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과 등불, 선지자적 삶의 압축파일
- 이병수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수필은 일상을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 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이병수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그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열정을 바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자기 이상으로 사랑한다. 이병수가 문학에 심취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일 것이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구축된 삶의 실상이다. 그 안에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강한 의식의 주체들이 있는 힘을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몰입시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병수도 마찬가지다. 다섯 권의 수필집을 내고, 팔순을 맞은 그는 이제 단수필에 몰입하고자 한다. 몰입해서 하는 일이란 가치 있는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인간은 어느 하나에 미쳐야 한다고 했다. 단수필 안에는 압축된 삶의 진한 영혼이 서려 있다.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이병수는 '단수필‘의 묘미를 찾아나섰다. 작가는 단수필을 통해 자신만의 문학론을 갖고, 재창조하며,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단수필의 시비 논란 속에서도 단수필을 사랑하고자 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인연이라는 끈을 통해 남과 나를 하나로 묶더라도, 열정이 없으면 그것은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끝없는 방황을 계속한다. 그 둥지의 실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열렬히 집착하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이병수에게 그 대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소박하게 단수필의 매력에 빠지는 일이다. 작가가 수필집 앞에 '단'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튼튼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병수가 팔순을 맞아 세상에 내어 놓는 ‘단수필집’은 아마도 부산에서는 최초라는 위상을 갖게 될 것 같다. 그는 단수필에 대한 나름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의미 있다고 하겠다. 천 자도 채 안 되는 제한된 글자수로 주제를 내면화하고, 문장을 형상화하기에는 짧은 수필은 한계가 따른다. 그러다 보니 단수필에서 문학성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병수의 단수필은 압축미와 요약 표현의 기법을 통해 문학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타 단수필의 부정적인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어 가치 있는 단수필이라 하겠다. 이제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는 이병수의 단수필집 <하산길>의 수필을 분석적으로 조명해 보겠다.
II. 왜 단수필인가
사실, 평자는 논단을 통해 단수필의 유행을 수필문단의 병폐로 지목한 바 있다. 전시성 효과와 안일한 창작성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쉽게 쓸 수 있으니 너도 나도 달려들어 단수필에 매달린다면, 겨우 되찾아놓은 수필의 위상이 다시 추락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단수필을 마치 퓨전의 전범처럼 받아드려, 수필을 시처럼 짧게 쓰고, 말로 해서 들려주면 마치 멋인 줄 착각하는 풍토에 경종을 울리자는 취지였다. 낭독이나 낭송을 위한 짧은 수필의 유행이라면 더욱 걱정스런 일이라 하였다. 들려주기를 전제로 하는 수필이라면, 응당 율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율문은 근본적으로 산문과 배치되는 개념이 아닌가. 율격이 전제된 글에 수필 본연의 산문 정신이 담길 수 없다는 논리다.
누가 뭐라고 해도 수필은 원고지 12매에서 20매 사이의 분량을 최적으로 삼는 글이다. 우리나라 현대수필문학을 연구해 보면, 그 길이가 13매 내외인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5매의 단수필도 있다. 윤오영의 <달밤>을 비롯하여 수필 태동기의 이태준, 한흑구, 김소운 등이 단수필을 발표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 현상이었지, 전체적으로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다. 수십 년이 흘러오면서 단수필은 살아남지 못했다. 원고지 5매를 읽는 데 걸리는 2~3분의 시간은 너무 짧아 하다가 만 이야기가 되기 딱 쉬운 것이다. 천 자 내외로 인생의 한 단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미적 쾌감을 주거나 어떤 본질적인 것을 지적 내지 암시함으로써 독자에게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감동을 주는 데는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삽화와 예화를 통해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비유와 함축으로 의미화하는 수필을 천 자 정도에서 쓴다는 것은 사실상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러니 내용이 빈약한 글이 되기 쉬운 것이다.
