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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허난(河南)성 신정시에 세워진 황제(黃帝)의 석상. 중국은 지금까지 전설로 간주됐던'3황 5제'중 한 명인 황제를 역사적 인물로 복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카넷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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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외교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중국은 오는 24일 수교 12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동북공정’은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거대한 ‘중화문명사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
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입장에서 중국사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한편으로, 여태까지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간주돼 왔던 하(夏)나라와 3황(三皇) 5제(五帝)까지도 역사로 편입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설상의 요(堯)나 순(舜)임금도 중국은 ‘실존인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중국사와 ‘중화문명’의 시작은 무려 1만년 전으로 끌어올려질 수도 있다. 중국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확장하는 작업이 국가 주도로 펼쳐지면서 이집트보다도 오래된 ‘세계최고 문명’이라고 강변하는 ‘역사적 패권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신화 전공자로 최근 ‘중국 신화 이야기’를 출간한 김선자(金善子) 박사(연세대 강사)는 “중국이 작년 6월부터 추진하고 있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신화’를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작업으로, ‘동북공정’보다 훨씬 거대하고 근본적인 역사왜곡”이라고 말한다. ‘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
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한족(漢族)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원보 인터넷판(cass.net.cn)은 작년 6월 30일자에서 이 ‘공정’의 과제로 ▲고문헌의 요(堯)·순(舜)·우(禹)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성과 정리 ▲중국 천문학의 기원 연구 ▲예제(禮制)의 기원과 연구성과 정리 ▲초기 야금기술·문자 자료 수집과 정리 ▲문명 기원에 대한 이론과 방법 정립 등이라고 밝혀 놓았다.
구체적인 발굴이 이뤄지기 전에 중국 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문명이었음을 입증한다는 목표를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지난 6월 샹펀현 타오쓰샹(陶寺鄕)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4100년 전의 천문대가 발견됐다”는 보도도 바로 이 ‘공정’의 일환이었다. ‘공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오쓰샹이 요임금의 도읍지였다고 전해지는 것과 결부시켜 이 ‘천문대 유적’이 요순시대의 흔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2년 후난(湖南)성 융저우(永州)시 닝위안(寧遠)현에서 발견됐다는 1만년 전 대형 무덤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순임금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황5제’ 시대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요순뿐이 아니다. 김선자 박사는 “최근 중국에서 10권으로 완간된 ‘염황자료집(炎黃資料集)’은 요순보다 앞서 중국을 다스렸다는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를 역사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염제 신농씨는 2000여년 전 ‘사기(史記)’를 저술했던 사마천(司馬遷)조차 정식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3황’ 중의 한 명이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 “고구려 왕실인 고(高)씨가 5제 중의 한 명인 전욱 고양씨(高陽氏)”라며 고구려 족속이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펼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조법종(趙法鍾) 우석대 교수(한국고대사)는 “이른바 ‘중화문명’의 유구함을 강조한 뒤 주변 국가들을 그 아류로 만들어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모두 집어넣으려는 대(大)중화주의 프로젝트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중국 후난(湖南)성 백록원(白鹿原)의 염제릉(炎帝陵) 안에 있는 염제의 상. 전설상'3황'중의 한 명으로 알려진 염제에 대해서도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범우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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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명탐원공정’은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 ‘공정’은 지난 1996년 시작돼 2000년 끝난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斷代工程)’을 계승한 것이다. 최근 연세대에서 ‘중국신화의 역사화 연구’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이유진(李有鎭) 박사는 “이 공정에 의해 하는 기원전 2070년, 상(商=은·殷)은 기원전 1600년 무렵, 주(周)는 기원전 1046년 건국된 것으로 연대가 확정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중국사에서 연대가 검증된 가장 빠른 시기는 서주(西周) 공화(共和) 원년인 기원전 841년이었다. 결국 중국의 ‘역사 시대’는 이 ‘공정’을 통해 무려 1129년이 늘어나게 됐다. 이 박사는 “순수한 학술적 입장이 아니라, 의도를 설정하고 자료들을 꿰어맞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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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제'중의 한 명인 전욱 고양씨. 중국 학계는 고(高)라는 글자가 같다는 이유로 전욱이 고구려 왕실 고씨의 선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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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역사의 ‘시간적 확장’과 동시에 ‘공간적 확장’도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이미 1986년 설립된 장학연구중심(藏學硏究中心)을 통해 서남쪽의 티베트가 원(元)나라 이후 중국의 영토였다는 왜곡 작업을 끝냈으며, 이후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을 통해 서북쪽의 신강 위구르사를 중국사로 편입시켰다.
