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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이유 :
거란의 중원(중국 본토) 진출과 지배에, 고려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중원에는 송나라가 있었다.
거란이 중원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면, 고려가 거란의 근거지를 공격할 수 있었음. 고려는 거란의 등뒤(배후)에 존재함.
거란은 송나라와 고려를 동시에 공격하기 어려움. 군사력이 분산됨. 그 정도로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함
고려와 송나라는 한편, 그 반대편이 거란.
2(고려와 송) : 1(거란)의 싸움
거란의 최선은 고려와 친교 후(고려의 군사력을 묶고), 송나라 공격. 중원의 패권자가 되는 것.
거란의 최악은 고려와의 전쟁.
고려가 사는 길은 송나라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손을 잡고 힘을 합쳐 거란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친송과 거란을 배격하는 북진정책을 편 것이다.
물론, 고려의 북진정책은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국력을 왕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다시말해, 북진정책의 명분은 고구려의 古土(옛날의 영토) 회복이지만, 왕권 강화의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은 외부적인 요소로만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외적요인.
대부분 내부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내적요인.
* 거란이 고려와 전쟁을 한 결과 :
고려와 거란의 국력은 약해진다.
결국 거란의 요나라는 여진족(금나라)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송나라에게 처음에는 조금 도움이 되었다. 고려도 국력이 쇠퇴, 거란도 국력 쇠퇴.
거란이 쇠퇴하면서 여진족(여진족의 또다른 이름은, 말갈족과 만주족)이 결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게 된다.
여진족의 선조가 말갈족이고, 후손이 만주족이다.
발해는 고구려 후예들과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다.
백성은 고구려 후예들보다 말갈족이 더 많았음.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금나라(金)이고, 그 후손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후금(後金. 나중에 청나라로 바꿈)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송나라 침략(중원 진출)으로,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 내려간다.
그것이 북송의 멸망과 남송(송나라의 왕실이 여진족의 침략을 피해, 남쪽으로 쫒겨 내려가서 지금의 항저우에 나라를 세움)의 건국이다.
거란의 고려 침략 → 거란과 고려의 국력 약화 → 여진족의 강성 초래 →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송나라 공격으로, 북송의 멸망 → 금의 팽창. 남송의 건국.
금나라와 남송은 황하(황허)와 회하(화이허강, 회수)를 경계로, 대체로 그 북쪽은 금나라가, 남쪽은 남송이 있었다.
거란의 침입 | ||
원인 | 고려의 거란에 대한 강경책과 친송· 북진 정책 (중원으로 진출하려면 고려와 송의 국교 단절 필요) | |
1차(993) | 거란 장수 | 소손녕 |
요구 사항 | 할지(땅을 떼어달라고 요구) | |
외교 담판 | 서희 → 강동 6주 획득 (압록강 하류까지) | |
2차(1010) | 강조 정변 | 개경 함락, 현종 친조(親朝) 조건 퇴각 |
3차(1018) | 친조 불이행 | 소배압 침입 |
격 퇴 | 귀주대첩(1019) : 강감찬 | |
결과 | 삼국(고려· 송· 거란)의 정립(鼎立) = 힘의 균형유지 | |
북방민족 침입대비 | - 개경 주위에 나성(외성) 쌓음 - 천리장성(압록강~도련포) 쌓음 |
고려 왕조 계보
① 태조 왕건(918-943) → ② 혜종(943-945) → ③ 정종(945-949) → ④ 광종(949-975) → ⑤ 경종(975-981) → ⑥ 성종(981-997) → ⑦ 목종(997-1009) → ⑧ 현종(1009-1031)→ ⑨ 덕종(1031-1034) → ⑩ 정종(1034-1046) → ⑪ 문종(1046-1083)→ ⑫ 순종(1083) → ⑬ 선종(1083-1094) → ⑭ 헌종(1094-1095) → ⑮ 숙종(1095-1105)
우리나라 | 중국 |
고려건국(918) | 거란의 건국(916) |
발해 멸망(926) | 거란이 국호를 ‘요’ (946) |
후삼국통일(936) | 송의 건국(960) - 고려 광종때 |
노비안검법 실시(958) | 금의 건국(1115) - 아쿠타 |
정안국 고려 광종 때 발해 유민이 압록강 서쪽에 세운 나라(926∼986)로 송나라와 친교를 맺고 거란에 대항하다가 거란에 의해 멸망됨 | 금이 요(거란)를 멸망시킴(1125) |
북송멸망, 남송시작(1127) | |
거란의 침입(993~1018) | 칭기즈 칸의 몽고통일(1206) |
동북 9성 축조(1107) | 원의 제국의 성립(1271) |
이자겸의 난(1126) | 남송 멸망(1279) |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1135) | 원의 멸망, 명의 건국(1368) |
동북아시아의 정세(政勢)
10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한반도에는 고려가 건국하였고, 중국의 북쪽 지역에는 거란이 요를 세우고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으며, 남쪽 지역에는 당의 멸망 이후 혼란기를 극복하고 송이 건국됨으로써 다원적(多元的)이고 복잡한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고려의 기본적 외교 정책 : 북진, 친송 정책
고려의 기본적 외교 정책은 이러한 중국의 정세 변화에 맞춰 신축성 있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란에 대해서는 국초부터 강경한 정책을 펴고 있었다.