이병수는 평자의 이런 우려를 인정한다. 그리고 ‘단수필의 미래와 전망’이란 논설을 발표하면서, 단수필의 태동과 유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이같은 단수필에 대하여 이를 보는 시각은 찬반으로 엇갈린다. 오늘날 젊은 층들이 작은 것, 짧은 것을 선호하게 됨에 따른 자연스런 시대적 산물이라 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측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수필의 산문성을 무시하고 시를 닮아 가려는 주체성 없는 경거망동이며 수필의 본령을 깨뜨리는 일종의 모독행위라 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측도 있다”고 하며, 두 갈래의 주장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진다며, 양시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자의 입장으로는 박양근이, <수필문학>(2005년 8월호), <단수필의 시대적 요청과 그 해법>에서 사이버 시대의 단수필을 불가피한 문학현상이라 진단하였다. 후자의 입장으로는 권대근이, <에세이문예>(2005년 가을호), <분별없는 실험성의 난무를 우려하며>에서 문학정신의 시대적 영합에 경계심을 표하였다. 그러나 이병수의 단수필론은 양시론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눈여겨 볼만한 독자적인 논리성이 있다. 시대정신을 따라가자는 것도 아니고, 낭독이나 낭송을 위한 단수필을 쓰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필은 그 소재에 다라 긴 수필이 될 수도 있고 짧은 수필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일률적으로 짧은 수필로 쓰려고 하는 발상은 잘못이다. 수필의 소재에 따라 짧게 압축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러지 못할 것이 있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15~20매 짜리 수필을 표준량으로 여겨왔기에 이 관습에 젖어 길이가 그 매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수필로서의 함량미달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먼저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지난 날 우리가 써온 수필을 살펴보면,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일정한 분량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것 같은 내용들이 없지 않다. 말하자면 그 수필의 주제와는 크게 무관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더더기요, 사족이다. 독자에게 지루한 감을 줄 뿐이다. 그런 것들은 주제를 선명하게 하는 데 오히려 마이너스 역할을 한다. 오늘날 짧은 수필이 요구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이런 데도 있다 하겠다. 만약에 종전의 15매 내외의 수필에서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내용이 절반 정도 있었다고 하면 그만큼은 줄여도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수필의 소재에 따라 5~6매 정도로는 도저히 주제 표현이 불가능한 것도 있는 것이니 억지로 짧은 수필로 꿰맞추려고 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위 논지를 요약하면, 짧은 것을 원하는 현대인의 기호에 영합하기 위해 모든 수필을 짧게 쓰자는 것이 아니라, 수필은 제재에 따라 짧게 쓸 것이 있고, 길게 써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주제적 양식의 수필에서 주제와 관련이 없는 부분을 삭제하면, 단수필이 되니, 압축미를 통한 산뜻한 감각을 주어 짧은 수필도 감동을 줄 수 있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한 편의 수필에서 전체 글의 주제와 관계가 없는 것이 있다면, 그 글은 수필이 아니라 잡문이다. 따라서 이병수의 주장은 소재에 따라 짧은 글의 운명을 타고난 것을 굳이 긴 수필로 쓰고자 하니, 잡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제 구체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삽화나 예화, 인용 등의 주제와 관계없는 내용을 빼버리면 자연스럽게 단수필이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잡문을 길게 써서 독자로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 듣지 말고, 압축과 요약의 기법을 배워 주제가 뚜렷하게 부각될 수 있는 단수필을 써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 자신이 먼저 시범적으로 ‘단수필’을 40여 편이나 선보인 것이다. 이는 단수필론의 긍정적 입장을 지탱하는 근거를 제공한 작가로서 탁월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병수의 단수필은 정말 맛이 있었다. 어떤 소재가 단수필에 알맞고, 어떤 것이 긴 수필에 알맞은가 등의 논증으로 나아갔다면 좋은 논문이 되었을 것이다.
III. 삶의 흔적, 달려온 역사
그의 아호는 현봉이다. 경남 산청에서 출생하였고, 진주사범을 거쳐 건국대 졸업하였다. 이후 교직에 투신, 각급학교 국어과 교사를 거쳐 ‘92년 부산 개금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월간 「수필문학」으로 문단에 등단하면서 폭발적인 창작 활동으로, ’87년에 회갑 기념으로 첫 수필집 「보통 사람을 기르는 교육」상재하였고, ‘92년에는 정년퇴임 기념으로「쏟은 정 얻은 보람」을, 97년에는 세 번째 수필집「보람 속의 회오」를, 4집 「초상화 그리기」를 고희 때에 펴낸 바 있다. 다섯 번째 작품집인「느티나무처럼」은 팔순에 맞추어 펴낸 수필집이다. 이병수는 8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한 부산의 몇 안 되는 대표적 수필가다. 교육자로서의 인품과 작가로서의 탁월한 글솜씨는 2002년에 제12회 수필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2003년에는 부산문학상을 수상하게 하였다. 그의 여섯 번째 수필집인 이 단수필집은 40여 편의 단수필과 10여 편의 일반수필이 합해져 50여 편의 작품이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부마다 노 교육자의 인생에 대한 지혜와 삶의 의식이 담긴 주옥같은 작품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교육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바른 사회를 바라는 명징한 현실 인식이 빛났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삶에 대해 진정한 가치와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며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아온 사람만이 지니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먼저 내리고 싶다.