동북쪽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려는 ‘동북공정’은 그 다음의 수순이었다.
이춘식(李春植) 고려대 명예교수(중국고대사)는 “이 ‘공정’들은 역사학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를 고취하려는 정치·군사적인 행동으로 봐야 한다”며 “군국주의 시대 일본의 ‘일왕 만세일계’ 등의 조작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중국 내부의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고 상호 결집을 노리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고대사 복원’ 작업 모두를 왜곡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형구(李亨求) 선문대 교수(고고학)는 “하·상·주 단대공정’의 경우 탄탄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며 “오히려 홍산(紅山) 문화 유적 등 한국사의 기원으로 봐야 할 만주 지역의 많은 유적들을 우리 스스로 도외시함으로써 고대사의 많은 부분들을 잃어버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7)‘고구려사 왜곡’ 중국 왜 침묵하나
중국 정부ㆍ언론 짠 듯 언급 피해…
한 중국인 “수치스럽다. 고구려·신라·백제는 한국 국가”
중국에서 갑자기 ‘고구려’가 사라졌다.
최근 들어 인민일보나 신화통신은 물론, 주요 관영매체 어느 곳에서도 고구려사 문제를 거론하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우
리 언론은 물론, 정부 당국과 정치권이 연일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중국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구려사 문제가 단순한 학술 문제가 아니라 이미 양국의 첨예한 외교 문제로 떠오른 현실을 감안하면 중국의 이 같은 반응은 뜻밖이다. 우리 정부의 한 당국자는 “한국이 고구려사 문제에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할 줄 중국이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조금 당황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한 뒤 “중국 정부와 언론이 침묵한다고 해서 그들의 기존 입장이 변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침묵하는 중국 언론
중국인들에게 고구려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6월 하순부터다. 중국 정부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면서 고구려 유적이 집중적으로 중국 언론에 소개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고구려 유적 자체에 대한 소개가 주류였다. 그러나 7월 1일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되면서 이들의 보도 내용이 바뀌었다. 인민일보와 신화사 등 관영매체들이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확정 직후, 일제히 ‘고구려는 고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관영 매체의 이런 왜곡 보도에 이어 지린성과 지안시 정부는 7월 20일부터 ‘고구려문화여행절’ 행사를 대규모로 진행하며 고구려 유적 현지에서 ‘고구려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임을 일방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중국 외교부가 한국 역사를 소개한 홈페이지에서 ‘고구려’를 삭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이즈음이다. 우리 언론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는 중국 측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그 뒤부터 중국 정부와 언론의 태도는 또 한 번 돌변했다. 약속이나 한 듯 고구려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특히 7월 말 이후 인민일보·신화통신·중국청년보 등 주요 관영 언론 매체에는 단 한 건의 고구려 관련 보도도 나오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의 반응도 비슷하다. 한국 정부와 언론의 잇따른 항의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는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달 하순 중국 외교부에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외교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고구려’를 삭제한 이유와 고구려사가 어느 나라 역사에 속하는지 귀속(歸屬) 문제에 대해 물었다. 이 질의서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고구려 귀속 문제에 대해 즉답을 회피한 채 “고구려 문제는 논쟁이 있는 학술 문제”라며 “양국 학술기구가 학술 교류를 통해 인식을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입장만 밝혔다. 중국 정부는 지난 8월 6일 박준우(朴晙雨)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와 외교부를 잇따라 방문하며 8시간30분 동안 마라톤 협상을 벌였을 때도 조선일보 질의에 회신한 내용과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고구려사 문제가 이처럼 양국의 외교적인 현안으로 부상했지만 중국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리 정부가 주한 중국 대사를 불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항의하고 김하중(金夏中) 주중 대사가 중국 외교부를 방문, 항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지만 별도의 보도가 없었다.
