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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4-15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 / 장기용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출애굽시킨 모세는 120년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신명기 34장 1절의 말씀과도 같이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러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모세의 120년의 생애를 3단계로 분류하면,
모세는 초반 40년 동안은 애굽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였고,
중반 40년 동안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았으며,
후반 40년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출애굽하여
광야의 여정길에서 보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민수기 20장 11절에 기록된 바와도 같이 모세가
“그 손을 들어 반석을 두 번 치매”입니다.
그러자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 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명령은 민수기 20장 8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출애굽한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에 지쳐서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석에게 명한 것이 아니라 반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20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출애굽한 사람 중에서 단 두 사람만이
약속의 땅(Promised Land)인 가나안에 입성(入城-성 안으로 들어감, 싸움에서 이겨 점령지에 진주함)하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출애굽한 사람들이 아니라
광야길 40년 동안에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신명기 34장 7절의 말씀처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신명기 34장 9절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 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그 백성들을 가나안이 눈 앞에 보이는 모압땅까지 인도하는 것이고,
그 다음 부터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자신의 사명을 다 완수(完遂-완전히 이루거나 다 해냄)하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보다 더 먼저
영원한 본향인 가나안에 입성한 것입니다.
이 모세는 다섯 편의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모세오경(Pentateuch)이라고 하며,
이 모세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죽음이 기록된
신명기 34장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위인의 저서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 위인의 사망기사를 기록하여 첨가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신명기 33장까지만 기록하였고,
누군가가 모세의 장례(葬禮)에 관한 사실적인 내용을 기록하여
신명기 34장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비록 34장은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을지라고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모세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이기에 모세오경에 포함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세의 죽음이 기록된 신명기 34장을
기록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모세의 후계자(後繼者)인 여호수아가 대두(擡頭-어떤 세력이나 현상이 나타남)되며, 이러한 사실을 유대인의 문헌인 탈무드((Talmud-유대교의 율법, 윤리, 철학, 관습, 역사 등에 대한 랍비의 생각을 기록한 문헌)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명기 34장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쓰여 지고,
제사장 엘르아살이 이 기록의 직무를 수행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므로, 모세에게 있었던
모든 지도권이 여호수아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다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남아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 여호수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이 여호수아는 히브리식의 이름이며,
이 이름이 포로시대 후기에는 “예수아”로 바뀌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헬라식 명칭인 “예수”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마태복음 1장 21절의 말씀처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히브리식의 이름인 여호수아가
신약의 헬라식 이름인 예수로 바뀌었으며,
여호수아와 예수의 뜻도 동일하게 ‘구원“입니다.
또한 구약의 히브리 성경을 신약의 헬라어로 음역한 성경인 셉투아긴타(SEPTUAGINTA) 즉, 70인역(LXX INTERPRETES)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를 예수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이름의 변천사(變遷史)를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로, 여호수아가 예수아로,
예수아가 예수스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름의 뜻은 바로 “구원”입니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민수기 13장 8절의 말씀처럼
“눈의 아들 호세아”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 호세아를 민수기 13장 16절의 말씀처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칭하였‘ 습니다.
그 이유인즉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 인데, 이는 구원의 주체(主體)가 호세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구원의 주체가 호세아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가진
여호수아로 개명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는 여호와와 호세아의 합성어(合成語)입니다.
모세의 뒤를 잇게 된 여호수아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1장 5절의 말씀처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라고 말씀하시며,
여호수아 1장 6절의 말씀처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고 말씀하시며,
여호수아 1장 9절 후반부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두명의 정탐군을
가나안에 보낸 것과도 같이
이제 여호수아도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탐군을 가나안에 보냅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정탐군은 그 곳에 사는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무사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게 됩니다.
기생(妓生)이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천박(舛駁)한 여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천박한 여인인 기생 라합이
두 명의 정탐군에게 고백하여 말하기를
여호수아 2장 9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고 합니다.
이 결과로 인해 이 기생 라합은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가게 됩니다.
마태복음1장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라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두 명의 정탐군의 보고를 듣게 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고자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홍해를 갈라주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요단강을 갈라주십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요단강은 갈라지게 한 것 또한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흔히 안타깝게도 무엇이 갈라지는 현상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모세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서 할례의식을 행하고
자신들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유월절 의식을 행하므로 지난 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은혜(恩惠)를 상기(想起-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여 냄)시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난날의 애굽의 수치와 죄악의 부끄러움을
하나님께서 다 굴러가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길갈의 뜻은 “굴러 가다”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사업장의 이름을 지을 때 너무나도 지나치게 성경에 나오는 명칭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합니다.