수필가 이병수는 고향을 떠나와 살면서 누구보다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문과 고향에 관계된 일이라면, 물심 양면을 아끼지 않고 봉사하는 분이다. 이러한 헌신과 봉사 정신은 수필문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활력적인 수필가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정년 퇴임을 하고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 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인생을 느티나무처럼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살고 있다. 수필다운 수필쓰기가 어렵다고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고, 5년 주기로 수필집을 내어놓는 저력을 발휘하여 젊은 작가를 게을러 보이게 한 그는 연로한 청년작가다. 작품집을 탈고하고 나서는 후손들에게 선대의 사상 감정을 전하고, 독자들에게도 공감을 주는 글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살며시 내려놓는 참 어른이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인구급증에 따라 기존의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느티나무 같은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다. 이병수는 느티나무처럼 포용력을 가지고, 의젓하게, 베풀면서 살아가기에 모든 후배 작가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병수의 단수필은 나름대로 문학성을 띄면서 다양한 영역을 두루 포섭하고 있다. 비교와 대조 기법을 통한 글쓰기는 그의 수필에 드러나는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 그는 주제정신의 특징화를 위해 대립항을 빌려와 드러내고자 하는 제재를 비교와 대조 기법으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선보인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 등을 통해 사모곡을 노래했는가 하면, <유서로 쓰는 수필> 등의 수필로 가족과 뿌리의 전통성을 옹호하였고, <느티나무 예찬>을 통해 애향의 정신을 드높였다. 이 작품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작가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 어찌 이 뿐이겠는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등의 작품을 통해 자기 성찰과 후회, 만족한 삶의 색깔을 드러내었으며, <마음짱> 등의 작품을 써서 세태풍자와 현실비판 그리고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아, 시원하다> 등의 작품을 통해 국어 순화와 정화, 그리고 바른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생존신고> 등의 수필은 기지와 유머가 번득였다. <방귀세> 등의 기행 수필에는 외국에 나가서 느낀 감정의 편린이 지성과 맞물려 있어서 감동을 준다.
이병수는 글감을 생활 주변의 세태와 그를 둘러싼 사건 속에서 찾아내는 작가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버폰의 표현에 정확히 맞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작가다. 선비 집안에서 자라나, 평생을 교육계에 투신해서 헌신한 사람으로서 그의 글은 잔잔한 교훈을 남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인생을 달관한 삶의 원로로서 버릇없음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담겨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을 편안하게 리드해가는 가장으로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편편들에 대한 다소곳한 정감을 수필 속에 용해시켜 내는, 가슴 따스한 작가다. 차분함과 여유에서 나오는 그의 글에는 오늘을 사는 생활인의 가슴 저린 애환이 있고, 따스한 정이 소리 없이 흐르며, 감사하는 생활의 미학이 녹아 있다. 늘 범사에 감사하고 베풀며 살고자 하는 자세는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VI. 이병수의 수필세계
1. 참신한 인식과 논리의 만남
수필은 출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수필의 품격이 달라진다. 수필은 언어로써 일상적인 체험 활동을 보여준다. 사실을 토대로 하다 보니 의도적인 의사가 지나치게 반영되어 저급한 속성이 드러나기 쉽다. 수필은 주제적 양식의 글이다. 주제가 있는 수필은 참신한 인식과 정연한 논리가 만남으로써 독자를 지성과 관조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여 감동으로 이끌 수 있는 법이다. 실상을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그대로 널어놓으면 독자에게 실상의 맛을 미학적으로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연상과 상상으로 미의식에 접근하려는 독자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독자의 상상력과 연상력을 자극시키는 것은 비유와 대조기법을 통한 구체적인 현상과 사상의 형상화다. 비유와 대조는 인식의 어머니로서, 다양하고 광범위한 활동의 자유와 변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내용을 미적으로 음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공감에 박차를 가하게 해서 추상적 개념일 수밖에 없는 주제의식을 이미지화 하는 데 기여한다.
주제의식을 나타내는 데 관련된 재료와 유사 또는 대립적인 재료를 선택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미루어 헤아리게 하는 것이 이병수 수필의 한 특성이다. 주제의식을 유사성 또는 이질성에 근거한 재료를 통해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주제를 나타내면 작문이 되고 만다. 보고 느낀 그대로의 이야기가 수필가의 렌즈를 통하여 투시되고 각색되고 문학적으로 변용될 때, 일상의 단순한 기록이 아닌 문학으로의 승화가 가능한 것이다. 이병수의 수필 쓰기는 이러한 기법에서 한 특성을 보인다. <잔디와 클로버>, <올빼미형과 종달새 인간>, <정서와 사상 사이>, <효, 불효>, <계단길과 평길>, <지식과 지혜>, <전반전과 후반전> 등의 작품이 대립항을 통해 주제를 논리적으로 지성화한 것들이다. 이는 꾸준히 사물을 연상한 작용의 결과다. 이런 상관적 사고는 무수한 체험들과 상상력이 가장 큰 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이다.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열등감이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이병수의 위의 관점에서 수필을 창작한다. <잔디와 클로버>는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상식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잔디와 클로버, 이 두 풀의 영토 전쟁이 바람이란 중매쟁이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진술이 재미를 준다. 얼핏 생김새만 보아서는 클로버가 잔디에 이길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는 정반대란 이야기다. 주제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이다. 클로버가 잔디를 이기는 것만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남여의 생존수명과 입 안의 치아와 혓바닥,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전쟁까지 주제 구체화를 위해 동원하고 있다. 클로버와 잔디의 싸움에서 예상과 달리 잔디가 지더라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겉모습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인식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더 이상 길 이유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주제화를 위한 장치가 다 들어가 있다. 멋진 단수필이다.
