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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낮 사분지 일을 이리 이리 하여
성경본문 : 느헤미야 9: 1-5
1.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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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과 관련된 축복에 관한 정보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 「이날 낮 사분지 일을 이리 이리 하여」라고 제목 하였습니다.
이날 즉, 구약시대 같으면 안식일이겠고 지금의 시대면 주일이 되겠습니다. 이날 낮 사분지 일을 이리 이리 하여 우리가 버렸던 하나님의 전을 되찾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났으나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도록 하겠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게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9장이 속해 있는 이 문단의 시작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8장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그 끝맺음은 10장에 가서 마치고 있습니다. 10장 39절 하반절 맨 끝에 보면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은 전에는 그리 그리 하지 아니하여 하나님을 버린 결과를 가져왔고 그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었지만, 오늘 본문이 있는 9장 3절에는 보면 이제부터는 이날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서 하나님 율법책을 낭독하고.
간단히 썼습니다마는 전 시간에 말씀 드린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낭독한 것을 이제 가르치는 이로 하여금 풀어주어서 모든 백성으로 다 깨닫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떠나갔던 하나님의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모시게 되는 내용인 것을 전 주에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제 이어서 또 다른 사분의 일 낮 동안은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하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이날 낮 사분지 일 동안",
그러니까 사분지 일은 말씀을 낭독하고 듣고 또 풀어줄 때에 온전히 그 낭독한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그 낭독한 내용을 다 깨닫게 되는 일을 주일 낮 사분의 일 정도 시간 배정해서 한다는 것이지요.
또 그 다음에 또다른 사분지 일은 2절과 5절에 보면 자기와 자기 열조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한다, 찬송한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주일 낮 이 낮 사분지 일 동안 회개와 그리고 경배를 하나님 앞에 하므로써 떠났던 하나님의 전에 우리가 돌아오는 그런 유익을 갖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지금처럼 어렵지 않고 복을 누리게 된다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이 9장 속에 있는 회개는 어떠한 내용으로 회개했으며 경배는 또 어떤 내용으로 경배했는가? 회개할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또 경배를 드려야 할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우선 1절과 2절을 살펴보면 "모두 모여 티끌을 무릅쓰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를 하나님 앞에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고 그저 많은 사람 보는 데서 티끌을 무릅쓰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인정받을 정도로 아주 심각하고 절실하게 회개를 했다 그겁니다.
상항이 절실하니까 이쯤 되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는 하나님 앞에 조용하게 하고 옆의 사람이 보게 되면 옆 사람에게까지 내가 죄인인 것을 표시낼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지금 이 느헤미야 때의 이 백성들은 아주 멸망당하다가 끄트머리만 조금 남았던 이런 때였기 때문에 절실해서 이제 뭐 눈치 볼 것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모여 티끌을 무릅쓰고"
이 말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고, 그리고 "모든 이방인과 절교하고" 이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겁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만 골라 가지고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과 절교했다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과 방향을 같이 하지 않겠다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뭐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교통하고 다 이렇게 지내는 때에 "당신은 예수 안 믿으니까 절교입니다. 당신은 뭐 이방신을 섬기니까 절교입니다. 얘기도 않습니다. 인사도 않습니다." 이렇게 살 수 없는 시대이지요.
그러니까 그때와 지금과는 좀 다르기 때문에 지금 같으면 이 구절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되겠는고 하면, "하나님과 반하는 모든 죄된 행위를 단절하고"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는 행위를 단절하고 이런 일들을 이제 해 가면 떠나갔던 전이 내게로 돌아온다 이제 그런 뜻으로 계속 연결해서 들으셔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성도님들이 혹 본인이 범죄한 사실이 있으면 본인의 죄는 잘 회개합니다마는 열조에 대한 허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사유함을 구하는 이런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것을 보면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면서 사해 달라고 구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참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날 자기 부모님들이 그 조상이 하나님 앞에 허물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 잘 안 하는 것은 아마 효심 때문에 먼저 가신 열조에 대해서 내가 허물 들추어내어서 되겠는가 해서 안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절박하게 되면 할 수 있다 그겁니다.
예를 들어서 함이 죄를 지었는데 저주는 누가 받았습니까?
가나안이 받았습니다.
함이 범죄해서 그의 죄값은 누가 받았느냐? 자기 자식이 받았다 그겁니다. 그리고 또 솔로몬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큰 복을 누렸는데 그 솔로몬 자신이 특별히 잘해서 복 받은 것 아닙니다. 나기 전부터 복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입니까?
그 아버지 덕분에. 그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하니까 "네게서 날 자식에게 내가 이처럼 이처럼 해 주겠다. 그가 비록 죄를 지어도 죄값을 따지지 않고 너의 잘한 것을 대물림해서 편하게 해 주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대로 해 주셨지요.
그러니까 이 성경을 보면 복도 후손에게 상속이 되고 죄도 상속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상속되면 삼사대 가기가 힘들지요. 복은 한 번 상속되면 천대까지 간다 그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특히 신앙의 일세대 되시는 분들은 여러분의 열조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는데 나는 사실상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일이 안 되고 풀리지 않고 정말 이렇게 고통이 계속 되는가?
