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 복 · 공 · 동 · 체
2013-05
길 에 서 행 복 을 묻 다
박세아 목사(행복공동체)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우리가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고 자기가 선택하거나 환경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좁은 길일수도 있고 큰 길일수도 있습니다. 큰 길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까요? 작은 길에 있는 사람은 불행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큰길에 있든 좁은 길에 있든 자기가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고 행복을 향해 나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암이라는 병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암이 걸리면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된다고들 합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은 원래 쉽게 분노하며 조그마한 충격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예를 들어봅시다. 미국 사람들은 의사선생님이 당신이 치유될 가망성이 1%만 있다고 하더라도 의사선생님에게 감사하며 희망을 찾은 것처럼 얼굴이 밝아지며 살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보다 미국 사람들이 더 치료가 잘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사선생님이 당신 치유될 확률이 30%입니다. 라고 하면 화를 낸답니다. 내가 큰 돈 들여서 미국까지 왔는데 뭐라고 30%라고 하면서 욕을 하고 분노를 일으키며 짜증을 낸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온 한국 사람들은 많이 치유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시골사람보다 서울사람이 암 치유가 안 된다고 합니다. 시골사람들은 의사 선생님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대로 하려는 의지를 보이는데 서울 사람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막 떠들어대고, 또 이미 ‘죽었구나’ 포기를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암이라는 질병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암을 연구하고 식이요법으로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암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치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암이 걸렸을 때 의사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져서 극복하는 것이 암이다. 라고 했습니다. 암은 끝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또 다른 삶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 동안은 암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암이 좋아하는 습관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암이 싫어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암이라는 질병이 확인되었을 때 웃을 수 있는 사람과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누가 과연 치료가 빨리 되고 완치 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감사이고,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스스로가 실천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윗도 아름다운 시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위대한 시는 시편 23편입니다. 그는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행복을 느끼며 어떤 두려움도 없는 최고의 정체성과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러한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최고의 고백이며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위대한 시 입니다. 그는 양을 치는 목동으로 가진 것은 없었지만 충만함을 느끼며,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달랐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서서히 욕망이라는 그림자가 사로잡기 시작하였고, 그 욕망은 서서히 커지게 되었습니다. 수천명의 부하들과 궁녀들이 있었고 또 자기 말 한 마디면 모든 일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더욱 걷잡을 수 없었고 자기 부하를 죽이고 부하의 아내를 취하는 악랄한 범죄도 저질렀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자녀와 자녀가 싸우고 자녀가 아버지를 공격하는 아주 끔찍한 가족사로 진행이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과연 욕망은 어디까지일까요? 욕망이 채워지면 행복 할까요? 우리의 욕망은 행복과 비례할까요? 여러분들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좁고 불편한 길입니까? 아니면 큰 대로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길이 좁고 불편하다고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큰 대로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람 말 입니다.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좁지만 행복한 사람이 행복합니까? 그냥 여러분들의 주어진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러다 보면 좋은 길도 나오고, 미소 짓는 길도 나오고, 치유되어지는 길도 나올 줄 믿습니다.