2. 절절한 사모곡과 조상 숭배
이병수 수필의 두 번째 그림자 형상은 눈물보다 끈적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이다. 고향을 떠나와 살아온 작가의 삶에 비추어 수필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혈연과의 연대다. 그리움은 언어적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사모곡은 인간적인 향기를 구성하는 요체다. 자식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이 항상 눈물 나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모성에 대한 그리움은 남성작가들에게 눈물이며, 영원한 안식처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사회적 통념이다. 이병수는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어머니의 공덕을 칭송함으로써, 이 글에서 죽을 때까지 못다한 효를 실천하려 한다. 효심이 뜨겁게 솟구치는 글이다.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작품은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회한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현대인들은 부모가 능력이 되든 안 되든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이병수는 이런 진리를 이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이 수필의 제재는 작가의 어머니가 소중히 아꼈던 유품 두 가지다. 하나는 ‘신주단지’요, 다른 하나는 ‘원상’이다. 신주단지에는 어머니가 자식 잘 되라고 빌었던 소원이 담겨 있고, ‘원상’은 성철 스님에게 받았던 그림이다. 그는 어머니가 신앙처럼 아꼈던 유품을 자식으로서 길이 보존해야 하는 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조상 숭배 정신으로 의미화한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결말 단락에서 조상 숭배를 나무의 뿌리 가꾸는 일에 견주는 부분이다. 자식의 앞길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모정의 신비함이다.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만끽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정신을 압축된 정서로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에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뿌리에 대한 집착이 희미해져가는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유서로 쓰는 수필> 은 한 인간의 삶에 있어 문학 작품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글이기도 하다. 그는 할아버지가 한학 공부를 하시고 글을 남기고 가셨기에 “그러고 보니, 번역된 할아버지의 문집 내용은 나에게 유서가 되었다.” 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도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우리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글이다. 이병수는 평생을 교단에 서서 제자들을 가르쳐 오신 존경받는 선생님이시다. 그런 인격을 갖춘 분이기에 팔순의 연세에도 그가 들려주는 한 문장 한 문장에는 엄숙함이 절절히 배어있다. 조부가 남긴 시서, 서신, 훈사, 만사 등이 그에게 삶의 길이 되고 등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한 조명이며, 조상에 대한 애착으로서 자신의 건강한 미래를 향한 의무인 것이다. 결말을 반성적인 성찰로 이끌어 독자를 공감의 장으로 이끈 점이 좋았다. 수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의 표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좋은 수필을 낳을 수 있다. 이 수필은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소재로 취택해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한 글이다. 이 글은 조상이 남긴 문집에 대한 의미 부여를 통해 문학의 가치를 고양했을 뿐만 아니라, 반성적 성찰을 통해 튼튼한 삶을 가꾸어나가려는 자세를 단수필에 담아 잘 형상화한 글이다.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몇 편의 글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겠는가’라며 자신의 글을 낮추며, 조부의 문집을 드높여 칭송하는 작가의 조상에 대한 겸허한 자세가 빛난다.
3. 뿌리와 전통에 대한 강렬한 애착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뿌리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수필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급급한 문학은 일시적 카타르시스의 도구와 수단은 될지언정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문학을 자기 감정의 분출 수단이나 그를 위한 도구처럼 인식해왔다. 그러나 보다 견고한 가치를 지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전통을 이어가는 사회적 소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리얼리즘 문학으로서 수필의 의식은 개인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에서 개회의식의 형이상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병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뿌리 가꾸어야 가지 무성하리>, <운명은 있는 것인가>, <탕수국 예찬>, <가족 묘원>, <그대가 있었기> 등은 뿌리와 전통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착이 담긴 글들이다.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그 시대와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자기의 희생을 소진하며,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문학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병수는 대대로 이어져 오는 조상들의 체취와 한국혼의 정서를 문학으로 그려내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다. <탕수국 예찬>은 전통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표백된 글이다. 작가는 요즘 젊은 사람은 물론이고, 중년 이후 사람들 가운데서도 ‘탕수국 냄새’ 운운하면서, 우리 전통 음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전통음식으로서 조상의 온갖 정성이 담긴 탕수국의 가치를 고양시킴으로써 우리 조상의 얼과 정성이 담긴 고유의 전통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탕수국에 담긴 조상의 정신과 한국인의 전통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이병수의 글을 읽으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어떻게 이렇게 옛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 전통과 뿌리에 대한 사랑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혼자 태어나서 혼자 큰 것처럼 살지만, 작가는 조상의 얼을 이어 받지 않고는 온전한 자기 삶이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해준다. ‘헛제사밥의 인기’나 ‘식혜’의 성공신화를 통해 주제의식을 보완한 전략이 전통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글의 메시지를 잘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4. 삶의 흔적에 대한 사랑과 향토 찬가