필자가 대형 매장에 있는 타이어 판매점의 이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은 다름 아닌 길갈 타이어였습니다.
아마도 길갈의 뜻이 “굴러 가다” 이므로 타이어가 굴러가는 작용을 하기에 길갈 타어어라고 지은 것 같아 보이는데,
이는 지극히 어리석고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행할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셔서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셨는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그 땅에서 나는 것들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그 땅에 거주(居住)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적하는 삶이었고,
그들을 정복하여 나가는 삶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에 그 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고르게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모든 땅을 분배한 후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딤낫세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헤브론 땅을 요구하여 얻게 됩니다.
사실 가나안 땅을 분배 할 때에 가장 우선권은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여호수아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땅 분배는
갈렙으로 시작하여 여호수아로 끝이 납니다.
갈렙은 땅이 분배되기 전에 가장 먼저 헤브론 땅을 요구합니다.
이 헤브론 땅은 그 어느 누구도 싫어하는 땅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땅에 거인인 아낙 족속이 거주하여 있었고,
그러기에 정복하기 어려운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모지(不毛地)와 같은 땅을 갈렙이 요구한 것입니다. 갈렙은 가장 좋은 땅을 요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14장 12절의 말씀처럼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14장 13절의 말씀처럼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 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차례대로 좋은 땅을 차지하고,
여호수아는 맨 마지막에 에브라임 산지의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不毛地)와 같은 땅인 딤낫세라를 분배 받게 됩니다.
여호수아 19장 50절 말씀에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 또한 자신이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아브람은 창세기 13장 9절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에 롯이 먼저 좋은 땅을 택하고 아브람이 옮긴 땅은 다름 아닌 장차 갈렙이 선택할 땅인 헤브론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백성들이 안락(安樂)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삶,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가운데 풍요롭고,
평안한 삶으로 가꾸어 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들을 다 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안식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목전(目前-눈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 23장 1절로 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게 되었고,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頭領-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를 부르는 호칭)들과 재판장들과
유사(儒士-일을 처리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3장 3절 후반부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모세가 한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想起-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여 냄)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출애굽기 14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언(斷言-주저하지 않고 딱 잘라 말함)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전(聖戰-거룩한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백성들은 염려할 것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승리하셔서
그 승리의 기쁨을 백성들에게 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피 흘리시기까지
우리들에게 죄를 범하게 한 사탄과 싸우시고,
부활로 승리하시어서 그 승리의 부활을 우리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믿음으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친히 대신 싸우시는 반면에,
이슬람교는 이와는 정반대로 인간이 신을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지하드(Jihad)라고 하는데,
이 지하드가 바로 성전(聖戰)입니다.
이 지하드란 이슬람교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이교도들에 대해 벌이는 전쟁을 말합니다.
이 이슬람교의 신도들을 가리켜 무슬림(Muslim)이라고 하는데,
이 무슬림은 “절대 순종하는 이” 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슬람의 뜻도 “절대 순종한다”입니다.
이슬람교에서 믿는 신은 그들이 말하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입니다.
그들은 “절대 순종”이라는 말을 맹목(盲目-사리에 어두운 눈)적으로 받아들여 전 세계에 흩어져 테러와 살인을 일삼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 23장 6절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고
당부(當付-말로 단단히 부탁함)합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23장 7절에 그 땅에 있는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들이 불러야 할 신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들의 삶 속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넘쳐나며, 풍요로움이 있으며, 악한 세력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생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만 죄인 된 인생들이 자신들의 입술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 은혜이며, 이러한 특별하신 은혜는 절대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택함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놀라우신 은혜 앞에 마땅히 부복(俯伏-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늘 끊임없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마음속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어서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지 못하고,
다른 신을 부른다면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으며,
불행을 자초(自招-어떤 결과를 자기가 생기게 함)할 것이며,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우선적으로 그의 삶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Out Christ)에 있는 선은
선이 아니라 선으로 가장(假裝-태도를 거짓으로 꾸밈)한 악이며,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선만이 참된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만이
참된 선인 이유는
그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근거(根據-근본이 되는 터전)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23장 10절에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 동안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회고(回顧-과거를 돌이켜 생각함)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도 없이
위기에 봉착(逢着-어떤 처지나 상황에 부닥침)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원망하여 배반하는 것을
진저리 칠 정도로 목격하였습니다.
특히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 온 12명의 정탐군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군들의 악평(惡評-나쁘게 평함)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고,
의분(義憤-불의를 보고 일으키는 분노)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여호수아이기에 24장 1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게 되어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옛적에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상세(詳細-자세히 이야기하다)하게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24장 2절로 5절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람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람을 강 저 편애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고 말합니다.