거란의 팽창(膨脹) → 송과 대립
거란(퉁구스족과 몽골족의 혼혈로 형성된 유목민족)은 건국(916, 아율아보기 = 예리아포치) 후, 중국의 5대 10국의 혼란기를 틈타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의 연운16주(5대10국의 혼란기에 거란이 ‘후진’으로부터 할양받은 만리장성 이남의 베이징 등을 중심으로 한 16주. 송나라와 오랜 분쟁의 씨가 되었다)를 차지하는 한편(936), 선진문물 수용과 풍부한 물자를 얻으려고 중원(中原, 중국 본토)으로 진출을 꾀하였다. 이를 위해 배후에 있던 발해를 멸망시키게 된다.(926)
이러한 거란의 남진 정책(대륙 진출)은 새로이 중국을 통일한 송(960)에 위협이 되었고, 이로써 거란과 송은 충돌하게 된다. → 송과 거란의 대립은 중국에 대한 주도권 다툼(중원의 패권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다.
♣ 5대 10국(907~979)
당의 멸망부터 송의 통일까지 약 70년에 걸친 분열기로 5대는 화북 지방을 지배한 5개 왕조이고, 10국은 강남 일대의 지방 정권 10개국을 일컫는다. 대개 당의 절도사들이 독립한 경우가 많다.
♣ 고려 ↔ (친교) 송 ↔ (대립) 거란 ↔ (대립) 고려
고려와 거란의 대립
고려는 국초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야만국으로 간주하고 배격하는 정책을 취하였다.(對 거란 강경책) 그리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고려의 거란에 대한 강경책과 북진정책은 국론(國論)을 왕을 중심으로 일치시키고, 국가의 에너지를 고려 왕에게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명분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거란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정책과 북진정책은 같은 맥락이기 때문에, 왕권 강화의 수단과 도구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특히 거란의 시조 예리아포치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고려는 당시 발해에 同族意識을 갖고 있었음)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거란의 사신을 유배(귀양) 보내고 그들이 선물로 가져온 낙타 50여 마리를 만부교 아래 묶어서 굶겨 죽이며 거란과 적대 관계를 분명히 하게 된다(942)
이러한 그의 뜻은 훈요 10조에서‘ 거란과 같은 야만국과는 통교(通交)하지 마라 ’고 유언으로 남겼을 정도였다.
결국 고려의 북진정책, 친송정책과 거란에 대한 강경책(反거란 정책)은 거란의 침입을 초래하였다.
고려와 송과의 관계 : 친선(親善) 관계
① 송 : 정치, 군사적 목적(거란, 여진 견제)
② 고려: 경제, 문화적 목적(선진 문물 수용)
→ 고려와 송은 친선 관계를 통해 문화적으로 교류하고 거란과 같은 북방민족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송과 고려는 서로 연합하여 거란을 협공(挾攻)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송의 성급한 공격으로 패전하면서 거란은 고려와 송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하여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고려의 거란 대비책
① 광군(光軍) 설치 : 30만 양성
② 장성(長城) 축조
♣ 북방민족의 침입 대비
광 군(거란족 대비)
별무반(여진족 대비)
삼별초(몽고족 대비)
거란의 침입과 격퇴
① 1차 침입(성종, 993)
거란 장수 소손녕이 침공(侵攻) → 할지(割地. 땅을 떼어달라고) 요구 → 조정(朝政)은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 주기로 결정 → 거란의 청천강이남 진격 → 안융진 전투(발해 출신의 장수 대도수)에서 기세 꺾임 → 서희의 외교 담판 → 고려가 송과 외교 관계를 끊고 거란에 조공한다는 조건으로 철수 → 강동 6주 획득(압록강 하류까지 고려의 영토가 확장됨 : 압록강 동쪽 280여리)
소손녕 | “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을 차지한 것은 우리인데 왜 고구려 땅을 엿보는가? 더구나 바다 건너 송을 섬기니 오늘의 군사행동이 있게 된 것이다. 만일 고려가 땅을 바치고 조공을 보낸다면 무사할 것이다.” |
서 희 | “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므로, 국호가 고려이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땅의 경계를 따지면 당신들의 동경(요양)도 우리 영토인데, 어찌 우리가 당신들의 땅을 엿본다고 하는가. 압록강 유역의 땅도 본래 우리 영토이나 여진이 몰래 자리를 잡고 간악한 짓을 하고 있으므로 길이 막혀 조공을 바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지금이라도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다시 찾아, 길이 열리게 된다면 어찌 조공을 바치지 않겠는가. 내 말을 귀국 황제께 아뢰도록 하라” |