중국인 고구려사 문제 모른다
일반적인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중국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달 초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열린 세계유산대회에서 있었다. 이 행사를 생중계한 중국 국영방송인 CCTV의 아나운서가 ‘고구려(高句麗)’를 언급하면서 ‘가오쥐리’라고 발음했다. ‘구(句)’는 일반적으로 ‘쥐’로 발음하지만, 고구려의 ‘句’는 ‘거우’로 발음한다. 따라서 ‘가오거우리’라고 발음해야 맞다. 보통의 중국인들은 이를
혼동하기도 하지만 국영방송 아나운서가, 그것도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순간을 방송하면서 고구려를 어떻게 발음하는지조차 몰랐다는 것은 중국 사람들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고구려사 문제가 한·중 양국간의 외교적인 쟁점이 돼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언론매체의 인터넷 중국어판 기사를 읽고 고구려사 문제를 알게 됐다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다. 기자에게도 조선일보 인터넷 중국어판 기사를 읽고 이메일을 보내온 중국인들이 많았다. 몇몇 중국인들은 고구려사 내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평범한 독자가 아님은 분명했다. 이런 사람들은 중국 관영매체나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동북공정에 복무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했다.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동북 지방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중국의 독자들 중에는 “고구려는 확실한 한국의 역사”라며 “왜 중국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일보의 고구려 관련 기사를 인터넷 중국어판으로 읽고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온 한 대학생은 “학교에서 분명히 고구려가 한국의 고대 국가라고 배웠고 지금 교과서도 그렇게 돼 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석사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국인은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우리가 미국을 향해 ‘패권주의’를 추구한다고 욕했는데 한국으로부터 똑같은 욕을 듣게 될 줄 몰랐다. 아주 수치스럽다”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는 분명히 한국 국가”라고 했다.
[‘고구려사 왜곡’ 기사 읽은 중국인]
“언제부터 교과서가 바뀌었는지…”
“한국인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싶다”
조선일보 인터넷 홈페이지 중국어판 기사를 읽고 중국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대학원생
중국과 한국은 사이가 좋든 나쁘든 이웃이다. ‘멀리 있는 친척이 가까이 있는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갑자기 좋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도울 수 있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함께 누릴 수 있는 것도 이웃이다. 당연히 이웃 간에는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고구려 문제처럼 말이다.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패권주의, 강권(强權)정치라고 중국인들이 미국인을 욕했던 말을 한국인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입을 때리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중국에서 고구려 관련 보도는 거의 없다. 나도 조선일보를 보고서야 알았다. 소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나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한국의 3국이라고 배웠다. 왜, 언제부터 중국 교과서가 변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놀랐다.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관련 보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스스로 이유가 불충분함을 알아서 한국 국민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내가 감히 보증하건대, 내가 예전에 배웠던 역사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100% 한국의 3국이라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중국인들은 참으로 선량하다. 나쁜 사람들은 권력 있고 머리가 이상한 몇몇 사람들일 뿐이다.
대학생
최근 조선일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고구려사와 관련해 한국이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우리 외교부 홈페이지를 보니, 당신이 쓴 것처럼 한국 관련 내용이 변경돼 있었다. 우리 정부가 잘못한 것 같다. 한국의 많은 시민들이 이번 일로 시위를 벌이며 항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일로 많은 한국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미안합니다’라고 한마디 하고 싶다.
