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 (제7대 대통령)과 한국 – 세부자유여행/세부먹거리볼거리마사지/시티나이트밤문화체험
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 (제7대 대통령)과 한국
박정희대통령과 필리핀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 - 막사이사이상과 통일벼
이야기
필리핀은 30-40년 전만해도 일본과 선두 다툼을 하던 아시아 최고의
경제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마르코스 독재정부가 들어서면서 헤일수 없는 부정과 정치 타락으로 이젠 세계
최빈민국에 속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잘살던 필리핀으로 경제 원조차 방문하였다. 말이 원조이지 구걸이나 다름없는 방문이었다. 아시아 동쪽 작은 반도의
빈민국 대통령이 왔다고 아예 이 나라 대통령은 아는 체도 안했다고 한다. 당시 박대통령은 영빈관(현재의 마닐라 호텔)에 묵었는데 필리핀 대통령은 의전용 차가 아닌
마차를 보내왔다고 한다.
못사는 나라의 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어찌되었건 돈을 빌려 가야할 입장이라 박대통령은 손수 걸어서 말라카냥 궁까지 갔다는데, 그런 호기에 놀란 필리핀 대통령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어왔다. 그래서
요구한 것이 쌀이었다. 이 곳 필리핀은 1년 3모작을 하는 곳이라 굶어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세계
미작연구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원 농대(현재 서울 농과대) 연구팀과
만든 것이 통일벼였다. 필리핀 경제의 80%는 화교들이 쥐고있다. 인구
10%의 화교가 한 나라의 경제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런 화교와의 결탁으로
자기들 배만 채우고있다. 그러니 부정축재와 정경유착은 악질처럼 붙어 다닐수 밖에 없다.
게다가 대통령 자체가 대부호이거나 대지주의 후손이다보니 민생을 위한 정치나 법 개정은 꿈도 못꾸는 현실이다. 이런 나라에 서민 대통령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라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1907-1957]다. 기능공의 아들이었던
막사이사이는 루손 섬의 이바라는 지방도시에서 한때 교사생활을 했다.
필리핀 정치지도자들이 대개 스페인 혈통인 데 비하여 막사이사이는 대다수 필리핀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말레이 혈통으로 고학으로 마닐라
근처 호세리살대학을 마친 후 마닐라 운송회사의 총지배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루손 섬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 탁월하고 자상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미군이 필리핀을 탈환하자 고향인 삼발레스의 군정장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2차례 삼발레스 지역의 하원의원을 지냈는데 이것이 최초의 정치경험이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엘피디오 키리노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어 후크 단 반란 진압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후크 단의 지도자는 루이스 타룩이었는데 1950년 인민해방군을
조직하여 정부의 전복을 획책했던 인물이었다.
막사이사이는 1953년까지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반게릴라 작전을 수행했다. 인민의 지지 없이 후크발라하프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막사이사이는 농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귀순자들에게는
토지와 농기구를 마련해주고 정부군에게는 인민을 정중하게 대하도록 역설했다.
또한 군대를 개혁하여 부패하고 무능한 장교들을 해임하고 게릴라와의 전투에서는 기동성과 유연성을 강조했다. 1953년이 되자 후크발라하프는 더이상 위협이 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막사이사이의 급진적 조치들은 정부 내에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놓았고 키리노 행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한 그는 2월 28일 결국 해임되고 말았다.
자유당 소속이었던 막사이사이는 국민당과 제3당을 구성하고 있던 카를로스 P.로물로의 후원을 받아 1953년 선거에서 키리노 대통령을 패배시켰다.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사회의 모든 국면에서 개혁을 단행할 것을 공약했으나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회의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좌절을 겪어야 했다. 토지개혁안은 통과되지 못했고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농민들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은 후크발라하프 진압 과정을 통한 그의 공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변함이 없었고 청렴한 행정주의 평판 또한 유지되었다.
대외적으로 막사이사이는 미국을 맹방으로 냉전기간 내내 강력한 반공주의를 표방했으며 필리핀은 마닐라에서 창설된(1954. 9. 8) 동남아 조약기구(SAETO)의 가맹국이 되었다.
그러던 1957년 3월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에 서민의 정치를 하던 이 인기있는 대통령을 위해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공여한 50만 달러의 기금으로 기념 재단이 설립되어 오늘의 '막사이사이 상'이 재정되었다.
이 상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할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데 재단에서 매년 정부공무원·공공사업·사회공익·언론문화·국제협조 등에 걸쳐 수상해 오고 있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도 받은 이 상의 역대 한국 수상자로는 1962년
장준하(張俊河), 1963년 김활란(金活蘭), 1966년 김용기(金容基), 1975년
이태영(李兌榮), 1979년 장기려(張起呂), 1989년 김임순(金任順), 1996년
오웅진 신부, 2002년 법륜 스님 등이 있다.
이런 권위의 상을 천안의 한 시민 운동가인 윤혜란(37)씨가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1990년부터 천안YMCA 창립준비멤버로 활동하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한
윤씨는 1998년부터 지난해말까지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앞으로 풀뿌리 운동가들을 양성, 교육하는 일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막사이사이상 위원회는 윤씨와 함께 태국의 존 웅파콘 상원의원(정부 서비스), 라오스 솜바트 솜폰(지역사회 지도자), 인도네시아 테텐 마스두키(공공봉사), 인도 V 샨테(공공봉사), 방글라데시 마티우르 라흐만(언론·문학·의사소통기술) 등 모두 6명을
뽑았다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31일 열린다. 자뭇 상이란 권위가 있어야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