이런 분들이 자기의 탓만 자꾸 하게 되는데 자기의 잘못이 아닌 어떤 그 저주의 그림자가 계속 뻗쳐가지고서 안 되는 경우가 있다면 열조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그런 겁니다.
그 열조의 허물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잘 섬기지 아니했으면 허물한 것이지요. 이것을 이제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우리 열조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종을 어렵게 하였나이다. 우리 열조는 하나님 앞에 그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열조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참으로 어려움을 많이 주었나이다. 이것을 참 죄송하지만 자식된 저희가 구하오니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그 기도를 들으사 부모적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저주를 면케해 주실 수가 있으니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느헤미야시대 사람들은 자기의 죄 뿐만이 아니라 열조의 허물까지도 하나님 앞에 이제 자복을 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들의 그 자복한 것과 그 경배한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살펴서 우리들의 회개하는 내용과 그리고 그 경배하는 그 이유를 비교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저녁에 좀 유의해서 주의깊게 들으시면 그 핵심을 여러분이 건지실 수가 있고, 또 그냥 편안하게 들으시면 그냥 한 시간 설교 들으시는 것으로 핵심을 혹 놓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께서 이 9장에 담겨있는 내용의 핵심을 우리도 붙잡아서 우리의 경배와 우리의 회개가 정말 이 핵심적인, 즉 하나님이 내게로 다가오시며 우리가 버렸던 전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들어온다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이런 내용으로 지혜를 얻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열심히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마는 혹 부족하더라도 좀 주의해서 들어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9장 내용이 너무 길어서 좀 요약을 해 왔습니다.
우선 18절부터 21절까지 보겠습니다.
느헤미야 제 9장 18절, 이렇게 중간 중간 봅니다마는 이 9장 전체의 흐름을 조금도 손상을 끼치지 않도록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9장 전체의 흐름과 주된 내용을 상처받지 않도록 요약해서 드리지만 그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름 기둥, 불 기둥, 만나, 물, 또 사십년 동안 해어지지 아니하는 옷, 그리고 사십년 동안 떨어지지 않는 신발, 그리고 사십년 동안 밤낮없이 뭘 타고 가지 않고 걷기만 했어도 발이 부릍지 않게 되는 이 놀라운 이적이 거의 구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들로서 거의 구약 성경에 다 가득차 있습니다마는 이 이적들을 보고서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다. 전능하시다. 못하시는 것이 없다. 반석에서도 물 내며 그리고 그저 아무 씨뿌리지 아니했는데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시며 뜨거운 낮에는 기름 기둥으로 이렇게 양산을 만들어 주시고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춥지 않게 하시며 밤에 또 진행할 때 길을 비춰주시기도 하였고 사십년 동안 목마름이나 배고픔이 없고 그리고 신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릍지 않을 정도로 이적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대단하신 하나님…" 우리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마는 이 느헤미야 때에 와서 성전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 이적을 보는 관점은 좀 다릅니다.
이제 여러분 18절부터 19절 상반절까지 한 번 다시 읽어봅니다.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이 '설만(褻慢)'은 아주 행동이 거만하고 무례하다 그런 뜻입니다.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 그리고 만나와 물과 또 옷과 부릍지 아니하는 발의 이적으로 함께 해 주셨다 그겁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무엇인고 하면 "무슨 반석에서 물을 낸 것 신기하다. 혹은 만나가 계속 나와서 신기하다. 구름 기둥 불 기둥 야 신기하다. 신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말이 부릍지 않는다 신기하다."
그게 아니고요, 이 진정한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고 복을 받아서 애굽으로부터 종살이하다가 홍해를 건너게 해 주어서 빠져나온 이 사람들이 얼마 가지 않아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인도해 낸 여호와다." 그랬다 그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하셔도 가장 싫어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지켜주고 어거하고 계시는데 내려다보고 계신데 그 하나님 앞에서 송아지 금덩이 가지고 만들어 놓고서 "이게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설만하였다. 무례하고 그 행위가 아주 거만하였습니다.
그렇게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하였사오나, 너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였으나 19절에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너희를 광야에 버려버리지 아니하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 만나와 물 해어지지 않는 옷 부릍지 않는 발, 이렇게 나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것은 당신의 재주를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당신의 능력을 뽐내기 위해서 행하신 겁니까, 아니면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주신 겁니까? 긍휼히 여기사 주신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이 긍휼히 여김 받을 만큼 착하게 했기 때문에 주신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고 매우 하나님 앞에서 설만하게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행동이 정말 잘못되었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긍휼히 여겨 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이 느헤미야시대 사람들의 경배할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 이런 것 경배하지 않아요. 물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지요. 그러나 경배는 그런 것 하지 않아요.
