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0] 윤영태(尹泳泰) - 고생과 축복 1. 나의 가정 배경
1 나는 1938년 음력 10월 1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월성군(月城郡) 산내면(山內面) 감산리(甘山里) 2, 240번지에서 아버지 윤찬호 씨와 어머니 박말봉 씨의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본고향인 월성군(月城郡) 서면(西面) 서호리(西湖里)에서 중병을 앓으시다가 요양을 하시기 위하여 산수 좋은 이곳으로 이사하셔서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로 완쾌되시어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되었다.
2 1943년부터 44년 사이에 내 형님 세 분이 일본 군에 징용을 당하여 끌려가게 되자 온 집안이 초상을 당한 것같이 날마다 눈물을 짓게 되었고, 어머니는 매일 이른 아침마다 냉수를 떠 놓고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3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 때문인지 해방이 되자 형님들은 모두 무사히 귀국하셔서 우리 집은 다시 웃음꽃이 피기 시작하는가 했더니 얼마 후 또다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였다.
4 빨갱이를 잡으려고 급파된 벼락부대원들에게 끌려 산내면 지서로 가는 도중 27세 된 둘째 형은 총살 당하고, 다음날 산내 지서에서 군인들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청년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시켜 버렸으니 25세 된 셋째 형도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5 하루 사이에 두 아들을 잃은 부모님은 땅을 치고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시고 미친 듯 몸부림을 쳤다. 그 후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56세 때 타계하셨다.
6 얼마 후 6.25가 일어나 피난민이 한창 밀려올 무렵 우리 어머니께서는 당시 산내면 의곡 장로교 집사였던 종형 내외분의 권고로 과거의 불교신앙과 미신을 다 저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나도 그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장로교회를 나갔다.
7 1953년 휴전이 되자 참전했던 매형들이 귀가하여 살림을 꾸리려는 때에 결혼한 큰 누님과 둘째 누님이 우연히 병사하셨다. 이제 4남 4녀 중 절반이 타계하게 되었고 그것도 좀 많이 배우고 인물이 좋은 사람만 골라서 죽었으니 더욱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8 나는 어릴 때부터 형제들의 죽음을 통하여 인생이란 무엇이며 죽음과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죽은 형제들이 꼭 살아올 것만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믿고 기다렸지만 죽은 자는 살아오지 않았고 보고 싶은 그들은 꿈속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9 어머니께서 3년 정도 교회를 다니시다가 독감 비슷한 병을 앓게 되어 3년여 치료를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교회에서 목사님과 교인들이 와서 기도했지만 아무 효력이 없었다. 점점 몸이 쇠약해져서 결국 이웃사람의 권고로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다시 미신을 섬길 수밖에 없었다.
10 그러자 가세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큰 형이 사업을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게 되어 1957년 11월 빚잔치를 하고 채권자들로부터 1년 먹을 양식과 메주콩 1가마 그리고 각종 씨앗을 동정받아 고향을 떠나 안동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경주공고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1 이듬해 봄방학을 맞이하여 안동 집에 가보니 생활이 너무 어렵게 되어 큰 충격을 받고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구하고자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안동 성결교회를 다녔다.
12 또 시간이 많기 때문에 혼자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고 소설책 읽기와 영화관람을 즐겼다. 그런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나쁜 친구들을 사귀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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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