고향에 대한 작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작가의 성장에 대한 개인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관심 가져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애향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고향 쪽으로 돌려 죽는다는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지만, 나도 이제 팔순을 넘기고 보니, 귀소본능의 심정으로 향수심에 잠기게 된다. <느티나무 예찬>은 애향심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래서 ‘고향’하면 느티나무가 생각나고,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그 느티나무처럼 포용력 있고, 의젓하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마무리했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는 표현 속에는, 삶의 흔적 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고향 느티나무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인연의 끈으로 묶고 있는 작가의 아름다운 고향 사랑이 질펀하게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병수의 고향을 소재로 하는 이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다. 아이들과 남편의 흔적이 있는 땅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그 기억들이 행복을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가슴에 살아 있는 마을은 항상 맑은 강물이 흐른다. 안식과 편안함으로 동네의 강은 나날이 작가와 인연된 사람들의 정 줄기와 함께 사랑이 넘실거리며 가슴 속으로 깊어지면서 오늘도 흐르고 있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애향성은 가정사의 단조로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은 한다. 고향은 그러한 의미에서 출향인에게는 그리움의 공간이다. 이병수에 있어서 고향은 향수를 넘어 성찰의 시간을 부여하는 매게체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작가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베풀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생을 마무리했으면 한다'는 말은 인간으로서 가장 의미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고 산다는 것은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는 뜻이며, 여유가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재에 만족하며, 풍요한 가운데 남에게 베풀며 사는 일은 그 무엇에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고, 그것은 관계된 인연의 소중함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베품은 유한적 존재로서의 체념일 수 있고 일상의 모든 것에서 탐욕을 제거한 홀가분한 자기 노출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는 애써 아픔을 표현하고 그 안에서 조작된 슬픔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온 날들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게 전개되고 그만한 부피와 무게의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건강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고향의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각인되 있어, 향리를 떠나 타향살이 50년이 된 현제에도 작가의 마음 속에 우뚝 자리잡고 있다. 이 글은 삶의 지혜와 향토 찬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서, 비인간화된 인간과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네 삶의 지향성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점철된 소망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주제 지향성적인 측면에서 인생론적 또는 향토예찬론적인 관점을 동시에 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선생은 인간의 이상적 삶을 현실과 격리해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느티나무 예찬’은 곧 고향 예찬이다. 그는 언제나 글을 쓸 때면 유서를 남기는 기분으로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귀소본능의 사상을 ‘느티나무 예찬’이란 제목에 담아 풀어내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우수성은 느티나무에 대한 의미 부여다. 느티나무의 의미 부여는 고향에 대한 의미 부여이기도 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성과도 연결되게 한 부분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이 청년기인지 노년기인지, 언제나 푸름이 창창하니 ‘만년청년’이라 해야 할까”하는 발단 말미 진술에서 느티나무를 자기 동일시로 느껴지도록 느티나무를 인격화한 데서 작가의 문학적 기량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 수 있다.
이 수필의 배면에 깔린 그림자 형상은 ‘그리움’과 ‘소망’의 의지다.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를 가슴에 담고 50년을 살아오면서 그리움을 화두로 끊임없이 향토를 사랑하고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달하려는 선비적인 기질과 교육자적인 정신을 지닌 이병수의 인생철학을 음미해보는 맛, 이 수필을 읽는 쾌미가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이 수필은 세련된 지성과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영혼의 분비물이다. 이 수필의 제재이기도 한 ‘느티나무’는 긴 세월 동안 작가의 수호신으로 작가에게 선비다움의 기개를 안겨주었다. 여생을 느티나무의 교훈처럼 살아야겠다는 작가의 인생철학이 담긴 수필이라 더욱 감동을 준다. 자신의 화두인 ’베풀면서 살자‘를 위해 ’느티나무‘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느티나무‘가 자신의 자화상이라 볼 때, ’느티나무‘는 그의 세계관을 관통한다고 하겠다. 그 말이 주는 의미를 새겨 보면 우리는 저자의 확실히 남다른 인생관에 수긍하게 된다. 인식의 형상화가 빛나는 부분은 주제를 소망으로 일반화하는 부분인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내 고향 느티나무처럼 포용력 있고, 의젓하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생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는 표현이다. 대체적으로 좋은 수필들은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화 전략들이 매우 체계적이다. 이 작품의 발단부에는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위한 우람한 느티나무가 있는 산자수명한 자연 환경을 갖춘 고향의 모습이 놓이고, 전개부에는 고향의 느티나무가 갖는 가치가 놓여 있다. 이는 주제의식을 설득적으로 구체화하는 전략이요, 수법이다. 이처럼 소박하고 진실한 경험의 용해와 절제된 감성은 이병수 수필의 품격을 드높인다고 하겠다.
