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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보며 탄식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4장 19-31절
큰 선거를 하고 나면, 날이 새도록 생방송을 합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실시간 중계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티비 영상으로 혹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로 중계합니다. 이런 생중계를 우리는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또한 그렇게 중계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본문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중계를 보게 됩니다.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재앙을 보며 선지자는 울부짖습니다. 유다를 덮치는 멸망 심판이 그를 영적·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선지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탄식하십니다. 악을 행하기에만 열심인 이스라엘이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슬퍼하십니다.
예언자의 탄식(19-2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지각이 없고 미련한 저들은 악을 행하는 데만 지각을 사용할 뿐, 선을 행하는 데는 무지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이 이런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저들을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신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죄를 짓고도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도록 내버려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19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19-22)
하나님께서 보여주심으로 이미 유다의 멸망을 알고 있던 예레미야는 ‘슬프고 아프다’라며 탄식합니다.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 만큼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아무런 애정이 없었다면 그저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 대로 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1) 고통의 외침(19a)
적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을 (아마도 환상 중에) 보는 예언자가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적들의 손에 넘겨질 수밖에 없는 유다의 참담한 운명이 예언자를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뜨립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속이 뒤틀리는구나. 내 심장의 벽이여, 내 안에서 심장이 마구 뛰는구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19a의 사역). 엄청난 무게로 짓누르는 영적·정신적 고통이 육체에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죽음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듯 창자가 뒤틀리고 심장이 터지는 아픔에 예언자가 온몸을 뒤틀며 소리 지릅니다.
(2) 곤경의 묘사(19b-20)
싸움터에서 혼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와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립니다(19b). 공격하는 나팔 소리에 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유다의 성읍을 공격합니다. 성읍이 차례로 함락되고 온 땅이 황폐해집니다(20a). 광풍이나 도적의 기습 공격에 장막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듯, 병거와 말들을 앞세우고 무섭게 진격하는 적들 앞에 집들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예언자는 백성의 터전인 집을 ‘나의 장막들’과 ‘나의 휘장들’이라 부르며 이들에 대한 강한 연대감과 깊은 연민의 정을 내보입니다(20b). 적들에 의해 허물어지는 동포의 집들은 ‘나의’ 장막들이고 ‘나의’ 휘장들입니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부사 ‘홀연히’와 ‘한순간’은 재앙의 갑작스러움과 철저한 파괴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3) 탄식(21)
적들의 공격으로 순식간에 유다의 집들이 남김없이 파괴되고 땅은 황폐해집니다. 그리하여 고개를 떨군 예언자의 탄식은 절망적인 하소연으로 끝을 맺습니다.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21). 유다 백성의 악한 ‘길과 행위’가 초래한 재앙이기에(18), 예레미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 예언자는 그저 전쟁의 깃발을 보고 나팔 소리를 듣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4) 하나님의 탄식(22)
예언자의 탄식은 하나님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22).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부르는 자들이 그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모르기 때문에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그분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또 지각이 없기 때문에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14)라는 권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련한 자들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자기 길과 행실을 따르며 재앙을 자초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들이 악을 저지르는 데는 지혜로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데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동사 ‘알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하나님을 앎’이 ‘선을 행할 줄 앎’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을 행할 줄 모르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임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혼돈에 넘겨진 땅(23-31)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예언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진노 중에도 회복의 약속이 함께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예고된 심판 가운데 긍휼의 은혜를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29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읍 사람들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사는 사람이 없나니 30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31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23-31)
예레미야는 환상을 통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산들은 진동하며 요동하고 사람도 없고 공중의 새도 날아가서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질서도 없고 생명체도 없었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 혼돈의 땅(23-26)
예루살렘이 에워싸이는 것을 본 예언자는 더 나아가 창조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어 창조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땅을 보니 창조 이전처럼 혼돈과 공허뿐이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빛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23). 피조물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질서와 빛이 사라지고 생존에 적대적인 혼돈과 어둠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창조 이후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던 산들이 떨고 언덕들이 뒤흔들립니다(24). ‘흔들리지 않는 산과 작은 산’은 안전과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창조 질서가 사라지고 우주적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어디에도 사람이 살 만한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땅에는 사람이 없고, 하늘의 새도 모두 도망가고 없습니다(25).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땅이 아직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1:2)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첫째 날에 빛(1:3)을, 셋째 날에 땅과 땅의 식물(1:9-12)을, 다섯째 날에 하늘의 새와 바다의 생물(창 1:20-21)을, 여섯째 날에 땅의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4-28).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것이 모두 파괴됩니다. 창조의 질서가 붕괴된 세상에서 인간의 역사가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과일나무가 심겼던 ‘좋은 땅’이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땅으로 변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 건설한 성읍이 모두 허물어집니다(26). 여호와의 진노는 그분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와 불법과 폭력을 징벌하는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8절에서는 그분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임합니다. 창조 세계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심판이 대등한 차원에서 이뤄질 것을 시사합니다.
(2) 확정된 심판(27-28)
여호와께서 땅의 심판을 선언하시는데,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앞 단락과 구분됩니다. 먼저, 멸망의 철저성이 다소 완화됩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27). 하나님께서 온 땅을 폐허로 만드시지만,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으십니다. 폐허가 된 땅에서도 사람은 계속해서 살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땅’의 의미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 단락의 ‘땅’은 온 세상이 분명한데, 여기의 ‘땅’은 일차적으로는 세상이지만 문맥에 의해 이차적으로 유다까지 포함합니다. 특히 26절이 온 땅의 심판과 유다의 심판을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땅’으로 옮긴 ‘카르멜’은 원래 과수원을 의미하고, ‘성읍들’은 4장에서 항상 유다의 성읍들로 나옵니다(참조. 4:5,7,29). 하나님의 심판 의지는 단호하고 확정적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계획하셨고, 후회하지 아니하시고 돌이키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8b). 땅/유다를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땅/유다의 황폐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땅은 통곡하고, 위의 하늘은 어두워집니다(28).
(3) 멸망을 당한 자, 시온(29-31)
먼 땅에서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오자,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에 유다 백성은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모든 성읍에서 주민들이 도주합니다(29). 성읍을 버리고 은신하기 용이한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거나, 접근이 어려운 바위로 뒤덮인 산으로 피합니다. 주민이 도망하고 자취만 남은 성읍들은 무자비한 적들의 수중에 넘어갑니다. 유다의 성읍들이 차례로 점령당하고 예루살렘의 함락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처한 예루살렘은 침략군의 환심을 사서 위기를 넘겨보려 합니다. 여인이 애인을 꾀기 위해 화려한 옷에 값비싼 금붙이로 치장하고 눈 화장을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매력적인 조건으로 침략군의 마음을 돌려보려 시도합니다(30).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예루살렘의 천박한 치장은 ‘연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만 끕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예루살렘의 미모가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처지는 첫아이를 낳느라고 온 힘을 소진한 여인의 형편과 같았습니다(31). 이미 기운이 다하였기에 그들은 적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도움을 간구하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파국적 재앙의 배후에 누가 계신지를 보지 못합니다. ‘소리’와 29절의 ‘함성’은 같은 ‘콜’의 번역입니다. 공격하는 적들의 ‘합성’이 높아가고, 예루살렘은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죽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도 가차 없이 벌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무서운 징계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어떤 생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씨앗을 남겨 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니다. 그분 앞에 늘 신실한 성도로 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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