수를 하였습니다. “예, 맞습니다. 빨리 오시면 싸게 해드리겠습니다.” 최소한의 배려가 우리 삶을 여유있게 지켜줍니다.
본문의 지혜로운 말씀대로, 인생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악을 행하려는 유혹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됩니다. 지나친 경쟁속에 오직 승리에만 눈이 어두워,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인생의 경주가 정직하고 공정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살리는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철저히 패배시키고 내가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자요, 인생경쟁에서 성공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한 행복을 쟁취한 사람들입니다. 경쟁에 지치고 참기 힘든 유혹이 있을 때, 우리의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둘째, 정직한 패배는 곧 승리로 이어집니다.
본문 7-8절에, 인간 세상일은 인간 뜻대로 되지 않고, 예측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패배에 대하여 과민하게 반응하고 속단하는 것은 지혜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나도 언제든지 패배할 수 있다는 제한성과 연약함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승리자라도 언젠가는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세상을 호령하며 금메달을 땄던 체력도, 인생 70이 되면 조그만 나무지팡이에 몸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타는 불에 비유한 우스갯 소리가 있습니다.
20대는 “성냥불”(빨리 붙고 빨리 꺼지기 때문);
30대는 “장작불”(더디 붙고 오래가기 때문);
40대는 “담뱃불”(빨아야 타기 때문);
그리고50대는 “반딧불”(불도 아닌 것이 불인척 하기 때문).
경쟁에서의 패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실력없이 요행으로 얻어진 승리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정직한 패배보다 자신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패배는 승리로 나아가는 계단일 뿐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의 말대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 뿐입니다. 자신의 패배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내일의 승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최고병”에 걸리게 되면 조그만 패배도 인정하지 못하고, 지나친 부끄러움과 자기 학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패배가 다음을 위한 기회로 사용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패배는, 부정직한 방법으로 성공하려는 것이요, 그래서 자기 인격과 도덕을 팔고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만의 승리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더 소중한 것을 잃게되고, 더 큰 패배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자라면, 세상적 패배에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가 있다면, 이미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무어든지 1등 하려고 어려서부터 태권도 배우고, 동시에 주산 학원 피아노학원 보습학원을 다닙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과외수업을 통해, 2학년 3학년것을 미리 배웁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다른 아이들을 크게 누르고 앞서가는 “수퍼맨”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최고가 되는 훈련만 받고 사니, 패배를 수용하지 못하고, 부모까지도 살인하는 패륜아가 됩니다. 1등을 하지 못하면, 인생 낙오자라는 변질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은 1등만을 키워내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인생은 1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1등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존재들입니다. 인생은 1등을 함으로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함으로써 인생의 깊이를 발견하여, 다른 사람을 겸허하게 섬기며 품을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갖게 됩니다. 패배의 고통을 정직하게 체험해본 자 만이, 승리의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2류 3류의 밑바닥 고통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사람만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최고 경영자 C.E.O. 예수>라는 책을 쓴 미국 경영 컨설턴트 로리 베스 존스는, 예수님을 성공한 최고경영자라는 각도에서 분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품어 안으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비젼을 제공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헌신과 열정을 발휘하도록 한 최고 경영자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경쟁적 인간관계에 지친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준다고 분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명심할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성공은, 당신 자신의 성공을 위해 경쟁대열에 뛰어들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 저 “십자가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밑바닥의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구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히 2:10). 십자가의 길이 천하를 통일하는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고통은 영광의 필수조건입니다. 고통없는 영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직한 패배는 성공을 위한 연습입니다. 여러분이 성공을 원한다면, 정직한 패배를 많이 경험하십시오.
셋째, 눈앞의 이익보다 의(義)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12-13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그자가 잘될 것이라고 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해서는 않됩니다. 오늘날 의사들의 폐업, 납이 든 꽃게 사건 등은, 자기 욕망을 위해 남의 삶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제 주머니를 위해 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니, 절대로 옳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대의를 버리고, 눈앞의 이익만을 좇게되는 그런 세상은, 앞날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런 사회는 끝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한번은 먼 길을 온 맹자에게 양혜왕이 물었습니다.
“선생이 천리를 멀다않고 찾아오신 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기 위해서입니까?” 그러자 맹자는 대뜸, “왕께선 하필 이로움을 말합니까? 인의가 있을 따름이지요.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하면, 대부들은 어떻게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하고 말할 것이요, 또 그 아래 사람들은 어떻게 내 몸을 이롭게 할까하고 말할 것입니다. 위 아래가 서로 이익을 위해 다투는 그런 나라는 금방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대꾸하였습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도리를 알며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원만한 인간관계로 살 때, 우리 사회는 파멸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대로 하다가 손해볼 것이 있다면, 손해봅시다. 의롭게 살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소외된다면, 거침없이 소외당해 줍시다. 정직하고 우직하게 살다가 남보다 뒤쳐진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뒤쳐집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라고 예레미야선지는 지적합니다 (렘 9:24).
1905년에 발표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막스베버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을 이렇게 진단하였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구교가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상징적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정작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속에 깊숙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것을 지적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뿌리내려 끊임없이 내면화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며 개신교의 중요한 특질이라고 베버는 말했습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에서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손해 보고, 왕따 당하고, 남에게 뒤쳐진다고 생각했던 길,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사실은 구원의 길이요 성공하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름길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피튀기는 경쟁을 하는 곳에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대부분 그곳은 넓은 길이요, 지옥으로 치닫는 미끄럼틀입니다. 세상 따라 흔들리고, 세상 사람따라 유혹받지 맙시다.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있으면 세상에서 꼴찌하는 것 같았는데, 세상이 뒤집어지면서 가장 보배로운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길이 바로 그러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아비규환의 경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바보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 하고, 못난이라고 매도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 생명의 길인 것이 능력으로 드러났습니다 (행 2:22-24).
사도바울은 빌 4:13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안에 굳게 서서,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갑시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눈앞의 이익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인생의 경쟁에서 악한 방법으로 이기려고 하지 맙시다.
차라리 정직하고 떳떳하게 지는 법을 배웁시다.
정직한 패배는 곧 승리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승리한 인생임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그리고, 눈앞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아갑시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인생길을 넉넉히 감당하는 여러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