5. 자기 성찰 그리고 거울과 등불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이병수의 작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음식이 약이다>, <하산길>, <효, 불효>, <팔순 회고 단상> 등의 작품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서 거울 같은 작품이라면, <남편을 오빠라고>, <드라마 작가의 언어질서 파괴>, <목욕탕 안 촌감>, <아, 시원하다> 등의 수필은 등불 같은 수필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의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잘못된 언행에 경종을 울리고 사회에 숨겨진 진실을 캐내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작품들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잊고 있었던 자기에 대한 응시를 통해 무거운 아집을 버리는 일이나, 국어교사로서의 몸에 밴 국어 사랑과 도덕과 윤리를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것은 모두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그는 팔순의 노신사이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작가이기에 그의 글에는 깊은 향기가 난다. 이는 이병수 수필을 읽는 매력이다. 이병수의 수필 <팔순 회고 단상>은 현실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본래적 자아를 지켜 주고 회복시켜 주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여생을 덤으로 생각하고, 여력이 닿는 데까지 무엇인가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나가리라 마음먹어 본다‘는 결구 진술이다. 인간이 각박한 현실이라는 공간으로 내몰리면서 상실한 것이 순수함에 대한 사랑이기에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하산길>에서처럼, 자신의 삶, 특히 교육자로서의 자신을 반성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모습은 성스럽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치우쳐 인간교육, 도덕교육을 소홀히 한 데 대한 자아반성과 회오의 정도 갖게 된다는 고백은 그의 솔직한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병수는 결코 화려한 삶은 아니었지만 순수와 열정으로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을 등산길과 하산길에 비유한 <하산길>의 수도자적 자세에 엄숙함을 느낀다.
문학은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집착의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했느냐에 따라 삶의 윤기와 습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삶 자체가 집착의 결과이듯 문학도 같은 것이다. 수필 <하산길>은 산행 이력 40년을 소재로, 산행은 곧 자아실현의 길이라는 인식이 녹아 있는 글이다. 등산길 못지않게 하산길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삶의 방향성을 진단하고 있는 작품이다. 인생 하산길의 당면과제로서 그는 여생을 겸손하게, 덤비지 말고, 건강 제일주의로 살아 마지막 인생 하직할 때, 남의 신세를 덜 지고 갈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노후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되고, 생활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이병수에게 있어서 '산행'으로 상징되는 인생의 의미는 하산길에 놓여 있다. 결말 단락의 반성과 성찰은 이병수 수필의 맛을 느끼게 하는 좋은 본보기다. 언제나 겸손한 작가의 언어가 지닌 마력에 이내 그 안으로 독자를 빨려 들게 만든다. 사색과 명상, 그리고 고독한 화자의 정염과 사상이 녹아 있는 수필이다.
<노후 인생의 길동무, 수필>에서 작가는 퇴임 이후 일상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자기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수필을 통해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 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원숙한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기 위해 수필을 씀으로써 이들은 자기구원은 물론이고 자아실현에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정신적 충족감을 만끽하고 생활의 활력을 얻고 있는 사람이다. 이는 건강한 생활인의 자연적 부화라는 측면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부가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의 공감대 위에서 <망구령에서 구순봉 오르는 길>, <음식이 약이다> 등의 작품에서 작가가 자아 성찰의 기쁨을 통해 일상의 행복에 젖어 들고 있는 것은 무료한 일상을 지나가는 시간의 관성이 아니라 창조의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한 의지의 확산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환영할 만 하다고 보겠다.
이병수의 수필, <망구 봉우리에 서서>를 읽으면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는 참다운 이의 깨달음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자신에의 집착을 엮어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부러워할 수 있게 늙고 싶다‘는 소망으로 마음을 비우고 여생의 길을 가는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원근과 대소를 재면서 자신과 관련을 현재를 비우면서도, 좋은 글에는 집착을 보인다. 인간의 일상적 삶은 순리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을 터 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작품에서 읽히는 또 하나는 자신의 존재적 인식을 교정하는 활달함이다. 인간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은 무아와 달관을 전제로 한 안심입명을 의미한다.
6. 세태풍자, 현실고발, 순화, 정화
이병수 단수필의 강점은 한 편의 수필에도 시대정신을 담는다는 것이다. 신변적 수필이 난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사회수필’의 기치를 내걸고 작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수필 <남편을 오빠라고>는 세태 비판의 날을 세운 작품이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언어 혼란 시대에 살고 있다. 저마다 자기 처지를 대변하는 말을 가시처럼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상대가 받을 데미지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문제다. 현대 사회 속에서는 몰상식하게 언어 질서를 예사로 파괴하는 사람들로 인해 작가는 정신적인 고통을 당한다. 바꾸어 부르기 어색하다는 이유로 사회적 약속인 호칭을 지키지 아니 하는 것을 작가는 운동경기에서 룰을 지키지 않고 반칙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런 부당하고 모순된 현실 속에서 언어 질서 파괴를 지도하기는커녕 보고만 있는 세태를 개탄한다. 국어 교사 출신다운 자세다. 닫혀진 현실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엄청난 사회적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남편을 오빠로 부르는 문제를 그는 단순한 호칭의 잘못으로 보지 않는다. ‘말은 곧 인격의 표현’인 고로, 그러한 자는 불문율인 사회도덕까지지 무너뜨릴 수 있는 ‘불구 인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한 대로, 이런 소재면 5매 정도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주제다. 오히려 압축과 요약 기법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단수필로 쓰는 게 더 참신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삶의 질서는 말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한 손님의 분별 없이 행하는 언어를 통해 상처받고 있는 자신의 입장 변호를 통해서 언어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느낌, 그에 대한 의사를 인간 관계를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피력하거나 판단케 하는 결정적 매체라는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가 언어 사용에 있어 각별한 배려와 함께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수필 쓰기는 진실을 구명하고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병수는 이러한 것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속물적 근성을 내보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찌 사회를 혼란케 하는 게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사람뿐이겠는가.
