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는 시인.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황해도 장연(長淵)
주요저서 : 《산호림》(1938) 《별을 쳐다보며》(1953) 《창변(窓邊)》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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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지냈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들을 남겼다. 8 ·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 ·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讚美)》 《포구(浦口)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望鄕)》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湖林)》을 출간하였다. 1945년 2월에 제2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을 때의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었다.
노천명 시인 연보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박택면薄澤面 비석리碑石里의
소지주 이며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어머니 김홍기金鴻基사이에서
차녀로 출생.
1917년, 본명이 노기선盧基善이었으나
6세에 홍역을 앓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자
하늘이 주신 천명이라 하여 이름을 天命으로 개명함.
1918년, 아버지 노계일 별세.
1919년, 서울 체부동體府洞 이모집에 머물며 진명여자보통학교進明女子普通學校에 입학.
1923년, 진명보통학교 때 언니가 변호사 최두환崔斗煥과 결혼하며
학자금과 생계비를 부담함.
1926년 4월, 진명보통학교 졸업 전 5학년 때 검정시험에 합격,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우수한 성적으로
"국어사전"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때에 엘리트의식이 싹튼 것으로 봄.
1927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 신분으로 [동광]誌 입선.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어머니 김홍기 여사 57세로 별세,
시집 [창변]에 실린 <작별>은 어머니를 추모한 시로 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며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으로부터 가르침을받음.
1931년, 수필<3·5의 달 아래서>, 시<고성허古城墟에서>, 단편소설<일편단심>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지 [이화(1928년창간)]3호에 발표.
1932년, 이화여전학생으로 교지[이화]와 [신동아]誌에 <밤의찬미(신동아1932.6>>,
<단상(신동아1932.7)>, <포구의 밤(신동아1932.10)> 등을 발표.
이화여전시절의 대표작<옥수수>가 있음.
1934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 8회 졸업.
# 졸업즉시 [조선중앙일보]기자로 입사 4년간 근무.
1935년, [詩苑]동인으로 [詩苑]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 기성문단에 진출.
# [詩文學]에도 관여하며 이화여전 동창 박봉자朴鳳子가 살고 있는
오빠 시인 박용철朴龍喆(1904-1938)집에 드나들어 많은 문인들과 교류함.
1937년, [조선중앙일보]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이두구, 연길 등지를 주유周遊함.
# [중외일보]여성지 기자.
1938 [조선일보]출판부 [여성]誌 편집위원.
1938년 1월 1일, 49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자비로 출판.
#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신극운동에 참여
안톤 체홉의 <앵화원櫻花園>연극에서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로 분장 열연함.
1941년, [조선일보]출판부 [여성]지 편집위원직을 사직함.
1942년,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
# [조선문인협회]를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하는데 적극 나섬으로서
친일행위를 하게되는오점을 남기게 됨.
1943년, [매일신보]문화부에 입사 조경희와 더불어 "가정란" 담당기자로 2년간 근무.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
1945년 2월 25일, 29편을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매일신보]출판부에서 간행. 초판본인 이 시집에는
친일적인 시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이 실려있음.
# 해방 후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근무.
1946년∼1947년, [부녀신문사]편집국 차장.
# [부녀신문]편집국 차장 근무를 마지막으로 기자생활에 종지부를 찍음.
# 일본으로 유학을 목적으로 밀항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1년 후 귀국.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현대시인전집]을 발행한 가운데
제2권이 [노천명집]으로 간행됨.
# 안국동에서 누하동 225-1호로 이사하고 양녀 인자仁子를 입양함.
1950년, 6.25 전쟁 중 피난을 못한 채 [문학가동맹]에 가담케 되어
9.28 수복 후 부역죄로 20년 실형언도를 받고,
1950년 10월-1951년 4월까지 6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함.
# 노천명은 1.4후퇴 후 대통령 비서실의 김광섭金珖燮에게
삼일절에 출소토록 하여 달라는 편지를 냄.
김광섭은 이건혁李健赫, 이헌구李軒求와 협의한 후
3인 명의의 진정서를 써서 당시 삼군총참모장에게
노천명의 편지와 함께 동봉해 제출함으로 출감케 됨.