이 백성들의 경배는 어떤 내용이냐? 우리가 참으로 엉터리같이 살았고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렸사오나 그런 중에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사십년 동안을 한 끼 굶주리지 않게 하였나이다. 물이면 물, 불 기둥이면 불 기둥, 구름 기둥이면 구름 기둥, 옷이면 옷, 신발이면 신발, 부릍지 않게 하는 발이면 발, 어찌하여 그렇게 해 주셨나이까.
이 느헤미야시대 사람들의 이 사건들을 보고 다시금 저들 열조와 같지 않게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고 자복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사 이런 것들을 주셨나이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들으시면서 아주 기뻐하시게 되어 이제 끝에 가서 "오늘부터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가 되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듣고자 하는 경배의 내용은 "하나님 재주 좋으시네요. 반석에서 어찌하여 물을 다 내십니까. 하나님 능력은 뭐 이 세상 누구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만나 그것 대단한 겁니다. 불 기둥 구름 기둥 홍해를 가르는 것,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십니다." 여러분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전지전능하시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런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아무 것도 없는 광야 속에서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살도록 해 주셨나이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게 이제 핵심이다 그겁니다. 연하여 긍휼을 베푸셨음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나와 물, 옷, 신 등은 다만 하나님의 이적 또 이스라엘 백성이 훌륭해서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이 될 것처럼 이스라엘을 본받을 것처럼 이렇게 우리는 생각하고 성경을 풀어왔습니다마는, 오늘 이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멀어져서 죽게되어 다시 돌아오면서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 이 사람들의 내용은 무엇이냐?
우리 열조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 이러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이적이 아니면 다 죽게된 우리 열조들을 그냥 저희들 힘으로 살게만 버려두어도 그저 고맙다고 할 터인데 죽게된 것을 하루도 굶주리지 않도록 친히 먹여주시고 그리고 마시게 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 세상에는 부부간에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며 정말 부부간에 우리가 남편을 놓고 금송아지 놓고 이게 내 남편입니다 했으면, 다른 남자 불러놓고 이게 내 남편이다 했으면, 그렇게 그동안 사랑하고 다 살게 해 주었는데 우리가 그런 짓 했으면 그것은 이혼밖에 달리 할 것이 없을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부부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나이다.
세상에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 위한다 하지만 부모가 다 키워주고 먹여주고 잘 인도해주었더니 어느 날 자기가 좀 자라고 나더니 그 부모가 준 금덩어리를 주워 모아가지고서 금송아지를 만들더니 "우리 낳아준 부모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동물이야. 이게 우리 부모야." 하면서 뛰쳐나가서 다시 돌아보지 않고 호적을 파 나갔다면 그 부모가 즉시로 긍휼을 베풀어서 죽게된 자를 따라가면서 광야 사십년 동안을 지켜주심같이 해 줄 부모가 어디 있겠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하셨나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표적 표적 하면 대단한 줄 압니다. 그러나 주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표적 소리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베푸신 그 사랑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가는 핵심이 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적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이스라엘같이 하여야 복을 받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마는, 이스라엘이 어디 복 받을 짓을 해서 복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서 25절부터 또 읽어봅니다.
25절부터 26절을 읽겠습니다.
"저희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이제 열조가 행한 허물을 이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어디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희 열조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저들을 인도해 내시고 복을 주셔서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주어서 저들이 취하고 그 아름다운 물건을 가득 채운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집이 없어서 유리하다가 천막에만 살아도, 그저 다음날 뜯어갈 천막에만 살아도 감사했는데 하나님께서 정착지를 주어서 기름진 땅을 주어서 이제는 농사를 짓고 재물이 많아져서 집을 짓고 집안에다가 장식품을 가득 채웠다 그겁니다.
벽마다 좋은 그림을 걸고 그리고 사방에 문화생활을 하도록 가득 채우고 그리고 가진 것이 많아서 그저 포도원도 좋고 감람원도 좋고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고 살찌고 주의 주신 큰 복을 즐겼사오나 오히려, 26절에 오히려 안 주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안 주었으면 차라리 계속 매달리기라도 했을 것을, 불쌍해서 잘먹고 잘살게 해 주었더니 잘먹고 잘 살게된 살찐 살을 가지고 오히려 저희가 하나님을 순종치 아니하며 거역하며 전에는 주의 율법을 자기 가슴 앞에 두고 따라가더니 이제는 어느새 어느 날부터 저가 부자가 되고 살이 찌더니 주의 율법은 저의 등 뒤에 가고 말았나이다.
내 가슴 앞에 바쁜 것은 나의 행복이요 "골프를 칠까? 더 좋은 평수의 집을 할까? 내 자식을 어떻게 해 줄까? 여행을 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놀음을 할까? 술을 마실까? 춤을 출까? 나가서 바람을 피울까?" 이런 것이 자기 가슴 앞에 있어서 전부 그것을 골라잡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은 전에는 그의 가슴 앞에 있었으나 이제는 율법은 등 뒤에 있어서 가끔 필요할 때마다 뒤에 손을 내어 가지고 만질 정도다 그겁니다.