<나는 증언한다> 같은 수필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성이 농후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을 다룬 수필이다. 한국동란을 경험했던 전쟁세대로서 작가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고 하는 좌경 세력들에게 경고한다. 북의 남침이 명백한 상황에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고 주장자들은 북한 공산당의 앞잡이라는 게 작가의 시각이다.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이념의 갈등에서 좌측으로 치우친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하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이 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수필가의 사명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이 같은 현실을 말해야 하고, 이에 대한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수필가다. 이병수는 이런 현실을 '침묵하지 않는다'의 입으로 말하고자 하는 작가다. 그녀의 시선은 예리하면서도 그 문제점이나 원인 등에 대해서는 매우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분단 현실 속에서 조국의 은인을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막힌 출구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응하는 자신의 일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병수는 보수주의의 깃발을 들고 좌경 세력을 규탄하는 데 추호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언어로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인간이 하는 일이다. 작가는 현실 정치의 도피자로서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란 말과 글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이병수는 성묘를 갔다 오다가 꽁꽁 얼어붙었던 계곡물이 해빙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당리당략에 눈이 어두워 시급한 경제 현안을 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정치판을 비판한다. “우리 정치판도 해빙제 약을 복용할 때가 아닌가”라는 주제의식의 의미화는 이병수 단수필의 매력이다. 화합 정치의 필요성을 계곡물의 해빙과 연결시켜 기발한 조제를 해서 현실의 모순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는 언어의 풍자가 성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로 흔히 드는 것이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주는 기본권이다. 수필가는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비뚤어진 현실을 분노의 힘으로 정조준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주장만 있고 대화는 없는 정치판이 경제 살리기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있는데, 작가가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암흑의 사회다.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수필을 빚어내기 위해서는 자연물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깊은 사고, 그리고 적절한 표현 기교가 뒤따라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고 누구나 흔히 생각할 있을 정도의 평범하고도 비개성적인 잡문에 지나지 않게 된다. 수필은 단순히 자연물의 외면을 묘사한다고 해서 수필이 되지 않는다. 자연물과 작가의 미적 상상력과 조우하지 않으면 좋은 수필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자연물과의 만남을 통해 고정화된 사고를 털고 은폐되어 있던 자기의 본질 내지는 인생의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계곡물은 녹아 흐르건만>이란 작품은 삶의 실체를 구명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제나 본질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시작되는 창작적 발상은 그의 글에 문학성을 더하게 하는 요인이다.
7. 기행수필의 멋과 맛, 유머와 기지,
정년 퇴직 이후로 이병수의 발걸음은 종종 외국으로 뻗친다. 근간에 와서는 문화 탐방을 위해 외국으로 나갔다. 자연히 견문을 넓혀야 하는 작가들의 여행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 만큼 기행문도 많이 쓰여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창작 동기가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기행체 수필은 신선한 충동만 가지고 써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시공간을 적절히 옮기면서 흔적을 적어 나가는 글이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선한 충동이 되려면, 기행수필이 여행의 추억, 견문과 해방감, 동경과 사색의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문예적 감흥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4부에는 기행수필들이 모여 있다. 뉴질랜드 문학기행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방귀세>, 국제퇴계학 학술발표회 참석 차 일본에 가서 퇴계 선생의 현창비 건립 문제에 대한 단상을 다룬 <인생은 짧고 학덕은 길다>, 중국 역사기행을 통해 공자가 부활되는 것을 보고, 우리의 단편적인 역사의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공자의 부활>, 그리고 <영아 예찬>, <죽어서 사는 길>, <효, 불효>, <계단길과 평길> 등은 해외 여행의 견문을 기록하되, 인상적인 대목을 주제의식으로 잘 뽑아낸 기행문이 아니라 기행수필들이다. 여행에서 마주친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어 감동을 주는 글이다. 이 작품은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 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예술적 감흥을 준다.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일단 이병수의 기행 관련 글은 수필의 형식을 지닌다는 데 특징이 있다. 많은 수필가들이 기행문을 수필이라고 내어 놓고 있는 현실에서 이병수의 기행수필은 모범적이다. 집을 벗어나야만 좋은 글감을 건질 수 있는 게 기행수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변 잡기라는 틀에 빠지기 쉽다. 기행수필의 근간은 깊은 자연관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이고 문화와 예술의 상호 교류에 있다. 기행의 세계는 이동의 세계다. 그 이동에 따라 초점을 맞추고 서술하는 것이 기행문이기 때문에 극히 주관적인 글일 수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작가는 여행을 통해서 자연 속에 제 나름의 자태를 뽐내며 존재를 밝히는 물상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새로운 의미를 터득하게 된다.