사실 나도 우리 정부가 당신이 보도한 것처럼 고의로 역사를 왜곡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나 결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 대학교 3학년인데, 내가 겪은 10여년간의 중국 교육 과정 중에서 선생님이나 우리들의 교과서는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라고 가르쳤다. 진짜 그렇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소일본(小日本)’이다. 중국과 한국은 비록 수교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양국 관계는 매우 좋다. 나도 한국을 매우 좋아한다. 한국 노래와 영화를 좋아하고, 내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그다지 평화롭지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의 특성은 미국과는 다르다. 일본과는 특히 다르다. 중국은 절대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베이징=조중식 조선일보 특파원(jscho@chosun.com)
(8) 中,고구려 인식 어떻게 변해왔나...
발표자료 입수
中, 개방이전까지 “고구려는 한국史”
90년대들어 민족통합 방편 “중국사”주장
최근엔 고구려·고려의 연관성마저 부정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4.08.11 18:17 59' / 수정 : 2004.08.11 18:42 42'
중국 학계에서 고구려는 ①애초 한국사였다가 ②’일사양용’(一史兩用·하나의 역사를 두 나라가 공유하는 것)의 시기를 거쳐 ③중국사로 분류되는 시기를 맞고 있다는 논문이 나왔다. 윤휘탁(尹輝鐸)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13일 독립기
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사와 고구려·발해 인식’ 심포지엄에서 ‘근현대 중국의 고구려·발해 인식’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는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인식 변화 과정을 시기별로 분석
하고 있다.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1877년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으로 시작됐다. 이로부터 약 20년 동안 중국 학자들 손에 의해 ‘호태왕비고증(好太王碑考證·1887년)’ ‘호태왕비석문(好太王碑釋文·1889년) ‘고구려영락대왕비가고(高句麗永樂大王碑歌考·1895년)’ 같은 책이 출간됐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만주 지역이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소수 민족 연구가 금기시되는 바람에 고구려 역사 연구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한국사에 포함시켜 ‘삼국시대(三國時代)’로 파악했고, 각급 학교 역사 교과서 또한 이런 관점을 채택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고구려사는 중국사와 한국사에 동시에 속한다”는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론이 장멍산(姜孟山) 류쯔민(劉子敏) 등의 학자에 의해 대두하면서 이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들은 서기 427년 평양 천도(遷都)를 기준으로 만주 지역에 중심이 있던 그 이전은 중국사, 한반도에 중심이 있던 그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고 본다.
하지만 1990년대에 한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부상한다. 리뎬푸(李殿福) 쑨위량(孫玉良) 쑨진지(孫進己) 등은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도 민족 구성이나 정치 성격에 변함이 없었으며, 당시 영토 경계를 기준으로 보면 마지막까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국민적·영토적 통합’이 최대 당면 과제로 대두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 윤 연구위원의 해석이다.
선진적인 동남쪽 연해(沿海) 지역과 낙후된 내륙 지역의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했고, 내륙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들의 위화감이 커져갔다.