* 행복공동체는 대전시 유성에 위치한 장애인 공동체 모임입니다. 공동체를 운영하시는 박세아 목사님은 문학 모임을 이끄시는 시인(詩人)이시기도 합니다. (042-822-8591 010-8811-9104)
우 리 들 의 공 감 대
장애인과 장애우
무심코 우리조차 ‘장애우’란 말을 쓰고 있지요. 엄연히 잘못된 표현입니다. 최근 동아일보 독자란에 ‘장애인’이 아닌 ‘장애우’란 표현을 쓰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은연중에 ‘장애인’을 ‘장애우’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특정 대선 후보는 TV토론회에서 ‘장애우’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회에서 격리되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분리되었던 ‘장애인’을 보다 친근하게 인간적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우’란 표현은 장애인을 비주체적이고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형상화하고 구조화해 내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집단 또는 계급, 계층을 표현하는 개념 또는 단어는 1인칭, 2인칭, 3인칭 모두가 가능한 표현으로 쓰여 집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나 ‘여성’의 경우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도 ‘노동자, 여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우’란 표현은 타인이 나(장애인)을 지칭하거나 부를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내(장애인)가 나(장애인)를 지칭할 때에는 절대 쓸 수 없는 용어입니다. 즉, 집단을 지칭하는 표현은 모든 인칭에서 쓰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우’라는 표현은 1인칭에서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애우’란 표현은 사회집단 또는 계급, 계층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며 장애인을 사회집단, 계층이 아닌 비사회적인 집단 혹은 개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우’란 표현은 ‘장애인’스스로가 자신을 지칭할 수 없기 때문에 비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이나 단어는 그 집단의 정체성(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집단의 위치, 또는 사회적 관계)을 표현함과 동시에 주체적인 의식을 표현하는 것인데, 스스로가 자신을 지칭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가 주체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장애우’란 표현은 장애인 운동이 발전되어 온 역사에도 역행됩니다. 지난 시절 장애인을 재활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재활 패러다임’에서는 장애인은 자신의 삶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항해 장애인 당사자 스스로가 권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자립생활 패러다임’입니다. ‘장애인’을 비주체적 인간으로 그려 내는 ‘장애우’란 표현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장애인을 삶과 권리의 주체로 내세우기 위한 장애인 운동의 시계를 뒤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장애우’라는 부드러운 표현이 장애인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비사회적이고 비주체적인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용어를 써가면서까지 ‘장애우’를 고집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장애인이든 장애우든 상관없이 자신이 편한 대로 쓰면 되지 않느냐'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이나 단어는 그 집단의 사회적 관계와 위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습니다. 언어의 힘은 매우 강합니다. 특히 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이나 단어의 힘은 더욱 강합니다. 예를 들어 ‘여교사, 여학생’ 등의 표현은 여성의 사회적 관계를 왜곡되게 표현하고 이를 강화해 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더 이상 편의주의에 사로잡혀 장애인을 비주체적,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왜곡하는 ‘장애우’란 표현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는 일부 장애인 단체마저 ‘장애우’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정말 아이러니 합니다. 도대체 장애인을 비사회적, 비주체적 인간으로 표현하는, 그리고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장애우’란 단어를 단체명으로 사용하면서 어떻게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확대할 것인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장애인의 사회성, 주체성을 확대해가야 합니다. 이는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동시에 사회적 관계, 집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에서도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절 ‘불구자’에서 ‘장애인’으로 바꾸어 나갔던 경험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장애인을 비주체적이고 비사회적 인간으로 형상화하는 ‘장애우’란 표현을 쓰지 맙시다.
* 장애인 실업자 종합 자원 센터 사무국장 ‘엄태근’님의 글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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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안순분 이인순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지명수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2013년 5월 11일에 신평교회 최영득 장로님께서(충만육묘) 고추.가지.오이.토마토.케일.치커리 등의 육묘를 전해주셔서, 그 전에 살림교회에서 심도록 비닐작업으로 잘 정리하여 주신 밭에 5월 13일에 심었습니다.
* 2013년 5월 17일에 대전금성교회 임헌선 목사님과 교우 분들의 도움으로 새만금방조제를 새터공동체 식구들이 다녀왔습니다. 교회와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2013년 5월 21일에는 금산 금성면 도곡교회 김종만 목사님과 금산 추부면 만나교회 조남현 목사님과 금산 군북면 조정리교회 이정애 목사님의 차량봉사를 지원 받아 새터공동체 식구들이 청남대를 다녀왔습니다.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충전교회.금성교회.김기홍.정이삭.최영애.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라홍채.박종만.이은주.수영교회.양오석.진명구.채윤기(박현실).도승룡.유민재(연월순).대덕교회.신건태.주식회사EG(이광형).신평교회(김종원).그리스도의집(옹인숙.파리바게트.5회).시민교회(엄재용).조정리교회(이정애.4회).사랑의쌀나눔공동체(장진성).김용환(최정숙).동산교회(윤호철).신흥교회.신평반점(문창준).대전노회국내선교부(홍사국.양광연).김종성가족.문공선(문주현)외1인.이치안.금산군모란회(5인).김종학.임영호(장재영.고은성)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