1951년 4월 2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감.
# 부산 중앙성당에서 "베로니카"(예수가 악당에게 맞아 쓸어져
흘리는 피를 닦아준 성녀의 이름)라는 영세명을 받음.
# 부산의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국원 촉탁 발령을 받고 합숙소에서 기식.
# 친구의 도움으로 판자집을 짓고 살면서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도피적인 생활에 젖음.
1953년 3월 30일, 61편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희망출판사에서 간행됨.
1954년 7월 7일,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 백서>가 대조사에서 간행됨.
1955년, 서라벌대학 등에 강사로 나가는 한편 이화여대출판부 일도 함.
1956년 5월 30일, [이화70년사]를 집필 출간.
# [이화70년사] 집필로 인한 과로에 의해
지병인 재생불능성뇌빈혈증세가 극도로 악화됨.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길거리에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 가료 약간 호전됨.
6월 16일, 새벽 1시 30분 46세의 일기로 누하동 자택에서 별세.
6월 18일, 문인장으로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 안장.
1958년 6월 15일, 유고들을 뫃아 42편을 수록한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를 한림사에서 간행.
1960년 10월 3일, 3주기를 기념하여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이 발행인으로 하여 노천명의 全 詩篇을 등재한
<노천명전집>을 천명사에서 간행.
● 묘 소 : 1970년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서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소재
카톨릭 묘역으로 이장, 입구에서 3Km 이상을 들어간
산 끝자락 중턱에 위치하며 흰 화강암 석재로 다듬어 놓았고
묘지 앞 중앙에 시비가 세워 짐,
(노천명의 묘와 나란히 한 오른 쪽은 언니 노기용의 묘임).
● 詩 碑 :
* 1957. 8. 20. "고 시인 노천명 문인장위원회"가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카톨릭 묘역에 <고별>8, 9연을
서예인 김충현의 글씨로 높이 60cm, 넓이 98cm의 화강석에 새겨
묘비를 겸하여 세움.
* 부산 어린이대공원(일명 "성지곡수원지")내의 10리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시가 있는 숲" 삼림욕장 입구 왼편의 "체력단련의 숲"에 위치한곳에
<사슴>을 새긴 시비가 있음.
● 저 서
시집 :
<珊瑚林>, 1938년.
<窓邊>, 1945년.
<별을 쳐다보며>, 1953년.
<사슴의 노래(유시집)>, 1958. 6. 한림사.
<노천명전집>, 1960. 천명사.
<노천명시집>, 1972. 서문당.
<노천명전집·1 (사슴)>, 1997. 7. 31. 솔출판사.
수필집 :
<산딸기>, 1948. 10.
<나의 生活白書>, 1954. 7.
<사슴과의 고독의 대화>, 1973. 4. 서문당.
<노천명전집·2 (나비)>, 1997. 7. 31. 솔출판사.
기타 :
<여성서간문독본>, 1955. 12. 박문출판사.
<이화70년사>, 1956. 5. 이화여대출판부.
박용철
[시문학]을 창간한 한국의 시인.
호 : 용아(龍兒)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광주 광산(光山)
주요수상 : 은관문화훈장(2001)
주요저서 : 《박용철 전집》(전2권)
주요작품 :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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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 용아(龍兒). 광주 광산(光山) 출생.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도일,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서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했으나,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연희전문(延禧專門)에 입학, 수개월 후에 자퇴하고 문학에 전념했다. 1930년에 김영랑(金永郞)과 함께 《시문학(詩文學)》을 창간, 이 잡지 1호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했다.
《시문학》에 이어 《문예월간(文藝月刊)》 《문학》 등을 계속해서 발간하고 시와 함께 많은 번역시, 그리고 《인형의 집》을 비롯하여 《빈의 비극》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을 번역했다. 1931년 이후로는 비평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효과주의 비평논강(效果主義批評論綱)》 《조선문학의 과소평가》 《시적 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 등을 발표,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하여 임화(林和)와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후 1년 만에 《박용철 전집》(전2권)이 간행되었으며, 200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연보
1907 8월 21일 전남 광산 출생
1911 광주공립고보학교 입학
1920 배재고보 자퇴
1922 토오쿄오의 야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편입
1923 토오쿄오외국어대학(東京外國語大學) 독문과에 입학
1930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문학.창간, 편집과 재정 맡음
1931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창간
1933 순문예지인 <문학(文學)>창간, 재정난으로 3호를 내고 중단
1938 5월 12일 사망
주요 저서
시집 <박용철전집>(전3권) 시문학사 1940
‘노산문학관’은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꿔 짓기로 했다.