2차 침입(현종, 1010)
거란군이 철수한 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토벌하고 성을 쌓았다(강동6주) 그리고 이곳을 군사적 거점(據點)으로 삼음 → 거란은 이에 불만을 갖고 강동 6주의 할양(割壤, 땅을 떼어서 돌려 달라고)을 요구 → 고려 거절 → 강조 정변(政變)을 구실로 다시 침입(거란의 성종이 40만 병력으로 親征) → 흥화진 전투(양규)에서 거란을 공격을 막아냄, 그러나 통주 전투(평북 동림)에서 강조는 거란의 포로가 됨 → 개경 함락, 현종은 나주로 몽진(蒙塵, 피난) → 거란은 현종의 친조(親朝) 조건으로 퇴각함.
♣ 강조 정변
목종이 20세가 넘도록 후사(後嗣, 대를 이을 자식)를 두지 못하고 갑자기 병석에 눕자 이 때 모후(왕의 어머니)인 천추태후(헌애왕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 불륜으로 나은 자식을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모후의 음모를 안 목종은 당숙(堂叔) 욱의 아들 대량군 순에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태자로 삼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하게 하였다(협조 요청). 이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에 들어가 김치양을 죽이고 천추태후를 귀양 보내고 난 뒤, 목종까지 폐위(廢位)시켰다가 시해함(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으나 이미 후사가 결정된 뒤라 반역의 누명을 쓸까 우려하여 목종을 죽였다는 설도 있음).
3차 침입(현종, 1018)
현종의 친조(고려의 왕이 거란의 왕을 황제로 인정하는 행위) 불이행 → 소배압이 10만 병력으로 침입 → 개경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고려군의 협공(挾攻)을 받아 퇴각 →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평북 구성)에서 강감찬, 강민첨이 격파함 (귀주대첩, 1019)
♣ 낙성대(落星垈)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장군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일생을 바쳐 백성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백성들은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장군의 집터에 사리탑(舍利塔) 방식의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의 낙성대라 이름하였다.
전쟁의 결과
- 거란과 강화(講和) 체결로 평화 관계가 유지됨.
- 고려, 송, 거란(요)의 힘의 균형이 유지됨(삼국의 정립. 鼎立)
- 거란의 고려 침략 실패로 배후에 고려가 존재함으로써 거란의 송나라 공격은 어렵게 됨.
- 고려의 북진정책 추진도 어려워 짐.
- 국방력 강화 노력.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
- 개경 주위에 나성(羅城, = 외성, 성 밖을 둘러싼 성) 축조
-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강감찬 건의)
♣ 고구려와 고려의 천리장성
고 구 려 | 고 려 | |
축 조 자 | 연개소문 | 유 소 |
위 치 | 요동 반도 (비사성 ~ 부여성) | 한반도 북부 (압록강 어귀 ~ 도련포) |
설치목적 | 당나라 공격 방어 | 거란· 여진 방어 |
연 도 | 631 ~ 647 | 1033 ~ 1044 |
고려의 군사제도
① 고려의 중앙 군사조직은 2군과 6위로 편성되어 있었다.
② 2군은 국왕 친위대(왕 경호 부대)로서, 궁궐(왕궁) 방어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③ 6위는 수도방어와 국경방어(지방군대 통솔)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④ 2군 6위의 병력은 대부분 직업군인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복무의 대가로 군인전을 지급받았다.
⑤ 고려의 지방 군사조직은 5도를 지키는 군대(주현군)와 양계(동·북계)를 지키는 군대(주진군)로 나누어져 있었다.
⑥ 주현군과 주진군 병력의 대부분은 의무군인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복무의 대가로 군인전을 지급 받을 수 없었다.
⑦ 이들은 자기의 순번(順番. 순서. 당번)이 오면, 교대로(번갈아.番갈아) 가며 생업(生業. 먹고사는 일)과 병역(국방 의무)에 종사해야 했다.