여러분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이 사람들 열조가 그랬다니까요. 혹 여러분도 닮으신 분이 계십니까? 아직은 그렇지 않을 줄로 아는데 이 말씀들을 오래 기억해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네게 복을 주리라 해서 여러분이 복을 받고 계신데 복을 받아서 살이 찌고 하나님 주신 큰 복을 즐기며 여러분의 가정에 채우고 남을 정도로 어디에다가 내 이 돈을 쓰며 나의 남은 생애가 얼마 되지 않을텐데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 그것만을 내 가슴 앞에 두는 날이 혹 오게 되거든 율법이 내 가슴 앞에 있다가 어디로 갔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차라리 율법이 등 뒤에라도 붙어 있으면 다행입니다마는 영영 떠나버리면 그것은 큰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들의 열조가 그리하였었다 그말입니다.
27절을 또 계속해서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니까 26절에 있는 내용 때문에 "그러므로" 했지요. 26절의 내용은 "오히려" 이 오히려 라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 복 때문에 잘 살게 되니까 하나님 덜 섬기더라 그겁니다. 전에는 새벽마다 기도하고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더니 잘살게 되니까 빠지더라 그겁니다.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 그러니까 단에서 책망하고 "돌아 오라. 사람을 더 사랑하랴 하나님을 더 사랑하랴. 돈을 사랑하랴 하나님을 사랑하랴. 회개하십시오!" 이렇게 주의 종들이 외치게 되면 이제는 유력자가 되어서 그 소리 듣기 싫고 그 소리를 들으면 모든 성도들이 날 쳐다보는 것 같고 하니까 그 주의 종을 죽여버렸다 그겁니다.
오늘같은 시대는 죽이지는 못하지요. 쫓아내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죽여버렸고 오늘같은 시대에는 죽이면 큰일나니까 나가라 나가라 하지요. 또 나가라 할만큼 힘이 있지요 이미.
그러니 그 받은 복을 가지고 오히려 선지자를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나님 앞에 크게 잘못했었나이다. 27절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이 한 절은 잘 읽어요. 이런 구절이 나오면 성도님들이 어떻게 민감한지요. 이 구절만큼은 잘 뽑아 읽어요.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렇습니다. 잘못했더니 벌 주는구나 그것은 성도들이 잘 압니다. 우리가 잘못했더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대적의 손에 붙여버렸구나.
그래서 병이 들거나 가난하거나 문제가 오거나 두려움이 오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아이고 회개해라. 네가 죄지었기 때문에 벌받는다." 이것까지는 잘 압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핵심을 잘 헤아려야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곧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지금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하는 백성을 대적의 손에 붙이신 목적은 대적의 손에 붙여서 잘못하는 자식을 욕보이려 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 당하게 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자꾸만 주를 떠나가는데 고통만 당하면 주여 하고 오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고통 당해서 주께 잘 돌아가는 체질 되지 마시고 잘될 때 감사 감사하여 돌아가시면 주께서 고통 주실 필요가 없어요.
주의 관심은 뭡니까?
자기 품에서 떠나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금 하시는 겁니다.
복을 주니까 감사하고 더 돌아오기는커녕 더 멀리 가니까, 대적의 손에 잠깐 붙여두니까 아프니까 "주여!" 부도가 나니까 "주여!" 당장 그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고생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그러니까 이 문장을 잘 읽으시면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서 잘못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서 대적의 손에 잠깐 맡기면, 대적의 손에 맡겨지면 오히려 주여 하고 온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주여 하고 오도록 고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리 구원자를 준비해두었다가 빨리 돌아와서 "이젠 다시는 가지 말라. 내 앞에 있어야 평안하다. 내 앞에 있어야 안전하다. 고생했지? 다시 가지 말라." 하면 그때 한두 주간 동안에 "예, 아멘 할렐루야! 안 가겠나이다." 했지만 그 다음에 또 28절에 보십시오.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버려 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이게 몇 차례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대적의 손에 맡기니까 대적이 마음대로 움직여요. 이것 대적이 마음대로 움직이면 인격도 소용없고요 얌전하던 성격도 필요 없어요. 대적이 제어하면요.
그리고 물건을 사든지 팔든지 집을 사든지 팔든지 주식을 하든지 증권을 하든지 손해 끼치려고 하는 대적이 제어를 하게 되면 항상 안 되는 일만 되게 되어 있어요. 참 속된 말로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어지고 대적의 제어를 받으면요.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 장관의 제어를 받으면요 엎어졌다가 일어날 때에는 동전 주어서 일어난다고 안 그럽디까? 그 말이 그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잘 살펴서 아직 이런 일 없겠지만 이들을 거울 삼으셨으면 합니다.
28절 중반절에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
주께서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 그러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경배한 내용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이적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더 많았습니다. 열 번 잘못하면 긍휼은 열한 번이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여 가기를 십리를 가면 주님은 십오리 앞에 긍휼을 갖고 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럼, 그럼. 네가 나를 이제 알아주는구나." 이렇게 하나님은 기뻐하시게 되신다 그말이지요.