또, 경기 고양시는 지난해 11월 덕양구 장명산에 있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 묘역을 새로 단장하기로 하고, 시비 건립을 비롯해 안내문 제작, 설명문 건립, 문학답사 코스 개발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고양시민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18개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난 8일 성명을 내어 “대표적 친일문학인 노천명 시인의 묘에 시비 등을 세우는 것은 반민족·반역사적 행위”라며 이와 관련된 모든 논의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노천명- 여류 시인,‘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는 시인
노천명(盧天命)(1913~1957)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황해도 장연
주요저서 : 《산호림》(1938) 《별을 쳐다보며》(1953) 《창변》등
여류 시인.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이화 여자 전문 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에 <시원>이란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여성적인 예리한 감각과 애틋한 정서가 넘치는 시를 썼는데, 1938년에 펴낸 첫 시집 <산호림>에는 <사슴>, <자화상>등 49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극예술 연구회의 신극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시작에 힘써 시집 <창변>, <별을 쳐다보며>를 펴내었다. <산딸기>, <나의 생활 백서> 등의 수필집도 있다.
☞ 노천명 시인 연보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 박택면 비석리의 소지주 이며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노계일과 어머니 김홍기사이에서 차녀로 출생.
1917년, 본명이 노기선이었으나 6세에 홍역을 앓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자
하늘이 주신 천명이라 하여 이름을 天命으로 개명함.
1918년, 아버지 노계일 별세.
1919년, 서울 체부동 이모집에 머물며 진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
1923년, 진명보통학교 때 언니가 변호사 최두환과 결혼하며 학자금과 생계비를 부담함.
1926년 4월, 진명보통학교 졸업 전 5학년 때 검정시험에 합격,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우수한 성적으로
"국어사전"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때에 엘리트의식이 싹튼 것으로 봄.
1927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 신분으로 [동광]誌 입선.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어머니 김홍기 여사 57세로 별세,
시집 [창변]에 실린 <작별>은 어머니를 추모한 시로 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며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으로부터 가르침을받음.
1931년, 수필<3·5의 달 아래서>, 시<고성허서>, 단편소설<일편단심>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지 [이화(1928년창간)]3호에 발표.
1932년, 이화여전학생으로 교지[이화]와 [신동아]誌에 <밤의찬미(신동아1932.6>>,
<단상(신동아1932.7)>, <포구의 밤(신동아1932.10)> 등을 발표.
이화여전시절의 대표작<옥수수>가 있음.
1934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 8회 졸업.
# 졸업즉시 [조선중앙일보]기자로 입사 4년간 근무.
1935년, [詩苑]동인으로 [詩苑]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 기성문단에 진출.
# [詩文學]에도 관여하며 이화여전 동창 박봉자 살고 있는
오빠 시인 박용철(1904-1938)집에 드나들어 많은 문인들과 교류함.
1937년, [조선중앙일보]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이두구, 연길 등지를 주유함.
# [중외일보]여성지 기자.
1938 [조선일보]출판부 [여성]誌 편집위원.
1938년 1월 1일, 49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을 자비로 출판.
#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운동에 참여
안톤 체홉의 <앵화원>연극에서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로 분장 열연함.
1941년, [조선일보]출판부 [여성]지 편집위원직을 사직함.
1942년,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
# [조선문인협회]를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하는데 적극 나섬으로서 친일행위를 하게되는오점을 남기게 됨.
1943년, [매일신보]문화부에 입사 조경희와 더불어 "가정란" 담당기자로 2년간 근무.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
1945년 2월 25일, 29편을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을
[매일신보]출판부에서 간행. 초판본인 이 시집에는
친일적인 시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이 실려있음.