이병수의 단수필집을 재미있게 읽히게 하는 것은 기행수필 함께 풍자와 유머 그리고 기지가 빛나는 <생존신고>, <보링인간>, <부모 자식세대의 동상이몽>, <친구, 트랜지스터> 등의 글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해학적이라는 데 있다. 억지로 웃기려고 꾸민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나름의 독특한 시각으로 참신하게 풀어내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글이 예민한 감각과 신경에 호소하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이성과 정서를 끌어들여서 독자를 흐뭇한 감동으로 이끄는 것은 수필을 쓰면서 닦은 탁월한 서술적 기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학정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시사성과 문학성을 적절히 배합하여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글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풍자란 부정한 세태의 가장 정점에 있는 인물과 환경을 선택하여 그 부정적 속성을 근대화시켜 드러내는 방법을 말한다. 따라서 풍자는 과장적인 묘사를 통하여 추악한 모습이나 결함 부분을 확대시켜 보여 주거나, 아니면 대상을 희화화시킴으로써 우회적인 공격을 고하는 양상을 띤다. 이러한 수법은 대체적으로 소설이나 꽁트에 많이 사용되지만 간혹 칼럼과 같은 비판적인 글이나 수필에도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비판적인 글이 대상의 부정적 속성을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비판하는데 비해 이병수의 풍자적인 글은 대개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시대에 많이 사용된다. 곧 필자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거나, 또는 부정적 대상이 너무 막강한 세력을 지님으로 인하여 대상을 정면으로 공격하거나 비판하기 어려운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생존신고>는 노령자들의 목숨은 사그라져 가는 짚불 같아서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작가는 정기적으로 친목 모임에 나가는 것을 생존 신고하러 간다는 말로 익살을 부린 수필이다. 이 수필 역시 대립항을 설정해서 출생 신고와 대비하여 풀어나가고 있어 명쾌한 맛을 준다. 출생 신고는 부모가 하고, 사망 신고는 유족이 하는데, 생존 신고는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란 깨달음을 통해 ‘관 속에 드는 날까지 여생을 보람 있게 살아가려 한다‘는 결말은 이 수필의 쾌미가 아닐 수 없다. 이 수필은 내용으로 봐서 죽음 앞에 당당히 자신의 태도를 나타낸 사생관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현세적 삶에 전전긍긍하는, 현실적으로 억압된 사회에서 죽어지내는 나이 든 기성세대의 불안심리와 불만과는 다른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세계관에 감동하게 된다.
<보링 인간>도 유머와 위트가 빛나는 수필이다. ‘보링’은 흔히 자동차 엔진을 재생할 때 쓰는 용어다. 작가의 말인즉 요즘엔 이 말이 자동차 엔진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가 좋지 않아서 인공 치아를 심은 것이나, 눈이 안 좋아 백내장 수술을 한 것이 모두 인체 보링이란 설명이다. 자신은 치아와 눈에 불과하지만 다른 이들은 인공 심장을 갈아 넣고 대장 수술을 하여 홍문을 밖으로 내어 차고 다니는 이도 있다는 소개다. 이 수필이 인체의 보링에만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좋은 수필이기보다 기발한 수필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작가는 제재의 단순 비유에서 더 나아가 인체 아닌 인간 보링에 대한 욕심을 낸다. 아무리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체 보링까지 가능해져서 인간 수명이 연장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인간성이 상실된 비도덕적 ‘보링인간’이 양산된다면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시각이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오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명제 아래 그는 인체 보링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간성을 심어주는 인간 보링에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인체 보링을 통해 삶을 건강하게 연장시키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끝없이 흘러가는 인생 유전에 대한 연민을 토로한 수필이다. 그렇다고 어찌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 글에는 한 작가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사랑과 비인간화되는 세태에 대한 아픈 질타가 녹아 있다.
V. 나오며
에이브럼즈는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작가는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선지자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작가는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쳐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문제는 거울이 중요하다 등불이 중요하다가 아니라 문학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문학이 되어야 한다. 거울이니 등불이니 순수니 참여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의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수필이 상상력이나 예리한 관조, 지적 통찰의 체로 걸러지지 않은 채 쓰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필은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어서도 안 되고, 결코 관념의 퇴적장이어어도 안 된다. 화려한 수식어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 몰두해서도 안 된다. 수필은 삶과 세계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 이병수의 단수필 작품은 문학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단수필집의 ‘느티나무 예찬’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문제의 한켠에는 언제나 초극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선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들은 그 세계를 통해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처절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벽으로 해서 어쩔 수 없이 각박한 삶을 자처해 그 길로 들어서기도 도망치기도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자의 마음가짐이다. 물질만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끈으로 튼튼한 미래를 창조하려는 창조적이며 포용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느티나무, 나는 그대 앞에 서면 마음이 경건해진다."는 표현에서 그가 추구하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가 드러난다. 그는,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 고향 느티나무에 삶의 뿌리를 내려놓고, 그를 바탕으로 베품을 실천하며, 행복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어찌 그 뿐이겠는가. 지식인으로, 원로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의 그늘지고 어두운 곳을 펜 끝으로 정조준하며, 작가로서 등불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수필집의 문학정신의 결정체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인식과 형상이 잘 조화되어 있다. 삶과 문학이 일치된 그는 정녕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선비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