그러나 이 참 뜻을 모르면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 자체만을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병들면 주여 이 병을 고쳐주시옵소서. 물질이 어려우면 지금 물질을 주시옵소서.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공부를 못하면 그저 이 아이를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케 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지금 내가 대적의 손에 붙여져서 대적의 제어를 받고 있기 때문에 참 물질 문제도 안 되고 건강 문제도 안 되고 자식 문제도 안 되고 지금 안 된다 그겁니다. 안 되는데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나님을 불러 놓고는 하나님을 훈육주임 선생님쯤으로 생각한다 그말입니다. 경찰관쯤으로 생각한다 그겁니다.
자기 지은 잘못만 말합니다. "아이고 내가 이것 잘못했는데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것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서 우리를 보시려 하는가 하면 한 단계 위에다 그겁니다.
네가 왜 그 일을 당하고 있느냐? 네가 왜 대적의 손에 제어받고 있느냐? 너는 병드니까 병 병 고쳐주소서 하는데 나는 병이 더 중요하지 않고 네가 내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네가 왜 병들게 되었는가? 네가 나를 떠난 것을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병을 주는 그 대적의 손에 붙일 때에 그 대적의 손에 너를 넘길 때에 대적이 너를 감당 못할 시험을 줄까바 미리 내가 분명하게 해 두기를 "내 백성 감당 못할 시험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래 고생 시켜서는 안 된다. 주여 하고 돌아오는 순간에 너는 손 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이겁니다.
여러분, 회개하고 제대로 돌아왔는데 마귀가 계속 달라붙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대적의 손에 붙이사 어려움이 있다면 왜 대적의 손에 넘겨져 있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섭하게 생각하셨는지?
율법이 내 가슴 앞에 있는지 등 뒤에 있는지?
내가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지 하나님을 버린 지가 오래인지? 하나님은 우리와 헤어지기 싫다 그말입니다.
수만 가지 죄를 지었을지라도 죄 한 제목 한 제목 "아이고 기억이 나느냐 안 나느냐. 아이고 꿈에도 생각나게 해 주시옵소서."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던가?" 그래서 한참 생각을 하니까 "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남의 지우개 훔쳤구나."
그건 남의 얘기 아니고 제 얘깁니다. 제가 완전히 훔친 것은 아니고요. 술도가집 아이가 있었는데 부잣집 아이니까 지우개를 큰 것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지우개가 있어야지요. 옛날 종이도 나쁜데 다 달은 지우개 나무토막을 가지고 닦아대니까 종이가 찢어진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 부잣집 아이에게서 지우개를 잠깐 빌려가지고 돌려주어야 되기는 되겠는데 어떻게 했느냐 하면, 통째로 먹을 수는 없고 얇은 면도칼을 가지고 껍데기를 약 일미리정도 포를 떴어요. 포를. 그렇게 해 가지고서 칼자국 흔적난 곳을 문질러 가지고서 맨들하게 해 주었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아이구 지우개가 작아졌다." "닦을 것이 많았다." 참 그런 것까지 생각나더라고요. 저도 하도 시키는 대로 회개는 하나도 감추지 말고, 죄는 하나도 감추지 말고 전부 기억해서 말해야 된다 이래서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리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들어갔지만 살찐 송아지만 준비되어 있다 그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전을 떠나고 곧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자기 백성을 놓칠까바 그게 걱정이지, 일 번 죄가 무엇이냐 이 번 죄가 무엇이냐 주께로 돌아오면 십자가 밑에서 그것 챙길 필요가 없다 그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이게 하나님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 그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죄 무슨 죄 그리고 무슨 병, 무슨 문제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게 문제라고 안 합니다. 대적의 손에 들어가서 어려움 당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나를 떠났던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무슨 그것 꼬치 꼬치 한 제목 한 제목 제가 말할 필요까지 뭐 있느냐 그겁니다. 내 집에 들어와버리면 이웃 사람이 뭐라고 하던, 돌아온 탕자의 형님이 뭐라고 하던 너는 좋은 옷을 입게 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되고 가락지를 끼게 되는 것이야.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어요. 여러분,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깐 우리를 대적의 손에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은 대적에게 가서 고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값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나를 떠나갔느냐? 다시금 돌아 오라.
29절 이하를 또 보시겠습니다.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하니까 여러분께서는 주의 율법을 지키기가 힘들지요. 주의 뜻대로 살기가 힘들지요. 그러니까 "이것 예수 믿으면 참 부담이 많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예수 믿으니 힘들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는데 "힘들어도 해야지."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 섭하십니다.
여기에 두 번째 줄 보십시오.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다음에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이라고 했어요. 여러분, 우리는 주의 계명이 힘든 줄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이냐?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은 어떤 것이냐?
들으면 복이 나온다. 그대로 행하면 거기에 생명이 나온다. 그대로 행하면 삶의 부요가 거기에 있다. 이게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29절에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시 그 삶이 윤택하게 하시려고,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다른 말로 바꾸면 다시 가난에서 돌아와서 그 생활이 윤택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그렇게 복을 주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그 가운데서는 무엇 가운데서요? 율법 가운데서. 지키는 가운데서.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이게 또 핵심입니다. 찬양할 내용입니다. 지금 잘못했다 잘못했다 하는 것은 이 뒤에 찬양을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아주 멋지게 한 겁니다.