이어서 여호수아 24장 6절에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친히 인도하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입성(入城-성안으로 들어감, 싸움에서 이겨 점령지를 차지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여호수아 24장 13절에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4절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자신의 수고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과 건강과 소유의 풍요로움을 누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간직하며
지금까지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며 우리의 믿음을
점검(點檢-낱낱이 검사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우리의 신앙의 열정이 사라졌다면 과거를 회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감사함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지 아니할 것이며,
퇴보(退步-뒤로 물러감, 수준이나 정도가 전보다 뒤떨어짐)하여
세상과 짝하여 어울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23장 12절로 13절에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여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고 말씀하시며,
또한 16절에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망하리라.”고
엄중(嚴重)하게 경고하며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말하고, 이어서 24장 15절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기록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의
히브리 원문은 “빠하루 하욤 미 타아보둔”인데,
이 말을 해석하면
“우상을 섬기려면 섬겨라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이다”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러한 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하게 어필(御筆-길들이기 위해 쓴 글)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여전히 다른 우상을 숭배(崇拜-종교적 대상을 우러러 신앙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단도직입(單刀直入-혼자서 칼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적진으로 쳐들어간다는 뜻으로, 여러 말을 늘어 놓지 아니하고 요점을 바로 말함을 이르는 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둘 중에 한 신만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섬기거나
다른 무언가에 집착(執着-어떤 것에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하지는 않았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속히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서 점점 사라질 것이며, 하나님의 징계(懲戒)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그 어떤 무엇이 더 중요시 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며,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강요(强要-굳세게 요구함)하며 권하지 않고,
자발(自發-스스로 나아가 행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렇듯 신앙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며 것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목사나 부모라고 할지라도
절대 강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信仰)은 성령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그 주어진 믿음을 기반(基盤-기본이 되는 토대)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강요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 무례(無禮-예의가 없음)함을 범하는 죄인 것입니다.
또한 강요에 의해서 주어진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외식적이고,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주어진 믿음만이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 된 우리들은 결코 이러한 믿음을 자발적으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원하는 심령을 주시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24장 15절 후반부에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하며,
신앙의 모범(模範-본 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을 보입니다.
이렇듯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변함없는 신앙으로 본을 보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종용(慫慂-잘 설명하고 달래어 권함)히 권면(勸勉-알아 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합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답하기를
여호수아 24장 16절에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7절로 18절에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듣게 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24장 19절에 단호(斷乎-딱 잘라 말함)하게 말하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목도하지 아니하시며, 긍휼히 여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십계명 중에 가장 첫 번째인 제 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설령 다른 죄는 긍휼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 만큼은 결코 용납(容納-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 때문에
도무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장 2절의 말씀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를 첫째 계명으로 여기며,
출애굽기 20장 3절로 6절의 말씀을 둘째 계명으로 여깁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를 늘 기억하면서
자신들을 그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감사하기 위함이며,
그 감사를 통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24장 20절에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24장 21절에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라고 단호(斷乎-매우 엄격하다)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이에 여호수아는 24장 22절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말에 여호수아는 24장 23절에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23장 24절에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聽從-이르는 대로 잘 들어 좇음)하리이다.”라고 답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강하게 어필(御筆)하여 말합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 자신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수방관(袖手傍觀-팔장을 끼고 보고만 있다는 뜻으로 간섭하거나 거들지 않고 그대로 버려둠을 이르는 말)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마시고,
내 자신의 하나님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유혹의 강도(剛度-금속 따위의 단단하고 질긴 정도)에 따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자신이 지은 죄를 부인하며,
합리화(合理化)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본다면
그 어떠한 유혹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진정한 내 자신의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말처럼 우리들도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자세로 바라보았기에 가나안 땅에 있는 우상을 쉽게 숭배하였으며,
심지어는 우상과 하나님을 견주어 비교하며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키며,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오늘 말씀의 제목인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의 신앙도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생명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며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인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 는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 경종(警鐘-다급한 일이나 위험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종)을 울리는 말씀이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신앙의 도전의식을 심어주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현 시대를 바라볼 때에 갖은 우상이 난무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섬기지 못하는 시대이며,
세상 속에 사무쳐 있는 사탄의 문화인 뉴 에이지(New Age) 문화가 기승(氣勝-기운이나 힘 따위가 누그러들지 않음)을 부리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속에 살면서 우리들은 단호하게 우리들의 섬길 자를 하나님으로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섬기는 자들이야 말로
비로소 썩어져 가고,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에
소금과 빛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신앙인들의 삶을 통해 이 험악한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멘-
출처: 대한 에스라 성서 연구원 글쓴이: 장기용 (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