중국 정부는 서부 지역과 동북 지방의 균형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이 한족(漢族)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함께 건 설한 국가라는 ‘통일적(統一的) 다민족국가론(多民族國家論)’ ‘중화민족론(中華民族論)’을 부각시킴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새 원칙이 채택됐다. 이에 따라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와 유적 발굴이 갑자기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시작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 집대성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최근 태도는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스스로를 ‘고려’ ‘구려(句麗)’라고 불렀고, 중국쪽 역사서에도 ‘고려’가 고구려의 약칭 또는 이칭(易稱·쉽게 부르는 이름) 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중국인조차 두 나라를 연결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들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는 250년이나 차이가 나고 왕족의 성씨(姓氏)나 예속 신민(臣民)의 구성 실태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왕씨가 서한(西漢) 당시 낙랑군의 귀족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왕건은 한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며 고려 태조 왕건이 한민족이 아닐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윤 연구위원은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현재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과거의 역사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고위금(以古爲今)’의 전형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왜 고구려사 왜곡할까
영토권 강화 위해 한민족 역사 가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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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5일 서울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항의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선일보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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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한 한민족의 역사를 중국이 도둑질해가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는 없다!” 최근 중국 정부의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해 우리 국민들의 분노가 크다. ‘고구려 역사는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는 중국측 억지 주장이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엔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서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고구려를 삭제한 데 대해 우리 정부가 항의하자, 아예 1948년 한국 정부 수립 이전의 역사를 통째로 지워버렸다. 중국이 이처럼 억지로 고구려사를 자기 나라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이유는 뭘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알아본다.
△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움직임
중국은 2002년부터 5년 계획으로 ‘동북공정’을 추진 중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바로 ‘고구려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변방 정부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아래 기사 참조>. 중국은 이를위해 광개토왕비와 국내성 등 중국 안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관광객을 대상으로 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중국의 의도는 벌써 세계 여론에 먹혀들고 있다.
중국 지린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는 데 중국이 북한과 공동으로 나서, 지난 7월 최종 허락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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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정부가 최근 대대적 단장을 한 광개토대왕비. 방탄 유리로 사방을 막아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고구려연구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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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속셈 = ‘고구려는 한민족이 세운 고대 국가’라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중국이 굳이 부인하려는 이유는 뭘까? 중국이 55개 소수 민족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라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55개 소수 민족은 인구 수로 보면 전체의 5%에 불과하지만, 영토로 따지면 70%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들 소수 민족의 역사를 자기 나라 역사에 포함시켜야만 지금의 ‘드넓은 중국 영토’가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고구려 무대였던 만주 지방에는 현재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중국은 “조선족 역시 중국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조선족의 조상이 세운 고구려 역시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다른 속셈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반도 통일 이후 한국·중국 사이에 만주 지방에 대한 영토권 논란이 일 것에 대비, 미리 선수를 치겠다는 속셈인 것으로 짐작된다.
△ 중국의 억지 근거와 우리의 반박
중국은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근거로 ‘조공과 책봉’을 들고 있다. 즉, 고구려 왕이 때맞춰 중국에 예물을 바쳤으며(조공),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를 세울 때 중국의 허락을 구했다(책봉)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해 역사가들은 ‘조공과 책봉은 국가간 외교 정책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또 “백제와 일본도 조공을 바쳤는데 이런 논리라면 두 나라도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 우리의 대응 =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주장은 사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를 반박할 역사적 자료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중국이 ‘힘’을 내세워 세계 여론을 자기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비해 우리 정부는 지난 6월 ‘고구려연구재단’을 만드는 등 여러 방면으로 대비책을 궁리 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어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모르면 눈뜨고 우리 역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까마득한 2000년 전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이다.
/ 박운미 기자 umpark@chosun.com
◈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동북’이란 랴오닝·지린·헤이룽장 등 중국의 동북 지역 3성을 말하며 ‘공정’이란 연구 프로젝트를 뜻한다. 즉, 중국의 동북 3성이 연합해 이 지역의 역사를 연구해보겠다는 것이 이른바 ‘동북정’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사실 따로 있다. 중국의 변두리 국경 지방인 이곳이 역사적으로 ‘중국 땅’이라는 근거를 찾아내서 이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더 강화하겠다는 속셈이다.