비교급으로 전부 했는데 "그러나" 이게 이제 핵심이지요.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아주 버리지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열 차례 복을 주니 백성이 열 한차례 반역하고 백성이 열 한차례 반역하면 하나님께서는 반역하는 자를 향하여서도 이미 대적의 손에 열방의 손에 붙여 놓고서도 주의 긍휼은 그 붙인 것보다 더 크셔서 시험과 환난을 받으면서도 받는 위로가 더 커서 시험 환난을 어렵지 않게 넘기게 해 주시고,
그리고 시험하는 자에게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경계하시기를 저가 감당못할 시험은 주지 말라. 믿음이 큰 자는 큰 자만큼 감당하게 해 주고 약한 자는 약한 자만큼 감당할 수 있게만 네가 건드릴 수 있고, 그를 건드리면 그가 나를 향하여 떠나갔다가 내 율법과 생명을 저의 등 뒤에 두었다가 "주여 내가 주께로 돌아옵니다. 자리를 주시옵소서." 하고 주님만 부르짖으면 이미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긍휼이 더 먼저 가 있었더라 그겁니다.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죄가 이렇게 컸지만 하나님께서 멸하시기에 충분한 사막 가운데 두셨으나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아주 멸하지 아니한 이 말씀에 저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저는 주의 종이니 더욱 더 철저히 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데, 온 백성들이 보고 본 받을 터이니 매사를 주의하라고 하고 있는데 매사 잘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책망 덜 들으려고 성도님들 보는 데서는 더 잘합니다. 주님이 그의 종에게 말씀하시기를 "남 안 보는 데는 혹 잘못할지 몰라도 보는 데서는 잘해야 백성이 따라올 것 아니냐." 하는 이런 지시가 있기 때문에 보는 데서 잘하지마는 혹 안 보는 데서는 잘못할 수도 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또 뭘 잘못했나 싶어서 여러분이 지금 챙기려고 야단인데 뭐 잘한 것도 있지만 잘못한 것이 왜 없겠습니까? 그래 주의 종으로서 참 하나님의 그 의의 잣대로 전부 재면 우리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마는하나님의 긍휼이 크시사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저는 하나님께 늘 감격하면서 살아요. 너무 감사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제가 행한 일로는 이렇게까지는 정말 세밀히 지켜주실 수 없다 싶어서, 또 저의 충성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 성도님들이 저를 목사로 대우하고 사랑해주시고 정말 저를 존경까지 해 주시는데, 정말 제가 존경이란 말하기도 그런데 제가 존경받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제가 이 대우받을 일을 못하고 있는데, 몸도 못 따라가고 생각도 못 따라가고 지혜도 못 따라가는데 너무 어디를 가든지 그래요. 어떤 분들은 제 앞에 와서 얘기를 하다가 조심해서 벌벌 떠는 분들까지 다 있어요.
요즘 세상에 높은 사람 앞에 가서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주의 종이니까 그래야지."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제가 항상 어머니를 팔리지요. "어머님이 잘하셔서 다윗의 것이 솔로몬에게 가듯 아마 그래서 내가 이렇지 나의 행한 것으로 어떻게 이게 올까?"
어머니 얼마나 잘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요. 이 저 때문에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뭐 아주 멸하지 아니한 여기에 해당되려면 한참 멀은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큰 사랑 받고 있어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저의 설교를,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부러워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런 영감을 얻었느냐고 난리입니다. 이것 정말, 그래서 이건 너무 너무…. 그런데 오늘 말씀 보니까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완전히 멸할 상대도 절대로 완전히 없애지 않는다 그겁니다.
그러면 뭘 기대하는 겁니까? 돌아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주 멸함받을 대상도 아주 멸하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약간의 잘하면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울 때 "주여!" 안 하려고 항상 좋은 것 조금만 생겨도, 그날 반찬 한 가지가 좀 맛있어도 "감사합니다." 씹으면서도 "감사합니다." 야 이 맛 대단한 겁니다. 그 흙과 물과 햇빛 사이에서 어떻게 이 맛이 나올까요? 김치도 시어도 맛있고 풋김치도 맛있고 중간 익어도 맛있고 시면 김치찌개.
하여간 모든 것, 그건 저희 가족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저놈이 떠나지 않고 내품에 있구나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 이왕이면 감사하므로 하나님 품에 있습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보내시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31절 중반절에 "아주 멸하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배해야 될 내용이 무엇이냐?
우리가 아무리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났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너를 버릴 수가 없어. 세상없어도 나는 너를 붙들어야 돼. 네 잘못이 크냐? 내 긍휼은 너보다 더 크다. 네가 백번 나가겠느냐? 나는 백한번 붙잡는다. 내가 너를 붙잡는 것이 너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그것이니 깨닫고 돌아 오라는 것이 주의 음성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느헤미야 때에 하는 모든 노래들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경배한 모든 경배의 내용이 무엇이냐?