# 해방 후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근무.
1946년∼1947년, [부녀신문사]편집국 차장.
# [부녀신문]편집국 차장 근무를 마지막으로 기자생활에 종지부를 찍음.
# 일본으로 유학을 목적으로 밀항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1년 후 귀국.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현대시인전집]을 발행한 가운데
제2권이 [노천명집]으로 간행됨.
# 안국동에서 누하동 225-1호로 이사하고 양녀 인자를 입양함.
1950년, 6.25 전쟁 중 피난을 못한 채 [문학가동맹]에 가담케 되어
9.28 수복 후 부역죄로 20년 실형언도를 받고,
1950년 10월-1951년 4월까지 6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함.
# 노천명은 1.4후퇴 후 대통령 비서실의 김광섭에게 삼일절에 출소토록 하여 달라는 편지를 냄. 김광섭은 이건혁, 이헌구와 협의한 후 3인 명의의 진정서를 써서 당시 삼군총참모장에게 노천명의 편지와 함께 동봉해 제출함으로 출감케 됨.
1951년 4월 2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감.
# 부산 중앙성당에서 "베로니카"(예수가 악당에게 맞아 쓸어져 흘리는 피를 닦아준 성녀의 이름)라는 영세명을 받음.
# 부산의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국원 촉탁 발령을 받고 합숙소에서 기식.
# 친구의 도움으로 판자집을 짓고 살면서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도피적인 생활에 젖음.
1953년 3월 30일, 61편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희망출판사에서 간행됨.
1954년 7월 7일,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 백서>가 대조사에서 간행됨.
1955년, 서라벌대학 등에 강사로 나가는 한편 이화여대출판부 일도 함.
1956년 5월 30일, [이화70년사]를 집필 출간.
# [이화70년사] 집필로 인한 과로에 의해 지병인 재생불능성뇌빈혈증세가 극도로 악화됨.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길거리에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 가료 약간 호전됨.
6월 16일, 새벽 1시 30분 46세의 일기로 누하동 자택에서 별세.
6월 18일, 문인장으로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 안장.
1958년 6월 15일, 유고들을 뫃아 42편을 수록한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를 한림사에서 간행.
1960년 10월 3일, 3주기를 기념하여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이 발행인으로 하여 노천명의 全 詩篇을 등재한 <노천명전집>을 천명사에서 간행.
● 묘 소 : 1970년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서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소재
카톨릭 묘역으로 이장, 입구에서 3Km 이상을 들어간 산 끝자락 중턱에 위치하며 흰 화강암 석재로 다듬어 놓았고 묘지 앞 중앙에 시비가 세워 짐, (노천명의 묘와 나란히 한 오른 쪽은 언니 노기용의 묘임).
● 詩 碑 :
* 1957. 8. 20. "고 시인 노천명 문인장위원회"가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카톨릭 묘역에 <고별>8, 9연을 서예인 김충현의 글씨로 높이 60cm, 넓이 98cm의 화강석에 새겨 묘비를 겸하여 세움.
* 부산 어린이대공원(일명 "성지곡수원지")내의 10리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시가 있는 숲" 삼림욕장 입구 왼편의 "체력단련의 숲"에 위치한곳에 <사슴>을 새긴 시비가 있음.
● 저 서
시집 :
<珊瑚林>, 1938년.
<窓邊>, 1945년.
<별을 쳐다보며>, 1953년.
<사슴의 노래(유시집)>, 1958. 6. 한림사.
<노천명전집>, 1960. 천명사.
<노천명시집>, 1972. 서문당.
<노천명전집·1 (사슴)>, 1997. 7. 31. 솔출판사.
수필집 :
<산딸기>, 1948. 10.
<나의 生活白書>, 1954. 7.
<사슴과의 고독의 대화>, 1973. 4. 서문당.
<노천명전집·2 (나비)>, 1997. 7. 31. 솔출판사.
기타 :
<여성서간문독본>, 1955. 12. 박문출판사.
<이화70년사>, 1956. 5. 이화여대출판부.
인문] 김지하 저 실천문학사 2005.10.15