⑧ 고려시대에는 무과가 사실상 없었다. 하급 장교들은 군공(軍功)에 따라 승진했지만, 최고의 무신 사령관직은 문신들이 차지했다.
⑨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문신(문관)은 우대되고, 무신(무관)은 여러 가지로 차별대우를 받았다.
⑩ 고려는 송나라처럼 문치주의(칼보다 붓을 우대)의 풍조가 있었다.
⑪ 이러한 문치주의는 군인 세력의 성장(왕권 위협 요인)을 억제하는데, 큰 이유가 있었다. 따라서 최고의 무관직은 당연히 문관들이 독차지했다.
⑫ 서희·윤관·강감찬·김부식 등은 문신 출신이면서 모두 최고의 군사령관을 지냈던 인물들이다.
⑬ 고려의 무신 천시(무신 차별) 풍조는 무신정변(1170)으로 나타났고, 이후 고려가 몽골(원)의 통치권 아래 들어가기 전까지(1270) 무려 100년 동안 무신들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했었다. 이 시기를 무신집권기라고 부른다.
⑭ 한편 고려는 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을,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별무반을, 몽골과의 싸움에 맞서면서 삼별초와 같은 별도의 부대를 두기도 했다.
강동 6주, 귀주대첩, 천리장성
① 고려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북진(北進)과 친송(親宋)이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다. 고구려의 계승은 고구려의 영토 회복의 의미도 있었다. 또한 태조 왕건은 훈요10조(일종의 고려왕실의 가훈)에서 유언으로 거란과 같은 야만의 나라와 교통하지마라 하였기에, 고려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북진(北進. 북쪽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려는 경제·문화적으로 송나라와의 친교가 필요한 나라였다. 이러한 고려의 북진과 친송, 거란 배격 정책(거란에 대한 강경책)은 거란의 침입을 초래하였다.
② 강동(江東) 6주(六州) : 강 강, 동쪽 동, 여섯 육, 고을 주.
③ 강동(江東) 6주(六州)는 압록강(鴨綠江) 동쪽(東)의 여섯(六) 개의 고을(州)로, 흥화진·용주·철주·통주·곽주·귀주이다.
④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서희의 성공적인 외교담판은 거란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거란의 국가 목표는 고려 침략이 아니라, 중원(송) 진출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고려와의 친교가 절실했다.
거란의 입장은 고려의 군대를 최소한 한반도에 묶어야 했다.
거란의 고려 침략은 최선의 대외전략이 아니라 최악의 선택이었다.
고려의 친송, 북진, 거란에 대한 강경책은 거란이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송나라로 진출하려는 거란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는 등 뒤에 있는 나라였다. 송이든 거란이든 고려와 친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송은 고려를 통해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거란을 견제하고자 했다.
즉 송나라도 고려가 정치·군사적으로 절박한 나라였던 것이다.
⑤ 거란은 고려에 3차례 침략했지만, 특별히 얻은 것 없이 오히려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크게 패함으로써(귀주대첩)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⑥ 대첩(大捷. 큰 대, 이길 첩)은 크게 이겼다는 뜻이다.
⑦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고려·거란·송나라 사이에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져 한동안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⑧ 나성(羅城. 늘어설 나, 성 성)은 외성(外城), 즉 수도(도읍)를 빙 둘러서 쌓은 성이다. 수도의 외곽에 쌓은 성이 내성(內城) 밖에 겹으로 쌓은 성이 나성이다.
⑨ 내성(內城)은 안쪽에 있는 성, 이중(두 겹)으로 쌓은 성에서 안쪽에 있는 성을 말한다.
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서 개경 주위에 나성(羅城)을 축조(쌓아)하여,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⑪ 고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은 강감찬의 건의로, 거란족,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압록강 입구~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쌓았다.
⑫ 한편,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정종 때 ‘광군(光軍)’을 두기도 했다. 광군(光軍)은 기운 센(光) 군사(軍士), 기세등등한(光) 군대(軍隊)라는 의미이다. 광군의 일을 맡은 관청을 광군사(光軍司)라고 한다.
천리장성(千里長城)
① 천리(千里)에 이르는 긴(長) 성(城)을 천리장성이라고 한다.
② 우리 역사에서 천리장성은 두 개가 있다.
③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④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연개소문의 주도(主導)로, 부여성~비사성까지 쌓았다.
⑤ 고려의 천리장성은 강감찬의 건의로, 압록강 입구~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쌓았다.
⑥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⑦ 고려의 천리장성은 거란족,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⑧ 결국, 천리장성은 고구려와 고려가 중국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작성자 : 최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