우리 열조를 비롯해서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까지 잘못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이러 이러한 우리를 지키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이러 이러한 것이 어떤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이렇게 하니까 엉뚱하게 해석을 해 가지고서 복이라도 받게 되어 있는 이런 이름인 줄로 알고, 어떤 분들은 우리가 분명히, 한국 사람은요. 그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데 이스라엘 지파도 아닌데 "우리도 이스라엘이 된 줄로 믿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불러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하하 그래? 이제는 다시 내가 너를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니까 그 참 좋은 이름 아니냐. 나쁜 이름 야곱을 버리고 이제는 이스라엘을 주었으니까 야곱과 반대되는 좋은 이름이 아니겠느냐.
여러분, 야곱이라는 이름을 그 부모가 왜 지어주었습니까?
동생이면 동생 자리에 있어야 될텐데 형에게 지는 것이 싫어서 나올 때부터 형 발목 잡았다 하는 뜻으로 '약탈자, 남을 밟고 올라서려는 자, 늦으면서도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자' 이 욕심쟁이라는 뜻으로 야곱이라 지었습니다. 맞으면 아멘 합시다.
성경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 야곱, 이 야곱을 만나서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씨름을 건 것이 아니라 야곱이 씨름을 합니다. 붙들고 놓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꾸만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아요.
"지금 밝아오니 내가 가야된다. 나는 지금 밝으면 있을 수가 없다. 나를 놓아라 떠나야 된다." 이렇게 하는데도 이건 형의 발목을 잡아도 야곱이 될 판인데 감히 인간이 하나님의 발목을 붙잡고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는 한발자국도 못 갑니다. 내게 복을 주시지 않고는 못 가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향하여 "네 이름이 지금까지 야곱이다마는 네가 형의 발목을 잡아 야곱이 되었지만 네가 지금은 하나님의 발목을 붙잡았으니 나는 너를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그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 뜻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다 그랬어요.
성경 전체를 놓고 보십시오.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을 이긴 자라면 살아남을 자가 있습니까?
그건 엄청난 죄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겨룰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겨루다니요?
하나님 주변에 있는 천사들, 그 능한 천사들도요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뵙지 않기 위해서 날개 몇 개 있다 했습니까?
여섯 개였던가요?
두 개는 얼굴을 가리고 두 개는 날고 두 개는 무릎을 가리고 하나님 가까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어요.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이나 하나님의 움직임과 하나님의 임하여서 그 성전 안이 가득 차고 연기가 찼거나 했을 때 이사야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하나님이 이 성전 안에 임하셨는데 내가 하나님 가까이 서 있게 되었도다. 내가 죽게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또 천사를 통하여 말씀을 전해 받았던 사람들은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음성 직접 들으면 너희가 죽고 살아날 자가 없으니 너희는 산으로 오르지 말라. 모세만 올라오도록 하라. 너희는 줄을 치고 이 이상 경계를 칠 테니 절대 올라오지 말라. 올라오면 다 죽는다. 내 음성을 직접 듣고 살 자가 있느냐? 너희는 나를 보려면 환상으로나 이상으로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직접 보는 날은 저 천국에 와서야 가능한 것이야. 너희가 인간으로서 죄인으로서 어떻게 나를 바로 볼 수 있더란 말이냐. 가까이 오지 말라." 그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붙들고 겨루다니요?
그런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죄를 짓고도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까?
그뿐입니까?
하나님인줄 알았으면 뒤로 싹 물러가서 절해야지요. "아이고 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까? "슬프다 나여. 하나님의 음성을 내가 듣게 되었도다." 그랬습니다. 책을 통해서나 읽어야 될텐데 누구를 통해서 낭독하는 것을 들어야 할텐데 내가 직접 들었으니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겠는가? 그게 성경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같이 해야 되는 줄 알고 하나님 만나려고 야단입니다. 한 번 붙들었다 하면 물고 늘어지려고 그럽니다. 이건 정말 해석이 참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기도를 해서 들어주시든지 안 들어주시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문제를 놓고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할 때에 세 번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응답 아니하시니 그 제자들에게 가서 "이제는 자고 쉬라 기도하지 말라. 이 문제는 절대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을 괴롭게 해서는 안 돼."
바울이 자기 육체에 가시가 있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서 그 문제를 안고서 성도들 앞에 나가니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덕이 안 되어서 "하나님, 이 문제를 고쳐주시옵소서." 세 번 크게 기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니야 난 들어주고 싶지 않아. 그게 너한테 있는 것이 좋아. 너는 떠나가면 좋은 줄 알지만 나는 볼 때 네가 그게 있어야지 너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잘나서 교만해질 사람이야. 교만하면 망하는 것이야. 네가 부끄러움이 있어야 큰 소리를 못 쳐. 그게 네가 사는 것이야."
다시는 더이상 기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 하나님을 굽힐 수가 없기 때문에요. 내가 굽어지고 내가 져야지 어찌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긴 사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얻은 야곱입니다.