동북공정은 비단 고구려만 겨냥하고 있지 않다. 이 지역에 터를 잡았던 고조선과 부여, 발해의 역사까지도 ‘중국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0) [만물상] '한반도 징크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입력 : 2004.08.09 18:40 44' / 수정 : 2004.08.09 20:40 53'
“고구려 소추(小醜·더러운 꼬맹이)가 공손치 못하고 무리를 모아 요동 땅을 거듭 잠식하였다. …그 땅과 인구는 일개 군현에 불과한데 짐이 이 군사를 가지고 적을 치면 이기겠는가.” 서기 612년 중국 수(隋)의 양제가 이렇게 말하며 고구려 정벌에 동원한 군대는 정규군 130만명, 예비 병력 200만명에 달했다. 당시 고구려 전체 인구가 400만명이었다니, 뻔한 승부였다. 그러나 달랐다. 수나라 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35만명의 별동대는 살수에서 을지문덕
과 부딪쳐 대패했다. 요동까지 살아서 돌아간 병사가 2700명에 불과했다니 그 패전의 모습을 알 만하다.
결국 수나라는 잇단 고구려 침공 실패로 인한 국력 소모로 건국 38년 만에 망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중국사에서 ‘정관(貞觀)의 치(治)’라 불릴 만큼 정치를 잘했다. 그는 서기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서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을 전쟁에서 돌아와 다시 태자를 보기 전까지는 갈아입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속전속결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고, 수도 장안에 돌아와 갑자기 독창으로 죽었다.
"중국이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한반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경우에는 왕조가 멸망하거나 큰 상처를 입는 징크스가 있다.” 김하중(金夏中) 주중 한국대사는 중국에 관한 에세이집 ‘떠오르는 용’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의 말이 새삼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이 난데없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에 집어넣으려는 억지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흉노 여진 말갈 등 많은 민족이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흡수됐지만 한민족만 중국의 천하 관념에 버틴 것은 강인한 민족정신과 저항 때문”이라는 것이 김 대사의 해설이다.
명나라는 1592년 임진왜란 때 40만명의 원군(援軍)을 파병했다가 왕조가 무너졌다. 청나라는 19세기 말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에 한반도에서 종주국 행세를 하려다가 청일전쟁에서 패배,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현대에 들어서도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서방 국가들의 배척을 불러왔고, 그 결과 폐쇄사회의 길을 걷다 문화대혁명 같은 암흑기를 맞게 됐다. 따지고 보면 일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조선을 넘보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멸족(滅族)의 운명을 맞았다. 한국을 강점해 식민지로 삼았다가 사상 최초로 두 번이나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패전 국
가가 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마땅한 대응카드가 없어 고심 중이라는데, ‘소추(小醜)’를 잘못 건드려 어떻게 됐는지를 일깨워주는 것만큼 섬뜩한 카드가 있을까.
(11) 中군사사이트, 한반도 일부 고대 中영토로 왜곡
중국의 유명 군사 포털사이트인 `톄쉐(鐵血)군사'( www.tiexue.net)가 고대 한국의 영토 일부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왜곡 지도를 전세계에 홍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톄쉐군사 시대별 지도를 보면, 서한(西漢)대에는 한강 이북(pic.tiexue.net/picinfo.aspx?id=3499)을, 당(唐)대에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호남 지방(pic.tiexue.net/picinfo.aspx?id=3501)을, 원(元)대에는 한강 이북(pic.tiexue.net/picinfo.aspx?id=3505)을 각각 자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톄쉐군사 내 시대별 지도는 과거 한국 영토였던 간도 지방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미국 알렉사닷컴(www.alexa.com)의 세계 인터넷 정보 현황에 따르면 2001년 9월 개설된 톄쉐군사는 칭화(淸華)대학교 출신의 레이 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방문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www.prkorea.com)는 8일 "톄쉐군사는 왜곡된 지도를 전세계에 배포해 중국 역사에 관심있는 네티즌들이 자유롭게 다운 받아 중국 역사 학습에 참고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이는 `동북공정'의 범세계화 전략의 일환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ghwang@yna.co.kr
▲ 위 자료들은 2006년 9월초에 집계한 자료를 올린것이오니 착오없기를 바람니다 (老宿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