"응답해 주지 아니하면 못 갑니다. 축복하지 않으면 못 갑니다. 절대로 못 갑니다."그 하나님이 힘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그를 쳐서 환도뼈를 무너뜨렸어도 "못 갑니다!" 하고서 질질 끌려옵니다. 그러니까 축복했어요. 복을 내려주었어요.
주기 좋아서 준 복이 아니에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 이것입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그래 너 야곱이지. 야곱이면 야곱 짓만 할 것이지, 사람 형제나 붙들 것이지 발목 잡을 것이지 네가 하나님까지 발목 잡아? 이제부터는 너를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과 이긴 자다 그것입니다.
천사가 그랬으면, 천사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얻었으면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시겠습니까?
악한 영들이 하나님과 겨루어 붙들고 늘어졌으면 그를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두겠습니까?
아니요.
그러나 저를 택하셨기 때문에, 그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저를 택했기 때문에 내 위에 올라와도 저는 심지어 이스라엘까지 되었지만 나는 이스라엘이라도 버릴 수 없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로다. 이 진정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왜 아멘 안 하십니까? 제가 몇 주전에 설교를 드린 적 있기 때문에 제가 이 정도 쉽게 자신있게 말씀을 드린 겁니다. 몇 주전에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이 무엇입니까?
호세아서 12장 2절로 6절에 뭐라고 했던가요?
“형의 발꿈치를 잡은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에게 보응하사 그의 소위를 따라 보응을 했고, 더욱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이 못가시도록 발목을 잡았던 이 큰 죄에 대해서는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벌받을 일로서 벌을 받고 있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런 뜻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이것은 분명히 지난 시간에 확실히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 자세한 말씀 더 안 드리지만, 우리는 누구였습니까?
야곱입니다.
우리는 누구였습니까?
혹 이스라엘까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스라엘까지 되는 행동을 많이 한 줄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살아온 우리, 오늘 이 느헤미야 시대의 시람들의 이 회개와 이 경배의 내용을 바로 깨닫고 능력의 하나님 불러서 덕이나 보고 나 편하게 살려는 그런 열조같은 허물스러운 신앙생활에서 탈피해서, 우리 열조와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사랑을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살찌어주신 그 살 가지고 가정에 채워주신 복을 가지고 오히려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주의 계명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주의 계명을 따라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주의 계명을 따라 주님 우선하지 못하고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가슴 앞에 두고 주의 계명은 등 뒤에 둔 지가 오래 되었나이다. 내 가슴 앞에는 자식이 있고 내 가슴 앞에는 집이 있고 내 가슴 앞에는 직장이 있고 내 가슴 앞에는 사업이 있고 내 가슴 앞에는 내 남은 날 동안 어떻게 오래 건강하게 살까 이것이 내 앞에 있고 주의 계명은 등 뒤에로 갔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의 주신 것을 거의 다 까먹고 보니 등 뒤에로 가 있는 그 율법과 계명 속에 내 생명이 있는 줄을 이제 발견하였나이다. 그 계명 가운데 내 부요의 삶이 있는 줄로 발견하였나이다. 주여 주를 배반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된 나를 이스라엘된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되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이만큼까지라도 남아있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이제 내가 찬송하는 것은 반석에서 물을 낸 하나님의 능력의 재주를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그렇게까지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고 할만큼 했어도 주님은 힘 있는 것 다 내어 반석에서도 물을 뽑을 만큼 날 불쌍히 여겼음을 찬송하나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되 여러 번 계속하여 긍휼히 여기심을 감사하나이다.
이 하나님을 감사하여 찬송시가 있는데 시편이지 않습니까?
시편을 전부 읽어보십시오.
어떤 내용입니까?
선함과 인자하심입니다.
시편 내용 읽어보십시오.
그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찬송곡 중에 우리 성가대가 가장 잘 부르는 귀한 곡 큰 곡 있지요?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그리고 진실함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찬송의 핵심의 내용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여 그의 긍휼은 우리의 악보다 크시며 우리가 열 번 잘못하면 그에게 용서는 열 한번 가 있고 우리가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어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니 그리고 끝내 버릴 수 없어 하시는 하나님. 내 육신의 부모보다 나으며 사랑하는 부부보다 나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는 자식보다 나으며 이러한 사랑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나이다.
주여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님 앞에 죄만 짓고 살았사오니 주의 능력만 이용하려고 하였사옵고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어서 살았사오니 이러한 기도와 우리 요구를 이스라엘에게 용서하심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용서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마는, 그러나 주여 우리를 부를 때에 죄인 오라 하실 때에 우리가 갈 수밖에 없나이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나를 부르소서. 인애하신 구세주여!
337 장 찬송합시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측량할 수 없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도 찾아볼 수도 들어볼 수도 없는 그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지금도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배반을 하더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고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이 망하는 것인 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와 진정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그 역사하심이, 진실로 멀리 하였던 주의 전 등 뒤로 하였던 주의 계명 우리 앞으로 모셔서 하나님 전에서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위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결심한 성도께 함께 하실지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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